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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성탄 제2강
은혜를 받은 자
말씀/눅1:26-56
요절/눅1: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하니”
오늘 말씀은 마리아에게 임한 성탄 소식입니다. 마리아에게 임한 성탄 소식은 매우 실제적이고 마리아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은혜로운 역사입니다. 이 시간 마리아에게 임한 성탄의 은혜가 무엇인가, 또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살펴보고 은혜받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마리아에게 임한 은혜가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되는지 생각해 보면서 예수님의 성탄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또 이 세상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천사 가브리엘이 성전에서 분향하던 사가랴에게 나타나 세례 요한의 잉태 소식을 알려주었는데, 그 이후 여섯 달이 되었습니다. 이때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갑니다. 그곳에 누가 살고 있었습니까?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는 청년과 정혼한 상태입니다. 남편 요셉은 목수였는데 당시 목수들은 집들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곳을 고쳐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들 부부의 집안 형편은 아기 예수님의 정결예식 때 보면 비둘기 두 마리로 제사하려 했음을 볼 때 그리 넉넉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신 성분도 다윗 왕가의 후손이었지만 이미 오래전 몰락했기에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와같이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조건으로만 본다면 마리아에게 어떤 특별한 조건을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리아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주권적으로 찾아오시고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뜻밖의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여기 ‘평안할지어다’의 헬라어 원어를 직역하면 ‘기뻐하라’는 의미입니다.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 ‘기뻐하라’하니 놀라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마리아가 당황해하자 천사는 마리아를 안심시키며 다시 한번 마리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은혜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은혜는 ‘아무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은혜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지만 사실 굉장히 어려운 단어입니다. 왜냐면 은혜는 우리 인간 중심으로 생각해서 주어지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편에서 베풀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왜 나를 선택하셨습니까? 나보다 더 훌륭하고 잘난 사람들도 많은데 내가 남들보다 더 도덕적으로 사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은 나를 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은혜 때문입니다. 은혜는 내 조건이 맞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서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마리아를 굉장히 숭배합니다. 지나치기 때문에 문제가 될 정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마리아에게 특별한 점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물론 육신적으로 구주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고 키우는 영광스러움을 누리기는 했지만 마리아는 결코 로마 가톨릭에서 말하는 신성의 위치에 올라갈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역사에 쓰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평범한 어린 소녀를 구속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받은 구체적인 은혜가 무엇입니까? 31절을 보십시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리아가 받은 은혜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처럼 자녀 없는 문제로 고통받다가 이런 말을 들으면 은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현재 상태는 어떠합니까? 요셉과 정혼은 했지만 아직 결혼식은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천사가 와서 이런 말을 하니까 그렇지, 만약 일반 사람이 와서 이런 말을 한다면 뺨따귀를 얻어맞을 수 있습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 얘기입니까? 그래서 세상의 많은 사람은 오늘 성경 말씀을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래동화처럼, 신화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천사 가브리엘은 처녀 마리아가 아들을 낳는 것이 은혜라고 합니까? 그녀가 잉태하는 방법과 그녀가 낳을 아들의 존재 때문입니다. 천사는 잉태하는 방법은 나중에 가르쳐 주고 먼저 마리아가 낳을 아들의 이름이 예수라고 말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의미의 ‘여호수아’를 헬라어로 발음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그 이름의 뜻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구체적으로 해석합니다. 마리아를 통해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됩니다. 세상을 구원할 자, 그리스도를 낳을 몸이면 어느 정도 조건을 보고 택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조선시대 때 세자빈을 간택할 때 집안 가문이나 배경, 지성과 성품을 살펴보았다고 합니다. 이것들이 다 충족되어도 외모가 부족하면 선택이 되지 못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 사는 처녀 마리아를 선택하시고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결혼하고 아이 낳고 키우는 평범한 인생을 살아갈 여자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인생에 개입하심으로 그녀는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낳고 기르는 특별한 은혜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많은 재물, 좋은 직장, 좋은 대학,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을 보면 복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는 은혜는 이런 단순한 일상생활 속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인생을 변화시키고 존재 자체를 변화시키는 영원한 가치가 있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무엇입니까?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쓰임 받는 부르심의 은혜입니다. 죄 가운데 살다가 영원히 파멸할 수밖에 없는 인생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토록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된 구원의 은혜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은혜입니다.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은혜를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무의미할까요? 하나님은 구원받은 이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도록 사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여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감당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마리아가 이 같은 은혜를 감당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아주 어린 소녀입니다. 추측하기로 마리아의 당시 나이가 12세에서 15세 이하였을 것입니다. 세상을 잘 알지 못하는 순박한 팔레스타인의 소녀입니다. 요즘같이 문명화된 사회가 아닙니다. 인터넷에 들어가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는 시대도 아닙니다. 천사를 통해 듣게 된 이야기는 충격 그 이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때도 마찬가지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기도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 큰 어려움과 부담감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은혜를 받고 나면 그동안 붙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아야 할 일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기쁘고 감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부담스럽고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은혜를 잘 감당하여 은혜가 진정한 은혜가 되도록 언제나 우리와 함께해 주십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아멘!”
마리아에게 천사를 보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찾아와 주셨습니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조금씩은 차이가 있겠지만 겉으로 보기에 다들 평범한 인생을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목자님을 통해, 친구를 통해, 가족을 통해 우리 인생에 찾아와 주셨습니다. 죄와 어둠에서 벗어나 참 빛인 예수님을 만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 안에 거하게 하시며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참된 기쁨도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크신 은혜인데 여기에 더해 우리를 구원역사에 동참토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예수님을 배우고 양들을 섬기고 말씀을 전하며 이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귀한 동역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며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마리아가 구속역사 가운데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낳는 은혜를 받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다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쓰임받기에 자격이 많이 부족합니다. 아니 자격 없던 자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우리와 함께 하시고 생명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물론 사명을 감당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어 마음이 힘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결과에 상관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쓰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열매가 많건 적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참으로 귀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와 주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다는 증거입니다. 주권적으로 우리 인생에 찾아오시고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삶을 살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러면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탄생하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큰 자이십니다. 32절을 보십시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여기 ‘크다’는 것은 ‘위대함’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신분 면에서, 능력 면에서, 성품 면에서 그 존재 자체가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이,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가 되시는 성자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아이의 모습으로 오시지만 그 본질이 하나님이신 지극히 큰 자입니다. 이 예수님은 자연계와 영적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나운 광풍을 잠잠하게 하셨고 사람을 사로잡고 괴롭히던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죽은 아이도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위대성은 이런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한 아기로 탄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궁궐에서 태어나지 않고 냄새나는 짐승의 밥통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모든 인생에게 섬김과 경배를 받아야 했지만 오히려 섬기고 낮아지셨습니다. 마침내는 인류구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 제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히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32b,33).” 하나님은 다윗의 왕위를 예수님에게 주십니다. 이는 구약에 기록된 예언으로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분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다윗 왕처럼 백성을 섬긴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왕으로 백성들을 사랑과 긍휼로, 공평과 정의로 다스렸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런 다윗을 목자로 여기고 따랐습니다. 다윗의 이미지를 가지신 예수님은 이 땅을 긍휼과 공의로 다스리시고 올바른 질서를 세우십니다. 이는 세상 통치자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세상 통치자들은 권모술수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위에서 군림하기 쉽습니다. 아래로 내리누르면서 자신의 통치권을 강화하고 나라를 통치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랑과 긍휼, 겸손과 평화, 공평과 정의를 가진 왕으로 백성들을 섬기고 늘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내 인생의 왕이 되고 주인 되었을 때는 그 마음에 불안과 염려, 미움과 갈등이 있습니다. 또 이 세상의 통치자가 누가 되든 세상에 완벽한 공의를 실현하고 우리에게 참 만족을 가져다줄 수는 없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든 윤석열 대통령이든 그 누구든 그렇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과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 마음에 평화가 임하고 질서가 있고 진정한 안식이 주어집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올바른 관계성을 맺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도 사랑의 관계성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다스려 주실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은혜입니다.
또 이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는 무궁합니다. 예수님이 죄와 죽음의 세력을 모두 멸하셨기 때문에 쇠하거나 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그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원한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이 땅에서 예수님의 구원하심으로 영원한 그 나라를 맛보며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도 주님의 말씀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갈 때 자유와 사랑과 평강과 기쁨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갈 때 이 같은 삶이 영원무궁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 되셔서 영원토록 다스려 주신다는 생각을 할 때 얼마나 감사하고 흥분되는 일입니까?
이때 마리아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의 이 반응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아무리 은혜가 크기로서니 생물학적으로 그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처녀라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천사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35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천사는 성령께서 임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녀를 덮어 그녀가 잉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상식적으로 처녀가 아이를 갖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은 얼마든지 처녀가 아이를 가질 수 있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로 온 세상과 사람의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사건은 인류 역사의 최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너무 신비로운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기 어려워합니다. 동정녀 탄생, 처녀가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도 그렇지만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다는 것이 과연 믿어지느냐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 속 이단들의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이단들은 주로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예수님이 역사적인 인물이었고 인간 예수라는 부분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신성은 부인합니다. 과연 그가 하나님이신가 하는 문제는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길에 들어서려면 통과해야 할 큰 관문입니다. 성탄 말씀 속에서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동정녀를 통한 탄생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어떤 성령의 사역을 증언합니까? 36절을 보십시오. 그녀의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임신했습니다.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졌는데 임신한 지 이미 여섯 달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37).”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믿으면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임신할 수 없게 된 사람의 태를 열어 아이를 갖게 하실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처녀의 태를 열어서 아이를 갖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이 처녀에게 아이를 갖게 할 수 있다는 말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성모로서의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믿음의 결단을 하고 그 부르심을 영접할 것이냐 거절할 것이냐의 문제만 남았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했습니까?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38).” 종은 마땅히 주인의 뜻만을 따를 뿐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이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역사에 자신이 쓰임 받을 준비가 다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이 같은 엄청난 부르심 앞에 어떤 핑계도 대지 않았습니다. 무게감이 크고 고통스러운 길이라 할지라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천사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붙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믿음으로 영접했지만 나이 어린 처녀가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게감이 커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누구를 찾아갑니까? 자기보다 앞서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한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믿음의 선배 엘리사벳을 찾아가 하나님의 역사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어떤 카운슬링을 해주었습니까? 엘리사벳은 성령충만하여 “네가 여자 중에 복이 있다. 정말 복 받은 거야!” 딸과 같은 마리아에게 ‘내 주의 어머니’라 부르며 마리아의 결단을 축복해 줍니다(42,43).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마리아는 ‘복 받은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45). 하나님의 약속을 순수하게 믿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엘리사벳의 카운슬링을 들은 후 마리아의 심령에는 은혜와 함께 주어졌던 무게감이 덜어지고 이제는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터져 나왔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46-48).”
여기 ‘비천하다’는 말은 다른 어떤 힘도 가지지 못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길이 없는 자들입니다. 힘도 없고 배경도 없고 권력도 없고 인맥도 없는 자들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바로 그런 자를 향해 베푸시는 돌보심을 찬양합니다. ‘돌보셨다’라는 말은 ‘~에 마음 쓰다’, ‘잊거나 소홀히 하지 않도록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여 생각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깊이 보살펴 주셔서 예수님을 잉태하도록 하셨습니다. 지금부터 사람들은 마리아를 ‘복 되다’고 말합니다. 마리아가 비천한 사람에게서 복 받은 사람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볼 때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들꽃처럼 피었다가 사라질 수 있었는데 구속 사역에서 영원히 기억하는 아름다운 꽃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아픔도 있고 희생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돌보심, 주님의 쓰심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하신 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능력의 하나님이 행하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십니다. 그분의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대대로 이릅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셨습니다. 주린 심령으로 주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는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지만 스스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는 교만한 자는 빈손으로 보내셨습니다(49-53).
이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역전의 하나님이십니다. 약하고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이 구원받는 대전환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엘리사벳은 오랫동안 아기를 갖기를 원했지만 임신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임신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전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요한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비천한 마리아에게도 하나님의 역전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녀는 구주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비천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 역전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도 일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조상들과 맺으신 약속의 말씀대로 그 자손들에게 신실하게 지켜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54,55). 이 하나님이 비천한 우리 인생을 역전시켜 복되게 하셨고 앞으로도 복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성탄절이 다가오면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나의 인생에 은혜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묵상하고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겸손과 사랑의 왕, 평강과 정의의 왕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영원토록 다스려 주십니다. 비천한 자를 만세에 은혜를 받은 자, 복 받은 자로 살게 하시는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