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서
남 도 국
제1막
저 남 도 국 (南道國)은 1937년 (丁丑年) 5월 말, 강원도 (지금은 경북) 울진군 근남면 뒷들마을에서 한 농가의 칠 남매 육 형제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논 열 배미 경작하든 농가로 별 어려움 없이 그런대로 살아갈 만한데, 일본 정부가 태평양 전쟁 준비한답시고 땀 흘려 수확한 쌀, 밀, 보리, 등 알곡을 죄다 공출해 가버린 땜에, 우리 집과 가족은 가난하고 배고프며 힘겹게 살아왔습니다.
일곱 살 되든 해 1944년 일본학교에 입학하여 성도 이름도 미나미도고꾸로 개명하고 일본식 교육을 받으며 일 년을 지났는데 그 이듬해 8월 15일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한국 정부가 들어섰지만, 세상은 어수선하고 무질서한 가운데 한국 학교를 그래 저래 별로 배운 것 없이 6년을 마쳤습니다. 마친 그해 1950년 3월 어렵사리 공납금을 마련하여 중학교에 입학하여 제대로 된 공부를 이제 좀 하는가 싶었는데, 예상치도 못했든 6.25 전쟁이 발생했습니다.
죽기는 싫어 인민군이 오라는 인근 교회 건물에 나가 인민군 헌법, 노래, 교과서를 가르치는 대로 따라 배웠습니다. 하늘의 도움으로 석 달 만에 한국군이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하여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남침한 인민군들이 뿔뿔이 흩어져 북으로 돌아가거나 남한의 태백산 지리산으로 피하여 공비로 남아 지역민들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중학교 공부는 물 건너가 버렸습니다. 3년간 배운 것 없이 중학교 졸업장만 들고나왔습니다. 배가 고프고 초근목피, 보릿고개를 넘어 살기가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열여섯 살 되든 해, 공비 토벌을 마치고 군산경찰서로 발령받아 근무하는 셋째 형님이 계시는 군산을 찾아갔습니다. 경찰 봉급으로는 저의 꿈인 고등학교를 도저히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군산 시립도서관을 찾아가 연연하다가 1959년 3월 차라리 군에 지원 입대했습니다. 맡겨진 군사 기초훈련을 거뜬히 마치고 하늘의 도움으로 카투사로 발령이 났습니다.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미 육군 7보병사단 항공대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집이 강원도 먼 곳이라 주말에 외박도 못 하고 밤낮 미군들과 어울려 먹고 일하고 놀고 자고를 함께 했더니 6개월 만에 대대 서무계서 불러 조수로 일을 시켰습니다.
거기서 처음 공병우 타자를 배우고 한글을 영어로 영어를 한글로 토닥토닥 치면서 2년여 배웠습니다. 임기를 마치고 다음 발령지가 부산 적기의 군수기지 사령부였습니다. 3월에 부임했는데 5월 16일 군사 혁명 쿠데타가 발생하여 그곳에서 복무 기간 5개월 연장되어 힘들게 더 일하다가 1961년 11월 일반 하사로 전역하였습니다.
제2막
준교사 자격증 소지자로 초등학교 교사로 시작하는 길과 급료가 배나 많은 미 공군부대 경비원으로 근무하는 두 가지 길에서 월급 많고 권총 차고 훈련된 군견과 함께 일하는 군견대원 직을 선택했습니다. 2년간 열심히 일했더니 군산 비행장 정문 근무로 발령받았습니다. 부대를 출입하는 모든 사람은 정문 첵크포인트에서 출입증을 받아 들어가고 나갈 때는 반납하고 나가는 일을 관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가난하던 시절 많은 사람이 미군 물품을 몰래 숨겨 나가다 들켜 출입 금지를 당하는 일이 벌어져 가슴 아팠습니다. 워낙 가난하여 부대에서 설탕, 담배, 먹다 남은 고기, 생선, 양주, 버려진 폐기물 등등 밖에 나오면 불티나듯 팔립니다. 그런 일을 감시하는 일을 해 온 4년 만에 저는 또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령부 안전처로 자리를 옮깁니다.
한국인 직원이 사령부 근무는 유일하며 5급에서 9급으로 껑충 뛰어 동료 직원들의 부러움을 샀으며 설상가상 미국 정부가 인정하는 관리직 직원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안전 업무를 다루거나 교육하는 부서나 학교는 우리나라엔 없어 미국국방부 예산으로 미국 콜로라도 덴버시의 공군 전문학교로 보내주어 기초, 전문 과정을 네 차례에 걸쳐 이수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전, 한국의 안전 전문가로 인증받았습니다. 공군 본부에서, 오산, 광주, 대구 공군 기지에서, 경찰청본부, 전북 경찰청에서, 대한 항공 김해지역 사무소로부터 초청받아 강연하기도, 또 미국 시카고에 있는 연방 안전본부 (National Safety Council) 워크숍에 여러 차례 참석 연구사례 등을 발표하는 기회도 있었습니다.
전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1986년 사령부 사령관의 보좌관 자리가 공백이 있었으나 신경을 많이 쓰는 직이라서 원하지 않았는데, 사령관이 토요일에 일하는 조건으로 특채하여 앉혔습니다.
공보관 직책은 사령관을 보좌하여 지역민과 지역의 각 단체장과 친밀히 유대하고 협조하고 잘 관리해야 하는 직입니다. 멀리는 중앙 정부, 행정, 입법, 사법, 지역 도지사, 시장, 군수, 의회, 경찰, 각 기관, 민간들과의 친선을 잘 유지하는 일은 유사시 필요한 지원을 속히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군대로서는 전쟁 못지않게 중요한 일 입니다.
1987년 10월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유세 중 느닷없이 군산에 공항을 건설하겠다고 공약을 발표했습니다. 기존의 미군 활주로를 이용하여 사용하고 대한 항공 아시아나 두 편 항공을 서울 제주도로 운행하도록 조치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보름만의 공항 건설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기지 밖에서 하는 일은 우리 정부에서 속전속결로 할 수 있지만 미군의 시설물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에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형편에 이르자, 활주로를 연결하는 유도로 건설을 밀어붙이려 하니 미군 측에서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워 쉽사리 들어 주질 않았습니다.
그해 10월 중순에 시작한 공사가 그해 12월 말까지 완료하려니 얼마나 급히 졸속으로 진행되었겠습니까? 그해에는 눈도 바람도 심하게 많이 내리고 불었습니다. 야간
작업까지 강행하면서 기한 내에 작업을 마치고 준공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미군 사령관을 잘 설득하고 국가 발전에 공헌했다며 국토부 장관 표창을 수여해 주었습니다.
1997년에 정년퇴직이 눈앞에 다가왔지만 일 잘한다며 정년을 연장해 주었습니다. 1996년 4월 25일, 미군의 날에 저를 미국국방부 펜타곤 대 회의장에 불러 미국 육해공군 대령급 이상 3,000명이 축하하는 단상에 불러올려 “세게 평화와 자유민주주의를 35년간 잘 수행해 온 대한민국 군산 공군 기지 공보관”을 소개하면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표창패를 전달받았습니다. 그날 오후에 저는 VIP 대우받으며 세계에서 단일 건물로는 제일 크다는 펜타곤 건물 1,2,3,4층을 VIP 투어를 받았습니다.
다음 날, 1996년 4월 26일, 미 공군 젊은 소령의 안내와 경호를 받으며 미국 백악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관람하고, 오후에는 링컨 기념관과 6.25 한국 전쟁 기념 공원을 관람했습니다. 내생에 최고 영광의 순간이었습니다.
1997년 7월, 미 태평양공군 사령관의 배려로 군산시장, 오산시장, 의회 의장, 상공회의소 회장, 체육회장, 한미 친선협의회 회장 등 10명을 초청하여 미 공군 최고 전략기지 알래스카 엘멘돌프 기지를 공군 특별기로 투어했습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전쟁 전략들이 이곳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2박 3일간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돌아왔습니다.
1998년 7월에 또 미 태평양공군 사령관의 허가로 군산시장, 의회 의장을 비롯한 열다섯 분의 지역 인사들을 초청하여 미군 특별기로 미국령 괌에 있는 앤들슨 기지를 견학하고 다음 날 돌아오는 길, 일본령 오끼나와의 나하 기지를 견학하며 또 한 번 미국공군의 전략과 전술에 대하여 더 깊이 더 크게 보고 듣고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군산 미 공군 전투비행단 사령관의 보좌관으로 13년간 일하면서 부족하지만 제가 진심으로 한미 친선을 잘 이루고 유지하며 관리해 왔다고 자부하고 싶습니다.
제3막
2000년 6월 나이 64세, 건강에 이상이 생겨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천식이 악화하여 전북대병원 교수님이 천식 치료의 최적지 울진으로 피신, 은둔생활을 권유해 주었습니다. 그해 8월 단독으로 울진에 가서 조그만 이층집을 하나 사서 수리해 들어갔습니다. 숙식뿐 아니라 모든 게 생소하고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그해 12월에 아내가 와서 보고는 이러다가 남편 죽이겠다 생각되었는지 자기 보따리를 옮겨 와 함께 살았습니다.
별로 할 일 없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한 권씩, 어떤 때는 일주일에 한 권, 되도록 쉽고 머리 안 쓰는 양서만 찾아서 약 500권을 읽었습니다, 마침 지방 신문에서 작품 선발 광고가 있어 처녀 응모했더니 운 좋게 입선되었습니다. 그다음 해 또 다른 신문사에 출제하여 입선되는 기쁨을 누리며 나 같은 문외한도 작가로 등단해도 되겠다는 희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2017년 무렵 지역 신문에 두 번 입선하고 2020년에는 한국문학 세상 공모전에 출제하여 수필 부문 우수상을, 2024년에는 대한민국 베스트 작가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울진에 살 때 펴낸 수필집, “성류 산의 정기”와 군산으로 귀향하여 펴낸 “인생 2막” 수필 집 과 첫 시집 “귀향“도 펴냈습니다. 그 외도 ”남도국 자서전“, ”감사의 발자취“ 등의 산문도 지역 신문에 올리며 아마추어 작가 생활을 지켜왔습니다.
자녀는 네 딸과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큰딸은 59세로 경기도 일산서 살고 있고, 둘째 넷째는 이곳 군산에, 셋째는 전주, 아들은 베트남 하노이 모 공기업에서 근무 중 입니다.
끝으로 전 2011년 3월 건강이 다소 회복되어 젊은 시절 온 혼과 땀과 정성을 바쳐 살아온 군산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이곳 자녀 손들과 함께 행복을 누리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2022년 군산평생학습관 ”여행 영어“와 ”정보화 분야“ 공부를 한 적이 있으며, SNS 를 통하여 보내온 안내문을 보고 글쓰기 학습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봄비 전정남 선생님과 여러 존경스러운 학우들을 만나 참으로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앞으로 진행되어 가는 모든 과제들이 유익하고 희망이 되고 즐거움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많이 많이 고맙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