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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2~3 히4:1~11 두 종류의 안식일
(창2:3)“일곱째 날을 복 주어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니”
(히4:10)“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우리는 앞글에서 새해를 맞이하면서 이 한 해를 그리스도인으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묵상했습니다.
오늘은 성경에 기록 된 두 안식일(율법 안식일과 히브리서의 안식일)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하는데, 이유는 안식일의 점진성(변화)에 따른 안식의 삶에 대하여 우리가 바르게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안식일(거룩케 하는 날)을 지키는 규정(구약의 율법 안식일)이, 신약에 와서 (히브리서의 안식일로) 바뀌었는데, 이 변화(바꿔짐-점진성)된 안식일의 지킴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존립하게 하는 가장 큰 교리적 두 기둥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성수 주일)교리와 (소득의) 십일조 교리입니다. (*성경의 십일조와 기독교의 십일조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두 기독교 교리를 조금 극단적인 표현으로 하면, 성수 주일교리는 사람을 개교회에 묶어두는 역할을 하며, 십일조 교리는 교회당을 신전 화(神殿化)하게 하는 벽돌과 역청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교리의 강력한 힘이 없었다면 교인의 대다수는 교회를 등졌을 것이며, 십일조 교리가 없었다면 건물 교회라고 하는 십자가 막대기 하나 꽂을 땅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현대 교회의 존립(存立)의 비책은, 모여야 한다는 교리와 돈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 사역자(?) 중에는 사람과 돈이 교회라는 확실한 등식 아래 과감한 투자와 과학적인 비즈니스를 통해 종교 사업으로 확장해 나가기도 합니다.
이 사업자들은 종교사업(교회운영자)을 하면서 하나님이란 용어는 상품 이름에 지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란 그 상품의 우수성을 입증해 주는 보증서 정도로 여길 뿐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종교 사업체 모양으로 보여지면서부터 사분오열된 교단과 교파는 디자인과 포장이 다른 상품의 다양화일 뿐이고, 교세는 다만 시장 점유율의 우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시한부 종말론 같은 사기성 히트 상품이 툭 툭 튀어나와서 상거래 질서를 흐려놓고, 기독교라는 상품의 신용도를 실추시키고 있으나 여전히 대형화해 가면서 베스트셀러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서 저들의 행태를 지켜보는 우리가 종교 상술에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길을 가려고 하면, 성경의 안식일과 십일조가 오늘날 저들인 교회 안에서 주장하는 그 안식일과 그 십일조인지 살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교회가 성경의 말씀과 다르게 걸어가는 것을 보신 목사님들은 한국 교회가 타락하고 있고,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고 있다며, 기독교 TV에서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보니 이단들(진리에서 벗어난 설교)이 너무 많다 라고 하시면서 저들을 경계해야 할 것을 교인들에게 당부하기도합니다.
요2장에서 주님 시대 때 하나님을 진리를 외면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성전을 강도의 굴혈 (장사꾼들의 시장)로 만들어 놓은 (유대 종교인들이 소, 양, 비둘기를 팔았던 것처럼)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거룩케 하는 예배 장소)가 저들의 놀이터가 된 것입니다.
안식일! 그것도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중에서 일요일은 종교 모리배들의 놀이터로 만들어 저들끼리 먹고 마시며 즐기는 축제의 날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안식일은 성경의 안식일이 아니기에 주님도 채찍을 들어 장사꾼들을 회당에서 내어 쫒으신 것입니다. 장사꾼의 소굴을 정화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날에 교회가 거룩케 하는 곳인지 잘 살펴야 합니다.
저들에게 그날은 교회 가는 날.(교인들), 그날은 헌금 들어오는 날. (목사님), 그날 서로 만나는 날. (청소년들), 그날은 한국 사람끼리 모이는 날. (해외 교포들)이며, 거룩케 하지 않아도 되는 날로 여기는 저들의 그날은 자신들이 쌓아놓은 웅장한 건물 안에 파이프 올겐과 오케스트라를 갖춰 귀를 즐겁게 하는 웅장한 성가대 음향이 울려퍼지는 축제를 벌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대며 종교 이기적인 행위로 썩은 냄새를 풍기는 날일 뿐입니다.
이런 모습은 마치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라 부르며, 자신들끼리 먹고 마시며 즐기는 축제의 날로 보내고 있는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합니다.
(출 32:1-6) “백성이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라 아론이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안식일의 참 의미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자기 목적과 욕구만 충족시키면 되는 안식일로 만들어 뛰 노는 날로 만들어버린 것은 더러움의 결과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입니다.
그러면, 신약시대로 건너와 (히 4:4-10)절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4] 제 칠 일에 관하여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 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안식과 안식일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하루 쉬는「안식일」은 영원한 쉼인「안식」의 「표징」일 뿐임을 분명하게 깨달아 이날을 우리에 안식이 되게 하는 날이 되게 생활을 해야 합니다.
(출 31:12~13)“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목적은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을 지킴으로 세상 사람에서 안식(거룩한 상태=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되는 것)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안식의 날(창 1~2장에 칠일 째 되는 날)은 사람이 사는 동안 언젠가 한 번 올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매주 일요일에 반복되는 그런 무의미한 안식일이 아니라 언젠가 영원히 한번 오고야 말 그날과 그 시대를 기리기 위해, 그날을 잊지 않고, 그날에 반드시 참여케 하기 위해 정해 놓은 표징의 날인 것입니다.
이 표징이란 마치 우리가 사는 집을 말할 때 집문서가 실제 집이 아니며, 집문서는 집을 대신하는 표징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집은 상징물이 아닌 실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집문서가 아니라 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을 상징하는 (표징)인 안식일을 종교 교리로 삼아 그날에 장사하는 자들의 미혹에 빠지지 말고, 표징의 날에 실제 안식을 알아 자신을 거룩케 하는 날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칠일 중 하루를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은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참 안식이 저들에게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광야에서 금 송아지 사건 이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듣고 그때부터 다시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안식일을 범한 자는 바로 돌에 맞아 죽었고, 심지어는 안식일을 범하지 못 하게 하기 위해 매일 내리던 만나도 안식일에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철저히 안식일을 지켰음에도 신약성경 히브리서 본문을 보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 95:8~11절에서도 보면,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하게 말지어다.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내가 사십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표징의 안식일에 목숨을 담보로 하고 지켰음에도 왜 못 들어갔느냐는 것입니다.
율법 안식일을 그렇게 철저히 지킨 그들이 ‘내 안식에’에 들어오지 못한다면 누가 감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 안식일을 지킨 것과 그의 안식에 들어가는 문제는 별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저희가 그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라고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착실히 지켰을(하루를 온전히 쉬면서 회당에 나가는)지는 몰라도 자신들을 거룩케 하는 말씀을 듣고 믿는 그 믿음으로 믿지는 아니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는 교회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도 (일요일을 율법 안식일로 잘 지키면서도) 믿지는 아니하는 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4: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왜요? 안식일을 지켜도, 교회 다녀도, “혹시라도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다 할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부족한) 자가 있을까 함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켰음에도 안식에 다 들어가지 못했는데, 우리도 저들처럼 표징의 일요일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면서 교회 생활을 잘했다 하더라도 그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저희와 같이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지만 그러나 그 들음의 말씀이 저희들을 유익하게 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들 안에서 믿음이 화합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들어가지 못했는데 왜 못 믿었느냐 하면 세상 화 되어 있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도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과 하나 되지 못한 것입니다.
종교 장사치들과 어울리면서 거룩케 하지 않고, 다른 종교 생활함에 빠져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안식에 들어갑니까? “이미 믿는 우리 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 도다”
지금도, 말씀을 믿어 매일 매일을 거룩케 하는 안식일로 지키고 있는 어떤 믿는 자들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집을 샀으면 그 집으로 이사하고 들어가 살아야지 계약서나 집문서만 들고 왔다 갔다 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매 주일 반복되는 율법 안식일을 지키면서도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않고 있으면 그런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안식에 들어간다는 말은 말씀으로 오신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오신 주님을 일요일만이 아닌 매일 매일 말씀을 통해 구원의 주님으로 곧 그리스도 메시야로 믿어져 마음 안에 영접함으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여 둘이 아닌 한 몸 된 상태가 되는 것을 안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안식의 실체이신 영원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우주선을 지구 궤도 밖으로 밀어 올려준 연료탱크처럼 표징의 안식일은 떨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에게는 안식에 들어갈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히 4:9) “그런즉 하나님의 백성에게 안식할 때가 남아 있도다.”
여러분들이 숨 쉬고 있는 그 순간까지는 그 안식의 기회가 아직 돌아오지 아니한 것도, 또는 아주 지나가 버린 것도 아닌, 그래서 그 숨이 멈추기 전까지는 안식에 거할 수 있는 기회가 아직 조금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믿고 힘을 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힘쓴다는 말을 바꿔 말하면 히브리서에 바울이 한 말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써야 할 것은 이제부터 (목사님들은) 표징인 안식일만 강조하지 말고, 실체 [안식]을 바르게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인들)도 이제부터는 표징인 안식일만 지키려고만 하지 말고 안식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을 통해 깊이 묵상하면서 찾아 여러분의 안식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만을 위하는 일에서 쉬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것이 아닌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일하시게 하셨으면 합니다.
이미 우리 앞에는 안식이신 주님이 (요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시매”와 계십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목적은 표징 안식일에 있는 것이 아닌, 우리 앞에 말씀으로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말씀(주님 품) 안에 거함으로 안식의 사람,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됨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올해 우리의 시작을 말씀으로 오셔서 안식을 주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그 안에 들어가 영원한 안식에 주인공들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