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말미에 예수님과 벳새다 사람 나다나엘의 첫 만남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자기가 옛부터 예언된 메시야를 만났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인도해 온다.
나다나엘을 보신 예수님은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나다나엘의 사람됨을 통찰하신다.
이에 놀란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하고 질문할 때,
예수님은 빌립이 그를 부르기 전에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노라고 대답하신다.
무화과나무 아래는 흔히 유대인들의 기도와 명상을 위한 장소였다.
추측건대 거기서 나다나엘은 기도를 하거나 오실 메시야에 대한 명상에 잠겼을 것이다.
이런 행위는 하나님과 자기 외에는 공개되지 않은 개인적 사건이었다.
그런데 자기의 내면세계만이 아니라 이 개인적 사건까지를 관통하는 예수님의 통찰력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시공간을 뚫고 나다나엘을 관찰하셨던 것이다.
생명이신 분과 생명을 받는 자의 시공간을 넘어선 교감이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탄복하면서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른다.
성경엔 예수님과의 이런 감격적인 첫 만남에 대한 기사들이 나온다.
베드로와의 만남, 요한과의 만남, 세례요한과의 만남, 수가성 여인과의 만남, 삭개오와의 만남,
나인성 과부와의 만남, 혈루의 여인과의 만남, 바울과의 만남 등이다.
이런 만남을 묘사하는 적당한 표현이 있을까?
한용운 시인은 “님의 침묵”이라는 시에서
“아 님은 갔습니다.....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 사라졌습니다.”
라고 눈물겨운 문장으로 애정의 추억을 묘사한 바 있다.
그 님이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든 조국을 가리키는 것이든 그것은 첫 키스에 대한 예리한 감각 경험이다.
당신은 어떤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첫 만남을 묘사할 적당한 형용사를 가지고 있는가?
만일 그분과의 만남이 당신에게 의미를 주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분과의 만남이 아니었을 것이다.
별 의미를 주지 못했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것은 첫 키스가 주는 예리한 감각 이하의 일반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첫 키스가 예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신체 조직과 신체 조직의 만남이다.
그러나 주님과의 첫 만남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다. 영과 영의 부딪힘이다.
모든 것이 되시는 분과 내 본질과의 충돌이다. 긍정하시는가?
주님과의 첫 만남은 내 존재를 꿰뚫고, 내 영을 꿰뚫고, 내 감각을 꿰뚫고
내 존재 전체를 사로잡아 그것으로 영원히 내 운명을 규정짓는 경험이라고 나는 규정한다.
그분은 나의 주님으로, 나는 그분의 소유로 하나 되어 생명과 사랑 안에 영원히 살아갈 운명이 된 것이다.
그것은 시간을 따라 퇴색할 수 없다. 그것은 마모되지 않는다.
사는 동안 우리가 죄인이라서, 세상이 무자비해서, 사는 게 힘들어서 영적 긴장이 좀 풀릴 수는 있다.
하지만 주님과의 첫 키스는 우리를 그분의 포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진정 주님의 입 도장이 찍힌 자는 주님으로부터 탈출 불가능이다.
그분의 성령이라는 도장에 그분의 피라는 인주를 묻혀 우리 존재의 중심부에 찍어버린,
그렇다, 그분의 첫 키스는 "너는 내것이다"라고 하는 그분의 인감도장이었던 것이다.
한용운 씨는 "아, 님은 갔습니다..."라고 탄식했지만,
그분의 도장을 받은 자에게 “아, 님은 갔습니다.” 라고 절규할 수 있는 기회는 없다.
있다면 "아, 님은 오셨습니다. 완전히 오셨습니다. 영원히 오셨습니다..."
라고 하는 놀라운 감탄일 것이다.
2023. 1. 7
이 호 혁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