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서기(日本書紀)서문
日本書紀
Ⅰ.
『일본서기』 역주사업을 착수한 지 만 6년, 그간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끝이 보이질 않던 작업이 지난 1년간은 매주 모임과 때론 합숙의 시간을 갖고 미진한 부분을 중심으로 집중력을 발휘했던 것이 역주본 탄생의 요인이 되었다. 처음 몇 년간은 월 1회 각자 담당한 과제를 발표하는 식으로 역주회의를 진행하였으나 생각만큼 진도가 나가지 않았고, 개인 사정상 참석률이 들쑥날쑥하여 전체 모임이 불가능하였으며, 중간에 멤버도 교체되는 등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게다가 견해가 다른 부분에서는 어떤 식으로 정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각자 담당한 부분을 교차 점검하며 논의를 거듭한 끝에 논란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을 제시하며 선택의 폭을 넓히는 쪽으로 정리하였다.
『일본서기』는 일본고대사 뿐 아니라 한국고대사에서도 대단히 유용하며, 특히 고대 한반도제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연구하는데 피할 수 없는 사료이다. 그러나 이 문헌은 사료의 신뢰성 때문에 섣불리 접근하다가는 『일본서기』의 논리에 빠져들기도 하며, 편의에 따라 선택적으로 이용하면 논리의 모순에 부딪히기도 한다. 『일본서기』는 진실과 허구의 세계가 공존하고 과장과 윤색, 선과 악이 뒤섞여 있는 이른바 동전의 양면성을 갖는 표리일체의 사서이다. 역사학에서 말하는 철저하고 엄정한 사료 비판이 따르지 않으면 자의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일본서기』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편찬 이념과 통시대를 간파할 수 있는 분석력에 입각하지 않으면 공정한 결론에 이르기 어렵다.
한·일 양국 간에는 『일본서기』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끊임없고, 국내 연구자들 간에도 다양한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 『일본서기』에 대한 편찬과 성립 과정에 대해 그간의 사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Ⅱ.
『일본서기』는 ‘일본(日本)’이라는 국호가 만들어지고 율령을 근간으로 하는 천황제 통일국가가 완성된 시점에 편찬되었다. 그 내용은 일본의 건국신화를 이야기하는 신대(神代)부터 일본국을 건국했다는 초대 신무(神武)천황에서 지통(持統)천황에 이르는 7세기 말까지의 일본의 역사를 천황을 중심으로 편년체로 구성하고 있다. 『일본서기』 성립에 대해서는 『속일본기』 양로(養老) 4년(720) 5월 계묘조에 「이전부터 1품 사인친왕(舍人親王)이 천황의 명을 받아 『일본기(日本紀)』 편찬을 추진했는데, 이때 완성되어 기(紀) 30권, 계도(系圖) 1권을 찬상(撰上)했다.」고 한다. 편찬 시점은 『일본서기』에 천무(天武)천황이 천도(川島)황자 이하 12인에 대해 「令記定帝紀及上古諸事」하였다는 천무 10년(680)을 기준으로 한다. 여기서 ‘제기’는 역대 왕의 계보를 말하고, ‘상고제사’를 ‘기정’한다는 말은 구전, 설화, 전승되어 온 기록물의 다양한 종류의 이설을 검토하여 사실을 확정 짓는다는 것이다.
『일본서기』 편찬을 개시한 천무천황은 고대 일본 최대의 내전인 임신(壬申)의 난에서 천지(天智)의 아들 대우(大友)왕자에 승리한 후 중앙집권적 권력체제를 구축한 인물이다. ‘일본’이라는 국호와 군주호로서의 ‘천황’의 출현도 천무에서 시작되었다. 천무의 시대에는 황족을 요직에 앉히고 기타 씨족을 권력의 중추에서 배제시키는 황친정치를 행하고, 종전의 씨성제도를 8색(色)의 성(姓)으로 개편하였으며, 비조정어원령(飛鳥浄御原令) 제정, 등원경(藤原京) 조영 등 천황 중심의 권력구조 기반을 구축하였다. 천무의 사후 그의 정치적 이념은 황후인 지통천황으로 계승되었다. 여성 천황의 즉위는 황태자 초벽(草壁)황자의 조사(早死)로 인해 이루어진 것으로, 황손의 성장을 기다렸다가 물려주는 일종의 중계역이었다. 적통을 황위에 즉위시키려는 것은 황자들 간의 권력투쟁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천무의 유훈이었다. 따라서 황손 문무(文武)의 사후에도 아직 어렸던 황태자 성무(聖武)의 성장기간 동안 원명(元明:문무천황의 모친), 원정(元正: 성무천황의 모친)이 즉위하였는데, 이러한 여성 천황의 즉위는 천황제국가의 황위계승 전통이 되었다.
원정천황 4년(720)에 사인친왕(舍人親王)을 대표 편자로 하는 『일본서기』가 완성되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천무천황의 황자이다. 그는 황족으로서 만기를 총람하는 태정관의 장관인 지태정관사(知太政官事)의 직에 있으면서 역사서 편찬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역사서 편찬을 구상한 것이나 『일본서기』 편찬 이념에 천황통치의 유구성, 정당성, 정통성을 내세운 것은 천무의 뜻이 반영된 것이었다. 일본국의 유구성을 주장하기 위해 건국신화를 만들고, 황조신(皇祖神)으로서 천상의 세계를 다스리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설정하고 그의 후손인 니니기노미코토가 지상에 강림한 이후 드디어 신무에 의해 일본국이 건국되어 현실의 천황으로 이어진다는 황통보를 만들어 타 씨족에 우월한 천황가의 유구성과 우월성을 강조하게 되었고, 혈통의 신성성을 통해 통치의 절대화를 꾀하였다.
Ⅲ.
『일본서기』 편찬 이념으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한반도제국과의 관련성이다. 『일본서기』 속에는 고대의 한반도제국과 관련된 내용들이 수없이 나온다. 신대기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천손강림설화는 금관국의 수로왕 탄생설화와 유사하고, 신무동정(神武東征)설화에는 고구려 건국설화의 흔적이 보이며, 숭신기·수인기 등에는 가야·신라로부터의 이주전승이 나타나 있다. 이후 안강기(安康紀)를 제외한 모든 권에는 한반도 관련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한반도제국과 관련한 『일본서기』의 주요 편찬 이념은 한반도제국에 대한번국사관(蕃國史觀)이다. 중애기(仲哀紀)부터 신공기(神功紀), 응신기(應神紀)에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설화를 비롯하여 백제와의 국교 개시, 가야7국 평정설화 등 한반도제국의 복속과 조공의 기원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고대의 한반도제국은 일본의 복속국, 조공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천황이 다스리는 신국인 일본에 대해 서번(西蕃)으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맹약하는 의식을 거행한다. 신공황후 전승은 『일본서기』 내에서도 중핵을 이루며, 신라 등 한반도제국 복속담의 기원설화로서 이후 대한 관련 사건의 고정화 된 관념으로 현실적으로 기능하게 된다. 『일본서기』에 이어서 편찬된 『속일본기』 등 5국사에는 신공황후 전승이 신라와의 외교적 마찰과 긴장관계 속에서 고대 일본 지배층의 신라에 대한 우월의식을 나타내는 전설이 되었으며, 중세 몽골의 침략기에는 신공황후의 은덕으로 적을 격퇴했다는 수호신으로서의 신앙화 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무사들이 신공황후묘를 참배하고 조선 침략의 성공을 비는 의식을 거행하기도 하였으며, 근세에 들어서는 고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신공황후 전승이 조선멸시관으로 나타나 정한론의 사상적·이념적 근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근대의 한국침략, 지배기에는 학문이 정치의 도구가 되어 관학파에 의해 한반도 지배의 정당성을 구하는 현실적 목적으로 신공황후 전승을 이용했으며, 교육 현장에서도 교과서의 핵심 내용으로 기술되었다. 왜곡된 역사가 시대를 이어서 전승되고 기억되어 일본인의 고정화된 관념으로서 대한관(對韓觀)을 형성한 것은 유례없는 일이고, 잘못된 역사의 해악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더불어 계체기(繼體紀), 흠명기(欽明紀)에는 임나일본부 문제 등 6세기대 가야제국을 둘러싼 백제, 신라, 왜 등의 복잡한 국제관계가 기술되어 있어 오랜 기간에 걸친 논쟁이 되고 있다. 고대 한일관계사 논쟁의 정점에 있는 이문제의 해결이야말로 한일고대사 정립의 핵심이다. 사료를 둘러싼 다양한 해석, 복잡한 기술이 무수한 논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여기에 민족주의적인 접근, 개인의 연구 분야 차이에서 오는 시각과 관점으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실타래처럼 얽힌 사료의 재구성과 가야사의 내재적인 문제, 한반도제국 상호간의 국제관계, 나아가 대왜관계라는 순차적인 접근방법이 필요하다고 본다.
『일본서기』에는 수많은 씨족들의 활동이 나오고 있다. 일본이 통일국가를 이루는 과정에서 이들 씨족의 역할은 중요했으며, 이들 집안에서 내려오는 가전(家傳)이 『일본서기』 편찬의 기초자료군을 이루었다. 이 중 고대에 한반도에서 활동한 씨족들은 대체로 조상의 활동을 미화하는 필법을 구사하고 있다. 특히 군사적인 측면에서 무훈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때로는 악인으로 표현되어 일본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미명하에 천황에게 소환되는 사례도 보이는데, 이것은 씨족의 가전이 『일본서기』의 천황 중심적 이념에 의해 손질이 가해진 사례이다. 천황의 지배이념을 능가하는 기타 씨족 활동은 허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645년 을사의 정변으로 몰락한 아스카시대의 최대 호족이었던 소아씨(蘇我氏)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소아씨와 더불어 추고조 때 국정을 공동 운영한 것으로 되어 있는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치적이 유달리 강조되고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유도 천황통치의 단절의 역사를 성덕태자라는 인물을 통해 복원하려는 『일본서기』 편찬 사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의 편찬사료 중에는 한반도 계통의 사료군도 다수 존재한다. 대표적인 사료가 『백제기(百濟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백제본기(百濟本記)』이다. 이들 백제삼서는 한성시대, 웅진시대, 사비시대의 시기별로 인용되어 있어 편찬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편찬의 주체나 성격을 둘러싼 논란이 있으며, 원 내용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일본서기』 편찬 단계에서 윤색된 흔적도 적지 않아 주의를 요하고 있다. 이외에도 고구려승 도현이 쓴『일본세기(日本世記)』, 한반도 이주민계인 길사(吉士) 집단이 남긴 기록류도 적지 않다.
Ⅳ.
본 역주본의 해제와 부록에는 관련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첫째, 『일본서기』 편찬과 사료에서는 『일본서기』의 명칭 문제, 『제기(帝紀)』와 『구사(舊辭)』, 『천황기(天皇記)』와 『국기(國記)』의 사료로서의 이용 문제, 『일본서기』의 각 권별 어구 및 어법, 가요, 가명(假名) 표기에 사용된 한자, 분주의 수, 출전과 소재 등의 특징을 바탕으로 몇 개의 그룹으로 구분하는 구분론을 정리하였다.
둘째, 『일본서기』의 인용 자료와 이용 목적으로, 앞서 인용한 『제기』, 『구사』를 비롯하여 『상고제사(上古諸事)』, 씨족의 가전(家傳), 국가의 단편적 기록, 개인의 수기, 사찰·신사의 연기, 한반도 관련 자료와 중국 측 자료 등을 정리하였다.
셋째, 고대부터 패전 이후까지 일본에서의 『일본서기』 연구사를 시대별로 정리하였다. 『일본서기』가 편찬된 직후인 양로 5년(721)부터 강보(康保) 2년(965)까지 일본 조정에서는 모두 일곱 차례 강서를 하였다. 고대부터 시작된 『일본서기』 연구는 강보 시기 이후에는 일본 조정에서의 강서는 없었지만, 귀족사회에서 계속 읽혀졌다.
중세에는 『석일본기(釋日本紀)』와 『일본서기찬소(日本書紀纂疏)』가 출간되었다. 근세에는 고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일본서기』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객관적·실증적 연구가 등장하였다. 그리하여 고대의 강서 때보다 훨씬 체계적인 형태를 갖춘 『일본서기』 주석서인 『일본서기통증(日本書紀通證)』과 『서기집해(書紀集解)』가 출현하였다. 명치기 이후에는 『일본서기』 기년에 대한 논쟁을 비롯해 『일본서기통석(日本書紀通釋)』과 같은 방대한 주석서가 편찬되기도 하였다.
부록에는 『일본서기』 사건연표를 비롯하여 천황 화풍시호 및 재위기간, 천황릉 위치 비정표, 일본 고대 산성 현황표, 고대 일본 관위 12계 및 위계제 변천표, 일본 율령제하 관위상당제 및 4등관제표, 왜5왕 비정 및 대중관계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백제왕력 비교표, 고대 삼국과 왜의 교류표, 고대일본 내 도래계씨족 출자표 등을 수록하였다. 계보 및 지도로는 『일본서기』천황 계보, 고대 일본 지도, 무내숙녜(武內宿禰) 후예씨족 계보, 갈성씨(葛城氏)계보 및 대왕가와의 관계도, 소아씨(蘇我氏) 계보 및 대왕가와의 관계도, 대화(大和)지역 유력씨족 분포도, 고대 일본 둔창 분포도, 임신의 난 관계지도, 기내(畿內)지역 고대 주요 유적 분포도, 『일본서기』 백제왕 계보, 가야7국 및 임나4현 위치도 그리고 일본 고대의 금석문과 한반도 관련 문헌 해제 등을 실었다. 『일본서기』의 시대, 관련자료는 거의 망라한 셈이다.
Ⅴ.
본 역주본은 국내 독자 뿐 아니라 일본인 독자도 염두에 두고 분석을 행하였다. 『일본서기』는 고대에 만들어진 고대의 역사서이고 당대 일본 지배층의 정치적 이념을 이해하는 데에는 대단히 유용한 사서이지만, 당시의 객관적 실태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이 사료가 갖는 왜곡된 한국고대사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해당 기사에 대한 해설과 각주를 보완하였다. 한반도제국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기반으로 한 역사서가 일본인의 대한관을 고착화시켰고, 이를 통한 왜곡된 역사가 일본 뿐 아니라 일본의 역사를 배우는 세계의 연구자, 그 휘하의 학생에게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은 심히 우려할 만한 일이다.
이 역주본의 출간은 『일본서기』 연구의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금후 올바른 일본고대사, 고대한일관계사, 나아가 동아시아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에 하나의 디딤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으로 이 역주작업에 참여한 공동집필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지방에서 주말마다 열차를 타고와 휴식 없이 역주작업에 몰두한 열의가 없었더라면 이번 출간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외에도 이 작업에 도움을 준 여러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