“여보 오늘 영화보러 가실래요?”
“뜬금없이 웬 영화?”
“먼저 아이들이 준 무료영화권 있잖아요. 기한이 말일까지인데 오늘 아니면 시간없을 것 같아서요.”
쉬는 토요일이라고 새벽부터 땅콩 400평정도를 종아리 빵빵하게 심고 서석 장모님 밭일을 도와주고 교회에서 성가연습을 마치고 오니 밤 10시다. 씻고 나니 노곤한 몸이 자야 한다고 신호를 보낸다.
“난 <김만덕>을 보는 게 더 좋은데.”
토,일요일에 열시부터 열한 시까지 나오는 사극이다. 편안하게 벽에 기대어 TV보다가 잠이 오면 스르르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게 행복이다.
“당신과 단둘이 영화 본 지도 몇 년인가 몰라.”
아내의 말소리가 못내 아쉬운 듯 하다. 이럴 때면 모질게 거절하지 못한다.
이년 전 영화시사회 초대권을 받았었다. 공짜라길래 둘이 손잡고 롯데시네마에 갔다. 팝콘을 사서 폼잡고 서둘러 시간안에 좌석에 앉은 부부는 실망을 금하지 못했다.
K상조에서 마련한 자리였다.
장장 한 시간 반이나 하는 홍보가 끝나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영화를 상영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그렇고 그런 액션물이었다. 액션영화를 좋아하는 남자는 끝까지 잘 보았는데 옆에 앉은 아내는 그렇게도 시끄러운 데도 곯아떨어진 아내가 이상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네요. K상조 홍보 실컷 보고 잠만 자고 왔네요.”
“다음부턴 공짜영화 말고 돈내고 보러 오자구.”
그렇게 손을 걸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걸린 영화도 공짜영화였다.
아니, 정말 공짜는 아니다. 아이들과 쉬는 토요일을 맞아 신나는 애니메이션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을 보고는 식당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영화표를 큰 아이가 제 어미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그 당시 <까르보나리 스파게티>를 외우지 못한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흠.
<그래 갈 거라면 끌려가지 말고 내 발로 가자>
마침 월요일로 지나간 결혼기념일 이벤트를 해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긴 했었다.
“좋아. 갑시다.”
이내 아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무슨 영화를 볼 거에요?”
큰 딸 아이가 나섰다. 남자는 딱히 무슨 영화를 볼지 막연했다.
“글세다. 가서 아무거나 괜찮은 걸로 봐야지.”
“에잉, 아무거나 보지 말고 정하고 가세요. 요즘 <반가운 살인자>도 재미있대요.”
“그래. 살인자가 뭐 반갑겠니?”
“코믹 영화제목이 그래요.”
“코믹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장르구나. 그럼 <반가운 살인자>로 정했다. 당신은 어때요?”
아내도 영화정보가 어두우니 다소곳이 고개를 끄덕인다.
“기왕이면 상영시간표를 보고 가세요. 가셨다가 너무 늦으면 힘드시잖아요.”
남자는 귀찮았다.
상영시간표를 보려면 컴을 켜야 하고 롯데시네마 사이트에 들어가 원주점에서 시간표를 보고 그 영화가 시작되는 시간에 맞추어 가야 하니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가서 괜찮은 영화 아무거나 골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냥 갔다 올게.”
부부는 옷을 갈아입고 채비 차렸다.
“맛있는 거 잡숫고 오세요.”
큰 아이가 배춧잎을 내미는데 이만원이다. 삼만원 밖에 주지 못하는 한달 용돈으로 이만원을 내민 것은 큰 것이었을 터였다.
“고맙다.”
조그만 얼라를 키워 이제 고3인데 벌써 철이 든 모양이다.
“92년 겨울 당신 진통이 시작되었을 때 아이를 낳으러 갈 때 새벽달이 빛나고 있었지. 혜지 할머니가 혹시 가다가 갑자기 나오면 태를 끊어야 한다고 실과 가위를 챙겨주던 생각이 나는군. 작은 티코 차에서 분만을 했더라면 나같은 겁쟁이가 무얼 할 수 있었을까?”
“그 때 나은 애가 벌써 이렇게 자라 준 것이 고맙지요.”
“그러게 큰 딸은 재산이라잖아.”
시네마 도착시간이 열시 사십오분이었다.
영화가 대여섯 개가 전광판으로 안내되고 있었다.
남자의 관심을 끌만한 영화가 세 편이었다.
“당신 3D영화본 적 있어?”
“아뇨.”
집에서 가져간 강냉이를 깨물던 아내가 도리질했다.
“저거 액션물 같은데 그렇고 그런 것 같고 3D지만 시작이 12시네. 그 옆에 <친정엄마>가 당신에게 어울릴 듯한 데 열두 시 반이니 께름하네. 나중에 컴퓨터로 다운받아 보면 되겠어. 딸래미가 찍어 준 <반가운 살인자>를 보도록 하지.”
“그래요.”
남자는 창구에 가서 무료영화권을 바꾸어 왔다.
부부는 남는 시간을 의자 옆에 있는 잡지를 보면서 시간을 죽였다.
이윽고 이십분이 되니 영화를 볼 사람은 3번으로 들어가란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비오는 날이면 죽어나가는 여자들의 끔찍한 장면들이 나오는 동안에 아내는 영화를 즐기는 듯 했다. 그러나 영화가 초반부터 긴장감이 덜한 듯 해지면서 코고는 소리가 들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내가 잠들어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클클>
남자의 시선이 다시 스크린을 향한다.
연쇄살인범이 좀처럼 잡히지 않는 동네에 정민이라는 갓 형사가 벌이는 좌충우돌, 그리고 백수 영석도 살인자를 쫓았다. 딸래미 혜린의 외국 피아노 레슨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범인을 쫓아가는 부정(父情)이 멋있다.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수익자를 딸래미로 돌려 놓은 후 살인범을 만나 반가워하는 영석의 표정이 압권이었다.
이 영화는 코믹이라기 보다는 드라마에 가깝다. 아버지(영석)와 딸래미(혜린)가 어렵던 매듭을 풀고 화해하는 과정을 리얼하게 그렸다는 감동을 주었다. 차라리 영석이 범인의 칼에 죽어 주었으면 딸 혜린에게 6억이라는 보험금이 돌아갔을 거라는 아쉬운 여운을 남기는 영화였다. 그러나 주인공이 살았다는 것이 관람객을 안도하게 한다.
<그래. 살아있다는 것이 좋은 것이야.>
남자는 돈이라는 물질 때문에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을 많이 제한해 왔었다. 학원 보내는 것도 돈이고 예쁜 옷을 사주는 것도 돈과 연결하여 <된다> 보다는 <안된다>라는 입장을 고수한 적이 더 많다는 것을 고백한다. 백수 영석처럼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할 만큼 절실하게 딸들을 사랑한다면 <된다>라는 긍정을 더 많이 하지 않았을까?
“여보 영화는 재미있었나요?”
“신나게 주무시더군.”
“나중에 살인범에게 칼을 찔리던 때 얼마나 시끄럽던지 눈을 뜨고 좀 봤지요. 아유 정말 피곤하네.”
아내는 영화만 시작되면 무슨 영화든 언제든 잘 잔다. 잘 자는 것 그것도 복이 아닐는지.
큰 딸래미가 마련해 준 결혼기념일 영화관람권에 남자만 신났다.
첫댓글 결혼기념일에 보는 제목치곤 좀/잼나셨어요그리고 다운받아보신다는 말은 비밀이야
볼만 합니다. 둘째 딸도 보고 오더니 재밌다더군요.
컴으로 다운 받아 보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업로드만 하지 않으면 다운로드는 그리 규제를 하지 않는 모양이더군요
전 지난번 신랑이랑 육혈포 강도단을 보고 왔어요.보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화만사성이란말이 딱/정신사나운게 싫은 지금에 제가보고 웃기에 딱 좋은 영화였어요.취향은 아니지만.
다음 영화에서 검색하니 스트레스 팍팍 날려줄 좋은 영화군요. 비디오로 한번 보아야겠는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