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곡항,
gentrification
심곡항에 산 적이 있다. 나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에 하나였다.
바로 옆 금진항의 대게 인터넷 쇼핑몰을 막 시작 할 때였다.
그리고 옥계면 북동리 북동 분교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직접 하면서 농산물 인터넷 쇼핑몰도 했었다.
심곡항은 강릉시 강동면과 옥계면의 경계를 이루고, 옥계면과는 한국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해안도로 헌화로가 경계다.
언덕을 넘으면 정동진이다.
얼마나 오지였으면 625 때 인민군이 모르고 지나갔고 마을 사람들도 전쟁이 일어난지도 모를 정도였다.
심곡항은 까만 자갈이 많아서 파도가 치면 자갈 구르는 소리가 기분 좋게 고즈넉한 동네를 안심시켜 주었다.
“쟈르르 쟈르르”
지금도 그 소리는 귀에서 떠나지 않는다.
눈이 내리면 정동진을 넘어가는 길이 막혀 마을은 본의 아니게 고립되었다.
심곡항의 자연산 미역과 돌김은 전국에서 최고였다.
자연산 미역은 공동 작업을 하여 공동으로 수협에 팔았다.
돌김은 마을의 해녀가 작업을 하고 아주 비싼 값으로 팔려 나갔다.
심곡항의 미역과 돌김은 왕의 진산품이었다.
가을이 되면 마을 뒷산에 송이가 지천이었다.
화전을 일구어 동네 사람들이 먹을 정도의 곡식도 생산되었다.
오로지 마을만의 자급자족이 충분히 되었던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한 가족이었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일하고 같이 잠을 자기도 했다.
거의 모든 생활은 공유였다.
서로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심곡항에 사건이 터지기 시작한 것은 헌화로였다.
심곡항에서 옥계면 금진항을 가기 위해서는 산길을 한 시간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헌화로가 생기고 나서는 자동차로 5 분이 걸리지 않았다.
헌화로를 보기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다음 사건은 정동진이었다.
어업도 제대로 못하고 아주 작은 광산 하나 밖에 없던 정동진은,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정동진 역의 소나무 하나로 전국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양쪽에 끼여 있던 심곡항도 덕분에 많은 관광객들이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심곡항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땅을 사러 오는 외지 사람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식당이 생기고, 시끄러워졌다.
내가 살 때는, 하루 종일 문을 열어 놓아도 도둑 하나 없었고 먼지도 쌓이지 않았다.
형제 같았던 마을 사람들이 싸우기 시작했다.
싸우는 원인은 땅값이었다. 땅값은 수십배가 올랐다.
마을 노인들의 자식들 끼리도 땅 때문에 재판을 했다.
마을은 순식간에 평화에서 분쟁지역으로 변해갔다.
내가 심곡항을 좋아했던 것은 ‘공유’였다.
나는 장사하기 위해 강릉 시내에서 와서, 허름한 폐가 하나 얻어서 살았다.
그때는 유기견을 데려와 키우던 강아지와 같이 살았다.
단 둘만의 생활은 신혼 같았다.
아침마다 같이 헌화로를 산책 하고 산에 올랐다.
강아지와의 생활 보다 더 좋았던 것은, 따로 있었다.
심곡항의 아름다운 절경을 독차지 한다는 거였다.
지구에서 가장 깨끗한 공기를 마셨다.
심곡항의 무공해 농수산물을 거의 무료로 먹었다.
비단 그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 전체가 그랬다.
같이 먹고 같이 숨을 쉬고 같이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같이 일하고........
공유였다!
나의 것도 아닌, 너의 것도 아닌, 우리의 것이었다.
심곡항에 ‘부채길’ 이라는 새로운 해안 산책로가 생겼다.
마을은 또 망가질 것이다.
마을 원주민들은 떠 날 수 밖에 없다.
땅값은 또 오를 것이다.
공유했던 모든 가치들이 지독한 사유화가 진행되면서 富라는 더러운 가치가 생겨났다.
gentrification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