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밍은 의심을 제거한다
나는 BBK 진위를 논쟁할 위치에 있지 않다. 며칠 출근한 것 빼고는 공식적으로 돈을 받은 것도 없고 어떠한 활동도 한 것이 없다. 내가 하는 이야기는 개인이 겪은 극히 주관적인 내용이다.
1999년 지인으로부터 BBK라는 회사가 있으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인터넷 증권사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에 ‘인’자만 들어가도 난리가 나던 시절이었다. 거기다 증권사라니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IMF 이후로 세상은 금융이 지배한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인지 인터넷과 금융 회사라는 단어는 매력적이었다.
최면 기법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라포르(rapport)’이다. 라포르는 불어로 ‘관계’라는 뜻인데 ‘마음의 다리’라는 의미이다. 잠재의식 수준의 ‘신뢰 관계’를 의미한다. 거부하는 마음은 보통 무의식에 있다. 무의식은 이미 프로그래밍 된 단어에 긍정적으로 반응한다. ‘금융 한국을 육성해야 한다. 인터넷을 육성해야 한다’라는 구호는 대한민국에 넘쳐 있었다. IMF의 원인이 우리나라가 금융을 너무 몰라서 당한 거라는 분석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인터넷 금융이라니. 회사가 어디 있느냐는 나의 물음에 지인은 말했다.
“삼성 본관, 그러니까 본사 알지? 거기에 있어…….”
삼성 본관이라는 단어는 삼성의 높은 사람들과 연관되었다는 뜻인데 부가 설명 없이도 신뢰도를 높이는 단어이다.
“삼성생명빌딩 17층이야! 롱아일랜드 은행인가 뭔가 하는 은행 출신으로 코넬 대를 나온 바비 킴과 로버트 킴이 세운 곳이야.”
미국 은행 출신에 명문 코넬 대를 나왔다. 엄청난 거물이구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거물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도 거물이라는 연상만으로 거물이 만들어진 것이다. 지인이 물었다.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어느 정도 규모로 해야 할까?”
이미 가슴이 부풀어 오른 나는 대답했다.
“큰 규모로 해야죠! 당연히.”
라포르가 형성된 것이다. 마음의 다리가 생기자 BBK는 가 보지도 않고 아는 곳이 되어 버렸다.
BBK! 이 회사의 탄생은 정말 복잡했다. 설명을 들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매혹적인 추상’이라는 말이 있다. 애매함이 오히려 인간을 중독시키는 것이라는 뜻이다. 삼성 본관 17층에 가니 삼성중공업이 있고 옆에 BBK가 있었다. 삼성이 임대업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 회사와 같이 있는 것을 보면 대단한 회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성생명과 다스, 심텍 같은 회사들이 한국 BBK에 투자해 달라며 돈을 맡긴다고 이사는 말했다. 멋지다. 회사 대표 김경준은 코가 크고 정력적으로 생긴 사람이었다. 열정이 넘치는 사람으로, 한국말도 잘하는 편이었다. 세계적인 인터넷 증권사를 세울 것이니 많이 도와 달라고 했다. 나는 흥분을 자제하며 속으로 외쳤다.
‘당연하지요!’
이명박 씨가 회장으로 온단다. 《신화는 없다》의 주인공 이명박 씨가 회장으로 온다니. 이명박 씨를 안 것은 드라마를 통해서였다. 유인촌 씨가 열연한 드라마에서 이명박이라는 인물은 강인하고 정직하게 열심히 일하는 청년 이미지였다. 《신화는 없다》라는 책은 두 번이나 읽었다. 열심히 일하는 이명박 씨의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내가 평소에 존경하는 이명박 씨를 모신다니 얼마나 영광인가!
세상의 프로그래밍이 무서운 것은 의심 없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모든 것을 쉽게 믿고 싶어 한다. 부정은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 중에는 신을 부정하는 것보다 긍정하는 것이 편해서 신을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정치인들이 사기를 치고도 잘 사는 이유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믿고 싶어 하는 심리를 이용한다. 다 같이 믿으면 없는 것도 믿을 만하다. 불신의 공허는 견디기 힘들다. 모두가 좋다고 하는 사람을 나 혼자 의심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나는 어릴 때 산에 올라가는 것을 좋아했다. 특별한 뜻은 없었다. 아무도 놀아 주지 않아서 산에 갔다. 혼자라는 공허를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가난하고 얼굴도 못생겼고 말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고 운동도 못하고 도대체 잘하는 것이 없었다. 혼자 되어 본 사람은 혼자 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지 안다.
혼자 된 사람들에 관한 영화인 <퍼펙트 월드>에서 주인공 버치 헤인즈는 청소년기에 어머니를 죽인 남자를 살해하고 감옥에 간다. 성년이 되어 헤인즈는 탈옥을 감행한다. 언젠가 아버지가 보내 준 알래스카 그림엽서를 품에 안고 무작정 탈옥한다. 헤인즈가 탈옥하자 텍사스 수사대는 그의 뒤를 추적한다. 도망치던 헤인즈는 홀어머니를 둔 여덟 살 소년 필립 페리의 집에 몸을 숨긴다. 페리의 어머니는 여호와의 증인의 독실한 신자로 아들이 크리스마스 파티나 생일 파티, 핼러윈 카니발 등에 참가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한다. 헤인즈는 소년 페리에게서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본다. 그리고 소년을 통해 폭력으로 점철된 자신의 과거를 치유한다. 결국 주인공은 생애 며칠간 보냈던 완벽한 세상을 추억하며 행복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는다.
감옥에 있었던 주인공 헤인즈가 원한 완벽한 세상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알래스카였다. 그를 헌신짝처럼 버렸지만 아버지가 있는 곳이었고 자신을 태어나게 했던 세상에 유일한 혈육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알래스카는 아버지를 상징한다. 주인공 헤인즈는 탈옥중에 만난 소년을 통해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우고 아버지가 된다. 이제 더 이상 혈육의 아버지를 찾지 않아도 된 것이다. 자신의 과거에 모습을 기억하게 하는 소년과 신뢰와 애정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완벽한 세상은 저 산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영화는 말해준다.
영화의 주인공이 알래스카로 가고 싶어 했던 것처럼 나도 실존하지 않는 마음의 고향을 찾아다녔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나는 나 자신을 불신했다. 자신을 불신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숭배하고 싶어 한다. 미성숙한 소년은 절대적인 남자를 찾고 싶어 하고 의존하고 싶어 한다. 나는 추종하고 싶은 사람을 간절하게 원했다. 남자들의 성장통 처럼 느껴지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따뜻한 아버지를 넘어 숭배하고 싶은 아버지를 원한다. 숭배하고 싶은 아버지의 모습을 프로그래밍하면 의심은 제거된다. 히틀러 김일성 박정희 마초남자들을 숭배하는 마음 뒤에는 따뜻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배신당한 초라한 소년들이 자리 잡고 있다. 영화 주인공 헤인즈는 자신을 무가치하게 버리고 간 폭력배 아버지를 아름다운 풍경의 알래스카로 기억하고 싶어 한다. 가슴아픔 기억을 반복한다는 것은 슬픔을 넘는 고통이다.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려 고통스러운 기억의 의미를 조정하려고 애를 쓴다. 인간의 기억은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파일이 아니다. 기억은 주관적 해석의 묶음이기 때문이다. 기억은 인간의 생각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된다. 대부분 인간의 기억은 타인과의 갈등에서 자신들만이 선한 피해자로 기억하고 싶어 한다. 만약 타인과의 갈등을 자시만의 잘못으로만 기억한다면 정상적인 삶을 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영화 주인공 헤인즈는 무책임한 아버지를 아름다운 그림엽서로 연상시켜서 과거의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기억의 합리화만으로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소년의 정신으로 남은 남자가 어른이 되는 것은 무책임한 독재자 아버지를 만나 그와 비슷한 인생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닌, 자신의 아픈 기억에 있는 연약하고 아픈 소년에게 진심어린 관심을 통해서 과거를 극복하게 된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성공의 연금술사는?운명상담과 자기계발교육프로그램이 있는 2004년에서 2012년까지 8년 역사를 가진 카페입니다.
첫댓글
(선생님 블랙파라오에요 닉네임이 제 이미지랑 조금 안맞는 것 같아서 원래 쓰고 있는 제 닉네임으로 바꾸었어요 ^^)
프로그래밍이 이렇게 우리의식을 모르게 바꾸어 놓는것이 놀라움 따름 입니다. 책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퍼펙트 월드 영화 보아야 겠어요 ^^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려 고통스러운 기억의 의미를 조정하려고 애를 쓴다
->합리화라도 하지않으면 살수가없으니까... 할수없지요..
사람은 아무리 강해도 약해서 때때론 의지할수있고 보살펴주는 사람에게서 휴식을 취해야하는걸요.
내용의 일부이지만 흥미진진하네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