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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선생
인물소개
『삼국사기』에 강수는 중원 사량 사람이라고 전한다. 중원경은 오늘의 충주로 신라 삼국을 통일한 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강수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외교문서를 효율적으로 다뤄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어머니가 꿈에 머리에 뿔이 난 사람을 보고 임신하였는데, 그가 태어났을 때 보통 사람과 달리 뒷머리의 뼈가 높이 솟아 있었다고 한다.
태종 무열왕이 강수의 이름을 물었을 때 ‘우두(牛頭)’라고 답하자, 태종무열왕은 강수의 머리를 보고는 “강수(强首)라 부를 만하다.”고 하고 강수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무열왕 즉위년에 당나라의 사신이 가져온 어려운 내용의 외교문서를 완벽하게 풀이하고, 뛰어난 문장력으로 당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답서를 작성함으로써 학식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 뒤 당나라, 고구려, 백제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전담하게 되었고, 당나라에 원병을 청할 때도 외교문서를 작성하였다.
재물에 뜻을 두지 않아 가난하게 지내므로 무열왕이 해마다 조 1백 석을 하사하였다. 통일된 이후 그 공을 인정받아 문무왕으로부터 사찬(沙飡)의 관등과 아울러 녹봉도 해마다 2백 석을 더 받게 되었다. 그는 부모가 양가의 규수에게 장가들게 하려고 하자, 이미 신분이 낮은 대장간집 딸과의 관계를 들어 양가의 규수와 결혼하지 않았다. 이는 강수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당시에 출세보다 유교적 윤리의식에 충실한 도덕적 실천가였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김생서예가
인물소개
김생은 통일신라시대에 활동했던 서예가로 해동필가의 조종이라 일컬어진다. 김생은 말년을 두타행(頭陀行: 승려의 수련)을 하며 보냈는데 그 장소가 금가면 유송리에 있는 김생사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 김생(金生)조에, “김생은 부모가 한미(寒微)하여 가계를 알 수 없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는데 나이 80이 넘도록 글씨에 몰두하여 예서·행서·초서가 모두 입신의 경지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는 김생을 신품제일(神品第一)로 평하고 있다.
김생사지 동쪽 강변으로 석축제방이 있는데, 이를 김생제방이라고 칭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생사에서 공부하던 아이들이 제방 쪽의 여울소리가 시끄러워 방해가 되므로 김생이 도술을 써서 이 여울물을 돌리고 제방을 쌓았는데 그 후 여울소리가 멈춰 벙어리여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댐건설로 인해 잠겨서 제방이 잘 보이질 않는다.
김윤후장군
인물소개
고려 후기 충주산성 방호별감을 역임한 무신이자 승려이다. 그는 용인 백현원(白峴院)의 승려였는데, 1232년(고종 19) 몽골병이 침입해 오자 처인성(處仁城)]으로 피란하여 성민들을 지휘하였다. 이때 처인성의 주위를 지나던 몽골 원수 살리타이[撒禮塔]를 활로 쏘아 죽여 몽골군을 퇴각시켰다. 이 전과로 인해 고종이 김윤후을 상장군으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공을 타인에게 양보하고 관직을 사양하였다. 이에, 관직을 낮춰 섭랑장(攝郞將)으로 임명하자 그때서야 관직을 받아들였다.
1253년(고종 40)년 10월 김윤후는 충주산성 방호별감 직을 역임하고 있었다. 이때 야굴이 이끈 몽골의 대군이 쳐들어 왔는데, 그는 70여 일 동안 몽골의 대군을 맞이하여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하여 적을 물리쳤다. 김윤후는 식량이 떨어져 위태롭게 되자, “만일 힘을 다하여 싸우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관작을 제수할 것이니 그대들은 의심하지 말라.”하고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이어서 관노의 노비 문서를 불사르고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 주니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워 몽골군을 물리쳤다.
조정에서는 그 공을 높이 평가하여 김윤후를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에 임명하였고, 그 밖에 전공을 세운 자들은 관노, 백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작이 제수되었다. 조정에서는 충주산성 전투의 공로로 충주를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시켰다.
임경업장군
인물소개
1594년(선조 27)년 충주에서 태어난 임경업(林慶業)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소년시절부터 전쟁놀이를 즐겨 항상 대장이 되어 지휘하는 꼬마대장이었다. 장군은 충주 정심사가 있는 대림산 자락에서 심신을 단련하였는데, 이곳이 삼초대 이다. 1618년 동생 임사업과 함께 무과에 급제하였고, 1633년(인조 11) 청북방어사 겸 영변부사에 임명되어 의주의 백마산성을 수축하고 방비를 튼튼히 하는 한편 명나라의 반란군을 공격하여 명 황제로부터 총병(摠兵)에 임명되고 많은 하사품을 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시 임경업은 백마산성을 굳게 수비하고 있었는데, 청나라는 이를 알고 백마산성을 우회하였다. 이후 청나라가 명나라를 치기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을 때, 친명반청의 입장에서 명군과 연락하여 지연책을 쓰면서 명을 도왔다. 그런데, 명나라를 도운 사실이 알려지게 되어 청나라로 압송되었다.
1644년(인조 22) 심기원의 옥사가 일어났는데, 이와 관련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런데, 심한 추국을 받다가 1646년 6월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후 1697년 복관되어 충민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충주시 단월동에 충렬사를 건립하여 장군을 배향하였다. 충렬사는 1727년 사액되었고, 1791년 정조가 친히 ‘어제달천충렬사비’라 글을 지어 비석을 세우게 하여 오늘에 전한다. 묘소는 충주시 풍동 산 45-1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