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2.수요일>
<루카1,46-56>그때에 46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마리아처럼 삶이 하느님께 대한 찬미가 되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선, 내 현주소가 어디인지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의 현주소가 무엇인지 모르게 되면,
바리사이처럼 끝까지 의인인양 살며 회개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대부분 바로 의식으로 가버립니다. 그래서 바로 판단 평가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됩니다.
상대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느낄 수가 없지요.
왜?
의식차원에서 판단 평가를 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행동은 의식차원이 아닙니다.
이 성당을 오는데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채 오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행동은 거의 무의식적인 습관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영과 연결되어있고,
내 혼은 정신과 연결되어있고,
내 육은 행동과 연결되어 있지요.
그런데 마음이 영과 연결되어있는데,
이 마음이 하느님의 영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것이야말로 구원으로 향하는 길인 것이지요.
보통 영이 하느님을 향해있지 않고 나를 향해있지요.
이기적이 되지요.
그러면 좋은 일을 해도 내 에고가 커집니다.
남이 좋은 일을 하면 시기질투가 생기고,
남의 일에 판단평가를 내려 심판을 하려하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열 번을 잘하다가 한 번을 잘못했다면, 그 한 번 잘못한 것에 각을 세우게 되지요.
그래서 자선을 행하더라도 기도를 하더라도 단식을 하더라도 보이지 않게 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좋은 일을 하면서도 내 에고를 키우기 쉽상인데,
어떻게 마리아 처럼 우리의 삶이 하느님 찬미의 노래가 되게 할까요?
그것은 우리의 현재 마음의 상태 또는 현재 하고 싶은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눈을 감으시고 현재 마음을 바라보십시오.
우울하다면,
꿈은 큰데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우울한 것,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한 상처,…등이 있지요.
나의 힘든 상황을 의식으로 떠올리면 머리이지요.
의식차원이지요?
그런데 그것은 바로 마음으로 느껴지지요?
마음은 감정과 연결되어 있어요. 가슴이지요.
마음은 왜? 라는 것이 없어요.
의식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면,
혼자 있고 싶다고 해요.
왜?
이유가 없어요. 그냥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인 것이지요.
그 마음 안에 담겨진 감정이 어떤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현재의 마음을 예수성심을 향해 비워낼 때 “‘나’라는 영spirit”이 “하느님의 영Spirit”을 향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내 기억과 그 기억에 따른 에고가 점점 비워지는 것입니다.
다 비워지면 나중에는 마리아처럼 찬미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방법은?
감정처리가 중요합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방법은?
1.혼자일 때
마음으로 무엇이 두려운지? 힘든건지? 화가나는지? 살펴봅니다.
마음은 영이지만,
마음으로 느껴지는 감정은 “영spirit”과 “혼soul” 에 있는 ‘지성 기억 의지’ 라는 영적기능 중 기억 안에 있게 됩니다.
처음에, 그 상황을 지금 눈을 감고 떠올려 보십시오.
판단 평가 없이 있는 그대로 그 감정을 느껴보십시오.
그리고 그 감정에서 빠져나오십시오.
그 감정의 크기가 얼마만큼 큽니까?
내 몸 만합니까?
아니면 이 성당만합니까?
아니면 지구만합니까?
이것이 객관화된 감정입니다.
그대로 예수성심께 봉헌합니다.
두 번째로, 그 상황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판단 평가 없이 있는 그대로 그 감정을 느껴보십시오.
이제는 예수님을 초대하고 그 상황을 고발하고,
용서 청할 것이 있으면 용서를 청하십시오.
그리고 그 감정에서 다시 한 번 빠져나오십시오.
그 감정의 크기가 얼마만큼 큽니까?
줄어들었습니까? 커졌습니까?
조금 줄어들었지요.
그것을 예수성심께 봉헌하십시오.
세 번째로, 그 상황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판단 평가 없이 있는 그대로 그 감정을 느껴보십시오.
예수님을 초대하고 그 상황을 고발하고,
아니면 용서 청할 것이 있으면 용서를 청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청하는 것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으라고 하시지요.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감정에서 다시 한 번 빠져나오십시오.
그 감정의 크기가 얼마만큼 큽니까?
더 줄어들게 되지요.
그것을 다시 예수성심께 봉헌하십시오.
이렇게 봉헌하다보면 무의식 안에 감정까지 나와서 비워지게 됩니다.
근본적인 나의 우울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혼자 있을 때 하는 방법입니다.
2.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사람들과 관계하다보면 사건과 일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에 따라 갈등과 여러 감정들이 생기고,
감정에 따른 몸의 반응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거기서 빠져나오고, 예수성심께 봉헌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내가 상대편을 존중하고 예의를 다해 내가 꼭 해야할 말을 하고,
남아있는 감정을 느끼며,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면서 감정을 예수성심께 봉헌하면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슬픈지? 기쁜지? 싫은지? 좋은지? 화가 나는지?
그리고 불에 대었을 때처럼 내 감정에 대인 나를 추수려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희노애락애오욕의 감정을 표현해야 합니다.
“잠깐, 내가 기쁘거든, 화가 나거든, 슬프거든, 즐겁거든….” 등으로 나를 표현해도 좋습니다.
그려면 감정이 가라앉게 되고, 그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도 됩니다.
보통은 감정을 억누릅니다.
그런데 감정이라는 힘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러다가 감정이 폭발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감정적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탓은 감정에 합니다.
감정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게됩니다.
아닙니다.
감정이 나쁜 것이 아니라, 감정적 행동이 나쁜 것입니다.
감정은 좋은 것이지요.
어떤 일을 하는데에 열정의 힘이요 원동력이 됩니다.
감정은 주전자의 끓는 물과 같습니다.
이 물을 데이지 않고 잘 사용하면 됩니다.
우선 물이 끓게되면 뚜껑을 열거나, 불을 줄여야 합니다.
그러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영spirit” 이지요.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1베드5,8)
그렇습니다. 이 “영spirit”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바로 감정적 행동을 하기전에 그 사이에 무엇을 끼워 넣으면 됩니다.
예수성심께 봉헌하든지,
깊은 숨을 세 번 내쉬던지,
순간 순간만 내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지요.
그 이외의 것은 다 주님의 것이니 봉헌하면 찬미가 됩니다.
<Luke1,46-56>
46 And Mary said: "My soul proclaims the greatness of the Lord;
47 my spirit rejoices in God my savior.
48 For he has looked upon his handmaid's lowliness; behold, from now on will all ages call me blessed.
49 The Mighty One has done great things for me, and holy is his name.
50 His mercy is from age to age to those who fear him.
51 He has shown might with his arm, dispersed the arrogant of mind and heart.
52 He has thrown down the rulers from their thrones but lifted up the lowly.
53 The hungry he has filled with good things; the rich he has sent away empty.
54 He has helped Israel his servant, remembering his mercy,
55 according to his promise to our fathers, to Abraham and to his descendants forever."
56 Mary remained with her about three months and then returned to her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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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창조적 환경과 창재의
상관관계
역사에 남은 위대한 업적들은 대체로 특정한 한 시기, 한 장소에 집중되어 있다.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 문학, 19세기 중 후반기의 파리 건축과 무대 예술, 20세기 초 미국의 실용적 창조물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르네상스의 중심 피렌체를 빼놓을 수 없다. 그 무대에서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의 거장들이 탄생했다. 물론 재능도 타고났지만 그들이 세기적 거장으로 클 수 있었던 것은 피렌체의 사회문화적 분위기 덕분이라는 것이 후세 사학자들의 연구 결과다.
창재는 만들어지는데, 지금의 우리에겐 창조적 자극으로 넘쳐 나는 환경 조성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 전체가 창조적 학습 분위기로 넘쳐 나게 해야 한다. 지금 골방에서 게임에 푹 빠져 있는 우리 아이들은 어떨까? 이건 창조가 아니라 뇌를 죽이는 길이다. 빌 게이츠가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창재는 혼자 되는 게 결코 아니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45-247)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창재가 된다
성공은 습관이다. 한번 성공해 본 사람은 그 성공의 이미지가 쉽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나는 칼럼을 쓰면서 진행이 잘 안 되더라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시간이 되면 결국 써내고 만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탈고 후의 후련함과 커피 한 잔 느긋하게 마시면서 참 잘 썼다고 흐믓해하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원하는 대로 된다는 확신을 갖고 성취 후의 모습을 그리면서 빌었다. 기우제를 지낼 때는 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모습을 떠올리며 빌었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기억하자. 측두엽의 편집 기능을! 우리가 간절히 기원하면 기억도 원하는 방향으로 편집된다. 목표는 물론 내 능력에 맞게 적정 수준으로 설정해야 한다. 뇌는 약간 부담되는 목표를 좋아한다. 그 과정은 힘들지만 성공 후의 쾌감을 알기 때문이다. 그 기분을 잘 기억해 두었다 다음 기회에 또 체험하려는 것이 뇌의 본성이다. 힘들어도 이를 돌파하려는 뇌의 본성은 우리의 의지보다 더 강할 수 있다. 성공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말을 믿어야 한다. 천재나 수재는 아무나 될 수 없지만, 창재는 마음먹기에 따라 누구든지 될 수 있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48-250)
성패는
과학적 훈련 방법에 달렸다
우리 뇌는 감각계와 운동계가 따로 있다. 이 둘이 연계되어야 비로소 예술적 작품이 나온다.
그렇다고 무조건 연습만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고도의 기술 향상은 의욕, 집중, 훈련의 세 요소가 바탕이 될 때 가능하다. 이를 잘하기 위해서는 즐거운 기분으로 해야 하고, 부모의 적극성과 돈, 시간이라는 자산이 필요하며, 잘 기획된 과학적 훈련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이 과정을 뇌과학적으로 분석해 보자. 일단 새로운 학습을 함으로써 뉴런의 수상 돌기가 가지를 뻗쳐 새로운 시냅스, 신경회로를 튼튼히 해야 한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51-252)
같은 시간에 두 배 효과 거두기
피아노 연습부터 해 보자. 악보를 본다. 시각야가 자극을 받아 정보를 전두엽의 운동야(運動野)로 보낸다. 이때 시각야와 운동야가 수상 돌기로 연결된다. 처음에는 연결이 없거나 엉성하다.
그러나/ 연습하면 이 연결망, 즉 신경 회로가 강고해진다. 나중엔 악보를 보지 않고도 칠 수 있다.
연습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앞의 그림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연습 시간과 기술 달성도는 정확히 비례하는 게 아니다. 연습을 하면 할수록 기술은 그보다 더 많이 늘어나는 것이다. 천재는 연습이요, 훈련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새로운 것을 익힘으로써 새로운 뇌 회로가 생성되고, 계속 연습하면 회로가 강고해진다. 이 과정이 곧 천재의 길이다.
물론 연습은 과학적이어야 한다. 같은 연습 시간이라도 방법에 따/라 효과가 다르다.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해야 효율이 높다. 특히 아침 시간이 효율적이다. 하루4-5시간 연습하고 공부하되 그 후 낮잠을 자야 기억이 정리되면서 머릿속에 정착된다. 압력과 저장이 잘되어야 즐거운 마음으로 훈련할 수 있고, 뇌가 세로토닌과 도파민의 영향을 받아 쾌적한 상태가 된다. 그러면 연습을 계속할 수 있으며, 생각과 정신, 머리가 긍정적으로 된다. 집중력과 기억력이 향상된다. 당장은 좀 힐들어도 기술이 향상되고 성공에 대한 이미지가 확연하게 떠오르면서 인내력도 생긴다.
공부의 원리도 이와 다르지 않다. 천부적 자질을 타고나도 연습과 훈련에서 승부가 갈리듯 공부의 성패도 결국은 양이 결정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공부는 학교 공부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창의력이 형편없는 박사가 하도 많아서 하는 말이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5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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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계명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361 세례성사 때 받는 세례명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는 어떤 이름하에 세례를 받습니다. 인간을 유일무이하게 만드는(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288)/
것은 이름과 얼굴이며, 그것은 결국 하느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이사43,1)[2158]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고, 내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묵시3,5)
그리스도인들은 경외하는 마음으로 사람의 이름을 대합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 존엄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성인들의 명부에서 자녀의 이름을 찾아 정했습니다. 그들은 수호성인이 자녀에게 모범이 되어 주고, 자녀를 위해 하느님에게 특별히 기도드려 줄 것을 믿습니다.->201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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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8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을 제 이름으로 부르신다(이사43,1; 요한10,3 참조). 모든 사람의 이름은 거룩하다. 이름은 그 사람의 표상이다.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존엄성의 표시로 존중되어야 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782)/
->201 하느님께서는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께서 ‘유일한 분’ 이심을 알려 주신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주님이시다. 주님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주 하느님을 사랑하여라”(신명6,4-5).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을 유일하신 분, 하느님 당신께 돌아오도록 부르신다. “온 세상 모든 인간들아, 머리를 돌려 나에게로 와서 구원을 받아라. 나만이 하느님, 다른 신은 없다…….사람마다 나에게 무릎을 꿇고 모든 민족들이 제 나라 말로 나에게 신앙을 고백하리라. ‘정의를 세울 힘은 주님께만 있다’”(이사45,22-24)(필립2,10-11 참조)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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