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과 사이좋게 지냅시다.
성경본문: 잠언 6: 20-23
20.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21.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22.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23.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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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2: 3-7
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6.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7.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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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구영 목사
우리 감리교회를 영어로 "메도디스트 처취"(Methodist Church)라고 합니다.
여기 "메도디스트"라는 말은 "규칙쟁이"라는 말입니다. 시계처럼 정확하게 규칙적인 생활을 하던 찰스 웨슬리가 이끌던 신성클럽 회원들에게 빈정대는 투로 붙어진 별명이 우리 감리교회의 명칭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감리교회의 전통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규칙을 지키는데 있습니다.
흔히,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필요한 세 요소를 정리(情理) 의리(義理) 법리(法理)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 요소는 서로 조화될 수 없는 요소를 가지고 있어 서로 상충하고 갈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에다 더 우선적인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특색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유럽 사회에서는 정리나 의리보다 법리가 우선합니다. 가까운 일본은 정리나 법리보다 의리를 우선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의리나 법리보다 정리를 우선합니다.
조선 왕조 때, 형리가 범법자를 잡기 위해 혐의자의 어린 아들을 잡아다 겁을 주어 어머니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는 말까지 자백을 받아 범인을 검거했습니다.
이때 이 보고를 받은 임금은 "범법은 기사지소(其事至小)하고 자식이 부모의 죄를 밝히는 것은 기사지대(其事至大)하다" 즉 죄를 짓는 것은 적은 일이요, 자식이 부모의 죄를 고백케 하는 것은 큰일이다 하여 형리들을 파면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법도 정리로 다스리는 것이 우리 민족의 오랜 정서입니다. 그러나 이런 오랜 타성이 오늘 우리 사회의 탈법, 무질서에 대해 관대하게 대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도 "법"이 주제인 말씀입니다.
잠언 6:20-23절의 말씀은 지혜를 듣는 자가 그 명령과 법을 잘 지키면 잘 때나, 깰 때나, 다닐 때, 즉 전 생애에 필요한 인도와 보호와 대처방안을 보장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지혜자는 명령과 법을 각각 등불과 빛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등불에서 빛이 나오듯 여기 명령은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되는 모든 명령들을 의미하는 말씀이며, 법은 일반적인 법과 질서를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지혜자는 이 명령과 법을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디모데후서 2:3-7절의 말씀은 사도바울이 젊은 지도자 디모데에게 세 가지 비유로 권면하신 말씀입니다.
① 그것은 군사로 비유했습니다.
군인은 사사로운 안전보다 국가의 안보를 우선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명령에 죽고 살아야 합니다.
② 경기자로 비유했습니다.
경기자의 목표는 우승입니다. 그러나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면류관을 얻지 못합니다.
③ 농부로 비유했습니다.
농부의 꿈은 풍년입니다. 그리고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은 권리입니다. 그러나 수고가 없이는 곡식을 먼저 받을 수가 없습니다.
위의 두 본문 말씀은 법과 질서를 따르는 것이 목적을 이루는 최선의 길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잠언의 지혜자나 바울사도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바는 법과 질서가 생명의 길이요, 승리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떤 법과 질서를 따라 살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수직적인 법과 질서입니다.
디모데후서 2:3-4절에 보면 "네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하였습니다.
수직질서란 상하의 질서입니다. 조직의 생명은 명령체계입니다. 이 명령체계가 무너지면 군조직은 이미 생명을 잃은 군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고 인간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하나님의 말씀과 순종의 관계가 무너지면 교회가 아니고 사회도 상하의 체계가 무너지면 그 사회는 사회로서의 기능을 잃은 무정부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이 상하의 질서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식상 되어있고, 자녀는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고, 젊은이는 노인의 권위를 무시하고, 대학생들은 교수의 권위를 무시하고, 직장에서도 부하 직원들이 상사의 권위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인들은 기도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진부하게 여깁니다. 전철 노약자석에는 젊은이들이 앉아 졸고 있습니다. 대학생들이 교수의 멱살을 잡습니다. 그리고 직장의 부하직원들이 상사를 웃음거리로 만듭니다. 오히려 이 상하질서를 깨뜨리는 것에서 자기 성취감을 느끼는 잘못된 현상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 상하의 질서마저 상업주의적인 논리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상업적 가치가 있으면 우대 받고 상업적 가치가 없으면 버려지듯, 상하의 질서도 존경할 만하면 권위를 인정하고 잘못하면 권위를 짓밟습니다.
그러나 상하의 권위란 하나님으로부터 온 권위이기에 잘잘못에 따라 주어졌다 빼앗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잘못한다고 개가 될 수 없듯이 상하의 권위와 잘잘못은 또 다른 별개의 문제입니다.
물론, 잘잘못에 따라 더 존경받는 권위와 덜 존경받은 권위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상하의 질서를 범할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상하의 질서를 범하면 그 어떤 불행이 온다기 보다 상하의 질서를 범하는 것 그 자체가 불행인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총회에 참석했다가 수요 성서연구 때문에 돌아오면서 택시를 탔습니다. 40대 초반쯤 되보이는 기사는, 내가 차를 타자마자, 김선생님, 시장, 경찰, 버릇없는 아이들, 그 부모들을 싸잡아 욕을 하면서 은근히 동의를 구하는 눈치였습니다.
내가 아무 말을 안하고 듣고만 있자 겸연쩍든지 IMF로 모 기업에서 밀려나 미국으로, 캐나다로, 그리고 독일로 전전하다 다시 들어와 택시기사를 시작한지 1년에 되었다는 것입니다. 병석에 누워 계신지 5년이나 되신 아버지가 그처럼 부담스럽고 힘들었으나 막상 돌아가시고 나니 아버지가 자기 삶의 기둥이었음을 깨달았다고 말하며 음성이 떨렸습니다.
왜? 인간은 돌이킬 수 없을 때 가서야 깨닫는 것입니까? 상하의 질서를 잘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둘째, 수평적인 질서입니다.
디모데후서 2:5절에 보면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요…" 하였습니다.
수평적 질서란 평등의 질서입니다. 흔히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수평적 질서가 있는 나라일수록 주지사의 차나 상원의원의 차나 불법주차를 했으면 불법주차 스티커를 붙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수평적 질서가 없는 나라는 도지사의 차나 국회의원의 차에 불법주차 스티커를 붙였다면 신문에 날 일입니다.
수평적 질서가 있는 나라일수록 공공의 이익이나 편의가 우선되나, 수평적 질서가 없는 나라일수록 개인의 이익이나 편의가 우선됩니다.
공공의 이익이나 편의가 우선되려면 부득이 개인의 이익이나 편의가 제한을 받으나 모두의 이익과 편의가 됩니다.
그러나 개인의 이익과 편의가 우선되는 것은 공공의 불이익과 불편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몇 일 전, 밖에 나갔다가 전철을 타고 아현역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오는데 한 떼의 학생들이 우르르 내려왔습니다. 저는 좌측으로 올라가려고 옆으로 옮겨 섰는데 학생들은 오른쪽으로 그대로 밀고 내려 왔습니다.
저는 그냥 그 자리에 서서 학생들에게 "좌측통행"하니까 모두 웬 미친 늙은이인가 하는 듯 흘끗 쳐다보고서는 그냥 떼지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순간 "내가 틀린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어 오른쪽으로 가려다 보니 분명 계단 밑에 "좌측통행"이라고 쓰여있었습니다. 그제야 안심하고 나머지 계단을 다 올라온 일이 있습니다.
모든 공공질서는 수평적 질서입니다. 이 평등의 질서에도 권리가 있는 반면에 의무가 있습니다. 흔히 권리만 주장하는 언행이 수평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이 질서를 모두 잘 지켜야 세상이 안전하고 편해집니다. 법대로 경기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셋째, 양심적 질서입니다.
디모데후서 2:6절에 보면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였습니다. 양심적 질서는 영적 질서입니다.
헬라인들이 제 1의 덕목으로 여겼던 것은 "근면"입니다. 근면한 농부만이 먼저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근면치 못한 사람들이 먼저 소유하고 누리려는데 오늘 이 사회의 양심적 질서의 혼란이 있습니다. 영적 질서에 혼란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대학가에서는 시험 칠 때 컨닝 하지 말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부끄러운 A학점보다 떳떳한 B학점이 명예스러운 양심의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을 때 한 장수가 들어와 적군이 방심하고 있을 때 야밤 기습을 해야 적군의 예봉을 꺽을 수 있다고 하자, 왕은 "나는 승리를 훔치지 않겠네" 했다는 말은 너무나도 유명한 말입니다. 반드시 이겨야만 할 중요한 전투에서도, 승리를 도적질하지 않겠다는 알렉산더의 대왕다운 도량은 세월을 뛰어넘어 오고 오는 세대 사람들에게도 감동과 교훈을 주는 양심의 질서입니다. 거짓말과 음모와 모략과 술수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근면한 농부처럼, 묵묵히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 길러 추수 때까지 기다리는 수고가 축복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결국 한가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생명의 길입니다. 진정 명예로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사심을 버리고 상하의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전정 면류관을 얻을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수평적 질서를 따라 법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사회 생활을 해야 합니다.
진정, 상을 먼저 받을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양심의 질서를 따라 수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법과 질서를 따라 생명의 길, 복받는 길을 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