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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도시와 교회사 이야기] 걸어서 세계 교회사 속으로
2. 이스탄불(콘스탄티노폴리스)
대축일 미사 때면 가끔 본당 신부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바치자고 말하는데,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로 시작되는 신경이 바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 신경이다. 세 개 구절을 제외하곤 니케아 공의회(325년) 신경 전체가 포함되어 있어 니케아 ·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라고도 불리어진다.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초기교회 역사 안에 중요한 도시로 등장하게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재위 306-337년) 덕분이다. 황제는 아리우스 이단과 부활대축일 날짜를 의사일정에 올린 첫 번째 세계 공의회(325년)를 이곳 니케아에서 열었다. 또한 동방 황제 리키니우스와의 전투로 본거지를 트리어에서 밀라노, 니코메디아를 거쳐 최종적인 수도로(330년) 삼은 곳이기도 하다. 비잔티움으로도 불렸던 이곳은 그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라 명명되었고, 오늘날의 터키 이스탄불이 바로 그곳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동방으로 천도한 이유는 정치 · 경제 · 종교적인 관점에서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가 있다.
381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소집명령에 따라 두 번째 세계 공의회인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열렸는데, 그 이유는 아리우스파와 성령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들 때문이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이 공의회를 통해 서로마 제국이 약해진 틈을 타,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각시킴과 동시에 자신이 그리스도교의 수호자이며, 그리스도교 제국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실제로 이를 위해 공의회가 열리기 한 해 전(380년 2월 28일), 그는 그리스도교를 국교화시켰다.
니케아 공의회 때만해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교회사 안에 등장한 도시는 아니었다. 또한 많은 학자들도 이 새로운 주교좌가 사도들의 설교나 가르침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랬던 곳이 바야흐로 동방 그리스도교의 정상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물론 그 뒤에는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있었다. 다만 새로운 것은 로마에 이어 명예수위권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부여된 것이었는데, 이것은 교회적이 아닌 단순히 정치적 동기에 의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주교좌의 의미는 당시 도시의 정치적인 의미, 즉 황제의 도시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기 전승은 성 안드레아 사도가 흑해 주변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했다고 전해지며, 현재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 목록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한(476년) 반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스만 투르크족에게 멸망되기까지(1453년) 동로마 제국 수도로서의 역사를 이어갔다. 그러나 새로운 로마의 급부상으로 옛 로마와의 마찰이 불가피해졌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이냐티우스와 포티우스 사이에 벌어진 비잔틴 논쟁 때(858년), 교황 니콜라우스 1세가 포티우스 총대주교를 파문하고, 포티우스 총대주교는 교황을 퇴위시키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교황사절 훔베르트 추기경이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를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대성당에서 파문하고, 총대주교는 교황사절을 파문하는 서구대이교(1054년)가 있어났다. 하지만 동‧서방 교회 분열을 결정적으로 야기한 것은 십자군 전쟁이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은 베네치아 상인들의 계략으로 예루살렘이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것이다, 몇 세기 동안 이슬람교도의 공격에도 견뎌왔던 곳이 어이없게도 같은 그리스도교 형제인 십자군에 의해 약탈당했고, 약 60년 간 라틴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한스 큉(Hans Küng, 가톨릭 신학자) 신부의 언급대로, 교황이 그 거룩한 전쟁을 주도했고, 동방의 자매교회도 공격했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동방 그리스도교계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그래서 오스만 투르크족의 침략이 눈앞에 닥쳤을 때(15세기), 교회의 일치를 지향한 피렌체 공의회(1439년)의 교령(Laetentur coeli)이 동방의 성직자와 수도자, 신자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사람들은 그들이 신앙을 돈을 받고 팔았다면서 비난했다.
심지어 해군 총제독 루카스 노타라스는 투르크족과의 교섭이 결렬되었을 때 ‘콘스탄티노폴리스 한복판에서 교황의 삼중관(Tiara)을 보느니, 차라리 터키인들의 터번을 보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였다.
새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역사는 1453년 5월 29일에 끝이 난다. 14세기부터 영토를 넓혀왔던 오스만 투르크족의 수중에 넘어간 것이다. 그날로부터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이슬람사원이 되었다.
이처럼 콘스탄티노폴리스 역사를 간직한 이스탄불에 도착하면 먼저 하기아 소피아 또는 아야 소피아(Aγια Σοφια)성당을 둘러보면 좋을 듯하다. ‘성스러운 지혜’란 뜻의 이 대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건립되었지만(360년) 두 번의 소실을 겪은 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비잔틴 양식으로 재건되었다(537년). 유스티니아누스가 성당 건립 때 기쁨에 겨운 나머지 외쳤다는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에게 승리했도다!’란 말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했던(1453년 5월 29일)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흐메드 2세가 하기아 소피아로 향하면서 외친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없고, 알라만 존재한다!’란 말도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1935년, 하기아 소피아를 박물관으로 지정한 터키정부는 아야 소피아 박물관(Ayasofya Muzesi)으로 개조해 일체의 종교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대성당 안 벽면에 고정된 원판에는 알라(Allah, 유일신), 무하마드(Muhammad, 예언자), 이슬람 제국 초기의 4대 칼리파(Kahlifah, 무하마드의 대변자)들의 이름이 아랍어로 새겨져 있다. 대성당 주변의 모스크와 궁전들, 그리고 그랜드 바자르(Kapali Carsi) 등도 찾아가 보면 좋을 명소이다. 또한 아시아와 유럽을 가로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바다를 보면서 식사를 하는 것도 추천한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 니케아 ‧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바치며, 동방과 서방 교회의 일치를 위해 기도를 한다면 그 또한 뜻 깊은 여행이 아닐까 생각한다.
[유럽의 도시와 교회사 이야기] 걸어서 세계 교회사 속으로
3. 라벤나(Ravenna)
이번 달에는 이탈리아 북동쪽에 위치한 라벤나로 떠나보자.
라벤나교구의 역사는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반면 로마제국 역사에 주요 도시로 등장하게 된 것은 4세기부터인데, 이는 로마의 황제들이 정치적 중요성을 잃고(약 300년경), 다른 거주지를 선호하면서, 트리어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비롯해 라벤나를 주목하면서부터이다.
서로마의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 황제(384~423년)가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피난하기 좋은 항구도시 라벤나로 천도를 하였는데, 게르만족의 일부인 동고트족이 라벤나를 침입하면서, 라벤나는 동고트의 왕 테오데리히(Theoderich)에 의해 동고트 왕국의 수도가 된다(489년).
게르만족의 하나인 고트족에게 복음을 전파한 사람은 울필라스(Uiphilas, Wulfila)인데, 그는 아리우스의 옹호자였던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 주교에 의해 고트족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고트어1)로 된 성경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가 고트족에게 전한 그리스도교는 아리우스주의2)적인 그리스도교였다. 아리우스주의는 알렉산드리아의 바우칼리스 성당 신부였던 아리우스(260~327년)가 주장한 이단으로 아리우스는 이 이단적 교리를 주장함으로 니케아 공의회에서 단죄를 받았다. 아리우스주의는 다른 게르만 부족에게도 전파되었는데, 동고트족도 아리우스주의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여 서로마제국 점령 후, 정통 그리스도교를 믿는 신자들에게 어려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동고트 왕국은 교회 지도자들의 노력에 의해 정통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유스티누스 1세(513~527년)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552년).
그렇게 비잔틴 제국의 도시가 된 라벤나는 또다시 롬바르드족(게르만족의 하나)에 의해 점령되는데, 이때 교황 스테파노 2세(752~757년)는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5세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소용이 없게 되자 다시금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이에 따라 프랑크 왕국의 왕, 피핀과 그의 아들 칼 대제는 롬바르드족이 점거했던 지역, 즉 라벤나를 포함한 중부 이탈리아의 모든 영토를 교황에게 에계 증여할 것을 약속하고는 이를 실현시키게 된다.
이리하여 마침내 교황령(敎皇領)이 탄생되었고, 라벤나는 그때부터 로마 교황이 통치하는 세속적인 영역이 되고 만다. 교황령은 1929년 2월 11일 ‘라테란 조약’에 의해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으며, 교황청은 현재의 바티칸 시국 영역으로 축소가 된다.
언제부터 이탈리아의 유명 성당들이 입장료를 받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라벤나에는 티켓 한 장으로 다섯 군데의 명소를 볼 수 있게 되어있다.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 인류문화유산 중 다섯 군데 명소를 나열해보자면, 성 비탈리스 성당(Basilica di S. Vitale, 526~547년)과 성 아폴리나리스 신 성당(Basilica di S. Apollinare Nuovo, 504년), 그리고 대주교 박물관과 경당(Museo e Cappella Arcivescovile), 네온 세례경당(Battistero Neoniano, 430년), 갈라 플라치디아 묘(Mausoleo di Galla Placidia, 430년) 등이 있다.
라벤나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인 성 비탈리스 성당3)은 동고트 왕국 지배 아래 있던 527년, 에클레시우스 주교가 건립하여, 막시밀리아누스 주교 때 완공(548년)되었는데, 팔각형으로 된 이 성당은 천장화만 빼놓고 거의 다 모자이크 양식으로 되어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의 양식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성당인 이곳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세르기오스 성당과 성 바코스 성당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또한 칼 대제의 아헨왕궁 경당도 이 성당을 모델로 삼았다고 하며, 피렌체의 유명한 대성당의 돔도 이 성당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고대 로마와 동고트족, 그리고 비잔틴 문화가 융합된 라벤나의 건축물들은 외관은 비록 간소하고 검소하지만 실내에 들어서면 다양한 모자이크를 이용한 장식물들이 있어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거리의 도로명판도 모자이크로 되어 있다.
대주교 경당은 6세기 초부터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주교들이 이용한 개인 기도실이었다. 494년부터 519년까지 라벤나의 주교로 있었던 베드로 2세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이 건축물의 중요성을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초기 그리스도교 개인 기도실이었다는 사실에 두고 있으며, 그 성화상학(聖畫像學)4)은 아리우스주의에 강하게 반대하는 상징주의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라벤나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네온 세례경당은 라벤나의 다른 건축물들과 마찬가지로 내부 모자이크로 유명하다. 우르수스 주교(재위 399~426년)가 건립을 시작했는데, 경당 이름은 네온 주교(재위 450~473년)의 이름을 딴 것으로 모자이크 작업이 그의 재위기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세례경당과 견줄만한 것이 바로 아리우스파 세례경당(Battistero degli Ariani)이다. 아리우스파 세례경당은 5세기 말 테오데리히가 그의 통치를 강화하고 아리우스적인 그리스도교를 공식적인 왕궁의 종교로 만들면서 건립한 것이다.
이 두 세례경당의 천장화는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놓았는데 비잔틴 예술에선 드물게 예수님의 모습을 나체로 적나라하게 표현해 놓았다. 이에 아리우스적인 그리스도교 영향을 받은 것으로(고대문헌에 따르면) 보기도 한다. 하지만, 비교할 수 있는 예가 없어 증명할 수는 없다. 다만 두 그림 모두 예수님 머리에 후광을 그려놓은 점으로 보았을 때 예수님의 신성을 표현하려 했고, 예수님의 나체를 그린 점으로 보아선 예수님의 인성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이 든다.
그리고 또 다른 성 아폴리나리스 성당이 하나 있는데 이곳에는 ‘in Classe’라는 별칭이 붙어있다. 이 별칭은 당시 라벤나 항구에 있는 고대 로마의 도시 ‘Civitas Classis’(함대의 도시)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아폴리나리스 성당은 우르시치누스 주교가 건축을 시작해서 막시미아누스 주교에 의해 축성되었고(549년), 초대 주교인 성 아폴리나리스의 무덤 위에 세워졌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유해는 9세기 중반 신(nouvo)교회로 옮겨졌다.
그밖에도 테오데리히 왕의 묘(Mausoleo di Teodorico, 520년)와 동시대 건축물 중 모자이크가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갈라 플라치디아의 묘(Mausoleo di Gallal Flacidia, 43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딸이며 콘스탄티누스 3세의 황후)도 가볼 만한 곳으로 추천하고 싶다. 또한 카말돌리의 베네딕토 수도회를 세운 성 로무알도가 라벤나 출신이라는 점과 ‘신곡(新曲)’으로 유명한 단테의 묘도 라벤나에 있다는 점 등을 미리 알고 가면 더 좋을 듯 싶다.
1) 고트어(Gothic language) : 인도 · 유럽어족인 게르만어파에 속하는 언어로 4,5세기경 유럽의 많은 지역과 아프리카 북해안에서 사용된 것으로 짐작되며 그 후 사멸하여 현존하지는 않는다.
2) 아리우스주의(Arianism) :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하는 아리우스(Arius)적 신학사상을 말한다.
3) 성 비탈리스 성당 : 라벤나의 수호성인. 성 비탈리스가 순교한 장소에 세워진 성당.
4) 성화상학(聖畫像學, Iconography) : 성화상을 해석하는 학문. 일명 도성학이라고도 함.
[유럽의 도시와 교회사 이야기] 걸어서 세계 교회사 속으로
4. 잘츠부르크(Salzburg)
한국인들에게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영화 중 ‘The Sound of Music(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영화가 있다. 알프스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의 촬영지가 바로 오늘 이야기 할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이다. 1993년, 필자 역시 영화에 나오는 트랩 대령의 집(Hotel Schloss Leopoldskron)을 찾아가보았다. 하지만 1층 로비의 모습이 영화에 나오는 모습과 조금 달라 실망한 적이 있었는데, 1736년, 레오폴드 피르미안 대주교의 가족소유의 집으로 지어진 건물은, 지금은 모던한 객실과 전원풍 스위트룸을 갖춘 고급호텔로 재탄생되었다.
독일어 Salz(소금)와 Burg(성)을 합쳐 ‘소금 성’이라는 뜻을 가진 잘츠부르크는 그래서인지 근처에 있는 소금광산이 유명하다. 이러한 잘츠부르크가 교회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는 5세기경인데, 450년경, 유바봄(Iuvavum)이라는 옛 로마 도시이름을 딴 잘츠부르크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생기면서부터이다. 그때 두 개의 성당과 수도원이 있었는데, 로마군대의 퇴각과 게르만족의 대이동 때, 이 도시는 포기되어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6세기에 바이에른 사람들이 이 땅을 점령했는데, 696년, 성 루페르토1)가 수도원과 수녀원을 설립함으로 교구의 역사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따라서 성 루페르토는 잘츠부르크 교구의 첫 번째 주교 이름에 올려져 있다. 그는 잘츠부르크의 수호성인이기도 하고, 바이에른의 사도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사명에 적합한 곳인 잘츠부르크에 정착하여, 성 베드로에게 봉헌되는 성당(Stiftskirche St. Peter)을 지었고, 베네딕도회 규칙을 따르는 수도원(Stift St. Peter)을 설립하였다. 이 수도원은 독일어권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이다. 711년에는 논베르크 수도원(Stift Nonnberg)을 설립하였는데, 이 수도원도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여자 수도원이 되었다. 그를 묘사한 성화나 동상을 보면 소금통을 들고 있거나 그 옆에 소금통이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염수(소금물)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으로서, 주교의 지팡이로 바위를 내리치니 염수가 흘러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잘츠부르크와 연관된 성인 중 성 보니파시오(673-755년)가 있다. 게르만의 사도인 그는 영국 출신으로 게르만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유럽으로 건너갔다. 교황 그레고리오 2세에게 선교활동 인준을 받은(719년) 그는 튀링겐, 바이에른, 헤센지방에서 성공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였고, 그곳의 교구들을 재정비하였다. 739년, 그는 새로 설립된 잘츠부르크 교구에 대한 교황의 승인을 얻어냈고, 교구의 경계를 확정지었다. 그래서 잘츠부르크 대교구는 쾰른 대교구에 이어 독일어권에서 가장 오래된 대교구가 되었다.(798년)
이후 잘츠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독립 제후급의 대교구가 되었으며(1322년), 마르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당시(16세기), 종교개혁을 반대하는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Primas Germaniae’라는 호칭이 있다. ‘게르만 지역의 으뜸 주교’에게 붙여지는 호칭인데, 이 호칭은 역사가 흐르면서 트리어와 마인츠, 막데부르크, 잘츠부르크 대주교에 의해 요청되었고, 실행되었다. 이 호칭은 다른 대교구에 대한 권한과는 관련이 없고, 교황사절로서 특별한 교황의 위임을 얻을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곧 광범위한 권한을 가진 교황의 사절로써 임명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황사절은 그 전권의 형태에 따라서 다른 주교들을 상대로 교황의 권위로 행동할 수 있다. 트리어와 마인츠, 막데부르크는 베스트팔렌 평화조약(1648년)과 나폴레옹 시대의 세속화(1802년)로 그 호칭을 잃어버렸지만, 잘츠부르크 대주교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그 호칭을 갖고 있다. 오늘날 그 호칭은 자치권의 우위와는 관련이 없고 전례 안에서 윗자리를 차지하는 권한이 있으며, 전통에 따라, 추기경의 자색과는 다른 교황사절만의 자색 옷을 입을 수 있으며, 주교 문장의 실 장식도 주교의 경우와 같이 녹색이 아닌 적색인 점이 특징이다.
- 잘츠부르크 대성당.
이처럼 다양한 교회역사를 지닌 잘츠부르크에 도착하면, 먼저 수도원 성당인 성 베드로 성당(Stiftskirche St. Peter)을 찾아가 보자.
오랜 역사를 지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성당의 묘지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트랩 대령 일가가 나치를 피해 숨어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774년, 성 비르길 주교에 의해 지어진 대성당(Salzburger Dom)도 있다. 비르길 주교는 대성당 축성을 계기로 성 루페르토 주교의 유해를 보름스에서 잘츠부르크로 모셔왔다. 이 대성당은 1127년을 시작으로 다섯 차례의 대화재를 겪었고, 1944년에는 연합군의 폭격을 받아 성당의 일부가 파괴되는 불운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무려 6000여 개의 파이프로 만들어진 대성당의 파이프 오르간도 볼만하다. 오스트리아의 대표적 작곡가인 모차르트가 이 대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하는데, 물론 그의 생가도 잘츠부르크에 있다. 음악가이자 지휘자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잘츠부르크 출신의 요셉 모어(Joseph Mohr) 신부는 프란츠 그루버와 함께 그 유명한 가톨릭성가 99번,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작사 · 작곡했으며, 잘츠부르크 근처의 오베른도르프의 성 니콜라 성당에서 초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교회사와는 별개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마리아와 아이들이 도레미송을 불렀던 미라벨 궁전과 정원(Schloss Mirabell & Mirabellgarten), 1077년, 게브하르트 대주교에 의해 지어진 호헨잘츠부르크 요새, 1615년, 마르쿠스 지티쿠스 대주교가 지은 예측 불가능한 곳에서 물을 뿜어내는 분수가 있는 헬브룬 궁전(Schloss Hellbrunn), 채굴한 소금을 수송하는 대동맥 역할을 한 도시를 가로지르는 잘자흐강(Salzach), 그리고 잘츠부르크에서는 조금 떨어져있지만 호수와 알프스 산이 자아내는 멋진 풍경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잘츠캄머구트(Salzkammergut), 그리고 영화 속에서 대령과 마리아가 결혼식을 올렸던 몬트제 성당(Basilika Mondsee)과 아돌프 히틀러의 은둔지였던 독수리요새가 있는 베르히테스가든(Berchtesgarden)의 켈슈타인하우스(Kehlsteinhaus)도 가볼 만하다. 마지막으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지막 장면에서 엔딩곡과 함께 트랩 일가가 알프스 산을 오르며 탈출한 곳이 바로 베르히테스가든 근처의 오버잘츠베르크(Obersalzberg), 더 정확히 말하면 아호른뷕센코프(Ahornbüchsenkopf) 정상이다. 이곳에서 웅대한 알프스 산들과 저 멀리 아래로 펼쳐진 잘츠부르크의 전경들을 바라보며 추억의 영화 한편을 떠올려보면 좋을 듯 싶다.
1) 성 루페르토(Rupert) : ‘잘츠부르크’란 도시명을 직접 지은 인물로, 독일 선교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주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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