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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5일
말씀: 출33:12-18
제목: 우리의 소망 중보자적 사명
우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여러분들께 소원을 물어보면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출애굽 33장에서 모세의 소망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주님의 길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것 이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소망이었습니다.
롬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소망이 넘치기를 원하신다고 하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소망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겠지만 모세의 소망은 세 가지었습니다. 먼저는 주의 길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출33:13 ‘내가 참으로 주의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모세가 하나님의 길을 보는 것처럼 영명교회가 하나님의 길을 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요구하는 길은 마7:13에서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저가 적음이라’
모세의 소망은 하나님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이 협착하고 외롭고 찾는 이가 없고 가시밭길이고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길로 가는 사람들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승리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하나님이 여신 길이요 하나님이 계획하신 길이요, 하나님의 의도가 있는 길이요 또한 그 길은 영생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이 길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여신 길은 그 나라와 연합되어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길은 하나님이 보장하신 길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은 반드시 승리가 있고 반드시 축복이 있고 반드시 그 나라를 소유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길은 위험한 길이 될 수 있고 십자가의 길이 될 수 있고 불행한 길도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길은 분명히 확실한 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길은 확실한 길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 길에서 후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골로새서 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위를 바라보면 하나님의 길을 보입니다. 이 땅의 것을 위해 땀 흘리고 이 땅의 것을 소유하기 위해 애쓰는 삶속에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길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신 길은 위의 것을 사모하고 갈망할 때 보여지는 것입니다.
(시계 11개, 금반지 21개- 예화)
그러면 모세는 왜 하나님께 길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까?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길을 보여 달라고 한 것은 출애굽 32장에부터 출발해야합니다. 출32장에서는 금송아지 사건이 있었지요. 그 결과 하나님이 진멸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33장에서 진노를 돌이키고 34장에서는 하나님이 영광을 나타내십니다마는, 먼저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출32:10‘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진멸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듣고 모세가 11절에서부터 13절까지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켰습니다. 모세의 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이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노만 돌이키실 뿐입니다. 모세가 내려와서 보니 가관이 아닙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타락한 우상제물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레위인들로 하여금 삼천명이 죽습니다. 이 죽음은 철저한 구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출32:33절에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가나안을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하시고 천사의 능력으로 그 땅을 차지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한 고비가 넘어갔지요. 그런데요 이 말의 의미는 무섭습니다. 33:3‘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왜요? 목이 곧은 백성들이라 또 다시 범죄 하면 하나님이 진멸하실까봐서 같이 안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업은 주지만 너희와 함께 안 가겠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능력으로 약속을 이루지만 하나님은 같이 가지 않겠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 때 모세가 이스라엘백성을 위해 세 번째 기도하는데, 집중적으로 하나님을 구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와 교통 가운데 생명을 건 기도를 합니다. 출33:12-13 이렇게 기도하니까 14절에서 응답이 있습니다. 너희와 함께, 나의 임재와 함께 가리라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구비 구비 이스라엘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이끌기 위해 기도하며 애를 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은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우상 숭배하다가 삼천 명이나 죽었습니다. 정말 이 민족을 이끌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길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길을 보여주시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영광을 보여주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백성들입니다. 광야의 삶이 그렇고, 인생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절규하다시피 기도하고 하나님의 길을 보여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길을 보아야 합니까? 보지 않으면 살아갈 수없는 시대에 있습니다. 어느 때도 마찬가지입니다마는 오늘날 이 시대가 얼마나 불안전한 시대며, 불투명한 시대입니까? 영적으로는 정말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동성애는 결국 교회를 파괴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동성애와 교회가 무슨 상관이 있냐고요, 말씀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저들이 합리화하기위해서는 말씀에 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성경도 동성애에 대한 구절을 빼어버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경기도 안산 대부도에서 발생한 '방조제 시신 사건'의 피의자 조성호가 피해자로부터 성관계 대가로 약속받은 수십만 원을 받지 못하고 욕설을 듣자 격분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결국 동성애 때문에 이런 무차별 살인이 저질러 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출33:16‘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서 은총을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이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하심으로 구별 된 것이지 다른 것으로는 구별된 이유가 없고 구별될 증거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셨음을 염두에 두고,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주의 백성 된 자들의 가장 큰 증거는 구별됨입니다. 이것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됨이며 또한 어두움, 사망, 악의 세력으로부터의 구별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별이 가능한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어 능히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동행해주셔야지 하나님이 우리 편인 줄 알고 하나님이 동행해 주셔야지 우리가 바른 길을 가게 되고 하나님이 동행해 주셔야지 세상 사람들 앞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구별된 자들임을 선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이 임재에서 떠나니까 하나님임재가 없는 가운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가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나안의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생명 건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8절 ‘주의 영광’을 구합니다. 그랬더니 21절에 이렇게 응답합니다. ‘내 영광이 지나갈 때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임한다는 뜻입니다. 이 약속에 대한 행동으로 34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영광으로 임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을 진멸하려고 했을 때부터 시작해서 고비 고비, 위기 때를 맞이하면서 모세는 결국 주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과 임재가운데 거하는 것이 최고의 축복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에게 소망이 되었고 소원이 되었습니다.
현실에 대한 심각함을 아시고 영적분별력을 가지고 이 시대를 볼 수 있다면 모세가 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를 깨닫게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소망하는, 소원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시기를 바라고 이 소망은 중보자적 사명을 가진 자가 감당해야할 거룩한 짐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보고 하나님이 길을 여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보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종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다시 한번 중보자의 역할을 기억해야할 때입니다.
12절 ‘보시옵소서’ 명령형입니다. 건축을 하는데 벽돌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잘 쌓지 못했을 때 소장이 와서 ‘이게 뭐야’하는 식입니다. ‘여기소서’도 명령형입니다. 강권하고 있지요. 그 만큼 모세가 강력하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지금 모세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거 하나님이 알고 시작한 일 아닙니까? 그러면 왜 내게 이런 백성을 맡겨가지고 생고생하도록 만드십니까? 이거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이런 뜻입니다.
모세가 기도했더니 어쩌면 일이 술술 풀리는 것 같습니다. 물론 생명을 건 기도였지만, 모세가 기도한 것을 한 번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모세의 요청을 다 들어주셨습니다. 왜요? 모세가 특별한 사람이어서 이런 결과를 얻어낸 것입니까? 아니면 모세는 보편적인 신앙인으로 서 있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위치나 자세가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 만의 특권입니까? 신18: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죽기 전의 모세의 예언입니다.
이스라엘역사 내내 모세를 지도자로 세웠듯이 끝없이 세워질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백성사이에서 중제자 노릇을 한 이직분이 계속되고 이 중제자의 주인공은 궁극적 실체로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십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모세와 어떤 상관이 있는가를 그리스도를 통해 모세의 성격 지도자로서의 위치가 들어납니다. 왜냐하면 모세를 통해 율법이 선포되었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이 완성되었습니다. 오늘 확인할 것은 중보자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실체되심이 구약에서 상징된 모세로 인하여 연장선장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구절은 마17장의 변화산의 장면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세가 열심을 낸 이유는, 이렇게 강력하게 하나님께 간구하며 생명을 건 기도를 한 이유는 중보자로서 사명 때문인 것을 압니다. 중보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쌍방 간의 합의와 연합과 화목을 이루어야하는 책임 때문이라기보다, 중보사역은 이런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이 백성을 진멸하고 너로 새로운 민족을 이루겠다하자 이 백성을 진멸하시려면 나도 죽여 달라고 하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 중에 한 사람을 택해서 중보자로 삼으셔서 그는 상방간의 합의와 화목을 위해서 일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자기 백성으로서 삼은 것을 이 한 사람, 모세를 세워서 이 지도자와 갖는 관계가 전체와 갖는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중보자입니다.
모세에게 너로 새로운 민족을 세우겠다고 하셨는데, 모세가 이해하기로는 그 민족을 대표해서 서 있는 자로서 자신과 민족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세우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놓지 않고 붙들어 가겠다는 뜻입니다. 모세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모세와 이스라엘백성전체의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롬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은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이 똑같은 고백을 합니다. 내 민족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면 나는 저주를 받아도 좋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모세와 마찬가지로 바울을 이방인을 위해 부름을 받은 사도이지만 바울의 고백을 모세와 연결해서 이해하면 이방을 위하여 어디서 불렀느냐하면 이스라엘 중에서 바울을 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제사장국가로 부름을 받아서 이스라엘의 순종과 제사장직분을 통하여 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넘어가서 온 세계가 구원을 얻어야 되는데, 그 책임을 진 이스라엘이 실패했습니다. 예를 들어 통에 물이 넘쳐서 다른 통으로 흘러가야 되는데, 이 통이 흘러가기를 거부하자 직접 갖다 부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로마서에서 복음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넘어갔느냐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으로 흘러갔다고 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었고 이방만 구원을 얻었느냐, 그럴 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이방을 구원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썼습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했는데요, ‘내가 이스라엘백성 아니냐.’이 말입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바울을 불러 이방인들을 구원케 했으면 이스라엘에서 바울을 부른 것은 한 개인을 부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부른 것으로 관주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이방에게만 넘어가도 이스라엘은 실패된 체로 끝 날이가 없다, 왜요? ‘내가 이스라엘 사람이니까?’
이런 논리는 예수그리스도로부터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엡1:17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예수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의 독특한 점은 하나님과 우리를 중재하기 위하여 우리와 묶어 섰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분리가 되면 나만 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도 죽게 되어 있습니다. 머리인 그리스도와 지체인 우리는 운명적으로 묶여 있습니다. 성자하나님과 성부하나님을 분리시킬 수 없듯이, 성자하나님과 우리를 분리시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수그리스도와 성도들과의 관계인 것입니다.
다시 좀 정리해 보겠습니다.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마는 이 말씀이 우리교회 중보자로 세우시고 이끄시고 부르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알면 중보자의 사명을 알게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대표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교제하며 교통하며 친밀한 관계에 있는 것은 이스라엘과 이렇게 친밀한 관계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즉 모세의 기도응답은 모세 개인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전체에 해당되는 기도응답이란 말입니다. 모세 한 사람을 세워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어떻게 이끌 것이며 어떻게 사랑하며 언약의 백성으로 삼을 것인가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께로 이어지지요.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위해 대표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묶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백성과 분리될 수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교회가 몸이 되어 성도들이 각지체로 연합되어 있고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중보자로 세워진 것은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교회를 포기하지 않고 사명을 주신 것은 아직까지 이 땅에 할 일이 있고 이 땅을 변화시기기위해 이 땅을 구원하기 위해 지금 우리교회를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고 우리가 세상에 나가 빛 된 삶 중보자의 삶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보자입니다. 우리 영명교회에 일꾼을 세운다, 그러면 전체로서의 영명교회성도들을 포기하지 않으며 그 약속을 지키고 계신 증거입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아직까지 하나님이 인류에 대하여 희망과 약속을 지키고 있는 증거라고 누군가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죄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은 죄인으로 죽이려고 태어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려고 태어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의 일꾼이 세워지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신실하시기에 은혜롭고 자비하시기에 그의 일을 행하고 계신 구원역사를 계속하고 계신 증거입니다. 롬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들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지금도 우리 편을 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중보자 예수그리스도의 중보자사역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대표되는 지위와 약속과 특권으로 성부하나님과의 관계가 확실하며 충분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과 하나 되어 가는 길에 있어서 당연하게 생각한 것은, 하나님이 길을 여시지 않으시고 함께하지 않으시고 영광을 보이지 않으시면 이스라엘백성들을 이끌고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소망이 무엇이 되어야합니까? 지금 이 시대는 영적으로 타락되어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있고 형식적이고 의식적이고 기계적인 예배만이 존재하고 있고, 세상은 우상숭배와 순리를 역리로 바꾸는 성적타락과 동성애와 종교적으로는 무슬림인 들이 이 땅을 지하드를 통해 덮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뿐만 아니라 목사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의 윤리와 도덕의 기준을 지키지 못하고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기독교는 위기입니다. 이런 위기에서 모세와 같은 기도가 필요하고 또 민족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결단과 헌신이 필요할 때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중보자적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이 된다면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복음전도를 통해 이 시대를 살릴 수 있는 한 가닥의 빛이 비춰질 것입니다. 우리를 중보자로 삼으신 것은 아직까지 이 땅에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이며, 우리를 중보자로 세우겠다는 것은 아직까지 세상을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소망이 ‘하나님 길을 보여주십시오, 하나님 동행해 주십시오, 하나님 영광을 보게 해 주십시오’이런 은혜가 있어야만 우리가 중보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 될 때 이 땅은 삽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 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을 주께로 모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 될 때 하나님의 뜻이 펼쳐줄 줄 믿습니다.
다시 한 번 중보자적 사명을 통해 가정과 교회와 지역과 사회와 민족을 살리는 영명교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