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15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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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집에서 거리로 나왔을 때 우리는 모두 취해 있었고, 돈은 천원이 없어졌고 사내
는 한쪽 눈으로는 울고 다른 쪽 눈으로는 웃고 있었고, 안은 도망갈 궁리를 하기에도
지쳐버렸다고 내게 말하고 있었고, 나는 `악센트 찍는 문제를 모두 틀려버렸단 말야,
악센트 말야'라고 중얼거리고 있었고, 거리는 영화광고에서 본 식민지의 거리처럼 춥
고 한산했고, 그러나 여전히 소주 광고는 부지런히, 약 광고는 게으름을 피우며 반짝
이고 있었고, 전봇대의 아가씨는 `그저 그래요'라고 웃고 있었다.”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1964년 겨울 서울의 한 포장마차에서 세 남자가 만난다. 김이라는 성을 가진 `나'는 사관
학교를 지원했다가 실패하고 구청 병사계에서 일하고 있고, 대학원생 `안'은 부잣집 장남으
로 두 사람은 모두 스물다섯살이다. 서른대여섯 돼 보이는 또 다른 사내는 서적 외판원. 처
음에 말문을 튼 안과 `나'는 학력과 처지의 천양지차에도 불구하고 바깥 세상과는 겉돌고
있다는 점에서 상통한다. 나중에 합류한 제3의 사나이는 사랑하는 아내가 병으로 숨지자 그
시신을 병원에 판 뒤 낙담과 죄책감으로 시체 판 돈을 다 써버리자고 스물다섯살짜리들을
유혹한다. 억지로 돈을 쓰러 돌아다니던 세사람은 불자동차 뒤를 쫓아가 불구경을 하는데,
상처한 사나이는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남은 돈을 던져버린다. 세사람은 그날 밤 같은 여관
의 서로 다른 방에 투숙하며, 다음날 이른 아침 상처한 사나이가 밤사이 자살한 것을 알게
된 두 젊은이는 몰래 여관을 빠져나와 기약없이 헤어진다….
그러니 어쨌단 말인가. 작가는 왜 이런 이야기를 소설이라고 쓴 것일까. 젊어서 이미 늙은
것들의 말장난 같은 대화와 상처한 중년의 자살로 채워진 이야기가 한 편의 소설이, 그것도
한국 소설사에 우뚝한 작품이 되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 그리고, 이런 이야기의 제목을 `서
울 1964년 겨울'이라 단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우선, 1964년 겨울로 돌아가 보자.
그해 겨울은 추웠다. 한일기본조약 반대와 한미행정협정 개정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던
학생들은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전면전에 나선 군사정부에 의해 패퇴했다. 4
·19가 열어젖힌 해방과 자유의 공간을 군홧발로 짓밟은 박정희 소장. 그를 상대로 한 싸움
을 별러왔던 학생들의 반격이 6·3사태로 불리는 64년 여름의 용틀임이었다. 그 용틀임이
무위로 돌아가자 이제 학생들에게 남은 것은 개인 차원의 사소한 실천뿐이었다. 그것은 또
한 재래적 농촌 공동체의 붕괴와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단자(單子)적
세계관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포장마차에서 만난 세 남자는 사회이면서도 사회가 아닌 독특한
동아리를 이룬다. 그들은 포장마차라는 동일한 공간에 각자 술을 마시러 왔다는 공통점으로
묶이지만, 그것이 어떤 유의미한 공동체의 형성에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세사람은 각자의 고
독과 상처로 자은 고치 속에 웅크리고 틀어앉아 있을 뿐 고치 밖의 세계로 나올 염을 내지
못한다. “벽으로 나누어진 방들, 그것이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곳이었다”는 지문은 그들이
함께 그러나 따로 든 여관방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 모두가 몸 부리어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사회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김승옥 소설의 문학사적 의의는 `개인의 발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50년대
까지의 한국 소설은 말의 올바른 의미에서 개인의 존재에 눈뜨지 못했었다. 소설이 개인에
관해 말할 때조차 그 개인은 공동체의 역사와 현실에 절대적으로 규정되는 사이비 개인이었
다.
김승옥 소설은 또한 새로운 세대와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감수성으로써 두드러진다. 혁명
으로까지 일컬어지는 그 감수성은 사물에 대한 상투적인 인식을 거부하고 익숙한 것들을 새
로운 눈으로 봄으로써 결국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줄 수 있게 된다. `무진기행' 중 안
개를 묘사한 저 유명한 대목을 읽어보자.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김승옥씨의 소설들이 발아하고 무르익은 곳은 작가가 다니던 서울 문리대가 있던 동숭동
일대였다. 작가에게 서울은 전쟁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폐허 같은 도시였다. 서울 토박이라
고는 구렁이 같은 복덕방 영감과 앙칼진 목소리의 셋방 주인 아주머니 정도일 뿐 나머지 서
울 주민은 월남 피난민들과 자식들 교육을 위해 상경한 이농민들이었다. 이들이 얽히고 설
켜 생존을 위한 악다구니를 펼치는 살풍경이 서울의 모습이었다.
“파괴의 폐허 위에서 새로 시작되는 한국, 특히 서울에 대한 관심은 내 소설의 테
마가 되었다. 서울이라는 도시처럼 작가로서 흥미로운 도시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나에게 서울이란 평생 그물을 던져도 고갈되지 않는 황금어장과도 같다.”
60년대의 서울이 그에게 동인문학상을 안겨주었고(`서울 1964년 겨울'), 70년대의 서울은
이상문학상을 주었다(`서울의 달빛 0장'). 그렇다면 96년 여름의 서울 하고도 동숭동 마로니
에 공원과 대학로는?
1996년 여름을 서울에서 지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늦은 오후의 그곳은
저마다 세상으로 열린 숨구멍이라도 된다는 듯 허리께에 호출기를 찬 젊은이들로 채워진다.
관악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서울대가 있던 마로니에 공원이 그들의 주요 집결지다. 이 거리
의 명물인 아마추어 화가들과 가수들, 엔비에이(NBA)의 환상을 사고 〔買〕 또 사는〔生〕
아이들, 새 상품 홍보를 위해 목걸이 볼펜을 나누어주는 언니들, 다른 대책이 서지 않아 하
릴없이 앉아 있는 연인들, 나름으로는 이곳의 터줏대감인 몇몇 알콜중독자들, 아이스크림 장
수, 외국에서 산 장신구와 기념품을 늘어놓고 여행경비를 마련하려는 외국인 배낭여행자….
이들은 무책임한 구경꾼이자 스스로 남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즐기며 96년 여름 서울의
대학로를 수놓고 있다.
그 풍경을 지켜보고 있던 작가가 90년대 소설에 관해 말한다.
“언어에 관한 자의식이 강해졌다는 것은 장점이다. 반대로, 싸워야 할 적을 명확히
설정하지 못하는 것은 단점이다. 개조를 위한 욕구와 절규가 보이지 않는다.”
알다시피 그는 결코 민중문학론자도 실천으로서의 문학의 신봉자도 아니다. 하지만, 역시
그는 4·19와 6·3을― 그 성취와 좌절, 영광과 수치까지를 포함해 ―청춘의 훈장으로 간직
한 전투의 세대에 속하는 것이다.
글:최재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