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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3. 묵상글 들 (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 자기가 불행한 줄 모르는 불행.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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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3.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자기가 불행한 줄 모르는 불행 / 2021.10.13 05:42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저절로 생각게 되는 것은
‘가만이나 있었으면’과 ‘누가 더 창피했을까?’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너희 바리사이들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 이러저러한 그들의 잘못을 말씀하시자
듣고 있던 율법 교사가 나서서 그것은 자기들에게도 모욕이라고 항의하니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를 나무라실 때 나의 잘못은 없는지 성찰하고 반성하고 있었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자기들은 마치 잘못이 없는 양 톡 나서자
주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여지없이 면박을 주시니 얼마나 더 멋쩍고
창피하겠습니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갈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불행하다는 선언을 받고,
그들이 불행한 네 가지 이유 그러니까
그들을 불행케 만드는 네 가지 잘못을 지적받습니다.
첫째 잘못은 의로움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아랑곳하지 않는 잘못입니다.
십일조는 잘 바치지만 정작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엔 관심이 없습니다.
결국 십일조는 하느님께 바친 것이 아니라 신자 의무를 다한 것일 뿐입니다.
의무를 한 것으로 의롭다고 생각한 것인데
의무로 의롭지 않고 의무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더더욱 아니지요.
그런데도 의롭다 착각하고 하느님 사랑도 없으니 그것이 불행한 것입니다.
둘째는 공동체 안에서 윗자리를 좋아하고 인사받기를 좋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잘못과 이 불행은 사람들 가운데서 윗자리를 좋아하다가
사람들에 의해 아랫자리로 끌려내려가게 되는 불행만을 얘기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 역시 하느님 앞에 서지 않는 불행을 얘기하는 것일 겁니다.
셋째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은 불행입니다.
그런데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무덤이란 죽은 자가 묻혀있는 곳이니 겉으로 살아 있고 잘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죽어 있고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즉시 떠오르는 것이 대궐 같은 부잣집인데 그 안에 사는 사람끼리는
아무런 사랑이 없고 그래서 그곳에서의 삶은 아무 온기가 없는 삶이며,
매우 교양이 있는 사람처럼 굴지만 그것은 위선일 뿐 사랑이 없습니다.
넷째는 남에게 힘겨운 짐을 얹어 놓고
자기는 그 짐에 손가락 하나도 대려 않는 것인데
다른 사람들을 불행케 만드는 사람의 불행입니다.
주님께서는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사람은 다 당신께 오라고 하시는데
율법 학자들은 그 지키기 어려운 율법 규정들을 사람들이 지키게 하고는
그들의 고통과 불행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남을 불행케 하는 것이
자기도 불행케 한다는 것을 모르는 자의 행위입니다.
사실 최고의 불행은 자기가 불행한 것을 모르는 불행이고,
자기의 무엇이 자기를 불행케 하는지 모르는 불행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너희는 불행하다고 하신 것은 불행해지라는 저주가 아니라
불행한 것을 알라는 말씀이고
불행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에서 돌아서라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불행을 알려주시고 무엇이 불행케 하는지 알려주시는 것을
사랑이 아니라 모욕을 주시는 것이라고 율법 학자들은 받아들이니
이것이 참으로 딱하고 이것이 참으로 불행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도 이랬다면 이제라도 돌아서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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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3.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루카 11,43)
예수님께서는 어제 <복음>인 앞 장면에서 정결법의 정신이 사랑에 있음을 밝혀주셨습니다. 이어서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에게 여섯 가지 ‘불행선언’을 통하여 신랄하게 질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중에서 바리사이들에 대한 세 가지와 율법 교사들에 대한 한 가지를 들려줍니다.
<첫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십일조는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2)
이는 십일조의 율법준수를 부정하거나 율법준수를 질책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결여된 율법준수를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레위기(27,30-33)와 신명기(14,22-29)에 따르면, 주요 곡식과 가축의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이를 더 세분화하여 뗄 나무에까지 십일조를 적용할 만큼 율법준수에는 규정 이상으로 열성적이고 철저하고 엄격했지만, 율법의 정신인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을 행하는 일을 실천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열성은 좋지만, 그릇된 열성은 오히려 위험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본질 위에 서 있는 열성이어야 합니다. 곧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보다, 그 정신인 의로움과 사랑을 행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루카 11,43)
사람들이 그들에게 윗자리를 내어주고 먼저 인사하는 것은 존경의 표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맡은 바 종교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특권적 우월의식과 교만한 과시욕에 몰두했었나 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의 특권의식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사실, 존경받기보다 존경하고, 인사받기보다 인사하고, 섬기받기보다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곧 신앙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윗자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 합당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드러나지 않은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으면서 무덤인 줄을 모른다.”(루카 11,44)
민수기(19,16)에 따르면, 무덤에 닿으면 칠 일간 부정하기 때문에, 회칠하여 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불결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표시하지 않은 무덤처럼, 자신의 부패를 은폐시키고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사실, 악보다 더 추악한 것은 마치 선인 양 자신의 얼굴을 꾸미고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된 선일 것입니다.
<네 번째> 불행 선언은 율법 교사들에 대한 것입니다.
“너희 율법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가 11,46)
율법 교사들의 언행의 불일치에 대한 질타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자신들은 율법을 실행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는 짐을 지웠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보다도 조상들의 전통과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존중했고, 그것을 지나치게 세분화하여 모세의 율법 외에도 613개의 규범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결국, 백성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짐을 지워놓으면서도 자신들은 스스로 지키지 안했습니다(마태 23,3).
사실,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들은 그 당시의 종교적 길잡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은 자신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받은 많은 사람들까지도 파멸로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 참된 신앙인이요, 신앙의 참된 길잡이로 살아가라는 강력한 경각심을 일깨워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2)
주님!
제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당신을 믿으면서도 의로움과 사랑을 행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불의와 부패 속에서는 행복이 있을 수 없고,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는 행복이 있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뜻을 행함으로 진정한 행복을 얻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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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3.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꾸중을 감당하라
다행이란 목마른 이가 사막에서 우물을 발견한 것이고, 불행이란 너무 좋아 덤벙대다 그 우물에 빠져 죽는 것이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꾸중을 통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다행입니다. 아니 그 꾸중은 행복입니다. 그러나 듣지 않는 이에게는 불행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3,12). “내 아들아, 너는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히브12,5).
오늘 복음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가11,42),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가11,46)는 주님의 꾸중은 그들의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트집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높은 자리를 찾고 인사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남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을 요구하면서도 자기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더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들은 의인처럼 보인 죄인이었습니다. 오히려 죄인처럼 보인 의인이 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2,6). 그런데 정작 저 자신이 율법학자요, 바리사이인 것을 잊고 삽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 하신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바리사이들도 율법학자도 예수님의 꾸중을 들을 수 있었으니 그의 사랑 안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거부하는 것은 주님도 어찌하지 못하셨습니다. 따라서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면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육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무슨 견책이든지 그 당장에는 즐겁기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책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마침내 평화의 열매를 맺어 올바르게 살아가게 됩니다)(히브12,11). 회개에로 이끌기 위한 예수님의 표현을 잘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꾸짖거든 행복한 줄 아십시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잠언12,15). 꾸중을 듣는다는 것은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꾸중을 두려워 마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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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3.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우리 시대의 바리사이들에게
아,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여, 그대가 얼마를 바쳤든지 간에 그대가 바친 돈보다 더 많은 축복을 받으려던 기대가 채워지지는 못할 것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아,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윗자리와 인사받기를 좋아한 만큼 아랫 사람들을 섬겨야 함을 알지 못합니까?
아, 과거의 예언자들과 의인들을 현양하면서도 현재에 또 다른 순교자를 만드는 사람이여, 그대는 무덤 위를 밟고 다니는 줄을 알아야 했습니다.
아,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놓고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여, 그대는 그 힘겨운 짐을 바로 자신의 등에 올려놓은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아, 하늘 나라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서 문을 잠가버려 다른 사람들까지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은 사람이여, 그대는 하느님께서 그 문을 그대의 뜻대로가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열거나 닫으실 것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아,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음을 알지 못합니까?
아,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는 사람이여, 그대는 남을 심판하는 그 잣대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아, 하느님의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사람이여,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 때문에 심판을 받을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아,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면서도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우는 사람이여, 그대는 위선자라 불릴 것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아,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도 낙타는 그냥 삼키는 사람이여, 그대는 눈먼 인도자라 불릴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아, 모세의 자리에 앉아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사람이여, 하느님께서는 물론이거니와 사람들도 그대의 위선을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뭇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그대는 이를 알아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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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3.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남 탓을 많이 하며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며 그 마을의 현자라는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현자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떤 창고로 데려갔습니다. 그곳은 먼지로 가득했고, 여기저기 거미줄이 처져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사람의 방문이 없었던 곳임을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현자는 그를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거울 위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먼지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자, 현자는 자기 소맷자락으로 거울을 쓱쓱 문질렀습니다. 먼지가 가득 날리면서 현자와 이 사람은 눈이 따갑고 목이 칼칼해지면서 기침을 했습니다. 그 뒤 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님은 지금 먼지가 덮인 이 거울과 같습니다. 불평불만의 먼지가 가득해서 형제님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먼지를 닦아내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분명 쉽지 않고 유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업을 마쳐야 진짜 내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먼저 봐야 합니다. 다른 사람, 세상만을 바라보면 끊임없는 불평불만과 잘못된 판단으로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마치 먼지가 쌓여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교사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불행선언을 하십니다. 십일조는 열심히 지키지만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또 윗자리를 좋아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면서 정작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정작 자신의 옳지 못함을 알고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바라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잘못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 2,6)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을 가지고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하느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스스로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전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아닌, 행복 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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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불행이 찾아올 때 비로소 친구가 친구임을 안다(이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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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것.
로마 성 베드로 성당에 가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피에타상에는 이런 일화가 전해집니다.
미켈란젤로가 대리석 가게 앞을 지나다가 아주 볼품없는 커다란 대리석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대리석의 가격을 물으니, “그냥 가져가세요. 지난 10년간 이것을 팔려고 했지만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쓸모없이 큰 돌이 공간만 차지해서 귀찮았는데 잘 되었네요.”라고 주인이 말합니다.
일 년 뒤, 미켈란젤로는 이 대리석으로 피에타상을 만들어 주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주인은 깜짝 놀라며, “아니, 볼품없는 대리석으로 이런 훌륭한 작품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대리석을 보았을 때, 단지 불필요한 부분만을 쪼아낸다면 아주 멋진 작품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제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이 볼품없는 대리석이라며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은 우리를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만큼 우리 안에 훌륭한 모습이 있습니다. 불필요한 부분만 제거하면, 하느님의 멋진 창조물임을 세상에 알릴 수 있습니다. 제거할 것은 무엇일까요?
욕심, 이기심, 미움, 부정적 마음 등…. 너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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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3.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US OPEN 남자 테니스 결승전을 다녀왔습니다. 숨 막히는 경기였습니다.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그랜드 슬램을 코앞에 둔 세계 랭킹 1위 노박 조코비치는 아쉽게도 다니엘 메디베데프에게 우승의 영광을 내주었습니다. 경기를 마치면서 패자는 승자에게 축하의 인사를 하였습니다. 승자는 패자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하였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 경기장은 지하철로 1정거장이기 때문에 편하게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주일학교 유치부에서 율동으로 부르던 노래가 있습니다. 제목은 ‘텔레비전’입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내 얼굴”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율동을 가르치면 아이들은 신나게 따라했었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매년 송년의 밤이면 1년 동안 있었던 행사 사진을 모아서 보여드렸습니다. 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좋아하였습니다.
경기 중간 쉬는 시간에 대형 전광판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습이 나오면 무척 즐거워하였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기도 하고, 대부분은 환하게 웃었습니다. 전광판은 선수의 아내도 보여주었고, 유명한 스포츠 스타도 보여주었습니다. 배우와 가수의 모습도 보여주었습니다. 모두들 잔치에 참석한 하객처럼 즐거운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있는 자리도 스치듯이 보여주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등불은 켜서 됫박으로 가리는 사람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낮에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밤에 나를 잡으러 왔습니까?”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경기의 결과에 따라서 승자와 패자가 가려지듯이, 우리의 행실에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판단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꾸준히 선행을 쌓고,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판단은 민족과 능력과 업적을 가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공평하시다고 이야기합니다. 전광판에 얼굴이 나오는 것이 두려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수배중인 범죄자라면 진한 안경과 모자를 썼을 것입니다. 떳떳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전광판에 얼굴이 보이는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식과 위선으로 살아가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나무라십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떠넘기는 율법학자들을 나무라십니다. 그런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전광판에 얼굴이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나의 모습이 하느님 나라의 전광판에 나온다면 나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면 좋겠습니다. 경기장에의 전광판에 자신의 모습을 보고 환하게 웃는 관객처럼 좋아하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꾸준히 선행을 쌓고, 나누어야 합니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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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3.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만 찾는, 하느님 중심의 행복한 삶
- 지혜, 겸손, 진실, 섬김 -
어제 불암산을 바라보며 강처럼 흐르듯 수도원 하늘길을 걸으며 옛 자작 좌우명 애송시, 산과 강을 보완하며 읽어 봤습니다.
-“밖으로는
늘 새롭게 한결같이
임 기다리는
거기 그 자리 정주의 산
안으로는
늘 새롭게 끊임없이
임 향해
굽이굽이 맑게 흐르는 강”-
밖으로는 임 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임 향해 흐르는 강, 바로 하느님만을 찾는 베네딕도회 수도승 삶을 표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만을 찾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산山과 강江의 영성을 살아가는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입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감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을 꾸짖으시며 하시는 불행 선언에 맞서 저는 하느님만을 찾으며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에게 행복을 선언하고 싶습니다. 어제 저녁 휴게시간 요셉 수도원 34년 역사를 망라한 원장수사가 만든 수도원 사진첩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요셉 수도원에 비전이 없다.”
말하며 오래 전에 왜관 수도원에 돌아간 수도형제에 관한 이야기도 나눴고 당시 우리의 영원한 비전이자 꿈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이라는 제 지론과 더불어 1992년1월15일 왜관 수도원 종신서원 미사시 제 강론 일부가 선명히 떠올랐습니다. 읽을 때 마다 새로운 감동에 젖으며 하느님만을 찾는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 전의戰意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부단히 하느님만을 찾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수도생활을 판가름하는 시금석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하느님을 찾는 열정으로 표출되기 마련이며, 이때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찾아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모이면 세속이 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훌륭한 스승을 찾아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함께 살다보면 초라하고 실망스럽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참 스승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우리는 좋은 환경을 찾아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도 하느님을 찾지 않으면 답답한 벽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출세하러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닙니다. 작은자 되어 주님과 형제들을 겸손히 섬기러 왔습니다. 중의 벼슬은 닭 벼슬만도 못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실현을 찾아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실현은 다만 하느님을 찾는 삶의 부산물로 따라 오는 은총의 선물일 뿐입니다.
우리는 좋은 일을 하러 수도원에 온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일은 무엇을 ‘하는데(to do)’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데(to be)’있습니다.
우리의 공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허영을 만족시키는 헛된 공부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찾는 겸손해지는 공부여야 합니다.
혹자는 수도원에 비전이, 꿈이 없다고 말합니다. 당연합니다. 비전이 꿈이 있다면 그리스도 예수님뿐이고,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느님만을 찾는 단순한 삶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밖의 모두는 환상이요 우상일 뿐입니다. 결과는 환멸입니다. 그 무엇도 자기 에고를 충족시켜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 삶이 시끄러이 우상을 찾아 나서는 외적 여정이 아니라, 고요히 하느님을 찾는 내적 여정임을 단단히 못박아 두는 일입니다. 우상이 아니라 고요히 하느님을 찾는 내적 여정임을 단단히 못 박아 두는 일입니다. 우상이 아닌 살아 계신 하느님께 깊이 뿌리 내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찾아 수도원에 왔습니다. 결코 뜬 구름 잡는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공동체내에서 스승이신 성령의 인도하에 성서와 규칙서를 길잡이로 하여 하느님을 찾는 여정입니다.
삶은 끊임없는 배움과 정화의 여정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의 궁극 목표인 마음의 순결에 이르러 하느님을 만납니다. 물도 고이면 썩둣이 하느님을 찾지 않으면 정주는 안주로 직결되어 타락은 명약관화합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열정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찾을 때 순수와 열정도 살아나며 제 색깔을 지닐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일치도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찾는 데서 이루어 집니다. 그러니 부단히 하느님을 찾는 내적 등정의 여정에 올라야 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길을 잃은 오늘날 신자들에게 주는 말씀으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지금 제 나이 73세, 무려 29년전 44세때 강론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공감이 가는 수도생활뿐 아니라 신자생활의 진수가 담긴 내용들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과 제1독서에 대한 답을 줍니다. 하느님을 찾는,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일탈했기에 무지요 허영이요 거짓이요 교만이기에 불행 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은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교사들아!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하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느님을 떠날 때 이런 무지, 교만, 위선, 거짓의 어리석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비단 일부 일탈한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뿐 아니라 이런 무지의 교회 지도자들이나 신자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초발심의 자세로 돌아가 하느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여 지혜와 겸손, 진실과 섬김의 행복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 로마서에서 바오로는 남을 심판하는 자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다며 남을 심판하는 자들을 준열히 꾸짖으며 이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이 또한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일탈함으로 무지에 눈먼 탓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아 앎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눈 밝은 이들은 절대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참으로 하느님만을 찾으며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이들에게 축복이 있음을 천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선택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삶도, 하느님 중심의 삶도 선택입니다. 참으로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한결같이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을, 교회를 사랑하여 교회를, 지혜를 사랑하여 지혜를, 겸손을 사랑하여 겸손을, 진실을 사랑하여 진실을, 섬김을 사랑하여 섬김의 삶을 선택하여 시종여일하게 살아 낼 때 비로소 행복한 삶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화답송 시편이 참 은혜롭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내 구원이 오리니,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내 희망이 오리니, 내 영혼 그분을 고요히 기다리네.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아라. 하느님은 우리의 피신처이시다.”(시편62,2-9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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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3.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속뜻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카 11,42)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카 11,46)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종교 지도자 계급이고 이스라엘의 기득권층이며 아비규환의 장터 너머 거룩함의 영역에 속한 그들이 과연 그동안 이런 비난을 공개적으로 들어나 봤을까 싶네요. 아마도 감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처음이시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신랄한 목소리를 복음사가가 그대로 복음서에 남긴 건, 성경을 읽는 우리가 비난에 동조해서 함께 그들을 심판하고 단죄하라는 의미는 아닐 겁니다. 귀중한 묵상기도 시간을 그렇게 단죄와 자책으로 보내기는 좀 아깝지요.자주 언급하는 바지만, 꾸짖음에 귀를 잘 기울여 보면 그 안에는 주님께서 대상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기대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 기도를 통해 바로 그걸 포착하면 됩니다.
"윗자리 ... 인사받기 ... 드러나지 않는 무덤 ... 짐을 지우고 외면하기"
예수님은 대접받기를 좋아하고 겉과 속이 다르며 그저 말 뿐인 행실들을 멈추길 바라십니다. 그건 하느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영광에 골몰하는 모습이니까요. 주님은 당신의 사람이라 불리우는 이들이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으며, 위선을 버리고, 타인에게 더 관대한 사람이길 바라시지요.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루카 11,42)
십일조와 예물 봉헌, 외적인 예식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하느님은 그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마음을 보는 분이시니까요.
마음을 다해 하느님의 사랑과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이는 누가 보지 않고 알아주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는 제도와 신분, 문자와 형식을 초월해 진리와 영으로 하느님을 섬기지요. 예수님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것을 받아 누리는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이 내적으로 꽉꽉 채워진 진정한 주님의 사람이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받았으면서도 완고한 마음을 고집하는 이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나아갈 방향을 제시합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로마 2,7)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대가와 보상을 바라지 않고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자기 영광과 명예가 아닌 하느님의 영광과 명예를 추구하는 이는 삶의 어느 경로를 관통하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여정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로마 1,11)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자유인이나 노예나, 부자나 가난한 이나, 어느 신분의 사람이건 하느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높낮이와 수량, 타이틀과 직책을 보지 않으시는 그분은, 그 대신 어쩌면 온도를 감지하지 않으실까 싶네요... 당신을 향한 뜨거운 사랑, 그리고 피조물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가진 이에게 하느님 마음이 한없이 끌리실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소박하고 조촐하나마 온 마음을 다한 사랑의 제사로 주님의 마음을 얻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비록 우리의 미소는 마스크 안에 가려져 있지만, 타인의 어려움을 감지하여 베푸는 소소한 친절과 작은 선행이 이웃의 마음을 녹이고 빗장을 풀어 이 세상에 평화의 시공간을 한 평 더 넓히게 될 것이고, 하느님을 흡족하게 해드릴 것입니다. 힘들고 고된 세상살이 중에서도 나날이 사랑의 발자국을 쌓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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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3.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카11,42.46)
어제 복음에 이어서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시 기득권 세력의 한 축이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위선과 악을 지적하십니다.
율법 규정 자체 안에서만 보면, 그들의 행위는 율법 규정을 잘 지켰기 때문에 '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서 보면 그들의 행위는 하느님의 의로움과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은 '악'이었고,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힘겨운 짐을 지워 놓고,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은 악, 너의 구원을 위해 땀을 흘리지 않은 '악'이었습니다.
"불행 하여라!"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불행 선언'은, 그들을 구원에서 완전히 배제시키시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장 큰 기쁨인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포르투갈 작은 농촌 마을인 파티마에서 세 어린이들에게 '마지막으로 나타나신 날'입니다. 성모님께서는 1917년 5월 13일에 '세 어린이', 곧 루치아와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에게 첫 번째로 나타나셨고, 그 후 10월 13일까지 매월 13일에 '여섯 번' 나타나셨습니다.
세 어린이들에게 남기신 성모님의 메시지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와 고행을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모습은 아닌지? 그래서 시급한 회개가 필요한 우리와 나는 아닌지?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로마2,6-8)
지금 나의 완고함을 내려놓고,
지금 구원으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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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3.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종교 지도층을 향한 “불행하여라!”라는
선언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였던 이들을
향해서 “불행하여라!” 하고 일침을 가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에게 ‘불행 선언’을 들은 이들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불행 선언’을 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공통점을 지녔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이야기하지만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시는 듯 살았고, 하느님의 계명과 율법을 지키고
가르치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아닌 자기 자신들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언자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구약에서
신약 시대를 거쳐,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먼저 오늘날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합니다.
윗자리를 좋아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지는 않는지,
신자들에게 힘겨운 짐을 지워 놓고 자신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지,
종교 지도자들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족한 모습이 있다면,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과
같이 되지 않도록 변화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이 말씀은 종교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을 향하고 있습니다.
주일의 의무만을 지켰다고, 봉사 활동에
참여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하느님을 내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실천하는 하느님 사랑은 우리를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음에도, 하느님 때문에,
또 예수님 때문에 양보하고 실천하는 작은 희생이
우리를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그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행 선언’이 아닌 ‘행복 선언’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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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3.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정의와 사랑의 실천을 소홀히 하는구나.
율법의 근본정신을 외면하며, 결과적으로 계명을 어기고 그래서 율법을 어기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42절) 하신다.
그들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 같은, 반드시 실천해야 할 중요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단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계명들만 철저히 지키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쳤다. 자기들에게 편한 것만 찾아 지켰으니 나머지 계명들은 지키지 않은 것이니,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42절) 하신 것이다.
주님은 또한 잔칫집에서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바리사이들의 교만과 허세를 꾸짖으신다. 그들을 “드러나지 않는 무덤”(44절) 이라고 하신다. 그들은 겉꾸밈으로 자기를 감추고 그럴듯한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속인다. 입으로는 옳은 말을 늘어놓지만 속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마태 23,27참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남들에게만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 교사들이 많다. 그러니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시편 5,10)이라 한 것 같이 그들은 무덤이다.
위선이라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역겨운 것이다. 위선자는 겉모습과 말로 자기를 감춘다. 좋은 평판을 듣는 행위로 자신의 수치스러운 것을 감추려고 한다. 그러나 자기가 찬미하고 칭송하는 일에는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만 지키라고 요구한다. 그 위선은 오래 감출 수 없다. 잠깐은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머지않아 본색이 드러난다.
이렇게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자 율법 교사들이 이에 대해 분개한다.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45절)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들까지 책망하신다. 사실, 그들은 바리사이들과 한통속이었기 때문에 책망을 들어 마땅하였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자기들까지 모욕하는 것으로 들렸다면 그들 또한 바리사이들과 똑같은 사람들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나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나와 만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하느님의 뜻대로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분을 닮으려고 하는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이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그분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 이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 때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44절)고 엄한 책망을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주의자 되지 않고 진정한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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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3.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루카 11, 42)
복음은
실천의
재발견이다.
실천은
나와 너를
돌보는 참된
행복이다.
실천하는
우리의
행동이
이기심을
치유한다.
진정한
신앙인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건강한 믿음이
건강한 행복이다.
무엇을 위한
행복인가!
올바른
실천을 위한
우리의
행복이다.
요란한 삶을
치유하는 것은
올바른
실천이다.
실천해
나가는 것이
거듭 새로워지는
우리의
성장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실천하는
사람의
이름이다.
예수님께서는
행복과 불행을
일깨워주신다.
행복은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제대로
보는 것이
실천의
시작이다.
행복은
실천을
가까이에
두는 것이다.
깨끗한 실천이
우리의
맑은 행복이다.
오늘 이하루는
아는 것을
실천하는
행복의 멋진
새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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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3.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위선, 교만>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루카 11,42).”
십일조 규정은 신명기 14장에 있습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머무르게 하시려고 선택하시는
곳에서, 너희의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분의 일을, 그리고 너희의 소와
양의 맏배를 그분 앞에서 먹어야 한다. 그러면 너희가 언제나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신명 14,23).”
“또한 너희 성안에 사는 레위인들도 저버려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는 너희와 함께 받을 몫도 상속 재산도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세 해마다 끝에, 그해에 난 소출의 십분의 일을 모두 가져다가 너희
성안에 저장해 두어라. 그러면 너희 성안에서, 너희와 함께 받을 몫도
상속 재산도 없는 레위인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가 와서
배불리 먹게 될 것이다. 그러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신명 14,27-29).”
십일조의 주목적은, 또는 원래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는 것은, 그들이 십일조의 목적을
무시하고, 자기의 신심을 과시하려고 십일조를 내기 때문입니다.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그런 것들까지 십일조를 내면서
대단히 열성적인 신앙인인 척 했습니다.
그러나 의로움(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은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선자들입니다.
<바리사이들이 바치는 십일조에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그게 표시가 나지 않지만,
하느님께서는 어떤 의도로(어떤 지향으로) 바치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1) 눈에 보이는 일만 열심히 하고, 보이지 않는 일은 무시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볼 때에만 열심히 하고,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에는(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없고 혼자 있을 때에는)
하지 않는 것도 위선입니다.
2) 쉬운 일만 열심히 하고, 어려운 일은 하지 않는 것은 위선입니다.
3) 사람들에게 생색내기 좋은 일만 열심히 하고,
생색이 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은 위선입니다.
4)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열심히 하고,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는 것은 위선입니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내는 일 자체는 긍정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사랑 실천’이 더 중요하고, 먼저 해야 하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십일조를 내는 사람들도 ‘사랑으로’ 내야 하지만, 십일조를 받는 교회도
그것을 ‘사랑 실천’에 제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교회가 십일조를 받아서 ‘사랑 실천’이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죄를 짓는 일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루카 11,43).”
이 말씀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높이고,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낮추는 ‘교만’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좋아한다.’는 말에는 좋아한다는 뜻 외에도
‘요구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누가 권하기도 전에 먼저 윗자리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자기들에게 인사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이다.”가 일반적인 설명인데,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곧 겸손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수산나의 재판’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수산나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
하느님의 영이 소년 다니엘에게 내렸습니다.
그때 소년 다니엘을 ‘원로’로 인정하면서 다니엘에게 수산나의 재판을 맡긴
사람들은(다니 13,50) 참으로 겸손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다니엘을 통해서 하시는 일을 바로 알아보고 믿었고,
자신들을 하느님 앞에서 다니엘보다 낮추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루카 11,44).”
무덤에 몸이 닿으면 이레 동안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 율법입니다(민수 19,16).
그리고 부정하게 된 사람이 ‘정화 예식’을 하지 않으면
공동체에서 잘려 나가야 한다는 율법도 있었습니다(민수 19,20).
‘드러나지 않는 무덤’, 즉 무덤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아서
사람들이 그것이 무덤인 줄 모르는 무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덤인 줄 몰랐으니까 부정하게 되었다는 것도 모를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나중에라도 알게 되었다면 곧바로 ‘정화 예식’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드러나지 않는 무덤’은, 겉으로는 위선자로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위선자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실 위선자들은 자기들의 ‘속’을 감추고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위선자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위선자들이 사람들을 죄짓게 하고, 구원의 반대쪽으로 데리고 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 경우에 위선자들의 죄는
‘위선’이라는 죄와 ‘남을 죄짓게 하는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자’는
아주 엄한 심판과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루카 17,1-3).
그러면 위선자들 때문에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위선자들 때문에 구원의 반대쪽으로 가면서도
그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몰라서 당한 일이니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알아야 하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도 잘못입니다.
(위선자들에게 속아서 그렇게 된 것이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겠지만,
무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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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3.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진실한 탈피 ♣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카 11,42. 46)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입니다. 푸른 나뭇잎도 가을이 되면 땅으로 향합니다. 자연도 세상살이도 낮은 곳으로 향할 때 제 모습을 찾고 아름다워집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임에도 늘 자신이 주인이 되고 싶어 하고 자신을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평가하곤 합니다. 껍질이나 가죽을 벗는 것을 탈피(脫皮)라 합니다. 우리도 이 탈피의 계절에 묵은 생각, 위선의 껍질을 벗어버려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는”(11,42) 바리사이들과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11,46) 율법학자들을 향하여 불행하다고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큰 착각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엄하게 꾸짖으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세부 항목을 빈틈없이 지켰으나 본질적인 면에서 그 율법을 거슬렀습니다. 그들은 이웃에게 정의를 실천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율법의 정신을 실행하지는 않으면서 의인인양 처신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명예와 권력은 추구하면서도 사람을 경시했습니다(11,43).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고 그것을 몸으로 실천함으로써 백성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도록 불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삶의 주인이심을 잊고 나눔과 베푸는 일은 등한시하면서 자신의 영광만을 챙기려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랑의 법인 율법에서 사랑의 혼을 빼버린 채 그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사람들을 구속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우리도 자신이 주인인양 착각하고, 자기만의 틀로 하느님과 이웃을 바라보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지. 사랑의 도구인 각종 규범뿐 아니라 심지어 하느님의 말씀마저도 자기 이익을 위해 해석하고 적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봐야겠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거저 주신 달란트를 자기 것인 양 여기며 그것을 통해 인정과 존경을 받으려 하고 명예를 누리려 하지는 않는지, 그리고 주어진 모든 것을 통해 다른 이를 섬기도록 불림 받은 근원적인 우리의 성소를 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 이 가을에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의 위선과 거짓의 틀을 벗어버리게 하소서! 보잘것없는 자신을 마치 주인인양 여기는 어리석은 착각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주소서! 제 생각과 판단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는 유연함을 허락하소서!
나만 아는 이기심에서 벗어나 형제들과 이웃을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진실, 온유, 절제의 마음과 인내, 선행, 친절로 대할 줄 아는 거룩한 관대함을 주소서! 그리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 기쁨, 평화 안에 머무는 축복을 허락하소서! 제가 만든 껍질과 가면을 벗어버리고 당신 얼로 거듭 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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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3.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너희 율법교사들도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견디기 어려운 짐을 남에게 지워 놓고 자기는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다
묵주기도 한번 때릴까요?
지난 주일엔 평소보다 약간 일찍 산행을 나섰습니다.
미사를 끝내고 마당에 나와보니 선발된(지난 한 주간 열심히 산) 아이들 열 명이 벌써 봉고차에 빼곡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좋은 자리에 앉겠다고 서로 티격태격 다툰 두 명이 "짤리고" 다른 아이들로 교체되는 실랑이도 있었지만 일단 시동을 걸고 신나는 음악을 크게 틀었습니다.
단골로 다니는 산이 주로 가까운 관악산이나 이웃동네 뒷동산이었는데, 이번 주에는 좀 무리를 했습니다.
김포에서 강화방면으로 가다가 강화대교 건너기 직전에 오른 쪽에 보면 "문수산성"이란 삼림욕장이 있습니다.
바다를 낀 산성인데 주변 경관이 말로 다 표현 못할 정도로 빼어나기에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꼭 한번 가보시기를 적극 추천합니다.
입장료는 없고 얼마 전부터 주차료를 받기 시작했는데, 주차요원들이 얼마나 친절하고 인사성이 밝은지 모릅니다.
한 시간 정도 올라가니 그리 힘들이지 않고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맑은 공기, 서서히 물드는 단풍, 손에 잡힐 듯한 강화도의 전경 등등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세속의 묵은 때가 다 씻기는 듯 했습니다.
아이들 역시 눈앞에 펼쳐진 절경을 내려다보며 다들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다들 산정에서의 성취감을 만끽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제게 "신부님, 정상에 올라왔는데, 단체로 묵주기도 한번 때려요!"라고 말했습니다.
요즘 우리 아이들 사이에 묵주기도가 유행이거든요.
그 순간 제 머리 속이 갑자기 바빠지면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럴까? 좋은 생각이기는 한데...
그런데 여기 정상에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좀 어색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의아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지 않을까?
그런데 오늘 이 녀석들이 왠 일로 이렇게 오바들을 한다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엉겁결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애들아, 아이디어는 좋은 아이디언데...
여기 다른 등산객들도 많이 계시니 묵주기도는 나중에 돌아가는 차안에서 드리도록 하자."
저도 모르게 그 말을 던져놓고 나서 하산 길 제 발걸음이 참으로 무거워졌습니다.
왜냐하면 기회 있을 때마다 틈만 나면 아이들에게 신자들에게 제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증거하는 삶을 사십시오. 신자임을 떳떳하게 밝히며 사십시오.
기도하는 신앙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
공공장소에서 자랑스럽게 성호도 긋고 묵주기도도 열심히 바치십시오."
그렇게 외쳐놓고는 "하느님이 가까운 곳, 산꼭대기에 올라왔으니 묵주기도 한번 때리자"는 아이들을 만류했던 제 모습이 참으로 부끄러워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혹독하게 몰아 부치십니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다 민족 안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여러 부류의 집단 가운데 가장 순수한 혈통을 자랑하던 유다인들 가운데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6,000여명 정도의 수효를 유지하던 엘리트 가운데 엘리트들이었습니다.
한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 질책의 단골 대상이었지만 다들 정통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율법에 지극히 충실했던 정예 유다교인들이었습니다.
기도생활에 하루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고, 기도도 실제로 열심히 바쳤던 훌륭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치명적인 결핍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신앙을 삶으로 보여주지 못함"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신앙, 열렬한 기도 생활, 하느님 공경, 이웃사랑의 실천 등은 주로 신체 윗부분(입술, 귀, 머리, 생각)만을 사용했던 지극히 비정상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기도와 신앙을 가슴과 몸으로, 손과 발로 보여주지 못한 것, 그것이 그들의 가장 결정적인 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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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3.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십일조보다 사랑실천인가, 십일조 통해서 사랑실천인가?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십니다.
특별히 그들은 십일조는 잘 지키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실천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의로움은 이웃사랑입니다.
하느님께 자비를 받았으니 우리도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의로운 일입니다.
그러니 십일조는 내면서 사랑실천은 하지 않는다고 나무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십일조’는 바리사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나는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라는 명목으로 지키는 대표적인 조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일조를 지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더 중요한 율법을 지키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십일조를 통해서 사랑실천을 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나라 말의 번역은 약간 십일조와 사랑실천이 별개인 것처럼 해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어를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십일조와 사랑실천을 별개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바치지 않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서로 죄짓게 만들고 서로를 심판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사랑하지 않고 자기가 주체가 되어 사랑하면 그 사랑은 이기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바치는 것은 십일조와 같은 의미입니다.
하느님께 무언가를 봉헌다는 뜻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하느님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의 행위를 저버리면 이웃사랑도 당연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해석은 “너희들이 꼭 지키는 십일조보다는 사랑실천을 해야 한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너희의 십일조가 사랑실천으로 이어져야 하지 않느냐?”라고 하시는 뜻이 됩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것일까요? 당연합니다.
가정에서 자녀가 부모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형제끼리는 잘 지내게 될까요?
부모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형제끼리 잘 지내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이 부모가 하느님이 된다면 그것은 감사의 십일조가 될 것입니다.
유튜브에는 부모를 피해 집을 나와 혼자 평생을 산속이나 다리 밑에서 산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34년째 길 위에서 사는 남자의 사연’이 있습니다.
한 번 가졌던 부모에 대한 불만 때문에 돈을 많이 벌어오겠다면서 혼자 집을 나간 장남.
그러나 하는 일마다 잘 안 되어 34년 동안 형제들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다리 밑에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모가 많이 잘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렇더라도 부모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면 형제에 대한 애정과 책임도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받은 용돈을 모아서 부모 생신 때 선물을 해 드립니다.
그렇게 되는 가족이라면 형제들 간의 우애도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인공 기훈은 착하지만, 돈이 없는 캐릭터입니다. 누구도 이 게임에 강제로 참여하라는 강요를 받지 않습니다.
모두가 큰 빚을 지고 있기에 여섯 개의 게임을 잘 통과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배신하고 죽이고 죽습니다.
이는 돈을 위해 달려가는 우리의 삶이 마치 오징어 게임 안에 있는 것과 같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착한 사람 기훈은 정말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그는 누구도 짝이 되려 하지 않는 1번 할아버지 일남과 짝을 맺습니다.
그런 짝과 게임을 하면 질 게 뻔합니다.
그러나 게임은 둘이 구슬 따먹기를 해서 다 잃는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게임의 달인이기 때문에 이정재의 구슬을 거의 다 땁니다.
할아버지는 말기 암 환자로 몇 달밖에 살 수 없습니다.
이정재는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것으로 단정하고 할아버지를 속입니다.
홀이라고 했는데 짝이라고 했다고 하고 짝이라고 했는데 홀이라고 바꿉니다.
그렇게 죄책감이 들기는 하지만 일남 할아버지를 속여서 구슬을 다시 빼앗습니다.
이때의 짧은 대화가 뇌리에 남습니다.
일남 할아버지가 말합니다.
“구슬이 다 없어졌네?”
“죄송합니다.”
하지만 구슬이 하나 남아있었습니다.
“구슬이 하나 더 있었네?”
“우리 다 걸고 한 판 할까?”
“그 구슬 하나랑 이걸 다 걸라고요? 말이 안 되는 거잖아!”
기훈은 화를 버럭 내며 소리칩니다.
이때 일남이 차분하게 말합니다.
“내 구슬 가져간 건 말이 되고?”
일남은 치매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저 자기를 선택해 준 기훈에게 베풀고 싶었을 뿐입니다.
일남은 남은 구슬을 기훈에게 넘겨주며 말합니다.
“그동안 고마웠네. 괜찮을 거야.”
그리고 일남은 죽습니다.
하지만 죽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게임을 만든 건 일남이기 때문입니다.
일남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재밌게 게임을 하다가 죽고 싶은 마음에 이 게임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게임을 해야 할 이유가 없는 단 한 사람이 일남입니다.
언제든 누군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떠나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착하게만 보였던 기훈이 아니라 일남만이 이 안에서 사랑할 준비가 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죽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다면 아무리 혼자 힘으로 이 세상에서 이웃을 사랑하려 해도 안 된다는 것이
이 시리즈물이 주는 메시지일 수 있습니다.
이 게임에 들어온 모든 사람은 거의 모두가 가진 것에 만족할 줄 모르는 빚쟁이들이었습니다.
빚을 지게 되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기훈이 막일이라도 했다면 수백만 원의 빚을 지게 되었을까요? 그는 일하는 대신 경마 도박을 했습니다.
빚이 없다면 돈에 대한 욕심도 없게 되고 그러면 오징어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세상 안에서는 세상을 벗어난 사람만 게임을 즐기며 사는 것처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시기도 한 하느님을 먼저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이 믿음을 유지하게 하시기 위해 선악과를 준비해 두셨고 구약에서는 그것이 계속 같은 의미로
십일조 계명으로 나옵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내는 것은 일남 할아버지처럼 세상을 즐기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데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반면 바리사이들은 십일조는 하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목적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오징어 게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일조의 의미를 바로잡아 주려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도구로 십일조가 사용될 때야만 하느님 사랑을 통해 이웃사랑이 완성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오징어 게임은 놀이입니다.
이 놀이에서 유일하게 동심을 유지하며 즐긴 단 한 사람은 일남 할아버지 하나였습니다.
재산도 많고 어차피 죽을 것이라서 잃을 게 더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사람도 이처럼 삽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일조는 안 내도 되고 사랑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뜻이 아니라 십일조를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지향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뜻이 더 강할 것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을 아버지로 믿을 수 있어야 일남 할아버지처럼 이 세상을 즐기면서도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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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3.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사람들은 자주 착각합니다.
내가 받은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내가 맺은 결실이 나의 노력만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쌓이면 쌓일수록
마음 안에는 교만의 씨앗이 자라나게 됩니다.
사제이기 때문에 받는 존경이
나의 삶을 통해 존경이라고 착각하거나
수도자이기 때문에 받는 배려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배려라고 착각한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불행한 이들이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행복이 아닌 착각에 빠져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불행한 삶이 될 뿐입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
나의 명예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애쓰기보다
내가 바라보는 하느님을 따르기 위한 자세
그런 자세를 가질 때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제와 수도자뿐만 아니라
단체를 이끄는 봉사자와 협력자들
그리고 대부와 대모들이 빠질 수 있는 유혹이며
신앙의 여정을 먼저 걸아간 이들에게 쉬게 다가오는 유혹입니다.
그런 유혹 앞에서
우리는 겸손이라는 백신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뜻을 따라가며
그분을 향한 자신의 여정에 집중할 수 있는 자세
그런 겸손한 자세로 임할 때
우리는 함께 하는 이들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참 행복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함께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을
겸손의 갑옷으로 막을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하느님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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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3.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제1독서 (로마2,1-11)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5)
로마서 2장 1-5절은 자신도 동일한 죄를 범하면서도 이방인을 판단하는 유다인들의 악한 모습에 대한 책망과 경고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6-16절은 하느님의 심판이 이방인이나 유다인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온다는 사실을 심판의 기준과 근거를 가지고 논증한다.
로마서 2장 5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유다인들이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를 분명히 제시한다.
그것은 '화해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나오는데, 원문대로 번역하면 '다만 네 완고함과 회개할 줄 모르는 마음 때문에'가 된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느님(잠언16,2; 예레17,10)의 눈에 비친 유다인들의 내적상태를 나타낸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심을 회개로 나아가는 기회로 삼지 않고, 도리어 그 자비심을 외면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죄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유다인들이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첫번째 이유는 그들의 '완고함'이다.
여기서 '고집'으로 번역된 '스클레로테타'(sklleroteta)의 원형 '스클레로테스'(skllretes; hardness; stubbornness)는 '굳음'이라는 뜻인데, 유다인들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거대한 장애물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뻔뻔스러웠고, 완고하고 도리에 어두운 마음에 지배되고 있었다.
죄에 대해 뻔뻔스럽게 되는 것은 멸망으로 가는 첩경이다.
'경화증'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sclerosis'의 어원이 '스클레로테타'라는 단어의 어근이라는 것은, 마치 동맥 경화증이 인간 육체의 건강에 있어 치명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 완고함이 인간의 영적 건강에 있어 치명적임을 잘 보여준다.
유다인들이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두번째 이유는 '회개할 줄 모르는 마음'이다.
'회개할 줄 모르는'으로 번역한 '아메타노에톤'(ametanoeton)의 원형 '아메타노에토스'(ametanoetos; impenitent; unrepentant)는 부정 불변사 '아'(a)와, '회개하다'(마태3,2)라는 뜻의 동사 '메타노에오'(metanoeo)의 합성어이다.
그런데 '메타노에오'(metanoeo)는 접두사로 쓰여 '다르게' 혹은 '후에'라는 뜻을 지닌 '메타'(meta)와 '깨닫다'(마태16,9), '생각하다'(에페3,20)라는 뜻을 지닌 동사 '노이에오'(noieo)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다르게 생각하다', '후에 깨닫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아메타노에토스'(ametanometos)는 잘못한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깨닫지도 못하고 돌이키지도 않는, 즉 뉘우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영혼의 세 가지 기능(역할)이라고 하는 '영혼 삼사'인 지성, 정서(감정), 의지의 모든 상태의 마비 현상을 가리킨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마음으로 슬퍼하며 의지와 행동으로 돌이키는 이들에게만 유효하다.
그렇지 않고 어떤 동기에서든지 죄악을 범하고도 완고한 마음으로 그대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전혀 유효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인자하심을 계속 유린하고 있었다.
사도 바오로는 이에 대해 가차없이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믿는 이들 가운데도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계속 죄를 떠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는데, 이것은 심판날에 자신에게 내릴 진노를 쌓는 것임을 알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속히 그 죄에서 떠나야 하는 것이다.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최후 심판의 날에 내릴 진노는 하느님의 공의에 따라 집행되지만, 그 진노를 불러 일으키는 당사자는 다름 아닌 하느님께서 제공하시는 자비를 오히려 죄짓는 기회로 삼으면서 완고함과 회개할 줄 모르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로마서 2장 5절에서 '진노의 날'
즉 '헤메라 오르게스'(hemera orges; the day of wrath)는 2장 16절에 진술된 '사람들의 숨은 행실들을 심판하시는 그 날', 즉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있을 공의로운 최후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한편 '이루어지는'으로 번역된 '아포칼륍세오스'(apokallypseos)는 '계시'(revelation)라는 의미를 갖는 명사 '아포갈륍시스'(apokallypsis)의 소유격이다.
이것은 진노의 날에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 즉 공의로운 심판이 어떤 것인지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뉘앙스를 전한다.
그것은 곧 '진리에 따른 심판'(로마2,2.3)이며, 외적 조건이 아닌 내적 실체를 보고 행하는 심판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심판'(로마2,11)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그날에 지금 사도 바오로에 의해 적나라하게 공개되고 있는 유다인들의 그 악한 실체를 보고 심판할 것이다.
여기서 '그대에게'로 번역된 '세아우토'(seauto)는 재귀대명사로서 '바로 너 자신에게'(for yourself)라는 뜻이며, 스스로가 자신의 심판거리를 바로 자기 자신 속에 하나하나 쌓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쌓고 있습니다'에 해당하는 '테사우리제이스'(thesaurizeis; are storing up)는 돈과 재물을 저축하는 것처럼 쌓아가는 것을 뜻한다(마태6,19; 루카12,21; 야고5,3).
이 동사는 현재 시제로 쓰여 당시 유다인들이 계속하여 자신들에게 내릴 심판거리를 쌓아가고 있음을 회화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 단어는 문법적으로는 직설법으로 사용되어 평서문을 이루고 있지만, 단순히 사실 자체에 대한 묘사로 그치지 않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강한 부정의 명령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11,42-46)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46)
루카 복음 11장 46절은 율법 교사들이 저주를 받는 세 가지 이유중에 첫번째 이유이다.
그들은 자기 어려운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옥,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그 짐에 대지 않는 파렴치함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힘겨운 짐', '지기 어려운 짐'은 무엇인가?
이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에 대한 원로들의 전통과 율법 교사들의 해석을 가리킨다.
그들은 심지어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에 대한 십일조 규정을 세부적으로 제정했고(루카11,42), 그 결과로 당대 사람들이 십일조를 내기 위해 땔감까지도 계산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해석을 '율법' 자체보다도 우월한 것으로 여겼고(루카11,37), 하지만 이들의 해석은 지나치게 세분화되어 있었고 복잡하여 일반 사람들이 일일이 암기해서 지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런 부담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면서도, 자신들은 그것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마태23,3).
여기서 '대다'에 해당하는 '프로습사우에테'(prospsauete; touch)는 가볍게 만지거나 살짝 건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현재 직설법의 형태로 부정어 '우'(u; not)과 함께 쓰여, 마치 무거운 짐에 손가락 하나 살짝 건드리지도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율법 교사들의 파렴치한 악행이 관행처럼 계속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들의 이러한 모순되고 불의한 모습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율법 교사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율법의 의무를 무겁게 부과하면서도, 자신들은 전혀 지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둘째, 다른 사람들이 율법 준수의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일 때, 그들은 그 짐을 덜어 주기 위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첫댓글 평화와 선 ! 늘
묵상글 고맙습니다. 조명언 신부님 함자는 조명연이 맞습니다.
고맙습니다. 평화와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