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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에 관한 설교
바실리우스
질투심은 마귀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질투라는 악을 멀리합시다. 우리의 적인 마귀의 일에 동참하여 그와 함께 심판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교만한 사람이 마귀에게 선고된 심판을 받게 된다면(1티모 3,6 참조), 질투하는 사람이 어떻게 마귀를 위해 준비된 형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1]
☕ 질투 뒤에는 마귀가 숨어있다.
질투보다 더 해로운 악덕은 인간의 영혼에 심겨 있지 않습니다. 질투는 무엇보다도 먼저 질투의 죄를 지은 사람에게 개인적인 피해를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녹이 쇠를 부식시키는 것처럼, 질투는 영혼을 부식시킵니다. 더군다나, 독사가 자신을 잉태한 자궁을 갉아 먹고 태어나는 것처럼, 결투는 자신을 낳은 영혼을 집어삼킵니다. [1]
☕ 질투는 영혼을 죽이는 치명적인 병이다.
질투는 이웃이 잘될 때 생기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질투하는 사람에게는 비탄과 절망이 떠날 새가 없습니다. 이웃의 땅이 비옥하면, 그의 집에 이 세상의 모든 재물이 풍부하면, 그 사람이 마음의 기쁨을 계속 누리면, 이 모든 것이 질투하는 사람의 병을 악화시키고 고통을 증가시킵니다. 그래서 그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벌거숭이와 똑같습니다. [1]
☕ 질투에 사로잡히면 마음 편할 날이 하루도 없다.
나는 원망스럽고 비통합니다. 내 친구의 재산이 나를 화나게 합니다. 나는 내 형제가 기뻐해서 우울해요. 나는 다른 사람이 복을 누리는 것을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 이웃의 행복이 나에게는 불행입니다. [1]
☕ 이웃의 행복은 나의 불행이고, 이웃은 불행은 나의 기쁨인 것이 질투다.
무엇이 이 병보다 더 치명적일 수 있을까요? 이 병은 우리의 삶을 망치고, 본성을 어그러뜨리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좋은 것들을 증오하게 하고, 우리를 하느님과 적대 관계에 놓이게 합니다. [3]
☕ 질투는 하느님과 우리를 원수지게 민든다.
무엇이 모든 악의 근원인 저 마귀를 인간과 격렬하게 싸우게 만들었을까요? 질투가 아닙니까? 질투로 인해 마귀는 하느님과 내놓고 싸우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관대함에 앙심을 품고, 하느님께는 복수할 수 없으니 인간에게 복수했습니다. [3]
☕ 사탄은 인간에 대한 질투심으로 인하여 하느님께 반기를 들었다.
카인은 마귀와 똑같이 행동함으로써(1요한 3,12 참조) 자신이 마귀의 첫 제자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질투와 살인을 모두 마귀한테서 배웠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 두 가지 죄악이 같이 이루어지는 데 대해 말합니다. “질투와 살인으로 그득합니다”(로마 1,29). 그는 어떤 짓을 했나요? 카인은 하느님께서 아벨에게 영예를 주시자 질투심에 불탔습니다. 그 명예를 주신 분에게 타격을 입히고자 그것을 받은 이를 죽였습니다. 하느님과 싸울 수 없으니 차선책으로 친동생을 죽인 것입니다(창세 4,11-16 참조). [3]
☕ 카인은 동생에 대한 질투로 인하여 동생을 죽였다.
왜 그대는 아무런 끔찍한 일도 겪지 않았는데 괴로워합니까? 왜 그대는 그대의 재산에 손해를 입히지도 않은 사람이 번영을 누린다고 미워하는 것입니까? [3]
☕ 자신이 아니라 타인 때문에 괴로움에 빠지는 것이 질투라는 병이다.
승리의 축하 행사에서 무용수들은 다윗이 세운 승리의 공이 열 배나 더 크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수만을 치시고 사울은 수천을 치셨다네”(1사무 18,7). 진실인 이 말 한마디 때문에, 사울은 처음에는 그를 직접 죽이려 했고 나중에는 계략을 써서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1사무 18,20-19,7 참조),
죽이지 못하자 다윗이 도망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1사무 19,11-18 참조). [3]
질투는 가장 길들이기 어려운 형태의 증오입니다. 친절한 행동은 다른 이유로 우리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은 부드럽게 만들지만, 질투심 많고 악의적 인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은 그의 미움을 더욱 키울 뿐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가 친절을 베풀면 베풀수록, 더 분개하고 불쾌하고 역겨워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베푼 친절에 감사하기보다 친절을 베푸는 사람의 능력에 더 화가 나 있기 때문입니다. [3]
☕ 단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그가 가지고 있기에 질투가 나는 것이다.
개는 먹이를 주면 순해집니다. 사자는 상처를 싸매 주면 길들여집니다. 하지만 질투하는 사람들은 친절하게 대우받으면 더욱 야만성을 띱니다. [3]
무엇이 고귀한 태생인 요셉을 종으로 만들었습니까? 형들의 질투가 아니었습니까?(참조: 창세 37,28;사도 7,9). 그들은 요셉의 꿈이 실현될까 봐 두려워 요셉을 종으로 팔아넘겼습니다. 그가 종이 되면, 아무도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창세 37,5-28 참조). [4]
☕ 동생인 요셉을 팔아넘긴 것도 형들의 질투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의 광기가 구원자에 대하여 불러일으킨, 그 끔찍한 질투심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왜 그분을 질투했습니까? 그분의 기적 때문입니다. 어떤 기적들이었습니까?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구하셨습니다. 굶주린 이들을 먹이자 그들을 먹이신 분에게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자 그들에게 생명을 주신 분은 질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마귀들은 추방되었습니다. 마귀들을 쫓아내자 그들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신 분은 음모의 희생자가 되셨습니다. 나병 환자는 깨끗해지고, 다리저는 이가 걷고, 귀먹은 이들은 듣고, 눈먼 이가 보게 되었는데(루카 7,22 참조), 이 모든 선한 일을 하신 분은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후하게 생명을 주시는 분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해방시키신 분을 채찍질하고 세상의 재판관을 단죄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사악한 질투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4]
☕ 유다인들은 사탄의 술수에 넘어가 예수님을 죽였다.
생명의 파괴자 악마는 질투라는 이 무기 하나로 세상의 시작 때부터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때려눕혀 오고 있으며, 세상이 끝날 때까지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의 파멸을 기뻐하는 그자는 질투에 걸려 넘어졌고, 바로 그 악덕을 통해 우리의 파멸을 불러옵니다. [4]
☕ 질투는 사탄이 인간을 사로잡는 최고의 무기다.
인화성 물질은 가능한 한 불에서 멀리 두어야 하는 것처럼, 질투하는 사람과의 교류는 가능한 한 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 자신은 그들의 사정권 밖에 있게 됩니다. 질투는 조금만 가까이 해도 거기에 얽혀들 수 있습니다. 솔로몬에 따르면, “사람은 이웃의 시기에 노출되어 있습니다”(코헬 4,4 참조). [4]
☕ 질투가 강한 사람은 시한폭탄과 같다. 언제 터질지 모른다.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상수다.
스키타이인은 이집트인을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자기 동족을 질투합니다. 그리고 자기 나라사람들 가운데에서 모르는 사람들을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을 질투합니다. 그리고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웃이나 직장 동료들, 그리고 자신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질투합니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도 자신과 동갑내기이거나 친척, 형제들이 질투의 대상입니다. 질투는 친구 사이에서 가장걸리기 쉬운 질병입니다. [4]
☕ 질투는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대상이다.
마귀들은 질투하는 사람들의 눈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사용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무서운 마귀의 도구가 되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이들의 원수가 될 뿐만 아니라, 선하시며 질투를 모르시는 하느님의 원수가 되는데 말입니다. [4]
☕ 마귀는 질투를 도구로 인간을 무너트린다. 질투는 하느님의 원수가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 몹시도 역겨운 악에서 달아납시다. 그것은 뱀이 가르쳐 준 것이고, 마귀가 꾸며 낸 것, 불화의 씨앗, 형벌의 보증, 거룩함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장벽, 지옥으로 가는 길, 천국을 잃어버리는 원인입니다. [5]
☕ 질투는 자기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다. 질투는 천국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그들 눈에는, 어떤 덕행도 칭찬할 만하지 못하고, 아무리 뛰어나고 우아한 달변도 본받을 만한 가치가 없으며 그 무엇도 다 그렇습니다, 독수리가 초원과 쾌적하고 향기로운 장소를 모두 내버려 두고 악취가 풍기는 곳에 이끌리듯이, 파리가 신선한 고기를 두고 상처가 썩는 곳에 모여들듯이, 질투하는 사람들은 삶의 밝음과 선행의 고귀함에서 눈을 돌려 썩은 것들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5]
☕ 질투하는 사람은 빛에서 어둠을 찾는 사람들이다.
질투하는 사람들은 칭찬받을 만한 것을 경멸할 만한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전문가이며, 덕을 그것과 비교되는 악덕으로 중상하는 데 능숙합니다. 그들은 용감한 사람을 무모한 사람이라고, 절제력 있는 사람을 냉정한 사람이라고, 의로운 사람을 가혹한 사람이라고, 영리한 사람을 교활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세련된 취향을 가진 사람을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관대하게 베푸는 사람을 낭비가 심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검소한 사람은 인색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항상 모든 형태의 미덕을 정반대되는 악덕의 이름으로 부릅니다, [5]
☕ 질투하는 사람은 매사를 부정적으로 왜곡하여 바라본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병에 걸리는 것을 피할수 있을까요, 또 이 병에 걸렸다면,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첫째, 인간의 번영과 명성, 육체적 건강등,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위대한 것도 탐낼 만한 것도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5]
☕ 우리가 추구할 대상은 죽으면 사라질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다.
우리는 영원하고 참된 재물을 공유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단지 그가 부자라는 이유로 샘낼 일이 아닙니다. 군주도 그가 높은 지위에 있다는 이유로 질투할 일이 아닙니다. 강한 사람도 그가 육체적인 활력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질투하지 마십시오. 학자도 그가 뛰어난 웅변술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질투하지 마십시오. 이것들은 그것들을 잘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덕을 실천하기 위한 도구들입니다. [5]
☕ 질투를 뛰어넘어 진정 축하해 줄 수 있을 때 영성은 그만큼 성정한다.
어떤 사람은 정신적인 예리함이 뛰어나고, 하느님에 대한 설명과 그분의 신성한 말씀을 해석하는 능력이 탁월해서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질투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성경의 거룩한 말쯤을 전하는 사람이 침묵하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그는 성령의 은총으로 청중들로부터 칭찬과 호의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 혜택은 모두 여러분의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여러분의 형제를 통해서 가르침의 선물이 여러분에게 주어집니다. [5]
☕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의 재능은 시기해서는 안된다. 그 재능은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께서 주시기 때문이다.
만일 부(富)를 불의를 저지르는 도구로 쓴다면, 그 부자는 불쌍합니다. 하지만 만일 부를 덕을 위해 쓴다면, 질투는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이 부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 부를 나쁘게 사용한다면 복이 아니라 재앙이지만, 좋은 일에 쓴다면 모든 이에게 도움이 된다.
위선자들은 겉으로는 자애로운 표정이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증오를 감추고 있습니다. 마치 물로 덮여 있어, 부주의한 사람들에게 예기치 못한 재앙을 가져다주는 바닷속 바위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죽음이 그 근원에서 마치 샘처럼 우리에게로 흘러들어와 축복을 잃게 하고, 하느님한테서 멀어지게 하며 율법을 위반하게 하고, 동시에 세속적 번영을 망치니,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을 따릅시다. “헛된 영광을 바라지 말며, 서로 싸우지 말고, 서로 질투하지 말고”(갈라 5,26 참조), 오히려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친절하고, 자비롭고, 서로 용서합시다”(에페 4,32 참조). [6]
☕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하여 슬퍼하기보다는 가진 것에 감사하자.
첫댓글 "녹이 쇠를 부식시키는 것처럼, 질투는 영혼을 부식시킵니다."
잘 읽었습니다.
질투는 영혼을 죽이는 치명적인 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