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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원 이야기_ 나폴레옹 그 이후 2021 09 경향잡지 p38-44
새롭게 일어서는 수도원
글·사진 최의영 안드레아 교황청립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CFIC) 동아시아준관구장,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교 수도자 신학대학원(클라렛티아눔)을 졸업했다.
#대혁명의 종언 : 1797년 8월, 프랑스혁명정부로부터 명령이 떨어졌다. “벨기에에 망명 중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체포하라!” 죄목은 ‘프랑스 왕정을 영원히 증오한다.’는 내용의 선서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잇따른 민심의 동요에 따라 내린 고육책이었다. 민심을 잡으려면 뒤에서 그들을 조종한다고 여겨지는 성직자와 수도자를 단속할 필요가 있었다. 체포 대상자는 9,000명이었다. 체포 조가 마을마다 들이닥쳤다. 신자들은 헛간과 다락방 등에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숨겨 주었다. 그러나 결국 300명의 성직자와 수도자가 체포되었다. 이들은 모두 작은 배에 실려 외딴 섬으로 추방당했다. 배의 환경은 열악했다. 절반가량이 배 안에서 사망했다. 성직자 수도자에 대한 프랑스혁명정부의 탄압이 거세질수록 민심의 지지 기반은 점차 흔들렸다. 사회는 혼란에 빠졌고, 정부는 통제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외국의 잦은 침략으로 늘 불안감에 시달렸는데 혁명정부에는 이를 막아 낼 능력이 없다고 여겨졌다. 민중은 이제 안정을 바랐다. 이때 구세주처럼 나타난(1799년 11월 9일) 인물이 바로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로 유명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년)이다. 그는 30대 초반에 프랑스 황제로 등극해 유럽의 절반을 제패하고, 교육, 종교, 문화, 법률 등 오늘날 프랑스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그에 대해 말할 거리야 많지만, 이 글에서는 그와 가톨릭교회 및 수도원과 연관된 이야기만 하고자 한다.
#전략적 교회 이용 수도회의 부흥 : 나폴레옹은 먼저 사회를 안정시켜야 했다. 그는 교회를 심하게 박해하면 가톨릭 신앙인들이 등을 돌린다는 것을 알았다. 가톨릭 교회에 열심한 프랑스 국민과 화해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원만한 국제 외교 관계를 위해서는 로마 교황청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가톨릭 교회가 자유롭게 전례를 거행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리고 혁명 기간에 빼앗긴 교회건물을 모두 돌려주었다. 수도원에 대해서도 제한적으로나마 규제를 풀어 의료와 교육에 종사하는 여자 수도원은 나폴레옹 치하에 더욱 성장했다. 1814년 집계를 보자면 1,776개 공동체에서 12,415명의 수녀가 축성생활을 했다. 파리 외방 전교회 등 해외 진출 수도회도 외국의 정보를 제공 받을 수 있다는 유익성 때문에 우대하였다.
그렇다고 나폴레옹이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에 대해 전적으로 호감이나 좋은 의도를 가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는 교회를 자신의 통치 수단으로 삼았다. 그에게 교회는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은 가톨릭 교리 교육 교재를 통일시켰는데, 거기에는 황제에게 사랑과 존경, 충성과 순명을 바치고 제국의 수호를 위해서 노력하며 황제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라는 내용이 담겼다. 주교들은 황제를 찬양하고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를 열어야 했다. 나아가 나폴레옹은 교황청을 프랑스로 옮기기를 원했다. 이에 비오 7세 교황이 그를 파문시키자 교황과 추기경들을 강제로 프랑스로 이주시켜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두 번째 결혼을 반대하는 추기경들은 직위 해제했다. 그럼에도 이 시기는 숨어 지내거나 외국으로 추방되었던 수도자들, 혁명정부에 어쩔 수 없이 가담했던 수도원이 다시 한자리에 모여 화해할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그동안의 박해로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결혼하여 성직자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탓에 교회 재건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교회와 나폴레옹이 결혼한 사제들의 장애까지도 풀어 주는 관용을 베풀었으나 본당을 사목할 성직자는 여전히 부족했다.
교회는 나폴레옹이 실각한 뒤에야 완전히 자유를 획득했다. 1814년 5월 24일 나폴레옹은 유럽 연합군에게 패해 폐위되었고 교회는 비로소 국가의 억압에서 풀려났다.
되찾은 자유 : 혁명정부의 탄압은 끝났고, 나폴레옹이 물러나면서 교회는 완전한 자유를 되찾았다. 그런데 이제는 전혀 다른 문제와 싸워야 했다. 산업혁명에 따른 사회문제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어려운 산을 겨우 넘은 교회는 다시, 더 큰 산을 넘는 도전에 직면했다. 산업혁명은 전통적인 농촌의 생활 형태를 변화시켜 공장을 매개로 한 새로운 도시 생활 형태를 조성했다. 열악한 임금과 실업문제가 뒤따랐다. 일할 사람은 많고 일자리는 적으니 자연히 공장주들은 적은 임금으로도 얼마든지 사람을 구할 수 있었다. 성인 남자의 벌이가 고작 자기 입만 해결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실직했거나 일을 하지 않으면 다른 가족은 굶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사회주의 운동이 나타났다. 종교를 적대시한 사회주의와 교회의 관계는 복잡하지만, 사회주의가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황에 주목한 것은 사실이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공동체 정신을 강조하고 희생과 봉사 그리고 형제애를 가르치며, 가진 것을 나누기를 촉구했다. 수도회 또한 이를 의무화하고 실천해 왔다. 그러나 자선은 드러난 상황에 대처하는 실천이었지, 노동자들의 법적 권리와 같은 근본 문제에 대한 해답은 아니었다. 사회주의는 이 문제를 파고들었다. 이러한 현실이 역설적으로 교회를 그 혼란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교황청이었다. 레오 13세 교황이 19세기 혼란한 상황에서 노동문제 해결을 위한 지침을 만든 것이다. 1891년 5월 15일에 반포된 「새로운 사태」가 그것이다. 회칙의 내용을 간단히 말하면 사유재산의 사회성을 지적하고, 무정부주의자나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배척하는 한편, 발전을 위한 국가의 제한적인 개입을 인정하고, 노동자는 자본가를 위해 노동할 의무가 있는 동시에 자본가는 노동자가 인간답게 생활할 수 있는 임금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급투쟁은 거부했지만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 보장을 위해 조합을 만들 권리가 있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노동자들의 법적 투쟁에 이론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근대사회에 대한 수도회의 응답 : 교회의 이러한 새로운 가르침을 바탕으로 새로운 수도회가 잇달아 생겨나는데, 이들 수도회는 주로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 대표적 수도회를 꼽으라면 루이지 마리아 몬띠의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와 요한 보스코의 살레시오회, 안토니오 슈브리에의 프라도 사제회이다. 이 밖에도 교육을 통해 청소년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가 리옹 지방에서 창설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마리아 수도회는 거의 같은 목적으로 보르도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여자 수도회로서 1854년 남프랑스에서 창립된 도움이신 마리아수녀회는 산업혁명의 변화 가운데 젊은 노동자를 위한 기숙사, 결핵요양소를 설립하였다. 또 1841년에 창립되어 양로원, 고아원, 미혼모를 위해 활동하는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로마의 청소년을 위해 1879년에 활동을 시작한 성심의 프란치스코 수녀회 등이 있다.
산업혁명이 낳은 사회현상에 도전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한 수도회 창설의 열기는 19세기 중반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앞면계속- 20세기에 들어서는 성베네딕도회 오틸리엔수도원 출신의 독일인 사제들도 한반도에 입국해 활동했다. 그러면서 1922년에는 로머 신부가, 1923년에는 에카르트 신부가 각각 한국어 문법서를 간행했다. 로머 신부의 책은 초판이 소실된 대신 1927년에 제2판이 나왔으나, 이 제2판은 손으로 쓴 글을 등사한 것에 불과했으므로 조선 땅에서 활동하던 동료 사제들 이외에는 접한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에카르트 신부가 1923년에 펴낸 「조선어 교제 문전」은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활판 인쇄본으로 출판한 책이다. 이 책의 원어 제목은 Koreanische Konversations -Grammatik으로서 ‘한국어 대화 문법’으로 직역되지만 부록으로 나온 주해편에 ‘朝鮮語交際文典’이라는 제목이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1928년에 환속하고 독일로 돌아간 에카르트는 이후 뮌헨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새로운 한국어 교재들을 펴내기도 했다. 이처럼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 출신의 사제들이 한국어에 관해 저술한 책들은 유럽에 한국어가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후대 사람들이 한국어 문법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데도 밑거름이 되었다.
맺음말 : 한글은 15세기에 창제된 이래로 조선 시대부터 한국어를 표기하는데 널리 사용되어 왔다. 그럼에도 문학 작품을 제외하면 한글로 기록된 문헌이 많이 나오지 못했던 것은 조선 시대 사람들이 적어도 사상과 학문을 논할 때는 늘 한문으로만 글을 써 왔기 때문이었다. 한글이 창제된 지 300년하고도 수십 년이 지나서야 이러한 관행이 처음으로 깨지게 되었는데, 그 계기를 마련한 이들이 바로 이 땅의 천주교 신앙 선조들이었다.
천주교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한글로 기록된 한국어 문헌을 통해 전파된 종교’다. 이것은 종교사적 측면뿐만 아니라 언어사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천주교 신자들이 한국어로 교리서를 쓰고 천주가사를 지음으로써 비로소 고차원적인 사상과 사유를 한문 없이 한국어로 논하고 공유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 동아일보|사회 입력 2016-10-19 03:00
[오은영의 부모마음 아이마음]잘 놀아주는 아빠, 혼자 노는 아빠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은영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모처럼의 휴일. 아빠는 다섯 살 난 아들과 놀이터에서 고무공을 가지고 놀고 있다. 몇 번 아이와 공을 주고받는 것 같더니 아빠는 장난스럽게 아이 이마에 공을 맞힌다. “아야!” 아이가 인상을 찌푸리자 “미안, 미안, 아빠 실수! 다시 하자”라고 말하고는 다시 아이 이마를 맞힌다. 그러고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깔깔거린다. 약이 잔뜩 오른 아이는 도망가는 아빠를 쫓으며 공을 마구 던진다. 아빠는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아이가 던진 공을 주워 또 아이를 맞힌다. 결국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공을 가지고 놀아 주라고 하면 꼭 아이를 맞히는 아빠들, 꼭 있다. 장난감 칼을 가지고 놀 때는 꼭 아이를 찌르는 시늉을 한다. 공룡이나 악어 인형을 가지고 놀 때는 인형 입을 쫙 벌리고 으르렁거리며 아이를 물 것처럼 덤벼든다. 또 아이가 놀다가 흥분하여 혹여 때리기라도 하면 지나치게 정색하며 아이를 혼내거나 화를 내는 아빠들도 있다. 블록같이 뭔가 만들면서 놀아 주어야 할 때는 본인이 너무 심취한 나머지 1시간 넘게 혼자 만들기만 한다. 1시간을 조립했으면 아이와 1시간 놀아 준 거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행동은 아이와 놀아 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이와의 놀이’를 너무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놀이는 아이가 성장 과정에서 상호작용을 배울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시간이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서 정서적뿐 아니라 인지적 상호작용을 하면서 여러 가지 발달을 해 나간다. 특히 부모와의 놀이를 통해 아이는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에서 필요한 것을 배운다. 부모와의 놀이 속에서 서로 규칙도 지키고, 존중도 하고, 배려도 하고, 공감도 하면서 여러 상호작용 기술을 습득해 나간다. 이것은 아이가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을 해 나가는 기본 토대가 된다. 따라서 놀이는 반드시 해 줘야 하는 아이의 발달 과정이다.
아이와의 놀이를 놀이답게 하려면 몇 가지는 기억했으면 한다. 첫째, 놀아 주는 그 시간이 아이도 나도 즐거워야 한다. 꼭 엄청 재미난 놀이를 해야 즐거운 것은 아니다. 내 아이와의 놀이는 대부분 즐거워야 한다. 만약 매번 아이와 노는 것이 귀찮고 재미없고, 놀아 줘도 아이가 자꾸 짜증을 낸다면 나와 아이의 상호작용이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봐야 한다.
둘째, 놀이의 주도권은 반드시 아이에게 있어야 한다. 부모는 약간 뒤따라가야 한다. 아이가 소꿉장난을 하고 싶어 하면 그걸 하면 된다. “아빠도 이거 해볼까? 어떻게 하면 되니? 아빠는 뭐 맡을까?”라고 물어서 아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할 수 있게 한다. 놀이 수준도 아이에게 맞춰져야 한다. 공이나 몸 놀이 등 신체놀이를 하다 보면 아이와 부모의 수준이 많이 다를 때가 있다. 이때는 당연히 아이 수준에 맞춰야 한다. 아이와 놀 때는 늘 아이에게 주파수를 맞추고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셋째, 놀이 중에는 반드시 아이의 생각이나 감정, 행동을 반영해 주어야 한다. 아이가 뭘 고르면 “아, 네가 이것에 관심이 있구나”라고 해주고 아이가 뭔가를 던지면 “와, 잘 던지네. 조금만 더 세게 해볼까? 잘하는구나” 하면서 아이의 생각이나 행동을 읽어준다. 그래야 놀이를 하면서 어떤 성취감도 느끼고 능력도 발달시켜 나간다. 아이와 놀아 준다고 하면서 부모 본인만 재미있어 어쩔 줄 모르거나 혼자만 몰입해서 아이는 뒷전인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아이가 놀다가 때렸을 때는 지나치게 정색을 하는 것도, 그냥 넘어가는 것도, “하지∼ 마”라고 하면서 피해 다니는 것도 좋지 않다. 그럴 때는 규칙을 가르쳐 줘야 한다. “아빠는 너랑 노는 것이 좋아. 오늘 너무 즐거워. 그런데 놀 때는 규칙이 있어. 사람을 때리면 안 되는 거야. 너도 때리면 안 되고, 나도 때리면 안 돼. 잘 지키자” 하고 조금 기다렸다가 다시 놀아 줘야 한다.
넷째, 놀이 속에는 아이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한다. 존중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과 감정, 행동에 대한 것이 나와 달라도, 아니 이해가 되지 않아도 인정해 주고 잘 받아 주고 이해해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아빠는 재밌지만 아이가 싫어하면 “아, 너는 이게 싫구나. 안 할게”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를 공으로 맞히거나 장난감 칼로 찌르는 행동은 아이가 싫어하면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 마”라고 말하는 아이는 그 행동을 놀림이나 공격으로 느끼는 거다. 하지 말라고 했을 때 부모가 계속하면 아이는 무력해지고 자존심까지 상할 수 있으므로 바로 멈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