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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am Elody ,35 years old. Student of chinese medicine, from france , the city name is Frejus
발람 엘로디(35세, 한의학 학도, 프랑스의 프래저스시 출신)
오늘의 장소 : 무등산 약사암
일 시 : 2023.12.07(목)
참 가 : 강공수 나종만 박남용 양수랑 윤상윤 윤정남 정원길 장휘부 등 8명
불 참 : 김영부(안과 질환) 김상문(신장내과, 보청기 주문) 김재일(감기) 이용환(김장) 등 4명
회 비 : 70,000원
식 대 : 66,000원(애호박찌개 2, 김치찌개 5, 부추전 1)(외국 여인 1명 포함)
오늘 잔액 : 4,000원
이월 잔액 : 582,000원
총 잔 액 : 586,000원
시내버스에서 내려 부곡정으로 올라가는데 어떤 여인(40대)이 아저씨 떡 좋아하세요? 네 하였더니 비닐봉지에 넣은 떡 한 뭉치를 건네주었다. 혹시? 앞서 달려 간 여인은 증심사를 오가는 셔틀버스를 타는 것이었다. 불자인가 보다. 하여 안심이 되었다.
부곡정에는 6명(강공수 나종만 박남용 양수랑 윤상윤 윤정남 등)이 모였다. 불참자가 4명이나 되었다.
10시 조금 넘어 산행을 시작하였다. 올라가면서 떡을 얻은 이야기를 하였더니 윤상윤이 모르는 사람에게 함부로 먹을 것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친구들과 나누어 먹을 요량이었는데 혹시라도 불상사가 생기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서 떡을 내놓지 않고 그냥 집으로 가지고 오고 말았다.
올라가면서 우리 마을 이야기를 하였더니 박남용이, 이순신장군과 우리 마을-전남 보성군 득량면 송곡리 <박실(박곡(亳谷)>-에 얽힌 이야기를 물었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이순신장군이 1597년 음력 8월 12일 13일 14일까지 박곡(亳谷)의 양산항가(梁山杭家)에 3숙(宿)을 하시고, 4일째인 8월 15일 추석날 보성군 군청사가 있는 열선루(烈仙樓)에 가서 하룻밤을 지냈다고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 <박실>마을은 이순신 장군이 3박 4일 동안 머물면서, 이순신 장군이 1593년 이후 4년 동안 ‘동양최대의 막강 수군’으로 양성하고 구축해 놓은 ‘이순신 함대’를 무능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시켜버린 후에, 경상 우수사 배설(裵說)이 피신시켜놓은 12척의 판옥선(板屋船)으로 ‘조선수군을 재건(再建)하기 위한 작전 지휘본부’가 되었던 것이다. 선조(宣祖)로부터 조선 수군(水軍)을 파하고 육군(陸軍)으로 합류하라는 교지를 받고,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라는 그 유명한 장계를 올렸던 것이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금신전선상유십이(今臣戰船尙有十二)
죽을힘을 다해 항거해 싸운다면 오히려 해 볼만 합니다.
출사력거전즉유가위야(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지금 만일 수군을 전부 없애 버린다면
금약전폐주사(今若全廢舟師)
이는 곳 적들이 크게 다행으로 여기는 것으로
시적소이위행이유(是賊所以爲幸而由)
호남을 거쳐 한강까지 곧바로 쳐들어갈 터인데,
호우달어한수(湖右達於漢水)
신이 걱정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차신지소공야(此臣之所恐也)
전선의 수는 비록 적지만
전선수과(戰船雖寡)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미신불사즉불감모아의(微臣不死 則不敢侮我矣)
라는 장계를 올렸던 것이다.
약사암으로 올라가면서 이순신 장군이 명량(鳴梁)에서 어떻게 싸웠고, 승리를 한 그 해전에 대하여 박남용과 윤상윤에게 설명하였다. 이순신장군이 가장 중요시하였던 수군(水軍)이 어떻게 조직되었고 누구의 도움을 받아 어떤 작전으로 싸웠고, 전술은 어떠하였던가를 내가 십 여 년 동안 공부하였던 바를 비교적 간단히 설명하였다.
어느덧 약사암에 도착하였는데 박남용이 묘령의 외국여인과 한참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11시 50분이었다. 우리 먼저 내려간다고 말하고 하산하였다.
음악정자에 모였다. 장휘부와 정원길도 함께 모였다. 박남용도 외국여인과 함께 도착하였다. 2주전에 공부하였던 <가을>(백남석 요, 현제명 곡)을 한 번 부르고 나서 노래교실은 겨울동안 쉬었다가 3월에 다시 하기로 하였다.
식당으로 갔다. 외국여인도 함께 갔다. 박남용이 외국여인을 우리들에게 소개하였다. 프랑스여인으로 우리말은 한 마디도 못한다고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았더니
Ballam Elody, 35 years old. Student of chinese medicine, from france, the city name is Frejus.
발람 엘로디(35세, 한의학 학도, 프랑스의 프래저스시 출신)
인데 우리나라에 여행 왔다가 우리를 만난 것이다. 며칠 후에는 일본에서 국제선을 타고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지나가던 우리 사범 13회 이정훈선배가 외국 여인과 섞여서 식사를 하고 있으니, 다가와서 그 여인에게 몇 마디를 물어보면서, 막걸리를 그 여인에게 대접하였다. 우리들도 함께 잔을 들어 그 여인의 성공적인 여행을 비는 건배를 하였다.
지금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나는 지난 12월 4일 오후 <롯데시네마>에서 그 영화를 봤다. 참고로 다음에 볼 사람을 위하여 간단히 감상문을 남긴다.
<서울의 봄> (김성수 감독작품, 상영시간 2시간 20분)
4시 10분이 지나자 본 영화가 시작되었다. <서울의 봄>은 1979년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에 이어서, 신군부의 전두환소장이 12·12군사반란으로 실권을 잡게 된 과정을 실감 있게 구성하여 영화를 만들었는데, 등장인물들을 실명으로 하지 않고 모두 가명으로 설정하여 실감이 조금 떨어진 감이 있어서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 군사반란 과정을 시간대 별로-1979년 12월 12일 저녁 6시부터 이튿날인 13일 새벽 4시까지-우리 국민들이 까맣게 몰랐던 사실들이, 수많은 자료와 증언으로 발굴되어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치 떨리는 군사적 무력충돌들이 생생하게 발굴되었고, 진압군과 반란군 진영 간에 이쪽저쪽의 상황이 긴박하게 반전을 거듭하다가, 결국에 간악한 정치군인들인, 군부 내의 사조직인 <하나회>가 중심이 되어 그들의 개인적인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판세를 장악해 가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었고, 결과적으로 국가를 보위를 목적으로 피같은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길러진 군인들에 의하여 일국의 민주주의 정치가 허무하게 실종되어 가는 과정을 보면서 허탈감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군내의 사조직의 폐해가 32년 동안, 1961년 정치군인들이 중심이 된 5·16군사 쿠데타로부터 1979년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을 거쳐 1992년 노태우 정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국민들의 대부분인 서민들의 희생 속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이루어졌지만, 어떤 면으로는 박정희와 박태준같은 국가관을 가진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이러한 경제적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는 없지만, 군사독재가 얼마나 민주국가의 정치 발전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 수 있고,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국민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해 졌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그것은 박정희가 장기적인 독재 정권의 보위를 위하여, 하나회의 뒷배역할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하나회를 만들어 키운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정희가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인 <민주 공화당>이 뿌리가 되어 자칭 '보수당'이라고 하는 정당이 박정희의 18년 장기 집권 이후에 전두환과 노태우의 <민주 정의당>과 3당 합당으로 태어난 김영삼의 <민주 자유당>으로 이어지면서 장장 38년간(1960~1998)의 보수 정권이 국가를 지배하였다.
그리고 또 이명박(2008~2013) <한나라당>)과 박근혜(2013~2017)의 <한나라당>까지 또다시 9년간의 보수 정권까지 합하면 47년이 되고, 윤석열의 <국민의 힘> 2년까지 합하면 총 49년의 보수 정권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49년의 기간 동안에 군사 독제정권은 박정희부터 노태우까지(1960~1993년) 총 33년을 군 출신이 정부의 요직을 독차지한 군사정부시대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이제 윤석열 정부는 이번에는 검사출신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여 공무원들을 앞장서서 이끌어가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여당과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있는 야당인사들을 선택적으로 수사하는가 하면, 철지난 같은 사건을 재탕 삼탕 압수수색으로 업무를 마비시키는가 하면, 아직 유죄확정으로 판결되지 않은 사안을 공표하는 등 일명 <흠집 내기>수사, <괴롭히기>수사, <모욕주기>수사 등으로 당사자들의 고귀한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전직 대통령 한 사람을 잃었고, 우리나라 최대 건설회사 사장을 비롯한 수 많은 사람들이 검찰의 조사를 받다가 고귀한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게 하고 있으며, 그렇게 수 많은 억울한 사람들을 잃었다.
<서울의 봄>은 현실인 역사적 사건(팩트)을 픽션처럼 각색하여 영화를 만듦으로서 그들 반역사적 주인공들로부터 고발당하지 않으려고 이름들을 바꾸어 설명한 것으로 수경사령관의 가상인물인 이태신(장태환)장군의 영웅적인 저항이 결코 헛되지 않고 역사의 교훈으로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길이 남아있기를 바라면서, 광주의 밤하늘에 떠 있는 무수히 많은 별들을 쳐다보았다.
2시간 20분이나 되는 영화가 너무 금방 지나가 버려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다음포털 “영화 서울의 봄 출연진 및 등장인물 정보 총정리”에서 모셔 온 자료이다.
등장인물들을 열거하면
열외 인물 1979년 10·26 박정희 시해사건 주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반란군 측
12·12군사 반란 당시 묵시적 동조자 10대 대통령 최규하,
무능한 동조자 노재현 국방부장관(미 8군 사령부로 피신),
적극적 동조자 1군단장 황영시중장,
적극적 동조자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중장,
적극적 동조자 수도군단장 차규헌중장,
적극적 동조자 하나회 정호용소장
주동자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소장(나중에 11대, 12대 대통령),
소극적 주동자 전방주둔 9사단장 노태우소장(13대 대통령),
행동대장 1공수특전여단장 박희도준장(무력 동원으로 군사반란 성공 계기제공),
행동대장 3공수특전여단장 최세창준장(1980년 5·18광주민주화 운동 탄압 발포),
행동대장 수경사 30경비단장 장세동대령(반란군 지휘 본부 제공),
행동대장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대령(계엄사령관 정승화대장을 체포 강제 연행),
행동대장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대령(반란 기획 설계 및 군사 통신 장악),
행동대장 보안사 수사과장 이학봉중령(정승화대장 고문 취조, 장태환소장 고문 취조)
행동조장 3공수15대대장 박종규중령,(정병주특전사령관을 체포 시, 사령관 비서관인 (동생같은)김오령소령을 사살함)
적극적 가담자 제20보병사단장 박준병소장(12·12군사반란을 방조 가담)
적극적 가담자 제5공수특전여단장 장기오준장(12·12군사반란에 적극 가담)
적극적 가담자 수경사 제33경비단장 김진영대령(12·12군사반란에 적극 가담)
적극적 가담자 수경사 헌병단장 조흥대령(특전사령관을 요정으로 유인, 육본 수뇌부 무장해제, 진압군을 물 고문함)
소극적 가담자 제30보병사단장 박희모소장(진압군에서 반란군으로 변절)
진압군 측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정승화대장(보안사 허삼수대령에게 강제 체포됨)
유군참모차장 윤성민중장(반란군에 유화적 우유부단한 태도로 진압에 실패함)
제3야전군사령관 이건영중장(병력동원을 시도하다 진압에 실패)
특전사령관 정병주소장(반란에 가담한 부하들의 배신으로 체포됨)
8공수특전여단장 윤흥기준장(병력동원 중 원대복귀로 진압에 실패)
수도경비사령관 장태환소장(반란군 진압하려 끝까지 노력하다 체포됨)
수경사 작전참모 박동원대령(장태환 소장의 명령을 끝까지 이행)
헌병감 김진기준장(반란군을 진압하려고 노력)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소령(정병주사령관의 체포를 막으려다가 형같이 따랐던 박종규중령에게 사살 당함)
첫댓글 우리 목요산우회 양수랑회장의 기나긴 장문으로 써내려간 알찬 내용의 글이 그저 감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