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년 9월 (15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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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9
9월 초1일 (경오) 맑다. [양력 10월 3일]
700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701
탐후선이 들어왔다. 우후가 도양장에서 와서 영에 이르러 공문을 가치고 와 바치는데, 정사립(鄭思立)을 해치는 뜻이 많이 있으니 우습다.
702
종사관(류공진)도 병을 돌아가서 조리하겠다고 하므로 결재해 보냈다.
703
9월 초2일 (신미) 맑다. [양력 10월 4일]
704
새벽에 지휘선(上船)을 출항시켰다.
705
재목을 끌어내릴 군사 1283 명에게 밥을 먹이고서 끌고 내려왔다.
706
충청수사 ∙ 우수사 ∙ 경상수사 ∙ 두 조방장과 함께 이르러 종일 이야기하고서 헤어졌다.
707
9월 초3일 (임신) 맑으며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10월 5일]
708
아우 여필과 아들 울(蔚)과 유헌(有憲)이 돌아갔다.
709
강응호(姜應虎)가 도양장 추수할 일로 같이 돌아갔다.
710
정항(鄭沆) ∙ 우수(禹 壽) ∙ 이섬(李暹)이 정탐하고 들어와서,
711
"영등포 적진은 초이틀에 소굴을 비우고 누각과 모든 소굴을 불살라 버렸다."
712
고 했다. 웅천의 적에게 투항하여 붙었던 사람 공수복(孔守卜) 등 열일곱 명을 달래어 왔다.
713
9월 초4일 (계유) 맑다. [양력 10월 6일]
714
경상수사가 와 보기를 청하여 종일 이야기하고 돌아갔다.
715
아우 여필 ∙ 아들 울(蔚) 등이 잘 갔는지 알 수 없어 몹시 궁금하다.
716
9월 초5일 (갑술) 맑다. [양력 10월 7일]
717
아침에 경상수사 권준(權俊)이 소고기를 조금 보냈다.
718
충청수사 ∙ 조방장 신호(申浩)와 같이 식사를 하고 난 뒤에 신 조방장 ∙ 충청수사 선거이(宣居怡)와 함께 같은 배로 경상수사 있는 곳으로 가서 종일 이야기하고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719
이 날 체찰사의 공문이 왔는데, 순천 ∙ 광양 ∙ 낙안 ∙ 흥양이 갑오년(1594년)의 전세(田稅)를 실어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곧 답장했다.
720
9월 초6일 (을해)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10월 8일]
721
충청수사가 술을 바치므로 우수사 ∙ 두 조방장이 와서 같이 마셨다.
722
송덕일이 들어왔다.
723
9월 초7일 (병자) 맑다. [양력 10월 9일]
724
식사를 한 뒤에 경상수사가 왔다. 충청도 병영의 배와 서산 ∙ 보령의 배를 내어 보냈다.
725
9월 초8일 (정축) 맑다. [양력 10월 10일]
726
나라제삿날(世祖의 祭祀)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727
식사를 한 뒤에 아들 회와 송덕일이 같은 배로 나갔다. 충청수사 ∙ 두 조방장이 와서 이야기했다.
728
9월 초9일 (무인) 맑다. [양력 10월 11일]
729
우수사 및 여러 장수들이 일제히 모여서 영내의 군사들에게 떡 한 섬을 나누어 주고 초저녁에 끝내고 돌아갔다.
730
9월 초10일 (기묘) 맑다. [양력 10월 12일]
731
오후에 나는 충청수사 및 두 조방장과 함께 우수사 있는 데로 가서 같이 이야기하고 밤에 돌아왔다.
732
9월 11일 (경진) 흐렸다. [양력 10월 13일]
733
몸이 몹시 불편하여 공무를 보지 못했다.
734
9월 12일 (신사) 흐렸다. [양력 10월 14일]
735
아침에 충청수사 및 두 조방장을 청해다가 같이 아침밥을 먹고 늦게 끝내고 돌아갔다.
736
저녁에 경상수사와 우후 및 정항(鄭沆)이 술을 가지고 와서 같이 이야기하고서는 밤이 늦어서야 헤어졌다.
737
9월 13일 (임오) 맑다. [양력 10월 15일]
738
다락에 기대어 혼자 앉았으니 마음이 불편하다.
739
9월 14일 (계미) 맑다. [양력 10월 16일]
740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봤다. 우수사 ∙ 경상우수사가 같이 와서 이별하는 술잔을 들고서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741
수사 선거이(宣居怡)와 작별하며 준 시는 이러하다.
742
북쪽에 갔을 때도 같이 일하고,
743
남쪽에 와서도 죽사리 같이 하더니,
744
오늘 밤 이 달 아래 한 잔을 나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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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우리 서로 헤어져야 하리.
746
9월 15일 (갑신) 맑다. [양력 10월 17일]
747
수사 선거이(宣居怡)가 와서 아뢰고 돌아가는데, 또 이별의 잔을 들고나서 헤어졌다.
748
9월 16일 (을유) 맑다. [양력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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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공무를 봤다. 장계 봉하는 것을 감시했다.
750
이 날 저물 무렵 일식을 하여 밤이 되어서야 밝아졌다.
751
9월 17일 (병술) 맑다. [양력 10월 19일]
752
식사를 한 뒤에 서울에 편지를 써 보냈다. 김희번(金希番)이 장계를 가지고 나갔다. 유자 서른 개를 영의정에게 보냈다.
753
9월 18일 (정해) [양력 10월 20일]
754
저녁나절에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이 들어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755
9월 19일 (무자) 맑다. [양력 10월 21일]
756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이 들어왔다가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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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일 (기축) [양력 10월 22일]
758
밤 두 시쯤에 둑제를 지냈다. 사도첨사 김완(金浣)이 헌관으로 행사했다.
759
아침에 우수사가 와서 봤다.
760
9월 21일 (경인) 맑다. [양력 10월 23일]
761
박 ∙ 신 두 조방장과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박 조방장을 작별하려 했으나, 그대로 경상수사를 작별하고서 갔다가 그만 날이 저 물었기 때문에 하지 못했다.
762
저녁에 이종호(李宗浩)가 들어왔다. 다만 목화만 가져 왔기로 모두 나누어 주었다.
763
9월 22일 (신묘) 맑다. [양력 10월 24일]
764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박자윤(종남의 字) 영감이 나갔다. 경상우수사도 와서 전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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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 (임진) 맑다. [양력 10월 25일]
766
나라제삿날(太祖 神懿王后 韓氏의 祭祀)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767
웅천 사람인데 사로잡혔던 박록수(朴祿守) ∙ 김희수(金希壽)가 와서 알현하고 겸하여 적정을 보고했다. 그래서 무명 한 필 씩을 나누어 주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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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4일 (계사) 맑다. [양력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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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각처에 편지 열 통 남짓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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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울(蔚) ∙ 면(葂)과 방익순(方益純) 및 온개(溫介) 등과 함께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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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저녁에 우수사 ∙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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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5일 (갑오) 맑다. [양력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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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두 시쯤에 녹도의 하인이 실수로 불을 내어 대청 다락방 등이 모두 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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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량 ∙ 화약 ∙ 군기 등의 창고에는 불이 붙지 않았으나, 다락 위에 있던 장전과 편전 이백 여 개가 모두 타 버렸으니, 애석하다.
775
9월 26일 (을미) 맑다. [양력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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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온 종일 배 위에 앉아 있다가 앉았다 누웠다 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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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량(龜船將)이 재목을 깎아 가지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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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7일 (병신) 흐렸다. [양력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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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골포 사람으로 왜적에게 붙었던 자 이백서른 여 명이 왔다.
780
배는 스물두 척이라고 우수(禹壽)가 와서 보고했다.
781
식사를 한 뒤에 불난 데로 올라가 집 지을 만한 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782
9월 28일 (정유) 맑다. [양력 10월 30일]
783
식사를 한 뒤에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갔다.
784
우수사 ∙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785
아들 회 ∙ 울(蔚)이 기별을 듣고 들어왔다.
786
9월 29일 (무술) 맑다. [양력 10월 31일]
787
9월 30일 (기해) 맑다. [양력 1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