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1행짜리 2연으로 이루어진 이 짧은 시에 시인이 하려고 하는 말이 요약되어 있는 듯하다. ‘시퍼렇게 멍드는 삶이 계속되더라도 허옇게 살아내야 한다’는 말이다. 차가운 밭에서 노랗게 피어나는 장다리꽃이 햇볕 아래 시리도록 빛나 보이는 것은 그러한 삶의 긍정적인 의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워도, 죽음이 예비 되어 있어도, 현재의 삶에서 강렬하게 살아내는 것이 생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생에 대한 박주용 시인의 인식인 것 같다.
목차
시인의 말 4
1부
붉은 수수 12
참깨를 털며 13
뻐꾸기가 정오의 문을 열 때 14
내 삶에 무꽃이 피었다 하여 텃밭에 나가보니 15
달의 화분 16
꽃불 신호등 18
꽃의 계절 19
금낭화 20
칸나 21
묘목을 키우며 22
압화전을 보며 24
감꽃 25
시월의 은행나무 26
오동꽃 27
꽃신 28
나무 29
감성의 집 30
2부
묵묘 32
작정한다는 것 33
동자승 34
터널을 지나며 35
잠 36
묵언 수행 37
누군가를 부를 때 38
상생 40
세상살이 41
무릎을 굽다 42
개가죽나무 44
멍 45
봄이 접히다 46
회개 47
서랍을 열며 48
올빼미 49
코끼리 둥구나무 50
3부
카푸치노 54
사량도 55
유월을 만나다 56
만수산 횟집 58
삼월 61
덕종이 62
지심도 63
오타루에서 64
황산벌에서 66
사랑·1 67
자전거를 타며 68
사계 고택 70
무상사 가는 길 71
사랑·2 72
짝사랑 73
변기를 교체하며 74
팥죽을 먹으며 76
4부
쌍둥이 별자리 78
개화·1 79
나의 풍금씨 80
스크래치 82
개화·2 83
콩의 꿈 84
수목장 86
보내기 번트 87
빨래 풍경 88
할아버지와 누에 89
청산 장터 90
소래갯재 아이들에게 92
젓가락의 감정 96
어머니의 연못 98
시골집 100
고백 102
해설목숨 있는 약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양애경 104
출판사 리뷰
지는 것들의 이름 불러본다
지는 것들은 멍으로 지는 것이어서 그림자도 피멍 들어 있다 멍은 스스로를 색으로 떨구어 목덜미 물린 목련은 하양 지고, 철 내내 심장 터진 철쭉은 빨강 진다 장독대 옹기종기 피어있는 작은 이끼도 하늘의 크기는 같아 파랑 진다
이름 부를 때마다 짙어지는 멍, 새기는 일보다 지우는 게 힘들 때가 있다
지는 것들은 한세상을 지우며 지는 것이어서 화장 지운 민낯에도 멍의 흔적 남아 있다 화장터 옆 오동꽃은 딸랑딸랑 보라 물결, 상여길 이팝꽃은 나풀나풀 하양 물결, 이승 지는 것들의 행렬에는 멍의 물결 흐르고 있어 손수건이 촉촉하다
지는 것들의 이름 불러보면 멍은 더욱 눈가를 맴도는 것이어서 세상은 지독하게 습하다.
- 시 「멍」 전문
시 「멍」은 죽음을 제재로 한다. 시인은 지는 꽃에서부터 죽음에 대한 사색을 시작한다. 꽃은 지상의 생명 중 가장 화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며칠 또는 몇 시간 동안 눈부셨던 꽃은 물기가 가시기 시작하면서 멍이 들고 마침내는 땅에 떨어져 목숨을 마치게 된다. 물론 시인은 여기서 꽃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시에서 꽃은 태어나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상징한다. 존재의 성격은 모두 다르기에 죽음을 맞는 모습도 모두 다르다. ‘목련은 하양 지고, 철쭉은 빨강 지고, 이끼는 파랑 진다’. 꽃이든, 사람이든, 나의 부모와 혈육이든 간에 죽음 앞에선 모든 존재가 평등해진다. 죽는다는 것은 의미 있는 한 생애가 사라지는 일이기에, 이 시인이 노래했듯, ‘지는 것들은 한세상을 지우며 지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독자는 착잡해지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민낯에 멍의 흔적 남아 있’다는 것은, 하나의 존재가 죽음을 맞기까지 겪은 고통스러운 과정의 흔적을 말한다. ‘멍’은 이 시집에서 출현빈도가 매우 높은 시어이다. ‘상처’, ‘고통’의 뜻을 가지고 있는 이 ‘멍’은 생명 있는 것들이 죽음으로 향해 가는 과정을 상징한다.
3연에서 장례행렬의 목적지인 화장터와 상여길 옆에서 흐드러지게 피고 지는 꽃과 아울러, 사랑하는 이와 영영 이별하는 사람들의 상처와 슬픔이 드러난다. ‘지는 것들의 이름을 불러보면’, 시인이 노래하듯 ‘세상은 지독히 습한’ 곳이 되는 것이다. 상처와 죽음을 다룬 이 계열의 작품들로 시 「꽃불 신호등」, 「봄이 접히다」, 「어머니의 연못」, 「할아버지와 누에」 등이 있다.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들과의 인연의 끝을 노래한 이 시들은 여리고 절절하고 아름다우며, 인생이 주는 깨달음이 담겨 있다. 촉촉한 감성의 위 시들과 달리 다소 건조한 어조로 장례를 다룬 「보내기번트」는 박주용 시인의 다른 시들과 시어의 느낌이 많이 다르다.
야구방망이 대신
꽃 한 송이 들고 들어선 빈소
촛불이 툭툭 허리 굽히며 모션 취하는 순간
코끝 찡하게 어루만지며 보내오는 감독의 사인
타석에 들어서 있는 슬픔의 볼 카운트는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
문상 끝낸 사람들은 저희끼리 모여
베이스에 진루해 있는
주자의 트레이드 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삼루쯤에서 홈으로 내달릴 준비하는
영정 속 사내 주위로
국화꽃 하얗게 피어나고 있는 찰나
지상의 마지막 호흡을 모아
번트를 댄다
사람 보내는 일,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 시 「보내기 번트」 전문
장례식장에는 가족과 친족, 그리고 직장과 관련된 사람들이나 거래처 사람들 등 고인과 여러 갈래의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이 모인다. 고인과의 감정적 거리가 저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애절하게 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봉투를 전달하는 책무를 마치고 홀가분해진 사람도 있다. 야구 게임과 장례 의식을 나란히 놓은 이 시는 객관적 시점에서 바라본 고인과의 이별을 그렸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가 죽음을 희화적으로 다룬 것은 아니다. 고인은 생리적으로는 죽음이 선고되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아직 죽은 것이 아니다. 장례식장에 그를 알던 사람들이 모여서 그와의 여러 추억을 회고하면서 이별을 완성했을 때, 즉 고인을 저 세상으로 고이 보내주었을 때 죽음이 완성된다. 장례란 결국 ‘사람이 하는, 사람을 보내는 일’이라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해석에서는 일종의 철학적 여유가 풍긴다. 삶과 죽음에 대해 잘 알게 된 나이의 연륜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여유라고 할까. 그리하여 마침내 시 「묵묘」에 이르면, 시인은 죽음을 생명의 종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성된 우주의 한 존재라고 해석하게 된다.
알몸은 봉긋했던 봉분에 밋밋한 평지 하나 얹기까지 수억의 구름 삼켰을 터, 절정의 끝자락에 잠자리 한 마리 평온하게 올리기까지 수만의 소지 올렸을 터
자작나무 등걸도 스스로의 생각 주저앉히고 흘러내려 시나브로 이승 지고 있다
주저앉은 것들, 시간에 깎이고 다듬어져 모난 것이 없다 흘러내린 것들, 열두 구비의 생각도 모자라 웅덩이 파놓고 동안거 들고 있다
얼마나 둥근 묵언 수행이기에 가시나무도 저렇게 고요할 수 있을까
쉿, 우주의 꽃봉오리 열반 중이다.
- 시 「묵묘」 전문
‘묵묘’란 오래 관리가 되지 않아 둔덕인지 무덤인지도 구별이 잘 안 되는 상태가 된 무덤을 말한다. 봉긋했던 봉분이 평지에 가까워지기까지 오랜 세월이 지나갔다. 그 안에 누운 알몸의 사람은 이미 골격도 정념도 다 사라져버린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버려지고 잊혀진 무덤이라고 생각하면 안쓰럽지만, 박주용 시인은 이 묵묘를 다르게 해석한다. 수십 수백 년의 ‘묵언수행’을 거친 수행자인 무덤의 주인은, 누구의 자식 누구의 어버이 어디의 누구라는 모든 제한을 넘어서서, ‘우주의 꽃봉오리로 열반에 든’ 초월적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버이와 자식, 사랑으로 맺어진 인연들과 그 인연의 끊어짐으로 인한 비탄, 아름답고 여린 생명을 가진 것들이 멍들고 시들고 죽어가는 것을 보는 애달픔 같은 삶의 고통도, 우주의 정상적인 순환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의연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여기까지 철학적 사색을 계속해 온 시인은 마침내 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태도에 도달하게 된다.
시퍼렇게 멍들어도 어쩔 거여 허옇게 살아야지
장다리꽃, 시리다.
- 시 「내 삶에 무꽃이 피었다 하여 텃밭에 나가보니」 전문
1행짜리 2연으로 이루어진 이 짧은 시에 시인이 하려고 하는 말이 요약되어 있는 듯하다. ‘시퍼렇게 멍드는 삶이 계속되더라도 허옇게 살아내야 한다’는 말이다. 차가운 밭에서 노랗게 피어나는 장다리꽃이 햇볕 아래 시리도록 빛나 보이는 것은 그러한 삶의 긍정적인 의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워도, 죽음이 예비 되어 있어도, 현재의 삶에서 강렬하게 살아내는 것이 생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생에 대한 박주용 시인의 인식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