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가 끝이 아니라 진행을 위한 시작이듯이 하나님의 창조는 끝난 것이 아니라, 진행 중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왜 천지를 창조하셨을까? 이에 대한 이성적인 답변은 자기 원인에 의한 속성의 발현으로 본다. 그러나 이성을 넘어서 기독교 신앙적 답변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에 창조한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동력은 사랑이라고 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분의 정신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창조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은 창조의 시작이요 근본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우주의 기본 원소들이 결합되어 새로운 존재들이 태어나는 것을 창조라 한다면 그것은 원소들을 결합시키는 힘이며 그 원소들이 서로 간에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라는 사실은 교회가 새로운 창조를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이 교회 또한 각 지체들은 사랑으로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침례가 시작이라면 그 완성 단계는 아가페적 사랑에 도달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만물은 새롭게 창조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각 지체들의 사랑이 왜 필요한지,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적인 문체로서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사랑의 찬가'라 불리우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어떤 방식으로 어떤 수사를 통해 기록했는지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Ⅰ 고린도전서 13장의 주제 및 배열 1. 고린도전서 13장의 주제로서의 사랑 사랑(agape)은,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를 세우는(oikodome)일을 한다(고전 8:1).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를 세우는데 있어서, 공동체의 모든 지체들이 자신의 직분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세움의 윤리이다. 사랑은 고전 13장에서 공동체의 몸을 세우는 은사로서 주로 다루어지고 있다. 사랑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열매로 인내, 온유, 겸손, 무례히 행치 아니함, 자랑하지 아니함, 교만하지 않음,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공동체의 각 지체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언급된다 (12:7-11; 14:26). 그러나 고린도 공동체 지체들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어진 은사를 가지고 도리어 방언(13:1)과, 예언(13:2)과, 지식(8:1)과, 믿음(13:2)을 자랑함으로 시기하고 교만해졌다. 개인의 욕심과 탐욕으로 육을 따라 자랑함으로, 오히려 믿음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요소들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고전 6:9-11). 따라서 바울은 각 지체에게 주어진 은사(charis)로 자랑을 일삼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은사(charis)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여 아무 것도 아니며,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사라질 것으로 지적한다 (고전 13:10). 따라서 온전한 것이 올 때 예언과, 방언과, 지식도 사라지겠지만 사랑은 영원하다는 진리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토대 위에 순종하며 따라야 한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6:19하-20).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서 그 몸에 참여하도록 하신 분에 뜻에 합당하게 해야 한다. 종은 주인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3:9),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12:13중), 연대적으로 연결된 지체로서 서로 사랑으로 행해야 할 이유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종말을 기다리는 신앙 공동체의 사회가 세상과 무엇이 다른가를 의미한다. 종말론적 믿음의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와 미래 사이의 중간 연결체로서 온전한 것이 올 때를 바라보며 승리하는 공동체로 세상과는 확연하게 구별되게 은사로 헌신하고 봉사해야 한다(고전 12장). 그러나 은사만으로는 부족하다. 은사 가운데 가장 필요한 요소가 사랑이다. 사랑이 있어야 완전한 은사로서 서로를 위해 기능을 할 수 있다. 사랑은 은사를 은사되게 하며 지체가 지체되도록 기능을 한다. 은사자들이 서로 사랑할 때 맺는 열매가 오래 참음, 온유 등이다. 그러므로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명령은(12:31), 그 만큼 사랑이라는 요소가 공동체에 중요하다는 증거이다. 사도나, 예언자나, 교사나, 병 고치는 자나, 능력을 행하는 자나, 방언하는 자나, 모두 은사의 결과로서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어떤 교회의 직책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지체들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추구해야만 하는 반드시 필요한 길이다(12:31).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수고한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15:58;16:14). 2. 고린도전서 13장의 수사학적 배열 수사학적 배열은 설득을 위한 자료를 잘 정리하는 작업이다. 잘 정리된 배열은 수사학적 단위의 소 단락들이 설득의 주제를 향하여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바울은 고전 12:31에서 “더 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하면서 고전 12장의 은사론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단락인 고전 13장을 시작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여러 가지 비유와 논증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어떻게 형성해나가야 하는가를 설명하면서 그들을 설득해왔다. 이제는 사랑이라는 서사시를 통해 새로운 주제의 전개를 펼친다. 앞에서 논의한 수사학적 상황에 의하여 정해진 주제로서 사랑의 장인 13장을 배열하면 다음과 같이 나누어 질수 있다. Exordium(서론부) ························13:1-3 사랑의 원리 Narratio(진술부) ··························13:4-6 사랑의 성격 Exhortatio(권면부) ·······························13:7 사랑의 힘 Propositio(주제부) ···················13:8 영원한 사랑 본질 Confirmario(논증부) ··················13:9-12 사랑의 속성 Peroratio(결론부) ························13:3 가장 좋은 사랑 서론(Exordium)부에서는, 독자들에게 집중 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한다(고전 13:1-3).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분파로 인한 파당의 문제는 은사적 사역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하였다. 공동체의 갈라진 지체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선물로 여기며 서로 지체들을 세워나가는데 사용되어야 하지만, 오히려 주어진 은사들을 자신을 내세우는 데에 이용하고 있는 그들에게 사랑의 원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터 위에(3:11) 세워진 한몸 된 지체들이(6:15), 해체될 위기감을 (12:28-30)바울은 실행해야만 하는 덕목들과, 하지 말아야할 덕목들을 할 수 있는 힘은 사랑이 원천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외면적인 드러남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으로서, 참는 것은 인내의 결과의 열매로 볼 수 있고, 믿는 것은 온유와 진리를 기뻐함과 더불어 시기와 자랑하지 않는 자의 열매로 얻어질 수 있는 부분이다. 바라는 것은(고전 13:7) 교만과 무례히 행치 않음과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은 자의 열매로 얻어지는 결과물이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은 성내지 아니함과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는 결과의 열매인 것을 알 수 있다(13:7).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사랑의 윤리로써 권면하는 장면으로 볼 수 도 있다. 따라서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힘인 것을 암시한다. 주제부(Propositio)에서는, 바울이 독자에게 입증하기 원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다루는 것으로 사랑의 본질을 거론한다(고전 13:8). 대부분의 주제부를 포함하고 드러내기 위한 진술부와 주제를 드러내고 증명할 목적으로 논증부도 사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 13장은 ‘사랑'의 목적을 가지고 기록되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바울은 8:1에서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사랑은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세우는데 필요 불가결한 것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요소가 된다.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세상에 아들을 주셨다(요 3:16; 요일 4:9). 그리고 그 아들을 통하여 몸 된 교회가 세워졌고(롬 8:32),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엡 1:22; 4:15; 5:23; 골 1:18)되셨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 랑(고전 5:8)으로 세워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공동체의 머리가 되신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이 교회라는 공동체와 연결되기 위한 계획 아래 이뤄진 사실들이다. 공동체에 소속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요 1:12)가 주어짐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된다.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은 그 사랑 안에서 그 영원한 나라를(고전 4:20; 6:9-10; 15:24, 50)창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속성이 사랑이므로, 사랑은 그 속성과 함께 영원토록 존재하며 창조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워진 교회는, 온전한 것이 올 때 부분적으로 있던 것들은 사라지고(13:10), 그리스도 앞에서 서게 하는 것이 사랑임을 제시 한다( 13:13). 논증부(Confirmario)에서는, 독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증거와 함께 자신의 논증을 이끌어 나가는 것으로서, 바울은 사랑의 온전함과 각 은사들의 임시적인 성격을 대조하여 사랑에 관하여 논증한다(고 전 13:9-12).53) 고린도 공동체가 자랑하고 있는 철학적 지혜도, 예언도, 방언도, 사실은 일부만을 알고 있다는 것으로 그것들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지혜의 대표주자 아볼로는54) 그리스 철학의 본고장의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며 성경에 대해서는 능통한 자였다(행 18:24). 하지만 침례 부분에서 요한의 침례만을 아는 지식에 불과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를 데려다가 더 자세하게 가르쳤다(행 18:25-26). 어느 부분에서 비록 최고봉에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에 견주어 보면 아주 작은 지식에 지나지 않듯이, 고린도 공동체 역시 지식 면에서나 은사적인 면에서 많은 것을 소유하여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부분적으로 필요하지만 전체적이고 온전한 것이 이루어질 때에는 매우 사소한 것임을 바울은 논증한다. 여기서 부분적으로 하던 행위들이 폐해지리라는 것은, 사랑의 영원하고도 지속적인 효과에 비하면 거의 영향력을 주지 못한다는 주제를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공동체에 주어진 은사들에게 적용된 각 계시들은, 시간과 시간 사이에 있는 동안에만 필요함을 역설한다. 역사적인 존재 안에서 경험되는 모든 지식과 예언들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온전한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을 의미한다. 그날에는 완벽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룰 것이다.(11:17). 그날에는 부분적이 고 단편적이던 모든 것은 그 영향력이 사라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온전해지고 완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은 교만(고전 4:6)한 자들을 향해 아직도 어린 아이들과 같은 말, 생각, 그리고 어린 아이들과 같은 행동이라는 것을 어른에 견주어 논증한다. 아무리 최고의 지혜를 자랑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는 것은, 아직도 어린 아이라는 것을 표방하는 것이다. 이들은 아직도 미성숙한 자들로 육에 속한 자 들이었다(3:1-3). 이들의 몸은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으나 세상적이어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경계선상 밖에 있으므로 온전히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다. 이들을 일컬어 바울은, 육의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3:3). 바울이 공동체의 육을 거론할 때, 영의 반대의 개념으로 항상 부정적으로 말하였다. 믿음의 공동체에서 육적인 자는 자기 자신 만을 위하고, 더 나아가서는 공동체를 해체하기까지 하는 위험요소의 소유자들인 것이다. 육의 특징은, 자신의 욕망에서 나오는 이기심으로 언제나 타인의 이익에 우선하며,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공동체적 한 몸을 생각하지 않고, 개인주의로 자신의 업적과 독립을 주장하며, 자기 중심적이어서 시기와 다툼을 일삼는다. 또 하나님의 영역을 도전하는 잘못된 세상 철학이나 유대인의 율법, 관습, 등을 앞세워 십자가 사랑에 도전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육적으로는 성인이나, 영적으로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단단한 식물은 먹지 못하고 오직 젖으로 먹여야 된다. “음식이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저것을 폐하시리라”(고전 6:13). 오직 육적인 형태의 욕심은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바울이 이러한 논조로 강력하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어린 아이와 같은 육의 사람은 공동체의 몸을 온전히 세우지 못하기 때문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결론부(Peroratio)에서는, 자신의 논증을 요약하는 것으로서 끝을 맺는다. 바울이 지금까지 서술해 온 사랑의 모든 것 에 대한 결정적인 단어를 ‘그런즉’을 사용하므로 그의 논조에 방향을 전환한다(고전 13:13). 고린도전서 13장에 대한 목적이 함축된 13절은, 고린도전서 본문 전체에 강조하고자 하는 논제로 보아도 손 색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 사랑 안에 총체적으로 거론되어지는 것은 교회가 형성되고 유지 보존 되어지는 본질적인 요소가 사랑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떠받치 고 있는 실존이 되며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항상 있다’ 로 쓰인 그리스어 메네이(menei)는, ‘계속 있다 또는 머물다/ 남아있다’라는 뜻을 지닌 메노(mevo)의 현재형 동사이다. 현재형 동사적 의미로 볼 때, 믿음 소망 사랑을 고린도 공동체는 항상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공동체가 유지하고 보존해야 할 믿음과 소망과 더불어 사랑을 말하지만 은사가 필요 없다는 뜻 은 결코 아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선물이기에 다 같이 필요하다. 공동체가 존속하기 위하여서는 이것저것 다 필요하나, 그 모든 것 위에 믿음 소망 사랑은 영원히 소유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영원’ 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헤이스는 현재의 시간 속에 지속되어야할 영원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그 영원은 종말론적일뿐만 아니라 현재형으로 ‘지금/ 여기서’라는 의미가 더 강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은 공동체가 있는 동안 함께 존속해야 할 실존적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 수사학적 배열을 통해 사랑을 주제로 진술되고 있는 논증들을 서론부로부터 시작으로 13장을 살펴보았다. 모든 배열마다 저자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논증과 비유와 권면을 통해, 독자들을 설득해나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어서 이에 대한 설득의 양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3. 설득의 양식 앞서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사랑이라는 주제가 어떠한 형태로 배열을 이루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이곳에서는 수사학적 증명의 방법으로 왜 사랑이 고린도 공동체에 진정한 주제가 되는지에 관하여 살펴볼 것이다. 고전적인 정의에 의하면 수사학은 설득의 방법이었다. 설득(persuasion)은 수사학의 최종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로써 남을 설득하는 기술을 뜻한다. 화자가 남을 설득할 때 비로소 자신의 의도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적합성 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주장대로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효과 를 얻으려는 것이 수사학적 방법인 것이다. 수사학에서 모든 논증 혹은 논쟁이 설득의 내용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지만, 수사학이 설득의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연사나 저자가 청자 혹은 독자를 설득하기 위하여서 사용하는 증명의 방법으로, 인위적인(artificial)것과 비인위적인 (inartificial)것이 있다. 먼저 인위적인 방법에서는, 연사나 저자인 수사학자가 자기의 노력에 의해 청자나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경우로 세 종류가 있다. 그 첫째가 에토스(ethos, 인성)이다. 에토스는, 연사 또는 저자의 인격 윤리등으로 청자나 독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으로, 청자나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필요하다. 인위적 증명의 두 번째는, 파토스(pathos, 감성)이다. 파토스는 청자 혹은 독자들의 감정에 의존하는 것으로, 어떤 의사 결정을 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그리고 나머지 세 번째가, 로고스(logos, 이성)이다. 로고스는 증명하려는 담론이나 연설 자체가 된다. 다음으로 비 인위적인 것이 있다. 비 인위적이란 이미 있는 사실들을 가리킨다. 즉 증명을 위해 이미 존재하는 것들로써, 증인 이나 계약서등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설득의 요소가 순서에 맞게 배치되지는 않았다하더라도 수사학적 단위인 텍스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설득의 형태들인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를 찾아낼 수 있다. 이러한 설득의 양식을 통해 수사학적 단위인 고전 13장에서 사용하는 설득의 방법을 분석할 것이다. 저자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설득의 양식을 사용하고 있는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전통적으로 사용 하고 있는 설득의 방법인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 (Logos)를 중심으로 고찰할 것이다. 고전 13장에서 바울이 수사학적인 증명의 방법으로 사용한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등의 설득의 양식을 연구함으로 “사랑”이라는 주제가 어떻게 강조되고 있는지를 논하고자 한다.
① 에토스(ethos, 인성) 수사학에서 에토스는 저자나 연사가 소유하고 있는 좋은 인격 또는 성격 등을 통해 청자나 독자들에게 영향을 주는 설득의 형태이며 저자나 연사의 특성에 속한다. “에토스”(ethos)는 그리스어 “Ethos”에서 쓰여진 단어로, 성문법은 아니나 관례와 관습으로 성문법과 같은 유효성을 가지면서 일반적으로 행해진 것을 말한다. 결국 에토스는 과거부터 저자와 독자 사이에 존재했던 관습적 가치와 관련을 맺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에토스는 저자나 연사의 도덕적 성격에 의존하며, 발언할 때 사람들에게 인격을 갖추고 있다는 신뢰를 얻게 되면 효과가 더욱 많아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설자의 에토스를 설명하면서 3가지의 도덕적 성격을 제시한다. 즉 좋은 분별(phionesis)과, 미덕(arete)과, 선의(eunoia)등이다. 저자의 도덕적 특징은, 그 사람의 담론이나 연설을 믿을 만하게 만든다. 저자의 에토스인 좋은 분별은 자기 확신과, 자기 정체성으로 청중들과 독자들로 하여금 저자에 대한 신뢰와 확신을 통해 장차 설득의 목적에 이르도록 한다. 미덕은 좋은 결과 를 얻기 위하여 지신의 솔직함을 드러내며 표현하는 방법으로, 정의감, 자기절제, 용기 관대함, 등이 있다. 선의는 청자나 독자의 입장을 배려하면서도 그들에게서 환심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으로 자기 자랑 및, 자기 추천과 같이 자신을 신뢰하고 믿을 수 있게 만드는 부분이다. 에토스는 논증의 신뢰를 높이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으므로, 자기가 주장하고자 하는 담론이나 연설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 자신의 윤리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도 좋은 분별과, 미덕과 선의 안에 포함한 바울의 정체성, 자기 확신, 자기고백, 자기찬양, 자기과시를 통한 바울의 에토스를 살펴보고자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독자들에게 설득을 위한 자기의 에토스 인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어서 그들을 설득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고대수사학이나 바울의 에토스는 도덕적 성품에 의지하여 상대방을 설득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 보면 고대수사학은, 연설자 자신의 도덕적 성품을 통해 설득하는 반면, 바울은 말씀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본(고전 4:6; 9:10)을 보여 주고 나서, 그들로 심경에 변화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다른 면이 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공동체를 설득하기 위하여 자신과 독자들 간에 형성된 좋은 관계성을 상기시킨다. 고전 13:1, 2, 3, 11, 12에서 ‘나’라는 1인칭 단수를 주어로 사용하여, 자기 확신으로 사랑에 관하여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복음의 전달자로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그들을 권면하고, 가르치고, 경책하며 승리자로 세워나가는데 있어서 사랑의 사도로 자신을 확인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이 자기의 정체성을 밝히는데 있어서 이보다 더욱 확실한 에토스가 없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자신을 신뢰하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나’ 와 ‘없으면’을 강조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저 ‘나는 사랑이 있다’라고 한다면, 독자들을 설득할 수가 없다. 그러나 사람과 방언과, 천사의 말과, 예언하는 능력과, 모든 지식과, 믿음도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사랑의 사도라는 확신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라는 표현을 통해 독자들과 관계성에서 호소하는 강조이다. 이것은 고린도 공동체의 특성상 분열되어 여러 분파들로 나누어진 상황 안에서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었을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한 호소법이다. 바울과 고린도 교우들 간에 관계는 복음을 전달했던 사도로서의 전달자와, 그로부터 복음을 수용하고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던 만남과 교제 속에서 형성된 관계성이다. 바울이 고전 13:1절에서부터 시작되는 ‘나’라는 주제에 독자들의 감정을 이입시키기 위해서는 1:1절의 사도직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고 권위 있는 ‘나’는 일반적이 누구나의 ‘나’가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전권대사로서의 ‘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도로 …”(고전 1:1)이라는 대목에서 볼 때에 자신의 부르심의 직분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분명하고도 확신에 찬 에토스적 강조법이다. 그는 본 서에서 자신을 사도직이라는 직분에 매우 큰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apostolos, 사도직)를 사용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써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달자로써, 사도적 임무를 수행하는 일이 자신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님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여 둠으로써 독자들에게 주장하고자 하는 요지를 신뢰하도록 요청하 는 것이다. 신약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사도라는 단어는 ‘보냄을 받은 자’, 혹은 권위를 부여받아 ‘급파된 사람’ 이라는 의미로 자신이 지금부터 권면하는 말들이 자신의 메시지가 아니라 자기를 보낸 분의 권위에 입각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암 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고전 1:2)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여 자신을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자신은 수동적으로 이끌리어 사역을 감당하고 있으며, 그분의 뜻을 따라 할 뿐이요, 임의적으로 하지 않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부르 신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당신의 전적인 주권을 행사하도록 하셨으므로, 독자들로 하여금 말씀과 권위에 복종할 것을 분명하게 알리고 있는 것이다. 사도직을 통해 겉으로 나타나는 것은 ‘나’이지만 그 뒤 에 감추어진 사랑의 주체가 그리스도께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바울이 사용한 ‘나’에 대한 두 번째 에토스의 의미는 장성한 사람으로, 또는 성숙한 성인으로서 독자들을 지도하고 훈계 하는 지도자적인 표현을 쓰고 있는 대목이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 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필자의 도덕적 특성은 필자의 담론이나 연설을 믿을만하게 유도한다는 점에서 고전 13:11절의 장성한 사람은, 자신의 인품에 대한 에토스를 부각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인품과 더불어 저자의 지적 능력이나 선의 등은, 시학에서는 사상이 등장인물의 언행을 통해서 드러나듯이, 필자의 인품에 대한 선택은 주제발견, 배열, 문체, 전달로 이어지는 수사적 구성요소들 가운데서 구체화된다. 저자의 장성한 인품을 통해 교회를 사랑하고 지도하는 필자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이 장성과 어린아이를 대비시켜 아이를 양육하는 아버지를, 독자들을 지도하는 사도직과 더불어 희생적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전 4:14-15에 아버지는 교회의 영적인 아버지로,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아버지상은 일반적인 아버지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2:12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아 하나님 아버지의 영으로 양육하는 아버지인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그는 고린도교회를 잉태하여 산고의 고초를 겪었고(2:3), 어미가 자기 어린 아기를 돌보 듯이 사랑의 젖으로 먹이며(3:2), 밤낮 노심초사하면서 그들을 양육했다(3:6). 그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돌보기 위해 어리석은 자로 취급을 당하면서도 비방받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매 맞고 조롱 당하고 모욕을 당해도 그들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것도 감당했다(4:9-12). 그리고 마지막에는 만물의 찌꺼기처럼 천한 자로 취급당해도(4:13), 아버지로써 그 일을 감당했던 것은 고린도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아비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믿음의 아버지로 또는 사랑이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영의 지도자로, 독자들의 존경심을 유발시켜 좋은 감정으로 저자의 권면을 수용하도 록 유도하는 것이다. 더불어 하나님의 속성을 대변하는 사람으로, 바울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까지(2:2)연결된 기독론적인 에토스다. 아들을 사랑하는 부정의 심정으로 그들을 향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사도로 또는, 아버지로 자기를 본받으라고 권면하므로(4:16; 11:1), 좋은 분별에 해당하는 자기 확신(Self-Conviction)과 더불어 바울의 자기고백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의 에토스적인 세 번째의 고백은 ‘부분적’으로 알고 있다는 겸손을 들 수 있다(고전 13:12). 겸손은 미덕과 더불어 설득의 과정에서 생겨진 기교로서 교만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의도로서의 에토스기법이다. 여기서 '부분적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 메로스는(meros), 전체적인 것과 대조적인 일부 작은 단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주께서 나를 온전히 아는 것과 대비시키는 단어이다. 필자가 비록 사랑의 사람이며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받은 전권대사로서의 영적인 아버지라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소유하고 계시는 온전함과는 비교가 되지 않은 조그마한 앎이라는 것으로 자기 겸손부분에 해당된다. 바울의 겸손에 있어서는, 고전 13:12절 뿐만 아니라, 15장에서의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대비하여 나타난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고전 15:8)75)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맨 나중’의 에스카톤(eschaton)이라는 단어는, 끝 부분을 의미하는 단어로, 저자의 자기 비하적인 발언이다. 이 단어는 ‘가장 하찮은’ 또는 가장 ‘가치 없 는’ 끄트머리의 의미로서 표현하고 있으며,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15:8)라는 자기 겸손을 통해 부분적인 앎과 연결된다. 사도로서의 자신은 자격이 없고,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부적당한 인물로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더불어 9절과 10절에서 사도직 자격을 거론함에 있어서도, ‘지극히 작은 자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독자들로 하여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였음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기법으로 자신의 수고를 축소시킨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드러내고 자신은 낮춤으로 해서,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들의 앎과 관련하여, 교만한 부류들에게 부끄럽게 하려는 의도로 독자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고전 1:17ff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자신은 그리스도의 임무만 수여 받았음을 확실히 한다. 필자의 중심에는 오직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사랑만이 자리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고린도 공동체 역시 여타 많은 지식적인 것보다 더욱 소유해야 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만을 소유해야할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고린도 공동체가 명심할 것은, 그리스도의 겸손과 같은 성품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겸손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신(빌 2:8)겸손이며, 순종으로 모범을 보이신 겸손이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둘의 관계가 서로 엮어진 유기체적인 조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속해 있는 지체는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하여야 한다(고전 10:23-24, 33; 12:7). 이것이 교회를 세우는 공동체의 윤리가 되는 것이다. 고전 13장에서 보여주듯이 공동체의 모든 지체들은 자신의 직분을 가지고 사랑의 열매를 실천하는 것이 교회의 몸을 세우는 윤리인 것이다(13:4-7). ② 파토스(pathos, 감성) 파토스는 독자들의 심리적 경향을 고려하여 독자들의 욕구, 정서 등에 호소하여 감성을 자극하는 기술로써, 그들의 의견을 바꾸거나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데 결단하도록 돕는데 사용되어졌다. 파토스는 독자 혹은 청중의 감성과 기분에 기인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것들이 아니라, 변론가나 혹은 저자가 청중이나 독자들의 감정을 고려하여 자기가 전달하고자 하거나 혹은 자기의 의견을 수렴시키려는 의도 아래 이뤄지는 설득의 기술들이다. 이것은 바로 독자의 감정을 유발시켜 저자의 감정이 독자에게 이입되도록 유도하는 과정이다. 이때 저자는 독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신념이나 전통들을 잘 알고 있는 것이 유리하다. 저자가 자기의 감성과 에토스를 독자들에게 분명하고 확실하게 제시하므로, 독자들의 감성이 자극을 받아 서로에게 신뢰감이 형성되면 1차적인 목표는 달성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감성들을 이끌어 내어 설득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여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기술이 바로 파토스이다. 독자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감정을 소유하고 있다. 즉 기쁨, 환희, 동정심, 분노, 부끄러움, 수치, 적대감, 의무감, 공포, 억울함, 소망, 사랑, 애정, 연대감 등이다. 청자 혹은 화자는 이런 감정들을 자극하고 활용하여, 듣는 자로 하여금 자기가 주장하고자 하는 목적을 받아들여서 독자들이 결심하도록 유도하는 과정이다. 파토스의 대상은 본문 안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실제적인 파토스는 고린도 교회의 독자들이다. 본문의 내용을 통해 그들이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자랑을 일삼던 상황에 있던 지체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어떤 반응과 결심으로 새로운 파토스를 갖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 중 설득을 위한 수사학적 단위인 고전 13장의 언급된 파토스는 매우 중요하다. 파토스 기법에서 독자의 수치심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들의 실체를 알게 하는 과정이다. 고전 13장의 파토스는 1절에서 시작된다. 먼저 사랑이 없는 방언과 천사의 말과 같은 것은, 소리 나는 징이나 울리는 쾡과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바울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1절)에서, ‘내가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란 뜻으로 단순히 소유의 유무를 말하기보다,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모습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사랑이 없는 은사의 수치심의 파토스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구리로 만든 징이고, 다른 하나는 요란한 꽹과리이다. ‘소리 나는 징과 울리는 꽹과리’는 그 당시 이방신전에서 우상에게 제물을 드릴 때 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 사용하거나 귀신을 쫒아내는 데 사용된 도구였다. 바울이 사랑이 없는 은사는 마치 이방제사와 귀신을 쫓아내고자 할 때 사용되었던 시끄러운 악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소음을 연상시키는 것은 사랑이 없는 은사들은 떠들어 대는 어떤 행위의 표상으로 수치심을 유발시키려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 뿐 만 아니라, 천상의 존재인 천사의 말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없는 은사들은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있으며, 산을 옮길만한 믿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구제 활동 역시 같은 맥락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파토스의 진정한 목적은 독자들로 하여금 단지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주고자 함에 있지 않다. 독자들이 수치심과 부끄러운 감정을 통해 그들의 마음이 새롭게 변하고자 하는 자극을 받아, 올바른 행동으로 옮겨가게 하려는데 있다. 필자가 대상의 김정들을 자극 하여 듣는 자로 하여금 결심하도록 유도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라는 요지이다. 바울은 고전 13:1절의 악기들의 소리에 관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14:7-11에서 부연설명을 다시 한다. 피리와 거문고의 소리를 통해 군인들이 전투를 준비한다. 악기 소리가 분명하지 못하면 대처하지 못하여 방비하지 못하거나 출전하지 못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군인들은 적들과의 대치 상태에서 파숫군 이 사용할 수 있는 악기의 소리가 중요하다. 악기가 제 음을 내지 못하면 군인들로 하여금 올바르게 빠른 대처를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고린도 공동체 역시 방언과 예언적인 은사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서 올바로 사용되어야 한다. 사용하는 자가 주어진 목적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온전한 의미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파숫군이 피리와 거문고를 잘못 사용하여 군인들이 출전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과 같다라는 요지이다. 덧붙혀 고전 14:9ff부터는 ‘혀’를 통해 말하는 자의 역할을 비유로 설명한다. 말하는 자가 뜻 없이 하는 말은 없다. 만약 뜻 없 이 말을 하면 알아듣지 못하여, 외국인이 말할 때 듣지 못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사람의 말을 예로 들어 방언을 하는 자와 예언을 하는 자가 잘못 사용하면, 이렇듯 뜻 없는 대화가 된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바울은 방언을 잘못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지 않는 은사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종말론적 믿음의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공동체의 윤리로 수사학적 주제로서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두 번째 파토스 기법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선 내용은 고린도 공동체를 어린 아이로 규정한 대목이다(고전 13:11). 어린 아이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이다. 이들 공동체를 일컫어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라고 말하는 것을, 바레트는 종말론적 개념으로 온전한 미 래에서 성취되어질 시점에서 바라본 오늘의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어린 아이라고 한다. 바울은 수신자들을 어린 아이로 규정하는 것은, 그들로 수치심을 자극하게 만든다. 이러한 방법이 바울에게 있어서 고린도교회를 설득시키는 실제적인 예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부정적 감정의 요소들로 그들을 자극함과 아울러 바울은 위로의 말을 사용한다(4:14,21). 바울이 사용하는 단어들 중에는 마치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는 감정적 정서의 용어들이 발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바울은 ‘형제들아’라는 단어를 사용해 고린도그리스도인들과 자신 사이의 친밀감을 형성시켜서(12:1; 14:6, 20, 26, 39) 바울의 권면을 거절하지 않도록 한다. 바울이 부정적 요소로만 자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독자의 수치심을 자극할 뿐 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격려함으로써, 바울 자신의 논증에 호의적인 자세를 가지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이다. 바울의 세 번째 파토스는 고전 13:12절에서의 ‘지금’이다. 지금이라는 그리스어 아르티(arti)의 용례를 보면 '여기서' 또는 '이제는' 으로, 현재 바로 이 순간을 의미한다. 이 의미는 '부분적'인 것과 거울로 보는 희미한 상태로서의 ‘지금’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모든 것들은 다 부분적인 일부만 공개된 비밀들이며, 계시나 드러남의 어떤 것도 부분적인 것과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여 확실하지 않고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공동체 중에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거나, 남의 약함과 타인이 소유한 은사들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비유하여서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불어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 이요”(고전 13:12)에서 ‘그 때에’ 토테(tote)는 ‘지금’(arti)과의 시간적 공백으로 긴장 관계를 이룬다. 고린도 교우들이 겪고 있는 현재적인 실존과, 미래에 경험될 실존과는 차이가 있지만,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것과 같은 실상을 소망하면서 종말론적 사상을 소유하도 록 격려하는 것이다. 이것은 종말론적 사상을 독자들에게 입증시켜 지금 여기서 하는 것들은, 모두 임시적인 것들임을 상기시켜 미래를 향하여 나가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고린도 공동체가 소유해야 할 신학적 관점은, 종말론적이어야 한다라는 논증이다. 고린도 교회에 난무한 무질서 등은 그리스 철학과 같은 이원론적 사상이 들어와, 질서를 무너뜨려 공동체 지체들을 교란시켜서 서로를 배려하지 않는 상황에서 현상을 보게 하는 수치심의 기법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 때가 이르기 전에 아무도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고전 4:5). 이들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도, 자기 자신은 깨닫지 못하는 부류들로서 올바른 인식에로의 전환이었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 있는 심판대에 섰을 때에 얼굴과 얼굴을 보는 것처럼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3:13-15). 온전한 인식은 종말에 알게 될 인격적인 사랑과 만남이 될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파토스적 호소를 통하여 저자의 감정을 공감하고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시키도록 결단시키려는 목적임을 알 수 있다. ③ 로고스(logos, 이성) 로고스는 증명하려고 하는 담론 그 자체를 이성으로써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로고스적 설득에는 연역적인 삼단논법과, 귀납적인 예증으로 구성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삼단논법이 연역적이라면, 범례의 사용은 귀납적이다. 연역적인 삼단논법은 법정적 수사학에 많이 사용되었고, 귀납적인 방법인 범례는 심의적 수사학에 많이 사용되어지는데, 로고스적 호소는 삼단 논법과 범례를 사용하면서 주제부의 특정한 주제를 지지하고, 설득의 목적을 위해 강한 호소력을 제공한다. 이때 저자나 변론가의 연설이나 주장이 얼마나 신빙성을 가지고 있느냐하는 것은, 변론가의 기술과 내적 논거들을 어떻게 찾아내어서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증법과 삼단논법으로 대표되는 기술과 내적 논거들 통한 논증의 특성을 밝히는데 논리학에서 추론이라고 부른다. 이미 알려진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알려지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사유를 진행시켜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귀납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는 예증법이다. 예증법은 유사한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에서 생겨나며, 일종의 유추에 의한 논증 이라고 할 수 있다. 예증법은 설득하고자 하는 것과 유사한 실례들을 찾아내는 기술로, 귀납법적인 방법을 통해 보편적인 것의 내적 사슬에 의해 하나의 개체에서 또 다른 계열을 추론해내고, 다시 여기로부터 새로운 개체를 추출해낸다. 예증의 범위는 매우 다양하여 한 단어일 수도 있지만, 하나의 사실이나 때로는 사실들의 전제 혹은 그 사실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예증법은 설득력 있는 직유법 혹은 유추에 의한 논증법이다. 또한 연역적인 삼단논법으로 불리는 생략삼단논법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입증의 몸 또는 본체에 해당하며 수사적 입증 수단 중에 가장 강력한 것에 해당한다. 생략삼단논법은 대전제가 생략된 것으로, 독자나 필자 모두에게 당연히 알려진 지식으로 생략되 어진 논법의 형태로서, 듣는 독자로 하여금 마음을 뒤 흔드는 거센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생략 삼단논법을 사용할 때 표현의 과정 속에서, 독자 또는 청자는 불완전하게 생략되어 있는 삼단 논법으로부 터 완전하게 구성되어 있는 삼단논법을 논리적으로 유추해낸다는 것이다. 로고스적 호소는 삼단논법과 범례를 사용하면서 저자가 추구하는 증명들을 위해서 특정한 논제들(topics)을 사용한다. 논제는 원래 장소(topos)라는 뜻인데, 고전 수사학에서는 그 장소에서 논증이 일어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1) 삼단논법 삼단논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론적 기초를 이루었는데, 2개의 전제와 1개의 결론으로 구성된다. 삼단논법은 그 전제와 성격에 따라 분류된다. 그 첫째가 연쇄 삼단논법(대전제나 소전제 등으 로 여러 명제들을 연쇄시켜 제시하는 것)이 있고, 둘째가 대증식(對 證式) 삼단논법(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이는 대전제나 소전제에 증거나 일반 공론을 갖다 붙이는 것), 세 번째가 생략삼단논법(축소시키는 방법)으로 분류했다. 이 중에서 가장 필요하고 중요하게 활용 되어지는 것이 생략삼단논법으로써 일반적으로는 이것을 삼단논법 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술을 마시는 것은 사람에게 해가된다’(대전 제) ‘그런데 나는 사람이다’(소전제) ‘그러므로 나는 마시지 말아야 한다’(결론)라고 하는 논리다. 여기서 대전제는 술과 사람과의 관계를 말하며, 소전제는 나와 사람과의 관계가 되고, 결론은 나와 술과의 관계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전통적 논리학에서 전형적인 추론방법이며, 정언삼단논법이라고도 한다. 여기에서 삼단논법은 대전제(일반적인 격언으로 채워짐), 소전제(동작주는 대전제의 의해 포괄된 상황에 처함을 증명), 결론( 행동을 결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논증은 고린도전서 13장을 중심으로 한 사랑에 관하여, 생략삼단 논법을 사용한다는 것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대전제: 사랑이 있어야 교회에 유익하다. 소전제: 고린도 교회의 방언하는 자는 사랑이 있다. 결론: 그 방언자는 교회에 유익하다. 여기서 바울 자신은 사랑의 사람이라는 전제 아래 논증을 해 나간다. 고전 1:1-3까지 여러 가지 은사들이 거론된다. 그 중에 필자는 사랑이 있어야 교회에 유익한 것을 대전제로 하여 은사들을 받은 사람중에 방언자가 사랑이 있다는 소전제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사랑이 있는 방언자는 교회에 유익하다는 결론이다. 바울은 모든 고린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소유한 사람일 것이라는 전제 아래 방언을 말하는 자도 사랑이 있다는 것을 말하므로, 고린도 교우들이 사랑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은사의 최고 정점이면서 필수적이라는 것을 독자인 고린도 공동체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은사가 있어야 한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신앙 생활함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이 있어서야만 그 은사로 교회에 유익을 줄 수 있다. 방언의 은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방언의 은사자가 제 몫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사랑이라는 윤활유가 더해져야만 아름다운 은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삼단논법은 대전제와 소전제 그리고 결론으로 구성되는 바, 전제중의 하나가 생략된 상태가 삼단논법이다. 또한 바울은 고전 13:1절에서 자기는 사랑의 사도요, 사랑의 사람이라는 것을 생략하고 각종 은사들을 열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사랑의 사람이다. 이미 고전 4:14절에서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을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전 4:21), 자기 안에 사랑이 존재하고 있다라는 것을 생략하고 있는 것을 추론해본다. 그 사랑으로 권면하고 나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독자들인 고린도 공동체에 수사학적 긴급한 사안이 사랑의 부재임을 간파하였다는 결론이다. 삼단논법과 아울러 사용하고 있는 저자의 로고스 호소는 논제들의 사용이다. 1-3절까지 8개의 은사들을 고린도 공동체에서 가장 대두되는 은사들의 목록이다. 여기서 거론되는 은사들로만은 교회를 온전히 세울 수 없고, 유익하게 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대전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오래 참는다. 소전제: 오래 참는 자는 직분자로 적합하다. 결론: 그러므로 직분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속성에 관하여 논할 때 하나님의 긍휼과 오래 참으심이다. ‘오래 참고’(makrothumeo)는 ‘노하기를 더디하다’로 번역되기도 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다(롬 2:4; 9:22). 이 단어는 이웃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덕을 요청할 때(살전 5:14)와,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삶이 요구되어질 때 사용되어지는 단어로써, 사랑과 함께 열매에 속한다(갈 5:22). Anthony C. Thiselton는 오래 참음 즉, 인내는 충실함이나 소망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면서, 오래 참음의 참 본질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며, 어떤 것에 있어서 그 사람이 들을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대전제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오래 참는다를 제시하고, 오래 참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위해 일할 자격이 있는 직분자로서 적합하다는 소전제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직분 자로 적합한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결론이다. 오래 참음의 속성이 그리스도의 것이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람은 오래 참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오래 참는 사람이 직분자로서 적합한 것은, 공동체의 여러 가지 상황 안에서 타자를 위해 침묵하며 잠잠히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이 직분 자로 합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직분을 가진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다라는 결론을 유추해낸다. 이와 같이 구성된 계획의 수사학적 추론은, 논리적인 진행을 결론에 말함으로써 자기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를 더 강하게 표현하려는 것이, 생략삼단 논법에서 얻어지는 유익이다. 만약에 오래 참는 것이 논증의 근본적인 가치라고 생각할 때, 이 논법은 그러한 가치의 증언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희생을 요구한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며 타자가 들을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을, 오래 참음의 열매라는 안토니의 말처럼, 부단한 희생이 동반되지 않으면 가능하지 못하다. 그러기에 그런 자가 직분 자로 적합하다는 것이다. 고린도 공동체가 각 자 자기의 은사를 가지고 무질서하게 교회를 어지럽히는 현상에서는, 타자의 주장을 인내로써 들어주며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기다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의 비밀을 아는 자라면, 인내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강조하는 바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고전 13장 전체를 통해 여러 논제들을 가지고 생략 삼단 논법을 구성해 볼 수 있다. 바울이 13장의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린도 교회를 향해 지켜야 할 교우의 규범을 제시함에 있어서, 사랑을 은사들 중에 하나가 아닌 보다 높은 범주에 속한 것 으로 논한다. 여기서 그는 영, 육의 사람들을 분리시켜서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필요 적절하게 은사들을 활용하려면, 무엇보다도 은사의 본질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신 목적을 이해할 때 온전한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육의 사람들이 은사만을 강조하며 공동체의 유익을 훼손할 소지가 농후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기준을 세워놓 고, 자기의 은사들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게 하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의 기능으로써 행할 일(에르곤ergon)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랑의 논쟁을 살펴보면 고린도전서 전체 본문 안의 심의적 수사학과는 달리 13장은 사랑의 기능을 제의적 수사학적인 방법으로 논한다. 이것을 통해 어느 곳에서보다 더욱 아름다운 사랑의 역할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사랑의 찬가로 불려지는 13장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깨닫 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을 따라 주의 길을 감에 있어서 사랑으로 기능할 때만, 비로소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에르곤(ergon)은 역사, 일, 행위 등으로 바울서신 안에서 다양하게 사용된다. 유대교의 율법을 지킬 때에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롬 3:28; 갈 2:16),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행위를 가리킬 때에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갈 5:6; 살전 1:3; 살후 1:11). 믿음의 공동체에서 바울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실천 하고 따르는 역동적인 행위를 증명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 여기서 바울이 사랑을 논할 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말한다. “내가 예 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 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바울의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어떠한 사랑도 이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없다. 이러한 바울의 세밀하고도 전략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의 윤리적인 측면에서 사랑의 행위들을 열거하였다. 공동체의 모든 관계에 서 바르게 실천하도록 독자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삼단논법을 전략적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바울의 특별한 견해를 논하기 위하여 ‘반대의 것’으로부터 논증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긍정적인 측면을 더 확실하게 강조하려는 변증법적 추론의 사 용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바울은 모든 명제 앞에 사랑이라는 전제를 생략하고 아래와 같은 삼단논법적으로 육의 사람을 제 시한다. 즉 사랑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무례한 방법을 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추해보는데서, 육의 사람이 행하는 은사와는 다른 명제를 가지고 정반대로 논증하는 예이다. 대전제: 육의 사람은 하나님을 떠난 자이다.(생략) 소전제: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무례히 행한다.(생략) 결론: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난 자는 육의 사람이다.(생략) 여기에서 육이라는 말은 생략되어 진행되어지지만 우리는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에서 육의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무례하게 행동하므로 공동체를 무너뜨릴 소지가 있다라는 간주 아래 생략삼단논법으로 육의 사람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아래와 같이 여러 삼단논법을 설정해 볼 수 있다. 대전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 소전제: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결론: 그러므로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고전 13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어떻게 보면 13장은 사람과 사람사이에의 사랑으로만 편중되었다고 잘못 이해할 수 도 있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전제아래 이웃과의 사랑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 사랑은 영원하고 완전하여 변하지 않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완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 관하여 삼단논법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대전제: 예언과 방언과 지식은 사라질 것이다. 소전제: 사라질 것들은 유한하고 부분적인 것이다. 결론: 그러므로 사라질 것들은 예언과 방언과 지식이다. 모든 은사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소중하고 귀한 선물들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고전 14:12)서 허락하신 선물이다. 은사는 분명한 목적 아래 주어졌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며 지체들의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 되게 하기 위한 도구로서 활용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는 유한한 것이다. 필자인 바울은 은사가 이 땅에서만 사용되는 일시적인 것을 전제아래 사라지게 될 것을 거론한다. 그러므로 은사의 유한함으로 삼단논법을 가능케 한다. 즉 방언이나 예언이나 지식등은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지만, 오직 위로부터 성령님의 강권적인 은총 속에 공동체에 지체들 마다 다양하게 주어져서 부분적이나마(13:9)활용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면 부분적이던 모든 은사들은 불필요하게 된다 (13:10). 은사들이 현재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고 공동체가 존속하 는 동안에는 꼭 필요하다. 하지만 온전한 것을 이루기 위한 부분적인 것과 유한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필자의 의도는 영원한 사랑에 관하여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13:13). 대전제: 어린 아이는 장성한 사람의 일을 알지 못한다. 소전제: 장성하지 못 한 자는 깨닫지 못 한자이다. 결론: 그러므로 장성하지 못 한자는 어린아이다. 어린 아이는 힘이 없는 상태여서 성인들의 보살핌이 필요하며, 어른들의 지도가 아니면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어린 아이가 성인의 이상을 갖기 위해서 성장해야한다. 신 체적인 면이나 경제적인 면이나 지식적인 면이나 어느 면 에서든지 어린 아이가 어른을 능가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어른의 일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필자는 어린아이를 예로 들어서 은사를 중요시하며 사랑으로 행하는 않는 부류들에게 깨닫지 못한 상태라는 표현의 방법을 쓴다. 여기서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를 통하여 어른과 어린 아이를 대비시켜 사랑으로 행하는 사람을 장성한 사람으로, 그리고 은사적인 면으로만 치중하는 사람을 아직은 미성숙한 사람으로 분류시켰다. 대전제: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린 자는 장성한 자이다. 소전제: 장성한 자는 말씀을 깨달은 자이다. 결론: 그러므로 말씀을 깨달은 자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린 자이다. 바울이 고린도 공동체에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장성한 믿음을 가져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과 같이 유치한 상태에 머물러 신앙의 진보를 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사안들로 인하여 무질서한 공동체에 요구하는 기법이다. 바울이, 성숙한 공동체가 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재정립시켜 주고자, 어린 아이와 장성한 자의 비유를 통해 삼단논법적으로 비유하는 것이다. 장성한 사람은 영적인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진 사람이며, 신령한 존재로서 그리스도 말씀을 깨달아 믿음이 성숙한 자들이다. 장성한 자녀가 부모님의 마음을 알고 부모님의 일을 돕는 것과 같이, 장성한 믿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동역자가 되어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현실을 타파해나간다. 즉 종말론적 윤리로써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에 소속된 자로서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으나 현재적인 임박한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부활과 심판을 기다리는 가운데 육에 속한자로 어린 아이들처럼 이생의 자랑과, 안목과, 육신의 정육에 관심을 갖지 말기는 바라는 간절함이었을 것이 다. 장성한 자들은 신령한 세계를 깨닫고 영적인 비밀과 분별력을 소유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에 참여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뿐 아니라 만물을 유업으로 받을 신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고린도 공동체에 아무리 큰 분열과 문제들로 인하여 어려움이 발생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종말론적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만 있다면, 그 모든 것은 문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하였다. 바울이 거론한 분열과 분리와 같은 사색의 문제보다 성숙하지 못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그들의 신앙상태가 문제였기 때 문이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헤쳐나 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의 은총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 에 분열을 서두로 해서 여러 가지 문제들로 갈라지고 찢어진 공동체가 된 것이다. 이것을 독자들 자신 스스로 결단하도록 촉구하려는 데 있어서, 필자는 심판과 부활의 소망이라는 종말론적 신앙의 결론 부분을 생략하는 기법을 사용하여, 현재 장성치 못한 상태라는 것을 더욱 강조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의 에토스적 기법으로 독자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기를 결단하게 하려는 것이다. 필자는 공동체를 위해서는 어린 아이와 같은 육적인 신앙을 버리는 것이 시급한 사안이라는 것을 독자들로 하여금 공감하게 하기 위한 의도인 것이다. 사람의 감정은 쉽게 동요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서신인 로마서 13장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 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가운데 다 들어 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롬 13: 9-10), “온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 속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 라”(갈 5:14-15),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4). 또한 수사자가 사람의 감정을 자극할 때 어느 방향으로 주도하느냐에 따라서 긍정적 결단으로 이끌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라는 점이다. 즉 사람의 감정 변화에 동요가 되도록 저자는 의도적으로 청중내지 독자들에게 공감적인 이슈를 가지고, 긍정적 차원으로 독자들의 감정을 유도한다면 그들이 쉽게 결단할 수 있다는 논지이다. 필자인 바울 역시 고린도 교회의 교우들에게 성숙과 완전이라는 화제를 가지고, 그들이 처한 문제들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실현시켜야 할 것인가에 대한 행동지침을 공론화 시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로 전환되게 하기 위해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 범례 범례는 본문 안에서 저자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 용한 내용들을 말하는데, 범례(paradeigma)는, 수사학의 귀납법으로 대표적인 형태의 예증법이다. 예증법은 유사한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에서 생겨나며, 일종의 유추에 의한 논증이라고 할 수 있다. 예증법은 설득하고자 하는 것과 유사한 훌륭한 실례들을 찾아내는 기술을 뜻하며, 주제부를 지지하는 목적에 있어서 설득을 위한 강한 호소력을 제시한다. 범례는 실재인 것과 허구인 것이 있는데, 실재인 것은 역사적 사건들과 신화적 실례도 사용할 수 있고, 허구적인 것은 비유나 우화 혹은 이야기 등이 있다. 설득의 자료가 예증과 유추들, 그리고 우화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논증의 패턴 안에서 주제를 더욱 뒷 받침해줄 수 있는 하나의 증거로서 간주된다. 범례의 종류에는 상식적인 것과, 자료적인 것, 그리고 전략적인 것들이 있다. 상식적인 것과 자료적인 것은, 담론의 논증이나 설득을 위해 제공하는 ‘특수한 논제’라고 하고, 전략적인 것은 논증이나 설득의 전술을 제공하는 모든 형태의 논증으로서 ‘형식적인’ 것이다. 104) 따라서 고린도전서에서 사용된 역사적, 가상적 범례를 찾아 보면서 저자가 어떤 의도로 이러한 역사적인 것과 가상적인 범례를 공동체에 적용하고 있는 지를 알아볼 것이다. (1) 역사적인 범례 역사적 범례는 과거의 사건들을 말한다. 고린도전서에서 이러한 과거의 사건들을 범례로 사용하는 목적은 독자들에게 좀 더 많은 신뢰와 설득을 위한 것으로 사용된다. 13장에서 역사적 범례의 첫번째 것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고전 13:2)들 수 있다. 산은 바울에게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자취를 살펴보면 산은 기도의 장소요(마 14:23; 막 6:46), 시험의 장소였으며(마 4:8), 제자들을 부르는 장소였고(막 3:13), 말씀을 가르치던 장소로 사용되었고(마 5:1), 피난처의 장소였다(마 24:16).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 곳도 다름 아닌 변화 산이다(마 17:1f). 산은 그리스도의 자취를 쫓는데 있어 서 뗄 수 없이 연관된 장소로서 등장한다. 고대에서 산은 항상 신들의 거처로서 인간이 감히 정복하지 못할 곳이며, 변함없는 장소로서의 상징이었다. 바울이 이와 같은 산의 의미를 믿음에 접목시키고, 그 믿음조차 사랑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은 복음서의 말씀의 인용이다. “겨자 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눅 17:6), 겨자씨(sinapi kokkos)는 아주 작은 단위를 말한다. 겨자 씨와 산은 비교가 되지 않은 단위의 무게와 중량의 대비이다. 그러나 아주 작은 단위의 믿음이라도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산보다 더 큰 위력이 있음을 말한다. 겨자 씨와 같은 적은 믿음이라도, 산을 옮길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므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하나님을 역사하게 하신다는데 목적이 있다. 복음서에서 겨자씨 믿음과 비유하기 위해 등장하는 산은 그 부피나 단위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작용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역사적 범례로 선택한 산은 아주 크고 견고하여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구약에서의 산이란,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로 등장한다. 이곳에서 거의 하나님을 대면했으며 산에서 언약과 약속을받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다. 그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으며(출 3:1ff), 그곳에서 소명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시내 산으로 이끌었다. 모세는 그곳 시내 산에서 율법을 수여받는다 (19:1ff; 24:12ff; 31:18).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뵈었으며(20:21ff), 르비딤 골짜기에서 아말렉과 싸우는 여호수아를 대신하여 산꼭대기에서 기도하므로 이기도록 하였고 (17:7-16), 느보산에서 그의 생애를 마쳤다(신 34:1-6). 그는 호렙 산에서 소명을 받았고, 느보 산에서 사명을 마쳤다. 모세의 소명이 산에서 시작되어 산에서 마친 것이다. 또한 구약에서의 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으며,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신들의 제사장과 싸워서 이기었고(왕상 18:30-40), 싸움 후에 낙심한 엘리야에게 호렙 산에서 하나님은 다시 소명을 주신다(19:8-21). 이와 같이 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기도 한다. 욥기 9:5절에서는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며 옮길지라도” 산을 무너뜨리고 옮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극치를 나타낸다 는 의미이며.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 보이기도 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를 대행하는 능력의 사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믿음과 능력이 있다 하더라고 사랑이라는 믿음의 본질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으며, 지체로서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 분명하다. 두 번째 범례는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고전 13:3)에서 찾 아 볼 수 있다. '내어주다'(paradidomi)의107) 의미는 ‘위임하다/ 맡기다/ 넘기다’의 의미로서 자기 주권을 타인에게 넘겨주는 것을 뜻한다. 복음서에서의 이 단어는 예수를 넘겨주는 데 흔히 사용된다. 여기에서 예수가 타인에 의해 넘겨지는 과정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으나, 실상은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위임하시고 그리스도의 주권을 포기한 것을 알 수 있다(요한복음 19:11). 바울은 고전 13:3에서 이 단어를 사용할 때 그리스도께서 ‘잠잠히 털 깍는 자 앞에서’ 순종하셨던 의미로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다'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고 오직 순종에 의해서 스스로 어린 양이 되셨던 사건처럼, 바울이 자기 몸을 내어주는 사건이, 타인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내어주는 희생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내어 주다'를 그리스도의 사건으로써 역사적인 범례를 살펴보 면, 출애굽기의 유월절 양(고전 5:6-8)이다. 유월절의 어린 양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기 전날 저녁,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유월절의 절기이다. 곧 “어린양”(출 12:3)을 취하되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컷으로”(12:5) ”내가 피를 볼 때에는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12:13-14). 구약의 어린 양이 그리스도의 내어줌과 같은 희생이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 생되셨느니라”(고전 5:7) 어린양이 희생이 되셨듯이 그리스도께서도 스스로 그리고 기꺼이 희생양이 되어 주신 것이다. 유월절에 어린양이 ‘내어주’는 사건이듯이 바울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에서 그리스도의 어린 양과 같은 희생을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록 바울이 이런 형태의 희생을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는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크게 부각시키기 위한 범례인 것이다. 역사적 사건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같이 전무후무한 사건이 없다. 그러한 사건을 비유로 해서 희생을 말하지만, 그 안에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역사적인 범례들을 사용하여, 사랑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놀라운 능력이 되는지, 독자들로 하여금 인지하도록 각인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2) 가상적인 범례 로고스적 호소는, 삼단논법과 범례의 방법을 사용한다. 앞에서 는 역사적인 범례로 ‘산을 옮길 만한 믿음’과 ‘내어 주다’를 통하여 필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사랑’에 대해 논리적 호소에 대해 언급하였다. 여기에서는 ‘사랑’의 주제를 지원하기 위해 필자가 사용하고 있 는, 가상적인 범례로서의 구약성경의 인용과 비유 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가상적 범례로서 첫 번째 비유적 범례는 ‘어린 아이’와 ‘어른’이다. 어린 아이와 어른의 비유는 장성한 자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약한 자들에 관한 것들로 대조된다. 어린 아이와 같이 유치한 생각과 말과 행동은 자기 중심적이어서 타자를 위한 배려를 하지 못한다.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신앙상태로서 (마 6:31), 현실에 급급하여 남의 형편을 살필 수 없는 자들을 말하 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파당을 형성하여 가난하고 힘 없는 자들을 제외시키고, 자기들끼리 음식을 먹고 마시므로 취한(고전 11:12)자 들일 수도 있고, 주의 만찬을 합당하게 먹고 마시지 않은 자들 (11:27)일 수도 있다. 또한 이들은 신령한 것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부류(12:1)이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영을(12:3) 받지 못해서 신령한 것을 깨닫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은 3:1절에서 등장하는 어린아이들로 신령한 것을 알지 못하는 육에109) 속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와 같은 신자는, 그리스도의 진실한 사랑의 깊이를 깨닫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여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다. 제한된 부적절한 인식들로 판단력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아직 자라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teleios)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인 그리스도 를 보내주시고 자녀 삼으신 사랑을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성숙한 영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어린 아이의 생각에서 머물지 않 고 육체의 정욕과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소유한 자를 의미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임을 깨닫고(고전 1:24) 철저하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요,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인지할 수 있는 지각을 소유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장성한 자는 신령한 은혜를 깨닫고 생명을 주시기까지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쫓아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중심적인 것에서 탈피하여,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고 이해하며 살펴주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 온전한 그리스도의 뜻을 이뤄드리는 성숙한 자일 것이다. 두 번째의 비유적 범례는, 현재(arti)와 그때(tote)(고 전 13:12), 그리고 부분적인(meros)(13:12)것과, 온전한(teleios) (13:9-10)의 비유적 범례를 볼 수 있다. ‘부분적’인과 ‘온전한’ 것이라는 대비를 통해 단편적인 것과, 완성된 미래적이며 종말론적인 것에 대한 비유이다. 이것은 시간의 범주에서 은사들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금’과 ‘그때’를 대비시켜 고린도 교회의 현재적인 실존과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봐야 할 미래적 부활의 소망인 ‘그때’의 완성을 추구해야 할 것에 대한 대비인 것이다. 현재와 부분적인 의미는, 지상교회의 미완성 상태로서, 지금은 실존이 아니며 간접적인 경험과 온전한 것에 대한 모형으로, 불완전한 상태를 자각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부분적’과 ‘지금’은 고린도 공동체에서 자랑하고 있는 지혜를 의미한다라는 결론으로 볼 수 도 있다. 그들은 ‘육체적으 로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으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음’(고전 1:26)에도 불구하고 지혜를(1:27)자랑하고(1:31)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가에 관하여 깨닫고 부끄럽게(1:27)여기며, 하나님 앞에서 아무 육체도 자랑하지 못하도록(1:29)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지혜를 자랑하고 깨달은 것에 대하여 자랑한다고 하여도 여전히 부분적일 수밖에 없으며, ‘지금’이라는 불완전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1:7)의 그날에는 온전케 되어지며,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함과 같이 비밀과 지혜가 완벽하게 완성된다는 것이 종말론적인 바울의 논지이다. 아르티(arti)는 지금 막, 당장, 최근, 방금, 지금까지 등이다. 토테(tote)는 '그 때에', '그 당시'라는 뜻을 갖고 있다.
고전 13장에 사용된 설득의 양식을 통한 설득의 방법을 분석해 보았다. 더불어 필자가 목적하고 있는 바를 에토스(인성), 파토스(감성), 로고스(이성)의 측면으로 살펴 봄으로써 ‘사랑’이라는 주제가 어떻게 강조되고 있는지를 논하였다. 이제 설득의 양식의 연속 에서, 주제인 ‘사랑’을 설명하는데 사용된 여러 가지 논제 중에 ‘유익’과 ‘믿음’과 ‘교만’등에 대하여 살펴 볼 것이다. 이번 장에서 다룰 논제들 역시 로고스에 포함되는 것들이다. 이러한 논제들은 하나하나가 주제가 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논제들이다. 이러한 각각의 논제들은 방대한 범위이고, 그 중요성 때문 에 로고스에 포함되지만 여기에서 따로 다루고자 한다. 고전 13장은 사랑과 관련하여 여러 논제들이 사용되고 있음을 앞에서 언급하였다. 이러한 중요한 논제들로는 ‘방언’, ‘유익’, ‘믿음’, ‘소망’, ‘온전’, ‘알다’, ‘자랑’, ‘교만’등이 있다. 여기에서는 그 중에서 사랑의 주제와 관련하여 ‘유익’과 ‘믿음’ 그리고 ‘교만’의 논제들을 통해 주제인 ‘사랑’과 관련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1.유익(Opheleo) ‘오펠레오’(Opheleo)는 오펠로스(Ophelos)에서 유래했으 며 ‘돕다/ 조력하다/ 유용하다/ 유익하다/ 도움이 되다/ 이익이 되다’ 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전 13:3; 14:6). 사랑과 관련된 유익은 굉장히 중요한 논제 중 하나이다.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의 13:3절과 5 절에서 말할 때의 유익은, 공동체를 지탱하는 사랑과 함께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임을 살펴 볼 수 있다. 유익이라는 단어는 고린도전서 에서 오펠레오(opheleo)라는 표현과 함께, 쉼페로(sumphero)라는 동사로 쓰이고 있다. 쉼페로(sumphero)는 페로(phero)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짊어지다/ 나르다/ 견디다/ 안내하다/ 감당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6:12; 10:23; 12:7). 유익이라는 단어에서 의미가 밝혀지듯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는 어떤 짐을 짊어지듯 희생을 전제로 하며, ‘나르다’ 역시 남의 짐을 나를 때를 의미하며, ‘견디는 것’ 역시 참아주며 이해하는 뜻을 포함한다. 또한 ‘감당하다’는 좋은 일도 감당하지만 어떤 불이익도 함께 감당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유익을 사용할 때 개인을 위하지 않고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사용하고 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나타날 때 상호보완적이며 서로 유기적으로 기능하는데 있어서, 덕(고전 14:5, 12)을 끼치고 돕는 지체로서의 유익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체들은 상호 보완적이기 때문에 다른 지체를 위하는 희생이 바로 자신을 위한 유익이기도 하다. 그 좋은 예로 바울이 그들을 향해 지칭할 때 ‘형제들’을 사용함으로써 서로 하나임을 상기시키는 데서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가족애의 성격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책임과 의무가 동시에 주어짐을 알 수 있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2:14) 즉 한 몸으로서 서로의 짐을 감당하는(phero) 것이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형제로서 책임을 감당(phero)할 고유한 직분을 자각하게 하기 위해 몸의 기능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같이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직분은 서로 공동체를 형성하며 바르게 기능해야 하며 각 직책의 직분에 따라, 그리고 각자 주어진 역할을 따라 온 몸을 형성하며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기능해야 한다. 하지만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였다. 시기와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이 있었고(고전 1:11), 자신의 은사를 자랑하고 (4:7; 5:6), 교만하여(4:18; 5:2; 8:1)115)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무너지게 하였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지체의 유익을 위해 존재해야 할 지체들이 자기의 유익을 위해 자랑하고 교만해진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반을 두고 있다(5:7). 따라서 교회는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남의 유익을 구하는 윤리적 행위가 다른 지체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는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10:33).116) 바울에게 있어 믿음의 공동체는 은사를 받은 신자들의 지체들로 이루어지는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표현된다. 몸을 이루는 각 지체들은 고유한 이름을 가지며, 그 이름은 공동체의 직책을 나타낸다. 직책은 은혜의 선물로서 은사(charisma)라는 말과 상응한다(고전 12:4-11; 롬 12:4-8). 몸의 지체들은 성령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나타냄으로서 그 공동체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의 통일성은 카리스마들이 상호작용으로 구성되며 몸의 은유는 지체들의 한 몸을 이루기 위한 일치와 상호의존성을 내포하고 있다(고전 12:12).117) 즉, 은사들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필요하며,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온전히 세우기(oikodome)위해서 주어졌음을 인식하며, 그 일을 주력해야 한다(8:1; 14:3, 4, 5, 12, 26).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soma)118)을 세우기 위한 요소들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은사가 다양하듯 공동체의 직분도 다양하다(고전 12: 8-11, 27-30). 몸의 기능이 다양하듯 공동체의 직분도 다양함은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할 때, 비로소 하나가 되어 온전한 몸이 되는 것이다(12:12-20). 강한 자들은 약한 자의 짐을 담당하며 협력할 때 아름다운 몸이 되는 것이다(12:22-25). 은사들의 기능은 의의 도구로써 공동체의 몸을 위한 것들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최고의 삶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공유하고, 그 생명을 통해 또 다른 지체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여 생명을 공급받아 사랑의 열매를 맺도록 협력하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직책은, 그 자신을 위해서만 살도록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새롭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서로를 위한 섬김의 삶을 살아야한다. 교회의 몸인 지체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요청하신 것은 성령이 허락하신 은사를 받아들여 몸을 세우는데 있다 사랑의 열매는 모두 대인관계에서 맺어지며 양자관계에서 얻어지는 결과물이다. 이 사랑은 생명력을 발휘하게 되며, 그 생명의 원리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위한 것으로써 모든 은사에 역사한다. 그러므로 고전 12:31절은,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한다. 더 큰 은사를 구하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다른 지체들을 위하여 많은 희생과 헌신을 위한 사랑이 요구된다. 이 논증은 은사의 기능 이 공동체 안에서 단독으로 움직여서는 안 되며, 유기적인 연합이라는 공통분모 속에서 사랑으로 일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바울의 윤리적 명령은 그 사랑 안에서의 은사는, 남의 유익을 위하여(고전 13:3-7)있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바울이 표현하는 사랑에는 자기만 위해서 존재하는 지체는 없다. 오직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나타나야 한다는 것인데 모든 지체들과의 관계에서 그 중심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다른 지체에 유익을 주기 위해 일할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은 사랑인 것이다. 방언도 예언도 지혜와 지식도 공동체에 있어야 할 은사이나 사랑이 없으면 남을 위해 헌신하며 희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8:1-13; 12:31-13:13; 14, 16절 등을 살펴보면 사랑의 우선성 깨닫게 된다. 사랑만이 고린도 공동체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교회가 사랑 으로 하나 되어야 함은,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존귀하신 이름(onoma)122)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워진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바울은 십자가로 대변한다(고전 1:17-18, 23; 2:2), 십자가 안에는 그리스 도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할 때 두 차원에서 설명하는데, 그 하나는 “십자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이며(1:23),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1:17)이다. 이 둘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관한 것과 그가 하신 일(ergon)에 관한 것으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2:2)는 말씀 속에 모든 것이 표현됨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고 그 안에서 한 몸을 이루게 하신 일(ergon)이 십자가 사건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사건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교회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써 그 자취를 따름에 있어서 십자가 사랑을 쫓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세워진 공동체인 교회에 대해 바울은 그의 ‘몸의 신학’으로 대변된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불려지는 것은(고전 1:2; 10:32; 11:16, 22; 15:9),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5:7; 7:23)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속죄123)뿐만 아니라, 속량124)으로 죄에서 분리시켜 그리스도의 거룩성에 참여케 하여 주신 것이다. 몸은, 그리스도께서 대속물로서 육체로서 고난 받으셨다는 사실로 인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유기적인 관계로서,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 해야 할 책임과 의무도 함께 주어졌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산 것이기에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하여 두 개의 수식어를 사용한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입는 자 들’(고전 1:30; 6:11)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 받은 성도들’(1:2)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입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모임을 통하여 거룩함이 확인되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연결된 형제로써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예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은 사랑으로 덕을 세워(8:1),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는 계기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고전 10:33).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몸(soma)으로 표현하여 인간학적 용어로 결부시킨다. 인간 몸의 구성요소가 다양하여 하나의 인격적인 존재가 되듯이, 공동체 지체들도 상이한 지체를 통해 유기적 공동체를 이룬다. 이것은 서로 다른 지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자기도 모든 지체로 부터 동일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된 지체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하나이기 때문으로 분리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두가 기쁨도 공유하며 슬픔도 공유하면서 서로를 위한다. 형제가 기뻐할 때에 함께 기뻐하며, 슬퍼할 때는 함께 슬퍼한다. 피를 나눈 형제의 본질이다. 이처럼 끈끈하게 연결된 공동체에 자기 이익만을 따질 사람이 있겠는가? 공동체의 유기적 연합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공동체의 지체들이 받는 영향은 모두에게 미치는 것과 동일하다. 몸은 공통의 신경을 가진다. 몸 안에는 각자가 다른 지체와 일체가 될 수 있는 공통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 면 모두가 하나이며, 하나 안에 모두가 있는 것이다. 각 지체가 연결되어서 한 몸을 이루고, 그 몸 안에서 영광도 누리고 그 몸 안에서 고통도 분담한다. 몸에서 떨어진 지체는 살 수 없다. 몸에 머리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공동체라는 몸에서 떨어지면 주님과도 단절된다. 그러므로 몸에서 탈락되면 주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없고 생명을 유지 할 수 없다.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기 능을 하고, 그 몸 안에서 생명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 생명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구원의 길이며, 그 생명의 은혜만이 하나님의 은총을 누릴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은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내어주신 사랑이다. 그 사랑은 교회라는 공동체에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을”(고전 1:30)을 주셨고,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움”(1:30)을 받게 하셨다. 주의 속성을 부여받은 교회의 각 지체들은, 그 몸에 역행하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동하면 안 되는 것이다(6:12ff). 바울은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자신이 교회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모든 것처럼, 교회 구성원들 모두가 이와 같은 마음으로 섬기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주께서 몸 된 교회를 사랑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고, 그 사랑을 따라 지체된 자들도 주와 합하여 한 영이(고 전 6:17)되었기에, 모든 것을 사랑으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13:7). 주께서 주신 사랑은 아가페 사랑128)이다. 사랑은 알고 끝나는 지식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랑은 움직이게 만들며 타인을 향하여 활동하게 한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며 영원한 사랑이다(고전 13:1-8; 롬 13:10). 사랑이 없는 공동체는 다툼과, 허영과, 자랑과, 교만이 난무할 뿐이며, 제 기능을 감당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와 같다(고전 13: 11). 어린 아이는 자기 자랑에 빠져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고 현실에만 안주한다. 바울이 ‘내게 유익이 없다’라고 하는 말의 의미 를 살펴보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인 믿음의 공동체를 사랑하고 세우는 것이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며(8:1), 자신을 위한 것이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 된다라는 것이다.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분배하며, 또한 기쁨도 영광도 함께 받아야 하기 때문에(12:26), 서로의 유익을 위해 사랑하라는 것이다(10:23, 24, 33; 12:7; 13:5). 2. 믿음(Pistis) 믿음의 논제는 은사로서의 열매인 사랑과,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과 함께 더불어 논의되어진다. 즉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고전 13:13)를 말하므로써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 성도들에게는 항상 있어야 할 덕목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사랑과 뗄 수 없는 상관관계와 같다. 사랑이라는 주제에서 왜 믿음이 중요한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고대 그리스에서 믿음(pistis)은, ‘확신/ 의지/ 신뢰 할 수 있음’ 으로 사용되어졌고, 더 나아가 ‘담보나 맹세/ 보증/ 증거’와 같은 구체적인 뜻으로서의 한층 객관적인 ‘신빙성’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믿음이 종교적 의미가 체계화된 것은 헬레니즘시대부터였고, 그리스의 여러 신비 종교에서는 믿음을 신의 훈계와 가르침을 따르는 것과 자신을 신의 보호에 맡김으로서 신에게 위탁하는 것으로 사용 되어졌다. 믿음에 관하여 구약의 개념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일차적인 행위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 경건한 자가 하나님을 향해 서서 그분만을 의지하며 바라보는 것과, 하나님의 지침에 관하여 충실함을 나타내는 말로 표현된다. 이는 그리스 세계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를 포함하며, 순종에 관하여는 더욱 강력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계명들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신 9:23), 확신, 소망, 가운데 말씀에 대하여 순종하는 것으로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그분에 대한 경외함을 명확하게 보여드릴 수 있다.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받아들여 수용하므로서 시작되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속함을 받아 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그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진행되어진 모든 사건들을 인식하는 데부터 시작되어지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한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신 교리를 믿는 믿음과, 그 분에 대한 인간의 신뢰로서의 믿음(롬 4:3; 10:9, 16) 등이다. 또한 신뢰, 의존(롬 4:5; 9:33)등으로서의 믿음은, 침례를 받고 죽음으로 예수와 하나가 되어(6:3-4), 주 아래 자신을 두는 행위를 통해 표현되는 신뢰라는 것들이 믿음이라고 James D. G. Dunn은 말한다. 그러므로 믿음에 관하여는 바울서신 여러 곳에서 확실하게 발견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엡 2:8상),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에 대한 신뢰,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확신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고린도 전서는 로마서나 에베소서처럼 믿음에 대한 구절들이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린도전서에서 나타나는 믿음이라는 논제의 중요성이 약화되지는 않는다(고전 2:5; 12:9; 13:2; 13:13; 15:14; 15:17; 16:13). 믿음은 개인의 내면에서 출발하는 마음의 작용으로 영접과 수용이 있는 반면, 외적인 행위로써 나타나는 실천과 따름으로서의 믿음이 있는데 실천과 따름으로서의 믿음의 행위가 사랑이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로써 믿음을 수용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실천의 덕목에 해당된다면, 믿음은 내면의 세계에서 작용하는 요소로서 사랑과 짝이 된다. 신약성서는 믿음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지식의 요소를 강조하고 있으며, 또 다른 경우에는 신뢰의 요소를 의미하는데 있어 서 인물에 대한 일반적인 신뢰, 미래를 그분에게 의뢰하는 것 등이 있 다. 더 구체적인 그리스도교적 용례를 살펴보면 메시지를 받아들이 는 것으로서의 믿음이 에이스(eis)와 함께 사용될 때 믿음(pistis) 은, 복음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모든 구속사건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 안에는 믿음, 순종, 의지, 소망, 충성 등이 포함되며, 믿음의 내용 안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것으로, 부활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고전 15:14). 더 나아가서 그의 부활은 죄를 위한 그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주셨다. 어떤 것을 인식하고 알게 될 때 쓰는 단어인 그리스어 ‘오이다’(oida)는 ‘보았다/ 인식했다/ 깨달았다’등으 로 ‘알다/ 이해하다’의 의미가 있다. 믿음은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2:8).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과정 속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성취하심과 완성해가는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포함된다. 이른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하신 약속들이 성취되어지는 것까지이다. 바울은 그 분의 죽음과 부활이 어떠한 능력과 권세와 힘으로서, 성도들에게 큰 축복이 되는지를 깨달아야 된다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의 변형을 신뢰하는 것이다.
3. 교만(Phusioo) 교만을 뜻하는 헬라어 퓌시오오(phusioο)160)는, 퓌사(phusa) 에서 유래 했으며 ‘부풀리다 혹은 우쭐해지다’의 현재형으로 본서에 서 여러 차례 반복해서 거론되고 있다(고전 4:18; 19; 5:2; 8:1; 13:4). 이 구절들에서 바울은 특정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일컬어 자 기만이 제일이라는 자들을 향한 단어로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교만은 자신에 대해 거짓된 평가를 내리므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헛되이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부류들이다. 이들의 특징은 다른 사람을 언제나 깎아 내리는 것이 특징이다. 교만한자는 대부분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을 말할 때 표현되어 있다. 이들은 창조자를 경멸하며,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높은 위치에 올려놓고 자랑하는 자들을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행위로써 오만한 자들을 지칭할 때 쓰는 용어이다. 또한 이것을 바울이 현재형으로 쓰고 있는 것은, 교만한 마음이 진행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고전 13:4절에서의 교만은,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행위를 말하고 있다. 고린도 공동체가 이러한 교만이 어디서부터 발단 되어졌는가? 그들의 잘못된 지식에서부터 출발한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고전 13:1), 은사와 지식은 충만하였지만(1:5), 이들의 지식은 알맹이 없는 것과 같은 잘못된 지식이었다. 사랑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우상에 대한 지식으로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163)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8:1). 이들의 출발선상은 우상제물 에 대한 지식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바울이 왜 우상제물과 관련된 지식을 교만한 자세로 이해했는가? 하는 질문은, 하나님을 떠나 그 중심에 말씀이 없기 때문으로 이해되어진다. 바울이 우상제물 을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에 관하여 말할 때, 우상에게 받쳐진 음식을 먹는 문제를 가지고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8:4)는 사실이다. 바울이 8:2-3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이들이 알고 있는 우상 제물에 관한 지식 안에는, 우상에 관한 지식만 있을 뿐이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 될 수 있다. 그들의 몸은 교회 안에서 지체로서 기능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니다 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당시 고린도 시에는 많은 신전들이 있었다. 그 모든 신전에서 제사 의식들이 왕성하게 치루어 졌는데 모두 제단과 제물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모든 고기들은 우상 제물로 쓰였던 것으로 당시에는 일반적인 도살이 금지되어 있고, 신전의식에 쓰여 진 제물 들이 쏟아져 나와 시장에서 매매를 하게 되어 일반인들이 먹는 고기는 모두 이방신전 제사의식에 쓰여졌던 것들로 보아도 무방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문제를 다루면서 지식에 관하여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지식, 즉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이 없는 지식을 말할 때 교만으로 단정 짓고 말하는 것이다. 이들의 잘못된 지식으로 인하여 파당과 분열이 초래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밖으로 벗어났기 때문이다(고전 4:6).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13:4)와 같이, 교만은 시기와 자랑과 같은 위치에서 사랑과 대치한다. 그들은 신전에서 연회에 참석할 수 있는 신분은 종이나 노예계층이 아니라 적어도 중류층 이상이 되어야만 참석할 수 있었다. 이때 이들에게 지배적인 사고는 신분에 대한 우월감으로 인하여 자랑하며 더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한 시기와 오만으로 지체에 대한 온유함은 없는 상태였을 것이다. 그로 인하여 그리 스도의 낮은 신분의 지체들에게는 위화감과 신분에 대한 격차로 인한 좌절감을 줄 수 있어 공동체의 해체 위기를 겪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형제들아…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 4:6), 교만은 서로에게 대적하도록 한다. 지체가 지체를 향하여 자기의 유익만을 추구하며 무례히 행하는 악한 요소들은, 교만으로 자기의 유익만을 추구하게 되므로 시기와 자랑 164) 당시 제사들에 바쳐진 희생물들은 세부분으로 나뉘어졌다. 그 중 3/1는 제단에서 태워졌고, 3/1는 사제들에게 주어졌고, 3/1는 봉헌자에게 돌려졌는데, 그 중 사제들에게 주어진 부분들이 시장으로 흘러들어가 매매되는 경우가 많았으 며, 봉헌자는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어 먹었다. 신령하고 장성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 되어 그 분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일컬어 “오래참고 온유하며” 라13:4에서 말하는 것은 그 나라에 소속된 백성들이 행할 수 있는 믿음의 행위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육적인 것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로 새로워진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 장성한 자들과 또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속한 자들의 행위이다. 그러나 어린 아이와 같은 세상적인 지식을 소유한 자들은, 우상에 대한 지식으로 인하여 교만에 빠져 영적인 일에는 소홀히 하면서 파당을 일삼거나 자기도 모르게 분파 를 형성시킨 자들이다. 이들이 소유하고 있는 지식은 실상은 하나님을 모르는 육(sarks)적인 지식이다. 육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성에 역행하는 어리석은 사람들로 방종으로 자기 마음대로 무엇 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들이다. 바울은 이들에게 어린 아이와 같으며, 육에 속한 자들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고전 3:1, 3).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육(sarks)은, 공동체를 세워가는 신 령한 영과는 반대되는 매우 부정적인 용어다. 이들은 세상적이어서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과 반대되는 역할을 하므로 자기 유익만 (고전 13:5), 추구하며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로 인하여 마귀적이며 세상적인 자들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교만이라는 것은,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단어로 이해 할 수 있다.
Ⅱ고린도전서 13장의 수사학적 흐름 고린도전서의 수사학적 흐름은, 수사학적 배열을 통해 주제와 설득의 양식을 설명한 것을 토대로 하여 고전 13장을 해석해 나가는 것이다. 13장은 사랑의 극치를 찬양하는「사랑의찬가」라는 모든 학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이 과장되지 않을 만큼, 사랑의 심오한 보화들이 담겨있는 비밀창고와도 같다. 그러므로 본 글에서는 이미 제시한 주제와 더불어 새로운 설득의 양식을 가지고 본문의 흐 름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한 13장 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서의 흐름을 살펴보는 계기가 될 것 이다. 13장은 형식적으로 볼 때 은율을 지닌 산문형식으로 3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고, 내용면에서 볼 때 바울의 중심사상인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관한 논지가 거론되지 않아서 독립장으로 분리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12장에서는 성령의 은사들을 다 루어지다가 갑자가 ‘사랑’이라는 주제로 모든 내용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또한 13장은 정교한 수사학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문맥적으로 독립된 느낌을 받기에 고정된 형태의 자료로서 추정하는 것이 다. 그러나 12:31절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 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와, 14:1절의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의 연결점들에서 본다면, 사랑이라는 주제를 위한 12장에서 14장까지 이어지는 문맥들이 전혀 어색하지 않는 흐름으로 볼 수 있다. 14장 역시 사랑이라는 주제로 은사들을 이끌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고전 13:1-3 서론부에서는, 사랑이라는 명제를 앞에 놓고 교우들이 하나님께서 주셔서 활용하는 모든 은사들과, 그리고 인간스스로 할 수 있는 행위들과의 대조를 통해 비교해보도록 제시 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준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물들이 세상에 첫 번째 연의 1-3절은 사랑의 대조이며, 두 번째 연의 4-7절은 사랑의 서술, 세 번째 연의 8-13절은 사랑의 대비적 서술이다: 무의미한 것은 아무것도 없듯이. 모든 것에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위해 활동을 한다. 바울이 이 모든 것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기에 바울의 서신들을 보면 은사의 다양함도 적극적인 권장아래 서로 유기적인 협력을 당부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본장에서는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은사들이 제 몫을 담당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도록 사랑의 역할과 기능을 보여준다. 즉 영적인 은사들을 발휘할 수 있는 장소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이며 공동체 안에 사랑이 없이는 그 은사들의 가치는 상실되기 때문에 사랑이 없는 은사들의 무용성 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은 당대 최고의 학파에서 수학한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고(행 22:3), 정통한 히브리인이며(고후 11:22),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으로 율법에 흠이 없던 자이다(빌 3:5-6). 그가 속한 가말리엘의 스승은 힐렐과 샴마이로 당대 최고 의 랍비들로서, 율법의 해석서인 미드라쉬와 미나쉬의 전승서를 탄생시킨 바리새파들이다. 이와 같은 바울의 지식에 대한 배경은 율법을 생명처럼 여기며, 신앙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에까지 거슬러 올라 가서 진리의 토대로 여겼던 모든 것들이다. 그는 성경과 신학에 대한 깊은 이해로 그를 미치게 하였다는(행 26:24), 오해를 받을 정도의 말씀(토라)에 대한 지식이 깊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부활 하신 그리스도의 체험은 이성에 의해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에 관한 것으로, 오직 하나님의 계시만이 그것을 알게 하실 수 있는 영역까지이다. 고전 13:2-3절에서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 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 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 라”, 라는 말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은사들의 목록을 보면, 사랑의 중요성과 비중에 비해서는 아무리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모두 헛된 것임을 선언한다. 특별히 ‘내가 아무것도 아니며…아무 유 익이 없다’라는 말로서 사랑의 가치가 무한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 171) 다메섹도성의 체험 이전의 말씀. 172) 다메섹도성의 체험 이후의 말씀. - 87 - 리스도의 공동체에서 은사들은, 각자에게 주어져서 동일하게 특별한 역할을 하도록 역사하시지만, 그 안에서 사랑이 없는 행위들은 무용 지물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성도들이 행위에 대한 강조를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마 25:40). 말 씀과 “ 이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2), 하시면서 섬김의 도를 말씀하셨다. 바울 역시 그리스도의 자 취를 쫓아 죽음의 자리에 처한 상황을 열거하면서 “사십에 하나 감 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 고, 세 번 파산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 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 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4-27)고 하였다. 그는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자기의 삶을 표현할 때, 그 중심에는 이러한 상황이 내포되었을 것이다. 그가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라 는, 극단적 순교의 헌신으로 자기를 포기하고 생명을 죽음에 내던져 희생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는 헌신은 아무 유익을 가져오지 않더 라는 것이다. 바울의 중심에는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가 주목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이 될까?라는 물음 앞에 있는 자세로 살았을 것 인데, 모든 것을 다 실행한다하더라도 사랑이 배제된 행위는 그리스 도께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조차 진정한 기쁨이 되지 못하더라는 고백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삶의 목표가 그 리스도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지는 것이 최종목 적이다(행 20:24). 바울은 순교를 당하기까지 극악한 상황에서 자 신을 버린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는 순교는, 오히려 자기의 만족과 종교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며, 무의미한 고통과 죽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Ⅲ결론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영원한 속성과 그 기능으로, 교회를 세워나가게 하기 위한 중요함에 관하여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은사들이 꼭 필 요하다. 고린도 공동체처럼 내적인 혼란으로 공동체의 질서가 무너지고, 외적인 혼란 또한 가중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랑은 이방우상의 습관과 문화적 양식등이 공동체 안으로 유입되어 무질서 해진 공동체에게 어떤것이 유익한가? 하고 묻기 위해 던져지는 질문과 같다.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 즉,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워진 공동체 안에, 세상 문화가 파고들어 동화되어가는 상황에서 지체들의 결속력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유지보존하기 위해서 는 은사가 꼭 필요하다. 그러나 은사는 사랑보다 앞서거나 우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3장에 나타난 수사학적 연구 분석을 통한 사랑의 결과를 가지고 결론으로 요약하고자 한다. 고린도 공동체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의 부재로 발전된(고전 4:6; 13:4)교만과, 불의한 자들에게(6:8-9), 사랑의 윤리는 실천적인 지침서가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13:4에서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세우는 데 필요불가결한 것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요소가 된다. 사랑의 본질과, 사랑의 역할과, 사랑의 속성에 관하여 서술하면서 오래참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내용적으로 너무 많은 스토아적 사상이 많이 담겨져 있고 수사학적으로도 정교하여서 필자가 과연 바울인지 의심하기도 한다. 그만큼 사랑의 찬가는 특이한 문학양식을 동반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사랑을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표현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을 동반한 요구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랑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매우 독특한 문학 양식을 갖는다. 필자는 문장들 간에 독특한 짜임새와 어휘들을 사용하여, 사랑을 신앙의 덕목으로 나타내는데 있어서 아름답고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 본문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사용되고 있는 음율은, 비교법과 대조법 이다. 비교와 대조를 반복과 연계해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며, 누구나 실천해야 할 덕목도 사랑이다. 사랑을 실천하기는 어렵지만 실제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유익한 것을 알 수 있다.
인용 출처: 고종희. "고린도전서 13장에 나타난 사랑의 수사학." 국내석사학위논문 전주대학교 대학원, 2013. 전라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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