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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4. 큐티
골로새서 3:18 ~ 4:1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
관찰 :
1) 가족 관계를 주께 하듯 하라
- 18절.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이 땅에서 사랑으로 그 정체성을 드러내야 하는 이들이 어느 영역에서 그 사랑을 드러내야 하는가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관계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우선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이다. 이것이 모든 관계의 시작이고,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고, 옛 사람을 벗어버려 새 사람된 자는 가장 먼저 부부의 관계에서 그 새로움이 드러나야 그것이 진짜라는 것이다. 자기 유익과 편의로 신앙 생활하는 것은 진짜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아내 된 자들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을 모두 통틀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가정 회복의 대명령이다. 아담과 하와의 관계가 죄로 인해서 무너지게 되었을 때에 그것을 회복시키시고자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가정을 회복하시면서 말씀하신 명령이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문화의 차원도 아니고, 문명의 차원도 아니다. 그 어떤 시대, 그 어떤 상황을 무론하고 지켜져야만 죄악으로 인해서 무너진 우리 인간의 가정이 회복될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를 받으려 한다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 죽어야 남편에게 복종할 수 있다. 남편을 조종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내 된 이들의 본질이며 바뀌지 않는 성향이다. 그래야 즐겁고 기쁘다. 그러나 그것이 죄성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반드시 남편에게 복종해야 가정은 회복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정에 도래하게 된다. 옛 사람을 벗어버린 아내 된 자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새 사람 입은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 19절.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 남편들 역시 죄인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뼈와 살로 여겨야 하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죄악을 범하게 된다. 아내를 자신의 정욕의 대상으로만 보게 되는 죄악을 범하게 된다. 아내를 선택할 때도 자신의 사랑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욕의 대상으로 선택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그것을 벗어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모범을 따라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드린 주님의 모범을 따라서 아내를 위하여 죽기까지 희생하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옛 사람을 벗어버린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의 바른 모습이다. 복종보다 사랑이 더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남편은 그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이 바른 가장의 모습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은 자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은 직역하면 ‘쓰게 굴지 말라’는 의미이다. 남편 된 자는 그 아내를 주관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권리를 가졌지만 그것은 아내를 제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직 사랑으로써 부양하며 지도해야 하는 것이다. 즉, 남편 된 자는 언제든지 그 아내에게 사랑의 순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 20절.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 원리는 같으나 적용은 다르다. 아내 된 이들과 남편 된 이들에게 적용된 것이 복종과 사랑이라면, 자녀 된 자들에게는 순종이다. 이것이 또한 죄악으로 무너진 인간관계, 특별히 부모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복된 회복의 메시지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새 사람이 된 이들이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늘의 아버지를 순종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렇기에 자녀 된 자들은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함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도 기쁨이 되는 일이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사도적 권면으로 선언하고 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표현이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있다. 육적 부모가 하늘 아버지를 배반하게 한다거나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적용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진리의 문제를 제외한 거의 모든 문제들에게 대해서 자녀들은 자신의 혈기로 부모에게 반항하거나 다른 의견으로 부모를 꺾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21절.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 아비 된 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위로 자녀들에게 무조건 순종을 강요하면 안된다. 그것이 새 사람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의 도리이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은 억울하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자녀를 훈계할 때 부모가 자신들의 생각과 방법과 표준만을 고집하게 되면 자녀들을 억울하게 만들게 된다. 또 자녀들이 순종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부모가 자신의 혈기와 울분으로 말미암아 강박과 악담과 폭력을 사용하게 되면 자녀들은 억울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훈계하는 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공이 되셔야 한다. 그리스도의 명하신 교양과 훈계를 사용해야 한다(엡 6:4). 그리고 부모는 그 자녀의 잘됨과 못되는 문제를 전적으로 주님께 의뢰해야 한다. 부모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자녀의 문제를 가지고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녀가 불순종할 때 부모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온유하게 지도해야 한다. 이것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는 영역이 여기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부모가 그 자녀를 옳게 지도함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이 부모에게 대하여 노여워하거나 하는 것은 그 부모에게 잘못이 없다. 그것은 주님께서 판단하실 일이다. 자녀가 낙심하게 되는 것은 가장 실패한 자녀교육이다.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부모에게 저주를 받은 자녀가 잘되는 일은 거의 없다.
2) 주종 관계를 주께 하듯 하라
- 22절.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 사도 바울은 이제 가족 관계를 넘어서서 주종 관계에 대해서도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자가 해야 하는 적용을 말하고 있다. 당시에는 노예제가 있던 사회이기에 새 사람을 입어서 노예제 신분 사회를 타파할 것을 명령하고 있지 않다. 그것이 세상에 대해서 무조건 순응하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은 마땅한 부분에 대해서 바꾸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 바울을 통해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개개인의 태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종들이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지 않으면서 무슨 개혁이나 변혁을 말하는 것은 일단 잘못된 것이다. 그러한 태도는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주님을 두려워하듯이 성실하게 상전을 섬길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다.
- 23절.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 당시의 종들은 주인의 말을 지독히도 듣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유익이 없기에 노예 된 이들, 종들이 열심히 하고 싶지 않을 이유가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종 된 상황에서, 노예 된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그러한 상황에서 더욱 바르게 주인을 섬길 것을 명령하고 있다. 그것이 새 사람을 입은 자의 태도이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믿고, 사람에게 대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듯 열심히 섬기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성실하게 섬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상을 주신다. 그런 종의 모습, 그런 노예의 모습에 주인으로 하여금 감동을 일으키시고, 주님의 은혜를 베푸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늘의 처소를 예비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이 땅에서 자신의 신분의 고하를 넘어서서 따르는 것이 진정한 새 사람의 모습이다.
- 24절.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의 향기를 드러낼 것을 명하고 있다. 사람에게서 상을 받고자 애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의 모습을 드러내라는 것이다. 성도는 사람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이다. 육신으로는 종 되고 노예 된 모습일지 몰라도 실제 상태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이들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마음으로 주인을 섬기게 되면, 그 섬김을 그 육신의 주인이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받으시는 것이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종 된 자들, 노예 된 자들의 태도는 당연히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애씀과 수고가 주님께 드려지는 것이라면 그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이 아니겠는가! 오늘날도 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기본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주는 말씀이다.
- 25절.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 주인을 섬긴다고 하면서 겉만 그럴싸하게 하고 중심으로는 그렇지 않은 자들을 주님이 모르실 리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아무리 인정을 받는 것처럼 보여도 그 중심이 바르지 않고 잔머리를 굴리는 자들에 대해서 우리 주님은 다 아신다. 그것이 언제나 전제되어야 한다. 미련해 보여도 진실한 자들을 주님은 분명히 기뻐하시고, 그런 이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여기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 4: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 종이나 노예의 신분에 있는 새 사람을 입은 성도뿐만이 아니라 종이나 노예의 주인 된 자들은 더욱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상전이라면 더 놓은 하늘의 상전이신 주님을 인식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섬기는 자들은 그렇기에 자신의 수하들에게 의와 공평으로 대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세이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구하는 자의 자세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된 자로서 주인 된 자들이 받게 될 심판의 크기가 더욱 크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가르침 :
1) 아내와 남편의 관계는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이요 시작이다. 복종과 사랑은 그 아내 된 자들과 남편 된 자들이 따라야 하는 가장 핵심 메시지이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복종하고, 언제까지 사랑해야 하는가? 아내는 남편이 사랑할 때까지 복종하는 것이고, 남편은 아내가 복종할 때까지 사랑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나라가 부부 사이에 임하게 되고 가장 행복한 관계를 회복해 나가게 될 수 있다. 주님은 부부를 통해서 삼위일체의 연합을 이 땅에서 성도들이 누리기를 원하신다.
2)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부부 관계와 거의 동급으로 어렵고 힘든 문제이다. 그러나 새 사람을 입었기에 회복 가능한 영역이다. 아무리 망가진 부모 자식 간의 관계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뿌림이 있는 관계이기에 반드시 회복될 수 있는 것임을 믿어야 할 것이다. 자식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식을 노엽게 하지 않는 관계. 주님이 제시하시는 자녀교육 방법이다.
3) 주종관계 역시 새 사람을 입은 이들이 회복해야 하는 영역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하늘의 영역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에서도 온전하게 드러나야 한다. 그것이 주인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주께 하듯 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 사도 바울은 육신의 주인을 섬기는 것이 사실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과 같다는 놀라운 선언을 하고 계시다. 그것은 오늘날 직장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남의 일 한다고 생각하고 태만하고 게으르게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은 주님을 태만하고 게으르게 섬기는 것과 같다. 그리고 종과 노예를 대함에 있어서 의와 공평으로 대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그렇게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하시는 말씀으로 허언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될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단순한 협박이 아니다. 진짜다. 그렇기에 이 땅에서 조그만 권세를 가지고 타인을 제 멋대로 대하는 일은 악독한 일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일이 됨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상전에게 더 큰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적용 :
1) 아내를 사랑하자.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자. 내가 섬겨야 하는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섬기자. 나를 섬기게 되는 이들에게 의와 공평으로 대하자. 단순하고 분명한 적용점이다. 그러나 이것을 위해서 나는 평생을 걸어야 한다. 나 자신의 죄성을 알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를 못 박아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서 주님의 은혜로 나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며 날마다의 상황에서 그렇게 도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세상의 어드벤처를 누리는 것이 진짜 도전이 아니라 나의 내부의 도전을 직면하는 것이 진짜 모험이고, 진짜 도전이다. 주님의 은혜로 이기는 믿음을 드러내는 존재가 되길 진심으로 갈망한다.
2) 그렇게 새로운 도전을 날마다 가능하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하자. 이제 미얀마에서의 건축이 시작되었다. 교회가 아닌 학교 건축이다. 이 과정에서 관계가 중요시되고, 하나님의 새 사람으로서 합당한 관계를 맺어가고 풀어가게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