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2
삿 5:13-23
13 그 때에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내려오셨도다
14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들은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들이요 베냐민은 백성들 중에서 너를 따르는 자들이요 마길에게서는 명령하는 자들이 내려왔고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들이 내려왔도다
15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잇사갈과 같이 바락도 그의 뒤를 따라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16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찌 됨이냐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17 길르앗은 요단 강 저쪽에 거주하며 단은 배에 머무름이 어찌 됨이냐 아셀은 해변에 앉으며 자기 항만에 거주하도다
18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
19 왕들이 와서 싸울 때에 가나안 왕들이 므깃도 물 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은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20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21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 강은 옛 강이라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22 그 때에 군마가 빨리 달리니 말굽 소리가 땅을 울리도다
23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삿 5:13-23 / 그때에 남아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지도자들을 따라나섰네. 여호와의 백성이 모두 다 용사가 되어 여호와 편에 서서 싸우러 나섰네. 14)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계곡으로 뛰어 내려가고 그 뒤를 따라나서는 이들은 베냐민 지파, 마길에서 군사령관들이 내려왔고 스불론에서 지휘봉을 거머쥔 이들이 내려왔네. 15) 잇사갈의 지휘관들이 드보라와 한편이 되었네. 그래, 잇사갈이 드보라편에 선 것처럼 바락도 드보라편에 섰지. 계곡을 향하여 폭풍처럼 내달렸던 이 전사들! 하나 르우벤 지파는 입씨름만 벌이고 있을뿐 싸우러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말았네. 16) 어찌하여 양떼 틈에 끼여 앉아 우물쭈물거리는가? 어찌하여 주저앉아 목동이 불어 대는 피리 소리에 취해만 있는가? 답답한 르우벤 지파는 입씨름만 벌이고 있을뿐 싸우러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춤거리고만 앉아 있지. 17) 길르앗 지파는 요단강 건너편에서 건너올 생각조차 못하고 단 지파 사람들은 남의 나라 배나 타고 다니며 장사나 하고 있지. 아셀 지파는 해안가에 자리잡고 눌러 앉아 움직일 생각일랑 아예 뒷전으로 밀어 두고 있을 뿐 18) 하나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는 혼신의 힘으로 목숨까지 내걸고 싸움터에서 싸웠다. 19) 왕들이 몰려들어 싸움을 벌이는구나. 가나안을 지배하는 여러 왕들이 므깃도 물가 다아낙에서 있는 힘 다하여 싸워 봤지만 생기는 것 아무것도 없는 허망한 싸움이었을 뿐 20) 별들도 하늘에서 싸우는구나. 시시각각 자리를 옮겨 나가듯 하늘의 별들도 시스라에 대항하여 싸움을 벌였다. 21) 기손 시내가 흘러 넘쳐 저 무리를 휩쓸었다. 기손 시내에 큰물이 나서. 가자, 가서 저 원수를 향해 있는 힘 다하여 짓밟자. 22) 아, 군마가 질풍같이 내달려오는구나. 그 말발굽 소리에 온 땅이 흔들흔들. 23) 여호와의 심부름꾼이 이르시는 말씀. 메로스야, 저주받아라. 이 망할 것들아, 저주받아라. 여호와를 도우러 나오지도 않는구나. 여호와를 도우러 용사들과 함께 나오지도 않는구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사 드보라가 노래를 지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를 계속해서 찬송합니다.
용사를 치시려고 내려오셨도다(13-18) ‘그때’란 시스라의 최신식 병거 구백 대와 훈련된 군사들과 대조하여 오합지졸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전쟁이 시작하는 때를 말합니다. 그때 다볼 산에 진을 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을 내려오면서 용감하게 싸웠던 모습을 노래하고, 그 전쟁에 함께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13). 드보라는 이 전쟁에 참여한 지파들을 칭찬합니다. 에브라임, 베냐민, 스블론, 잇사갈등 싸움에 달려 나온 지파가 있고 목숨을 걸고 싸운 스블론과 납달리 지파도 있습니다. 그러나 르우벤 지파와 길르앗과 단 지파는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두 번이나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라고 말합니다(15, 16). 장자 지파로써 결국 불참을 결정한 무책임에 대하여 역설적으로 강하게 질책하는 표현입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지파는 이 승리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할 것입니다. 동족들이 전쟁에 나가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을 때에 외면하고 자기의 일을 살피며 태평하게 있었다면 책망을 받는 일이 될 것입니다. 드보라는 이 노래안에 전쟁을 시작하기 전, 전쟁의 과정, 전쟁의 결과를 아주 구체적으로 담아내면서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과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19-23) 가나안 왕들이 와서 싸웠으나 은들을 얻지 못하였습니다(19). 시스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완전히 달라진 상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전쟁 이전에 이스라엘은 20년 동안 야빈 왕의 군대장관 시스라에게 학대당하고 약탈당했습니다. 그러나 시스라와의 전쟁 승리 이후에 가나안 왕들은 이스라엘에게 아무것도 탈취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에 의해 진멸당하고 맙니다.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시스라와 싸웠다”라고 말합니다(20). “기손 강이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여호와께서 별들의 운행과 자연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전쟁을 도우셨다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별들도 적들을 치는 일에 동원되었다는 말입니다. 기손 강물이 갑자기 불어나 그들이 밟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저주를 함께 받은 성읍의 이름이 메로스입니다. 메로스는 다볼 산 남방에 위치해서 전쟁터 가까이 있었던 지역이었지만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저주를 받습니다.
적 용 : 여러분은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입니까? 방관하는 사람입니까?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하며 전쟁에 앞장서서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차를 따라주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보면 한 가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차 주전자에서 차를 담으려면 찻잔의 위치는 분명 주전자 보다 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며 겸손이라는 뜻을 생각해 봅니다. 겸손은 분명 낮은 곳에서 피어납니다. 겸손의 왕으로 하늘로부터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그분을 통해 높아지려 하기보단 낮은 곳에서의 섬김을 배웠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앙망할 때 우리 마음 속의 빈 잔도 하늘의 거룩한 것으로 채워질 것을 믿습니다.
< 설 교 >
드보라의 노래(2)
삿 5:19-31
19절부터는 이제 전쟁에 대해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열왕이라는 말은 왕들이라는 말입니다. 가나안 왕 야빈만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야빈 왕과 함께 가나안의 여러 왕들도 함께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연합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에브라임과 베냐민은 후방에서 아멜렉과 싸워서 이 아말렉으로 하여금 전쟁에 합류하지 못하게 막았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 여러 왕들이 바락의 군대와 최후의 전쟁을 하기 위해 므깃도 물 가 다아낙에 모였습니다. 4장에 보면...
(13)시스라가 모든 병거 곧 철병거 구백승과 자기와 함께 있는 온 군사를 이방 하로셋에서부터 기손강으로 모은지라(삿 4:13)
여기 기손강과 므깃도, 다아낙 다 같이 붙어있는 지역입니다. 이스라엘의 북부지역이었고, 해안가이고 갈멜산이 있는 곳입니다. 바락과 드보라는 그보다 더 북쪽 지역인 게데스에 군대를 소집하고 기손강과 므깃도, 다아낙 근처인 다볼산으로 진격해 내려갔던 것입니다. 어쨌든 므깃도에 가나안의 열왕들이 군대를 소집함으로써 최후의 전쟁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철병거 900승을 거느리고 있음을 생각하면서 승리를 장담했지만, 그러나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힘없는 이스라엘 군대가 아니라, 별들과 강들과 대자연의 힘이었습니다.
(20)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21)기손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강은 옛강이라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22)그 때에 군마가 빨리 달리니 말굽소리는 땅을 울리도다
그들은 별들, 그리고 강들, 곧 대자연과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최첨단 과학기술로 무장해고, 자연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지진한번 나니깐 일본이라는 대국이 휘청거리는 것을 보십시오. 대자연의 힘은 인간이 결코 이겨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가나안 군대들이 맞닥뜨린 것은 이런 대자연의 힘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앞서 가셔서 친히 싸우시는 것입니다.
별들이 어떻게 그들과 싸웠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별들이 비를 쏟아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당시 관념을 빌린 것이라면, 비를 내리심으로써 그들과 싸우셨다는 말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기손강이 무기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비 때문입니다.
기손강은 큰 비가 내릴 경우 그 지역을 질퍽한 습지로 만드는 그런 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비가 내림으로써 기손강이 철병거 900승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표류시켰던 것입니다. 철병거에게 있어서 진흙과 같은 땅은 바로 쥐약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와 기손강을 통해서 그들의 철병거를 완전히 무력화 시키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그들과 친히 싸우셨기 때문에 그 싸움은 승리가 보장된 싸움이요, 반드시 이기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기 4:14에서 드보라가 머뭇거리는 바락에게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14)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 이에 바락이 일만명을 거느리고 다볼산에서 내려가니
이 전쟁은 하나님이 앞서 가셔서 친히 싸우시는 전쟁이기 때문에 이길 수밖에 없는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주님이 친히 앞서 싸우시는 전쟁이기 때문에 이길 수밖에 없는 전쟁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 앞에서 현실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이 믿음을 잃어버리고 바락 처럼 주저하고 머뭇거릴 때가 많습니다. 드보라 자신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철병거 앞에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21절 끝 부분에 한 독백이 나옵니다. 드보라가 자신을 향해서 외치는 말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이것은 두 가지로 번역될 수 있는데, 본문의 한글개역처럼 단순한 서술로서 “내 영혼이 힘 있는 자를 밟았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보다 자연스러운 번역으로 생각되는 것은 표준새번역이나 현대인의 성경에서처럼 자기 명령에게 하는 명령으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힘차게 행진하여라” 또는 “내 영혼아 힘있는 자들을 밟으라” 그렇게 번역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번역이 맞다면, 용기를 내서 계속 전쟁을 수행하라고 자기 자신을 향해 명령하는 것입니다. 믿고 싶어도 막상 현실에 부딪히면 믿음을 잃기 쉬운 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생기지 않을 때는 이 드보라처럼 말씀을 가지고서 끊임없이 자기에게 외쳐야 합니다.
아무리 말도 안 되는 거짓말도 처음에는 “에이~ 그런게 어디있어.” 그러고 두 번째로 말하면 “말도 안돼.” 세 번째 말하면 “어?” 네 번째는 “정말?” 다섯 번째는 “진짜?” 여섯 번째는 “그럴 수도 있겠다.” 일곱 번째 “정말 그러하겠구나...” 그렇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쇠뇌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음이 연약해질 것 같으면,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쇠뇌를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낙심이 될 때에, 자기를 향해서...
(11)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 (시 42:11)
(1)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2)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이렇게 끊임없이 말씀을 통해 자기에게 외쳐야 합니다. 그러면 이 외침을 은혜의 방도로 사용하셔서 우리 안에 믿음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주님이 우리의 도움이 되심을 믿고 믿음으로 전쟁에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22)그 때에 군마가 빨리 달리니 말굽소리는 땅을 울리도다
패배자들이 도망치기 위해 허겁지겁 말을 달리는 상황에 대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싸우시니깐 전의를 상실하고 완전히 낙담과 절망 속에서 살기위해 몸부림치는 처절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23)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 거듭 그 거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24)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거한 여인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축복과 저주의 단락입니다. 메로스는 저주의 대상이고 야엘은 축복의 대상인데, 여기서 메로스가 정확하게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여기만 언급되는 단어입니다. 아마도 추격전을 펼칠 때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바락이 도움요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요청을 거부하고 도와주지 않은 어떤 거민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로 이들에게 저주가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엘은 복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다 용기가 없어서 벌벌 떨었는데, 이 야엘은 대담한 용기로 이 여호와의 전쟁에 합류하여 시스라를 암살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24)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거한 여인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칭송됩니다.
(25)시스라가 물을 구하매 우유를 주되 곧 엉긴 젖을 귀한 그릇에 담아주었고(26)손으로 장막 말뚝을 잡으며 오른손에 장인의 방망이를 들고 그 방망이로 시스라를 쳐서 머리를 뚫되 곧 살쩍을 꿰뚫었도다(27)그가 그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졌고 그의 발 앞에 꾸부러져 엎드러져서 그 꾸부러진 곳에 엎드러져 죽었도다
시스라는 여자에게 속아서 아무런 힘없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에글론의 비참한 최후를 익살스럽게 묘사했듯이 역시 이 시스라도 아주 익살스럽고 치욕적으로 그 최후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라는 문구가 3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올림픽 축구에서 박주영 골을 넣어서 일본을 이긴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마다 그 동영상 계속해서 반복해서 보면서, 볼 때 마다 유쾌 상쾌 통쾌를 느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을 괴롭힌 원수의 죽음을 다시금 반복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그러한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야엘이 시스라를 죽인 그 과정에 대한 묘사는 무한반복해도 질리지가 않는 것입니다.
(28)시스라의 어미가 창문으로 바라보며 살창에서 부르짖기를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고 그의 병거 바퀴가 어찌하여 더디 구는고 하매(29)그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하였겠고 그도 스스로 대답하기를(30)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사람마다 한 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시스라는 채색옷을 노략하였으리니 그것은 수놓은 채색옷이리로다 곧 양편에 수놓은 채색옷이리니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 하였으리라
이 부분은 예상치 못한 전개입니다. 왜 드보라는 승리의 절정에 해당되는 클라이막스 부분에 갑자기 이 이야기를 할까요? 시스라의 어머니가 시스라가 더디 오자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가운데, 옆에 있던 시녀들이 “전리품을 나누고 그 전리품을 즐기느라(사로잡은 여자들을 겁탈하며 즐기느라) 늦게 오는 것이다” 라고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요즘 같으면 인터넷과 통신기술이 발달되어서, 사건이 일어나면 바로바로 생 중개 되지만, 옛날에는 안 그렇습니다.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추측할 뿐입니다. 철병거 900승이 있으니 자기 아들이 당연히 승리하였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본인들이 이스라엘의 전리품이 될 형편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이 상황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독자편에서 볼 때, 정말 불쌍하고 비참한 모습입니다.
만일 그들이 패한 것을 알았다면 두려워 떨고 그래서 살길을 찾아 도망가려고 했을 것이고, 그것이 그나마 덜 불쌍해 보일 텐데, 그들은 자신들에게 곧 미칠 그런 임박한 멸망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상황가운데서 낙관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역설적으로 그들의 암울하고 비참한 상황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허락된 승리가 얼마나 크며, 하나님께서 그 대적들을 어떻게 비참하게 멸하셨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1)여호와여 주의 대적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년 동안 태평하였더라
이 고백은 대단한 고백이고, 위대한 고백이고, 놀라우면서도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주의 대적은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여기 드보라가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라고 했는데, 이스라엘이 주를 사랑했습니까? 그들이 이런 구원의 은혜를 받을만한 어떠한 행위나 자격이 있었습니까? 어떻게 보면 이러한 간구는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과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지금 자신들이 가나안 왕 야빈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이유가 자신들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사사기의 구조를 흔히들 잘못 생각하는 것이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하나님이 징계하시고, 그들이 회개하고 여호와를 찾으면, 다시 구원하시고 하는 식으로 반복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부르짖는 것이 참된 회개일까요? 전혀 회개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는 없겠지만, 반쪽 회개 또는 온전치 못한 회개입니다. 결국 회개했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지고, 구원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또 구원해줘도 다시 범죄할 것을 아시면서도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나가 죽어라 하고 쫓아내어도 밤에 슬그머니 오면, 그 자식이 잘못을 고친 여부에 상관없이 저녁을 챙겨주고 잠재워주듯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스라엘을 다루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고, 그들의 하나님이시며,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는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습니다.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3)
(22)네가 그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나의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출 23:22)
바로 이러한 은혜언약에 기초해서 지금 이 간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때때로 범죄하여 징계를 받지만,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원수를 갚아주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소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안다면, 마땅히 어떻게 할 수밖에 없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고 여호와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 언약백성들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징계하시되 포기치 아니하시고 그들을 구원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약속하셨던 여인의 후손 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원리로 이 세상을 그동안 섭리해오셨고, 또 장차 이 원리를 따라 세상을 궁극적으로 완성하시고 이 세상의 역사를 끝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을 대적하는 무리들을 심판하시고 언약백성을 구원하시고 승리와 영광을 주신 이 바락과 시스라의 전쟁 사건은 구속사적으로 세상 끝에 있을 궁극적인 최후의 전쟁을 예표하는 사건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 전쟁이 하나님의 백성과 사단마귀의 백성들 간의 최후의 전쟁으로 연결되어집니다. 그 이름 하여 ‘아마겟돈’입니다. “마겟돈”은 “므깃도”를 헬라어로 발음한 것이고, ‘하’(또는 ‘아’)는 “산” 또는 “언덕”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마겟돈은 “므깃도의 언덕, 므깃도의 산”을 의미합니다. 해당구절을 찾아보시죠.
(13)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14)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 (16)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계 16:13-14,16)
용과 짐승(멸망의 아들, 적그리스도)과 거짓 선지자(성령을 대적하는 악령)은 악마적인 삼위일체입니다.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이신 것처럼, 사단 마귀도 그것을 모방하여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라는 삼위일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 세 입으로부터 귀신의 영이 나와 천하를 미혹하여 군대를 소집합니다. 그리고 그 군대를 “므깃도의 산”에 모읍니다. 사도요한은 바로 사사기의 바락과 시스라의 전쟁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최후의 날에 있을 전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주님이 재림하여 온 세상을 심판하시기 직전에 있게 될 최후의 전쟁을 말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 보듯 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바락이 시스라를 박살내었듯이, 이 아마겟돈의 전쟁은 사단마귀의 패배가 정해진 전쟁입니다. 이러한 최후의 전쟁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은 여러 가지 다른 이미지를 사용하면서 자주 언급합니다.
(13)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14)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15)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16)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17)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3-17)
용이 미가엘과의 싸움에서 지고 땅으로 내어쫓김을 받았을 때, 교회를 상징하는 여자를 핍박합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용이 결박되고(이점은 20장에서 논의가 됩니다) 이 여자는 용의 낯을 피하여 한때 두때 반때(3년 반, 1260일, 42달->그리스도의 초림서부터 재림까지의 기간) 동안에 양육의 기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 용이 놓임을 받고 여자를 향해 공격을 감행하지만, 무위로 돌아갑니다. 이러한 용의 마지막 공격을 17절에서 다른 측면에서 묘사합니다. 여기서도 역시 용은 교회를 공격하기 위해 바다 모래 위에 군대를 소집하여 모으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마겟돈의 전쟁입니다.
그리고 19장에서는 바로 짐승과 거짓선지자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최후의 전쟁을 묘사합니다.
(19)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20)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21)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계 19:19-21)
짐승과 거짓선지자들이 왕들을 소환하고 군대를 소집해서 백마 타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군대를 대적합니다. 최후의 전쟁, 곧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불 보듯 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권능으로 단칼에 그들을 진멸하시고 지옥에 던져 넣으셨습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검에 의해서 심판 당합니다. 그러면 용은 어떻게 됩니까?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 해서 삼위일체라고 했는데, 왜 용은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것에 대해서 서술하는 것이 20장입니다. 이 20장은 앞선 아마겟돈 전쟁을 다시금 용의 입장에서 재진술한 것입니다. 특히 20장에서는 에스겔 38장의 곡과 마곡의 전투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이 최후의 전쟁을 묘사합니다.
(1)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2)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3)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계 20:1-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사단의 머리를 밟아 무력화시킨 사건을 말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으로 사단을 무저갱(감옥)에 던져 결박시켰습니다. 그리고 활동이 천년동안 중단됩니다. 이 천년은 주님의 초림서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갖는 질문이 지금도 사단 마귀가 역사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사단 마귀는 감옥에 지금 갇혀 있고 그를 대신하여 짐승이 용으로부터 권세를 받아서 이 세상 가운데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살펴볼 것입니다. 그래서 용이 비록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무저갱에 결박되었지만, 짐승을 통해 여전히 이 세상에 공중권세 잡은 자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1000년 동안 용은 결박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천년동안 왕노릇 합니다.
(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계 20:4)
이것이 주님의 초림서부터 재림사이에 교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미 목베임을 받아 하늘에서 부활을 기다리는 의인의 영들이나, 지금 이 세상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 사는 모든 신자들이나 신구약의 모든 교회는 바로 이 천년의 기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은 즉시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비록 우리의 현실은 보잘 것 없지만, 우리의 실상이 바로 그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천년왕국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계 20:5)
여기서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이 천년 왕국 동안(주님의 초림서부터 재림까지의 기간동안)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은 모든 불신자를 말합니다. 이 불신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죽음의 상태에 있게 됩니다. 지옥을 경험하는 것이죠. 그러나 신자는 첫째 부활(중생)을 통해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에 참여합니다.
(6)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계 20:6)
중생한 자는 복이 있는데, 왜냐하면 둘째사망 곧 지옥형벌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7)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계 20:7)
그런데 천년이 차매(이제 세상 역사가 끝나기 직전, 주님의 재림하시기 직전에) 용이 그 감옥에서 잠간 놓임을 받습니다. 이제는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 삼위일체가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8)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9)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10)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8-10)
역시 아마겟돈의 전쟁입니다. 그 수가 바다 모래와 같이 많은 군대를 소집하여 전쟁해보지만,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것입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 다 그들을 멸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쟁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것도 되지 못합니다. 그냥 학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과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강하게 무장했다 하더라도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게임이 되겠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얼굴에 흠집 하나라도 낼 능력이 됩니까? 그러므로 그 하나님이 우리 편이고, 우리를 위해서 앞서 싸우시는 백마 타신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반드시 승리하고 사단은 반드시 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오늘 현실이 아무리 어두워도,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어두운 밤 같아도, 그때가 되면, 드보라의 노래처럼 찬란한 태양처럼 힘 있게 솟아나게 될 것을 바라보면서, 교회의 궁극적인 승리와 영광을 바라보면서, 오늘 하루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이러한 아마겟돈 전쟁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말의 때가 반드시 옵니다. 이것은 동화속의 이야기도 아니고, 추상적인 이야기도 아니고, 장차 우리가 피부로 느끼고,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실제 일입니다. 그렇게 먼 미래는 아닐 것입니다. 종말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의 정황이라는 것은 이러한 아마겟돈이 있기 전의 전야와 같은 상황입니다. 용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결박되었지만, 여전히 짐승과 거짓선지자들이 활동하는 그런 시기입니다.
(4)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5)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 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6)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7)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8)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9)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10)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계 13:4-10)
마흔 두달은 주님의 초림서부터 재림까지의 종말의 정황으로 가득 찬 시대를 가리킵니다(천년왕국과 동일).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이 이러한 상황입니다. 짐승은 적그리스도, 멸망의 아들을 의미하는데, 이 짐승이 세상의 정사와 권세를 다스리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핍박하느냐 하면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 자들 사로잡고 칼로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 하나님께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다 신앙을 버리고 그 짐승에게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15절 이하에 자세히 서술됩니다.
(15)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16)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17)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18)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계 13:15-18)
표를 줍니다. 바코드(생체칩, 베리칩)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짐승에게 절하고 우상숭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표를 의미합니다. 계시록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이마에 인치심으로써 소유권을 표시하듯이, 사단마귀도 자기에게 절하는 자들에 이마에 인을 쳐서 표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표를 받지 아니하면 매매를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를 숭배하지 아니하면, 그 사회에서 추방하여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사형선고나 다름없습니다. 실제로 이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핍박에 의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순교 당했고, 또 어떤 사람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그 도시나 마을에 쫓겨나서 사막이나 광야에 유배되어서 유리방황하였습니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신앙을 포기하고 세상과 타협하여 자기 살길을 도모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666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표를 주는 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짐승을 숭배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짐승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면서도 이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짐승은 오늘날에도 이 표를 받지 아니하면 매매하지 못할 것이라고 위협을 가합니다. 예를 들어서 학교에서 정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말만 하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복음을 전하고 그렇게 살면, 친구들이 얼씨구나 좋구나 하고 반갑게 맞이해줍니까? 그렇게 살면 왕따 당합니다. 그것이 바로 매매하지 못할 것이라는 위협입니다. 그렇게 왕따 당하는 것이 두려우니깐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우리의 모든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와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할 때 이런 저런 핍박과 손해와 여러 가지 소외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사람, 그렇게 끝까지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666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상황은 그래도 “예수님 믿으면 죽는다”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사단은 그런 순교의 핍박보다도 유혹을 통해 우리 가운데 역사합니다. 그래서 이 유혹을 따라 육체의 욕심대로 자기 마음대로 자기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을 따라서 사는 사람이, 그리고 끝까지 그렇게 사는 사람이 바로 666받은 사람입니다. 오늘날은 특히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순교의 핍박보다는 이 유혹이 교회를 공격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어 우리 가운데 역사되고 있습니다. 이 유혹 역시 순교의 정신으로 살지 않으면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신앙의 본질은 동일합니다. 로마 당시에만 죽도록 충성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는 죽을 각오로 신앙생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짐승은 우리를 핍박하고 유혹하고 있고, 우리는 그러한 짐승의 세력과 대적하여 싸워야 하는 영적 전쟁에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매일의 아마겟돈의 전쟁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최후의 아마겟돈 전쟁은 이러한 매일의 아마겟돈 전쟁의 절정에 해당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그냥 먹고 살기 바쁘게 살 것이 아니라, 시대를 분별하고 우리의 대적과 원수를 분명히 인식하고, 또 우리가 지금 어떤 전쟁의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영적 전쟁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칼과 총으로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믿음으로 싸우는 전쟁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쾌락과 향락과 사치의 대중문화를 멀리하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와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왕따 당하고 조롱당하고 손해를 당하는 그런 고난 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 전쟁인데, 이 영적전쟁에 참여하는 자가 야엘처럼 복을 받는 것이고, 메로스와 같이 영적전쟁에 참여하지 아니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우리는 영적전쟁을 수행해나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이 지금 전쟁 중인지도 모른 채 이 세상과 타협하면서 이 세상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힘으로는 이 영적전쟁을 수행해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 연약합니다. 고난 앞에 바락 처럼 두려워 떨며, 머뭇거리고 주저합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믿음으로 이 싸움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10)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계 13:10)
(4)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오직 믿음으로 우리는 이 싸움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주님이 당신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여 인치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비록 지금은 험난하고 어둡지만, 결국에는 궁극적인 승리와 영광을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