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경주 황성동 찜질방에서 7시 30분경에 나와서 차량으로 경주 시내 이곳저곳을 다니며 출근하는 사람들과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날과 오늘 경주 곳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면서 알게 되었던 것은 도시 곳곳에 크고 작은 고분이
있다는 것과 경주 도시가 생각보다 제법 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우 놀랍게도 신라 전성기 때는 1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경주에 살았다고 하니 가히 삼국통일에
수도 같습니다.
경주에는 동국대학교와 서라벌 대학 그리고 신라대학교가 있는데 동국대학교에서 복음을 전하고
서라벌 대학을 지나 신라대학교로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신라대학교 넘어로 법흥왕릉이
네비게이션으로 보여서 신라대학교로 들어가 뒤쪽 좁은 논 길을 이용하여 차량으로 복음을 전하며
법흥왕릉으로 향하는데 학교를 막 나오니 많은 비석이 세워진 무덤이 보였으며 근처 마을 이름이
외와마을이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외와'라는 이름을 보면서 마귀의 세력들이 간혹 나에게 접근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에게 왜와?라고 묻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법흥왕은 신라의 불교를 공인한 인물이라는 것을 왕릉 표시석을 보고나서야 깨닫게 되었는데 아주 원수같은
인물로 생각되어 마음이 착잡하였는데 마침 오줌이 마려워서 왕릉 근처에서 볼일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왕릉이 있는 산에 개울이 흐르는지 왕릉 둘레와 옆으로는 물을 흘러보내도록
인위적으로 도랑을 만들어 놓았고 왕릉 아래에는 물이 가득한 논도 보았습니다.
그곳을 나와서 인근에 있는 태종무열왕릉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하니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견학을 왔는지 대종무열왕릉에서 선생님들을
따라서 밖으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태종무열왕은 영화 황산벌에 나오는 김유신과 함께 삼국통일의 주역이며 김유신과는 처남과 매부사이였던
김춘추로 그의 무덤 위에는 선대 왕릉으로 보이는 커다란 고분 네개가 있었고 무열왕릉 아래에는 그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의 무덤과 먼 후손인 김양의 무덤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태종무열왕릉에는 제법 큰 거북상과 비석이 있었는데 비석에는 둘째 아들 김인문이 지었다는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귀가 남아 있어서 이 무덤이 무열왕의 무덤이라는 것을 증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왕릉들은 이런 비석을 발견하지 못하여서 그 주인을 알지 못하는 왕릉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곳을 나와서 시간은 늦었지만 월성 왕궁 옆에 위치한 재매정 우물로 향했습니다.
재매정 우물은 김유신의 옛 집터에 있는 우물로 유신의 아내의 호를 따서 재매정이라고 불렸으며
재매정에 관한 일화가 있었습니다.
'644년(선덕여왕 13)에 소판이 된 김유신은 연달아 여러 차례 백제와의 싸움에 출정했는데, 싸움터에서
돌아오자마자 가족을 만날 틈도 없이 곧장 다른 싸움터로 보내지는 일이 거듭되었다...
이 때에 집사람들은 모두 문밖으로 나와서 장군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그런데 김유신은 문 앞을 지나면서
돌아보지도 않고 가다가 50걸음쯤 되는 곳에 이르러서 말을 멈추고, 종자에게 집에 가서 물을 떠오라 명령하여 물을 마셔 보고 말하기를 “우리 집 물맛이 아직도 옛날 그대로구나!” 하고 그냥 길을 떠나니, 이를 보는 모든
군사들이 말하기를 “대장군도 이와 같은데, 우리들이야 어찌 골육의 가족들과 이별함을 한탄하리요.” 하며
싸움터로 나갔다고 한다.'
저는 이러한 일화를 들으며 우리 부름받은 사역자들도 가족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여 연민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명자가 한다는 감동을 크게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유신의 옛 집터 앞에는 남천이 흐르고 집이 있는 남천 중앙에는 커다란 돌이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였는데 마치 흐르는 물에 견고하고 당당히 버티고 있는 바위처럼 전쟁으로 회오리
쳤던 삼국을 통일 시키고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당나라를 축출하는데 공헌한 김유신의 위엄과 용맹함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김유신 집에서 남천을 바라보면 천관사지가 보여서 가봤더니 그 당시에 절터가 조금 남아
있었고 나머지는 밭으로 습지로 남아있었으며 천관마을에서는 유적발굴이 한창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곳 주변에서는 태종무열왕릉 위쪽 네개의 고분이 훤하게 보여서 신비로움을 자아냈습니다.
' 이 절터는 도당산 서쪽 기슭에 있으며 신라시대 김유신이 사랑하던 기생 천관의 집을 절로 바꾼 곳이라
전한다. 김유신은 어머니 만명부인의 엄한 훈계를 명심하여 함부로 남과 사귀지 않았지만 하루는 우연히
기생 천관의 집에 유숙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훈계를 들은 뒤 천관의 집에 들르지 않았다.
그 후 어느 날 술에 취하여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말이 이전에 다니던 길을 따라 천관의 집에 이르렀다.
김유신이 잘못을 깨닫고 타고 갔던 말의 목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 돌아 왔다. 훗날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뒤 사랑하였던 옛 여인을 위하여 천관의 집터에 절을 세우고 그녀의 이름을 따서 천관사라 하였다.
처음 건립 이후 이 절의 역사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중기 이공승이 이 절을 지나면서 시를 지은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는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김해에서 부친이 경산을 거쳐서 경주로 오셔서 효도 차원으로 일은 뒤로 미루고 잠시 구경을 시켜드렸습니다.
첨성대 앞으로 많은 왕릉이 있는 대릉원이 있어서 그곳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미추왕릉을 보았고
근처에서 대나무가 무성한 왕릉과 대나무 숲도 보았었는데 그의 신비로움 때문인지 다른 왕릉과 다르게
유일하게 사면을 막아났고 대문도 굳게 잠겨있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다음 왕인 유례이사금 14년에 이서고국이 금성을 공격하므로 크게 군사를 들어 막아도
능히 물리치지 못했다.
이때 홀연히 이상한 군사가 오는데 그 수효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그들은 모두 귀에 댓잎을 꽂고 아군과
더불어 함께 적을 쳐 깨뜨렸다. 그후 그들이 간 곳을 알지 못했는데 누군가 죽장릉에서 죽엽 수만이 쌓여
있음을 발견했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미추이사금이 음병으로써 싸움을 도와준 것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대릉원에는 천마가 발견된 천마총이 있어서 다시 그곳을 가게 되었는데
천마총 주인의 유해는 지금도 복원한 천마총 목관 뒤에 안치되고 있었으며
근처 신라문화원에는 여러마리의 백마의 조각물을 보았습니다.
그곳을 나와서 월성에 잠시 올라갔다가 월성은 자연토성이 아니라 신라인들이 쌓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왕궁 옆에 지은 왕궁의 별장이며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였던 동궁과 월지를 둘러 보는데 그곳에서
낙뢰를 맞은 나무를 보았습니다.
사실 대릉원에서도 낙뢰를 맞은 나무를 보았었는데 둘다 낙뢰를 맞은 일시가 2015년 4월 14일
화요일 오후 네시였습니다.
사실 나는 낙뢰를 맞은 나무는 처음 보았는데 이번에 낙뢰를 맞은 나무를 보니까 낙뢰가 지나간 자리가
선명하게 움푹 파여 있어서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보면 김유신을 낳은 아버지 서현과 어머니 만명부인의 일화가 나오는데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가야국 왕의 후손이고 어머니는 신라 왕족출신인 만명부인으로
서로 마음에 들어 눈짓을 하여 중매를 기다리지 않고 야합하였고 서현이 만노군 태수가 되어
그녀와 같이 떠나려 하니 숙흘종이 딸이 서현과 야합한 것을 알고는 미워해 다른 집에 가두고
지키게 하였는데 갑자기 문에 낙뢰가 떨어져 지키는 자가 놀라 어수선한 틈을 이용하여 만명은
들창문으로 나와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사랑의 도피를 떠났고 그곳에서 김유신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부모인 서현과 만명이 결합하는 과정에서도 하늘에서 낙뢰가 있어 결합을 이룰 수
있었다며 이는 그의 혈통이 하늘과 연계되어 있음과 또 그의 출생이 하늘의 뜻에 의해 예정되 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삼국통일을 달성하여 한 민족을 하나가 되게 하였던 김유신은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하나로
만드시기 위해서 사용하신 사람은 아니였을까 생각해봅니다.
점심을 관광지 인근에서 먹게 되었는데 주인이 불심이 강한지 절 그림과 무당집에서 볼 수 있는 밝고
화려한 꽃을 가게에 장식하고 있어서 밥을 기다리면서 겁을 먹었던 것은 난생 처음이였으며
마치 절 또는 무당집에 앉아서 밥을 기다리는 기분이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경주 이곳저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교회를 보았기에 불교가 강한
신라가 있던 경주에도 복음의 씨앗이 심겨지고 많은 열매를 맺는 것 같아서 감사하였습니다.
시간은 늦었지만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부친과 함께 황성동에서 영업을 하는데 쉽지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현대 아파트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자동차를 주차하였던 곳에 예수님이 떠오르는 아름다운 장미가
피여있어서 기분이 무척좋았으며 자동차 영업을 하면서 자동차 유리로 무지개가 보여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우신다는 감동을 크게 받았는데 그곳에서 영업이 성사가 되었고 시간은 늦었지만 오늘 벌었으면
하였던 금액을 정확하게 벌게 되어서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것 같았습니다.
또한 다른 곳에서 영업하시는 부친에게 영업이 성사되었다며 아파트에서 보이는 열매 어린이집을
네비게이션으로 검색하여 오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실제로 그 열매 어린집에서 일하시는 분의
자동차 영업이 성사가 되어서 어린이집 이름처럼 열매를 맺는 한해와 삶이 되기를 소망하고 기대하였습니다.
부친은 경산 우리집으로 먼저 가셨고 나는 차량으로 복음을 전하며 시내를 다니는데 오늘 작업하였던
아주머니 남편분께서 자신의 자동 예약 작업을 의뢰해 주셨는데 경주에서 이틀 일을 하고 예약작업한
금액까지 합하면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해방된 숫자 70이 나와서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기원전 586년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패하여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 만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에 북한이 정권을 세운지
70년이 되는 2017년에 실제로 해방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다시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날 작업하였던 아주머니에게서 연락이 와서 다시 그곳으로 가게 되었는데
카톡으로 저의 전도지를 보았다며 처음과 다르게 상냥하게 대해주셨는데 제일교회를
다니신다고 하셨고 권사님 같았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이 사시는 아파트에는 부녀회가 세운 해태상이 있고 그 앞에서 작업을 하면서
마치 저의 사역은 마귀와 일전을 치루는 영적인 싸움 같았습니다.
오늘은 중앙시장에서 열리는 경주 5일장이라서 아침에도 장날에서 복음을 전하고 저녁에도
파장하는 장날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모든 것에 시작과 끝이 되시는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예수님이 상기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