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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이루는데 필요한 삶! / 이한규 목사
< 가나안의 비전을 이루는 법 >
삶이 고귀하고 의미 있게 되려면 소중한 비전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비전을 이루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가는 길에 반드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는 해결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옛날에 못 풀었던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오직 문제는 문제의 열쇠를 찾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문제가 크면 새벽에 교회에 나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기도해보십시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길 것입니다. 잘 생기지 않아도 매일 그렇게 기도해보십시오. 반드시 지혜가 생길 것입니다.
나이라가라 폭포을 보면 폭포 위에 교각이 없고 케이블에 매달린 조교가 있다고 합니다. 처음에 그 조교를 만드는 것은 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다리를 지탱할 엄청난 규모의 케이블을 걸칠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한 사람이 아이디어를 내 처음에 연을 날려 연줄이 폭포 건너편에 닿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연줄을 잡아당기면서 조금씩 굵은 줄을 매고 계속 당기고, 나중에는 굵은 로프를 달고 계속 당기다가 마침내 엄청난 굵기의 케이블까지 매고 당겨서 그 조교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문제 속에서 포기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있고, 장벽을 무너뜨리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선교의 비전을 이루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속 비전을 향해 달리면 마침내 비전을 이루고 훌륭한 선교사를 전 세계 방방곡곡으로 보내는 꿈같은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선교사 훈련학교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선교 중심적인 교회를 국내외에 많이 개척해야 합니다. 그것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방법을 세워야 합니다. 저는 매일 새벽에 기도가 끝날 때쯤에는 비전을 어떻게 이룰까를 묵상합니다. 그처럼 계속 길을 찾다 보면 지혜도 생기고 길도 보일 것입니다.
< 가나안 땅 정복에 필요한 것 >
여호수아 1장은 가나안 땅 정복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려주는 장입니다.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1-9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11-15절에 나오는 지도자의 인도입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지도자로서 3가지를 합니다.
첫째, 마음의 준비를 시킵니다. 본문 앞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진중에 두로 다니며 백성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예비하라 삼일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얻게 하시는 땅을 얻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하라.”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양식을 예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왜냐하면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 가나안은 펼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염려가 생깁니까? 준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내일 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은 항상 내일을 준비하는 날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기회를 주십니다. 그 기회를 누가 잡습니까? 준비하는 자가 잡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킵니다. 본문 앞 12-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여호수아는 요단 동편에 머물게 된 2지파 반, 즉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에게 요단 동편의 땅을 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달라집니다. 상처를 생각하면 상처가 덧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과거에 길을 열어주셨던 하나님을 생각하며 힘과 소망이 생깁니다. 우리가 복된 인생을 살려면 미움과 상처와 원통한 것은 최대한 빨리 잊고, 사랑과 은혜와 좋은 기억은 최대한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잔 웨슬레가 유명한 전도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여섯 살 때 불탄 집에서 죽을 뻔 하다가 지붕이 무너져 내리기 전에 간신히 구원받은 사건을 평생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받은 은혜를 계속 기억하면 내일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셋째, 사명을 일깨웁니다. 본문 앞 14-15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편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고/ 여호와께서 너희로 안식하게 하신 것 같이 너희 형제도 안식하게 되며 그들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얻게 되거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편 해 돋는 편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두 지판 반에 먼저 요단 동편에서 편하게 거하게 하셨기 때문에 처자들은 요단강 동편에 두고 홀가분한 상태에서 요단강 서편의 가나안 땅 정복전쟁에서는 선봉에 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 정복전쟁이 끝나면 요단강 동편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즉 먼저 받은 안식의 은혜를 생각하며 요단 동편에서 편하게 뒷짐을 지고 있지 말고 형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목표를 이루는데 필요한 삶 >
여호수아의 조치에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본문 16-18절 말씀을 보면 백성들의 반응이 나오는데 이 백성들의 반응을 보면 사람이 목표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목표와 비전을 이루려면 어떤 삶이 필요할까요?
1. 단결하는 삶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이 말씀을 보면 4번이나 ‘우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호수아의 명령에 2지파 반의 백성들은 “아니? 왜 우리가 선봉에 서야 돼? 우리만 죽으라는 건가?”라고 반응하지 않고 철저한 우리 의식으로 무장하고 단결한 것을 보게 됩니다.
여호수아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당시 우리나라의 강원도 정도 되는 가나안의 좁은 땅에는 7족속과 31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작은 지역이 이기주의와 소영웅주의에 빠져 분열하였기에 결국 단결한 이스라엘에게 패망하게 됩니다. 그처럼 내적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서로 밥그릇 싸움을 하면 나라는 희망이 없게 되고, 사단만 좋아하게 됩니다.
우리는 ‘나 중심’이 아닌 ‘우리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형제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어야 하고 그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어야 합니다. 충고와 비판은 최대한 자제하고 사랑과 용서는 최대한 실천해야 합니다. 인디언 속담에 친구의 고난의 신발을 신고 5리를 같이 걷기 전까지는 충고하지 말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충고하는 자세보다는 함께 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암이란 무엇입니까? 작은 세포들이 각각 자기만 생각하고 커지기 때문에 생기는 병입니다. 그처럼 자기만 주장하면 공동체에 치명적인 병을 줍니다. 내 말과 생각이 맞아도 남의 말을 존중할 때 하나님은 그 공동체와 그 당사자에게 축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2. 순종하는 삶
본문 17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는 범사에 모세를 청종한 것 같이 당신을 청종하려니와...” 그 말이 얼마나 여호수아에게 힘이 되는 말입니까? 40년 동안 엄청난 카리스마로 백성들을 이끌었던 모세 죽음 이후로 지도력의 공백이 생기고, 그때 모세의 후계자가 된 여호수아는 “과연 백성들이 나를 잘 따라줄까?”하는 의구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백성들은 “우리가 모세를 청종한 것처럼 당신을 청종하겠습니다”라고 말함으로 여호수아의 불안감을 씻어주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얻는 데에는 여호수아도 훌륭했지만 “명령만 하세요. 그대로 순종하겠습니다”라고 했던 순종하는 백성들도 훌륭했습니다. 하나님은 똑똑하고 능력 있는 성도보다는 순종하는 겸손한 성도에게 축복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복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우리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내세우며 고집부리면 절대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기도할 때도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기도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하면서 전적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 자세로 살면 감사가 넘치게 될 것이고, 반드시 아름다운 이름을 얻게 될 것입니다.
1990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올랐던 ‘엘레나’란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처음에 중국선교사로 자원했다가 폐결핵 때문에 선교를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요?” 기도하면서 후방에서 선교사를 후원하기로 작정합니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와 물려받은 넓은 광야를 개간하면서 농산물을 팔아 중국선교를 후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탈곡기에 손이 끼어 들어가 손을 잘렸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 모습으로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요?” 기도하다가 노인들을 돕기로 작정합니다. 곧 땅을 팔아 양로원을 세워서 결국 “노인들의 어머니”라는 사랑스런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우리의 신앙은 이제 “주님! 저의 문제를 해결해주세요”라고 달라고 기도하는 신앙에서 “주님! 제가 주님의 뜻을 잘 행하게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능력을 좋아하지만 능력보다 중요한 것이 순종하는 심성입니다. 능력은 대개 자기 지향적이지만 순종은 하나님 지향적입니다. 결국 진짜 능력은 순종에서 나옵니다.
조지 맥도널드는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시간이 없다.”고 했습니다. 말씀의 감동만 있으면 바로 뛰쳐나가려는 자세를 가지고 살고, 옛날의 노예나 종처럼 철저히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순종은 수도꼭지와 같습니다. 순종의 수도꼭지를 틀면 반드시 은혜의 물이 나올 것입니다.
3. 기도하는 삶
본문 17절 말씀 하반부를 보십시오.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시도록 저희들도 기도해 드리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이 백성들의 말을 듣고 여호수아가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가나안 땅을 얻으려면 순종하는 ‘아멘의 백성’도 필요하지만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는 ‘눈물의 백성’도 필요합니다.
여호수아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백성들의 협조와 기도 없이는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누군가의 기도 없이 복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특별히 남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능력이 없습니까?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뜻을 기필코 관철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 27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가장 위대한 기도는 성령님이 이끄시는 기도인데 그 기도의 가장 큰 특징은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운다는 것입니다.
힘든 일이 있고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가끔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을 잘 아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있는데, 그래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에 근거한 청구서와 같습니다. 회사가 교회를 보면 그 해에 쓸 예산이 배정되었어도 무조건 지출하지 않고 청구서를 올려야 지출합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했어도 그 약속을 붙잡고 기도해야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4. 죽기를 각오한 삶
본문 18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여 무릇 당신의 시키시는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는 자 그는 죽임을 당하리니.” 즉 죽음을 불사하고 당신의 말에 따르겠다는 결사의 선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뜻과 가나안의 축복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사람이 있을 때 공동체가 사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음도 각오하는 행동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사도 요한이 예수님이 바닷가에 서 계신 것을 발견하고 베드로에게 “주시다!”라고 외치니까 베드로는 즉시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베드로가 왜 주님의 수제자가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수제자가 된 이유는 자신의 몸을 주님께 던질 줄 아는 열정과 행동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행동하는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대개 보면 말씀대로 즉각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도 움직입니다. 진짜 기도는 하나님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자신도 움직이게 합니다. 진짜 기도는 행동이 따르는 기도입니다. 나의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의 행동도 따르기 어렵습니다. 내가 감동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감동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지 말고 예수님께 몸을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 후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들어야 합니다. 그냥 날마다 기도만 하고 가만히 있으면 곤란합니다. 기도는 행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루 종일 기도만 한다고 기도가 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기도한 후에는 반드시 자기가 뼈를 묻을 곳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기도한 다음에는 죽기까지 실천해야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성도가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제게 맡겨진 일을 잘하지 못하면 저를 죽여주십시오. 어떤 어려움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런 단호한 마음을 가지면 은혜 받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처럼 죽기를 각오하면 하나님께서 더 살려주려고 하실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다 살려고만 하고 편하려고만 하니까 진짜 사는 길이 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때, 그 명령이 마음에 들고, 내게 편리하고, 그 명령에 순종해서 내게 유익이 있을 때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면 그것은 진짜 순종이 아니고, 그런 자세 속에는 가나안이 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죽기를 각오하고 남이 안 하려고 하는 힘든 일에도 순종하면 진짜 사는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5. 격려하는 삶
본문 18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소서.” 이 구절을 보면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격려는 목회자가 성도에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도 목회자를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목사님! 괜찮아요! 우리는 반드시 비전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제가 힘써 돕겠습니다.” 성도로부터 그러한 얘기를 들으면 얼마나 힘이 나겠습니까?
성경 에스라를 보면 백성들이 에스라를 일으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스라 9장 3절 말씀을 보면 에스라가 귀환 후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 것을 보고 너무 슬퍼서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아 있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때 백성들 중에 회개운동이 일어나고 그때 백성들이 에스라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에스라 10장 4절 말씀을 보면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위대한 백성입니까?
목회자도 사람인지라 때로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성도들은 목회자를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기가 꺾이면 공동체도 기가 꺾입니다. 사기가 꺾인 군대는 결코 승리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사기가 꺾이지 않도록 말과 행동으로 격려해주고, 목회자뿐만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도 그렇게 해주어야 합니다. 교인들은 서로 이해하고, 서로 세워주고, 서로 존중하고, 서로를 위해서 헌신하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 교회가 존재합니까? 사랑하고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전도서 4장 12절 말씀을 보면 “한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삼겹줄은 서로 격려할 때 ‘나의 줄과 너의 줄과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생기는 줄’을 뜻합니다. 그런 줄로 맺어진 공동체는 힘 있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요새 개 한 마리 키우는데 많은 돈이 듭니다. 어떤 때는 개를 사람보다 더 아끼고 개가 병들면 큰 돈을 들여서 수술까지 해줍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지금 많은 사람들이 고독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 고독합니까? 남이 찾아와주기는 바라지만 찾아갈 줄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혼자 구원받고 혼자 축복 받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열심히 천국 동료를 찾고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 축복을 멋지게 사용하십시오 >
우리는 축복받는 이유를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축복받아야 합니까? 가장 큰 이유는 보다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에 미칠 줄 알아야 합니다. 목표에 미친 사람이 목표에 미칩니다(도달합니다).
사도행전 26장 24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심문 받으면서도 전도하니까 총독 베스도가 말했습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그처럼 선교에 미쳤기 때문에 그는 가장 위대한 선교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왜 우리는 선교해야 합니까? 복음만이 진정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 자기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아니까 더 나은 삶으로의 변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변화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정말로 사랑한 사람들은 다 변화되었습니다. 어떤 철학이나 사상이나 힘도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없지만 복음은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면 선교에 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에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 사상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처음 그 운동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총살과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사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과 재산과 재능을 당을 위해 바쳤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가 실현된 세상을 갈망하며 그 사상을 위해 자신의 삶과 사업, 종교와 취미 그리고 빵과 가족과 친구와 연인까지 모두 버렸습니다.
어떤 공산주의자는 자기 연인에게 절교 편지를 보내면서 이렇게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나는 공산주의를 위해 낮에는 그 일을 하고 밤에는 그 일을 꿈꾼다. 이 비전을 떠나서는 나에게는 어떤 우정도, 사랑도, 대화도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이 비전을 위해 감옥에 갈 준비가 되어 있고 필요하다면 사형대에 갈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는 전도와 선교에 집념을 가져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내가 전도와 선교의 비전과 열정이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를 많이 해도 영혼을 위한 전도와 선교가 빠지면 다 의미 없는 시간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열심히 전도대상자를 찾아 나서고, 그를 만나고, 방문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세상이 악해진다고 생각만 하지 말고 그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전도에 나서야 합니다.
어느 날, 희랍에 사는 한 어머니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내 아들이 세상에 나가 정직하게 살면 세상이 미워할 테고 부정직하게 살면 하나님이 미워할 테니 차라리 집에서 키우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습니다. “그래도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십시오. 그 아들이 세상에 나가 정직하게 살 때 세상이 미워할지라도 반드시 절대자의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현실이 어렵고 환경이 어렵다고 생각할수록 더욱 사명감을 가지고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 자녀들에게 다른 교육은 잘 못해도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이끄는 사명감을 일깨우는 교육은 잘해야 합니다. 오늘도 가나안 정복을 위한 5가지 삶, 즉 단결하는 삶, 순종하는 삶, 기도하는 삶, 죽기를 각오한 삶, 그리고 격려하는 삶을 통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과 비전을 기필코 이루어내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