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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67
5월21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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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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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6ti2j2xsmz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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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제 더 이상 스승님을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은 참으로 특별하고 의미심장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단과 아침식사를 끝내신 다음, 수제자와의 개별 면담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질문을 하나 던지시는데, 그 질문 하나가 분위기를 참 묘하게 만들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복음 21장 15절)
시몬은 너무나도 당연한 대답, 그러나 진정성이 조금 떨어지는 대답을 습관적을 하고 있습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질문을 또 한번 더 하시고, 거기에 또 한번 보태셔서 세번이나 거듭 물으셨습니다. 그제야 시몬은 동일한 질문을 세번 건네시는 스승님의 의도를 알아차리셨습니다.
얼마전 시몬 자신이 스승님을 세번이나 배신한 수치스런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참으로 고단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야단 한번 치지 않으시고, 언성 한번 높이지 않으시고 똑같은 질문 세번을 통해, 수제자 배반 사건을 은근히 질책하신 것입니다. 똑같은 질문 세번을 통해 수제자에게 초강도 정신 교육을 시키신 것입니다.
똑같은 세번의 질문에 거듭 똑같은 대답을 반복하면서 수제자는 더욱 마음을 새롭게 하였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나는 더 이상 스승님을 배반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목숨이 끊어지면 끊어졌지 더 이상 스승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고단수이신 예수님의 특별한 제자교육방식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수제자 직분을 수여했지만 베드로 사도가 못내 못미더웠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럭비공 같아서 언제 어디로 튈 줄 모르는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뜨겁게 타올랐다가도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다혈질 베드로 사도를 잘 파악하고 있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한번 두 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질문을 거듭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그런 예수님의 진의를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창피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지만 마음속으로 굳은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스승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제자의 세 번이나 반복되는 사랑 고백이자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 그때마다 한 가지 당부 말씀을 건네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얼마나 고마운 예수님의 당부인지 모르겠습니다. 세 번이나 배반한 수제자, 그러나 크게 가슴을 치고 회개하며 거듭난 수제자에게 건네신 스승님의 신신당부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당신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시면서 수제자에게 우리 양들을 잘 돌보라고 간곡히 당부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은혜롭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도 듭니다. 예수님 권고 말씀에 따라 사목자로서 양들을 잘 돌봐서 영적·육적으로 살찌우게 만들고, 기쁨과 행복을 주는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와 반대로 오히려 목자가 양들을 힘들게 만들고, 궁지로 몰아넣고, 짜증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큰 걱정이 앞섭니다.
예수님의 권고 말씀에 따라 세상의 모든 목자들의 양들을 좋은 풀밭으로 잘 이끄는 존재, 양들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존재로 거듭 회심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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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FZX8EeEZQ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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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자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7명이 탄 제자들의 배가 153마리나 되는 물고기를 잡게 만드신 다음 베드로에게 당신 양 떼를 맡기십니다. 당신 양 떼를 맡기시며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3번 고백하게 하십니다. 분명 3번의 사랑 고백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 모른다고 한 것의 죄책감을 씻어주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교회에 당신 자녀들을 맡기시는 방식입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온전히 죄를 용서받고 더는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게 될 때, 예수님은 안심하고 그 목자들에게 당신 자녀들을 맡기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을 위해 당신 피를 내어주십니다. 그 피로써 성직자들이 순결해지면 성직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분의 양 떼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목숨을 바치게 됩니다.
이것은 가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자녀들을 맡아 키우는 아내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내를 위해 먼저 피를 흘려야만 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녀들의 피에 남편 피도 반은 섞여 있기에 아내가 자녀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아내가 자녀를 위해 남편을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처럼 남편도 자녀를 위해 아내가 자신을 먼저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영화 ‘바보’(2008)는 강풀 만화의 내용을 담았습니다. 등장인물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혼자 토스트 가게를 하며 고등학생 여동생 지인이를 돌보는 승룡이가 있습니다. 지인이는 바보인 오빠가 싫어서 학교에도 오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바보 승룡이는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인 지인이를 잘 보살피라는 것에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승룡이는 원래 바보였던 것은 아니고 연탄가스 누출로 아버지는 사망하고 자신은 그런 장애를 얻게 된 것이었습니다. 승룡이에게는 다방을 하는 양아치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동창인 그 친구가 실수로 불을 내 학교 피아노를 태워버린 일이 생겼을 때 바보 승룡이가 대신 다 뒤집어쓰고 덮어줘 승룡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습니다.
승룡이에게는 어릴 때부터 좋아한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지호라는 아이인데 피아니스트로 성공하는 게 꿈이여서 유학을 갔다 10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승룡이는 지호가 오기만을 10년째 언덕 위에서 기다리는 그런 바보였습니다. 그러나 지호는 승룡이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지호는 사실 유학의 압박감으로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아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부모의 기대 때문에 그 사실도 말 못 하는 실정이었습니다.
지호는 조건 없이 자신을 좋아해 주는 승룡이에게 점점 고마움과 따뜻함을 느낍니다.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승룡이뿐입니다. 다시 피아노를 치기가 두려운 지호에게 승룡이는 초등학교 때 했었던 학예회처럼 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잘할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학예회때 무엇을 쳐야 할지 모르고 있었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그냥 쳤었던 기억을 지호는 떠올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잘 치던 노래를 알고 있었던 그 사람이 승룡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지인이도 신장이 좋지 않습니다. 신장 이식을 받아야 하는데 기적처럼 다방을 하는 양아치 친구 상수가 지인이와 신장이 맞아 하나 주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를 질투하던 다른 조폭에 의해 그는 위험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를 승룡이와 착각한 조폭들이 상수 대신 승룡이를 죽입니다.
이제 지인이는 지호와 상수가 지킵니다. 지호는 다시 피아노를 쳐서 그 돈으로 지인이의 학비를 대고 상수는 다방을 접고 승룡이가 운영하던 토스트 가게를 이어받아 지인이를 지켜줍니다.
말 그대로 만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만화가 아니면 승룡이와 같은 그런 만화 같은 사랑을 하는 사람을 찾기가 매우 어려운 세상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승룡이의 바보 같은 사랑으로 지인이는 잘 지켜질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지인이를 돌보려 했다면 언제나 바보 같은 오빠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자신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만든 친구들이 있어서 지인이도 오빠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에게는 바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밖에서 일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피곤해서 잠만 자고 집안일도, 자신을 위해 놀아주어도 재미가 없는 그냥 그런 아버지로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빠는 바보 같은 사랑으로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어야 자녀에게도 사랑받습니다. 혼자 자녀를 키울 수 있었다면 하느님께서 부모라는 두 명의 시스템을 만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고아원에서 자라서 마음이 얼음과 같이 되어 냉병을 앓는 엄마가 있었습니다.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녀를 어떻게 잘 키우겠습니까? 남편은 자녀들보다 우선 아내의 병을 고치려 노력하였습니다. 한여름에도 이불을 덮고 난로까지 피워야 하는 아내와 바보처럼 고통을 함께했습니다. 땀띠가 나면서도 자신과 함께 있어 주려 하는 남편의 사랑에 감동하여 아내는 심장의 얼음이 녹아내렸습니다. 그리고 냉병이 치료되었습니다. 이 아내가 자녀를 키울 때 자녀들은 아빠를 고마워하게 됩니다. 엄마를 돌려준 분이 아빠라는 것을 아이들도 알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세포 안에는 아빠와 엄마의 유전자가 반반씩 섞여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좋아하게 마련입니다. 엄마가 아빠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 사랑한다면(물론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면 자기도 사랑하지 못할 확률이 더 높지만) 아이를 반밖에 사랑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남편을 사랑한다면 자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빠는 이를 위해 아내가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바보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바치시고 베드로에게 세 번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세 번 다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인 교회를 그렇게 당신을 사랑하게 만든 다음에 우리 양 떼를 돌보라고 파견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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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1,15-19 : 내 어린양들을 잘 돌보아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15절) 하고 물으신다. 예수님은 다른 사도들을 제쳐 놓고 베드로에게 물으신다. 그것은 베드로가 사도들 가운데 선택된 이며 제자들의 대변인이며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도 조언을 구해야 할 일이 있을 때에 베드로를 찾아간 것도 이런 이유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자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다른 사도들보다도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자리임을 알 수 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신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물으심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같은 곳) 하고 대답하였다. 십자가의 처형 전에 세 번 모른다고 한(마태26,69-75 참조) 분을 세 번 사랑하느냐는 물음에 세 번 사랑한다고 고백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리스도께 무슨 이익을 드리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서 베드로를 사랑하시는 것은 오직 베드로를 위한 것이다.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님께 대한 사랑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15.16.17절) 그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양들을 돌보라는 말씀을 세 번 하셨다. 주님의 양떼를 믿음의 음식으로 잘 돌보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주님의 낙인(烙印)이 찍힌 주님의 양들을 돌보아라.’는 말씀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양들을 돌보도록 하기 위해 사목자들의 머리이신 분이 베드로를 사목자로 만드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을 맡기셨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의 양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양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피를 흘려 구원하신 양들이므로 베드로도 그들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18절)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림을 말한다.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당했을 때, 자신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했다. 이것은 자기는 예수님과 같이 바로 십자가에 달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자기의 십자가를 예수님의 십자가와 똑같이 숭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숭배하도록 가르친 것이다. 베드로는 쟈니꼴로 언덕에서 십자가형으로 순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를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19절)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지만, 처음에는 그들을 가르치시려 부르신 것이고, 지금은 당신의 영광에 참여하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겪는 것은 고난당하는 이에게 영예이며 영광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나 자신이 이 세상에서 주님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사랑해야하는 위치라는 것을 우리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더 많이 사랑하는 우리 되도록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이러한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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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주교회의 사무국장)]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주님께서 ‘베드로를 특별한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신 것은 그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반석이 되라는 사명에 대한 확증’이며,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주님의 파견 사명으로 베드로는 교회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고 하십니다.(『나자렛 예수』 1권 참조)
사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사제품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양들을 돌보시고자 “나의 양을 사랑하겠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점입니다. 사목의 대상을 사랑하는 데 필요한 것은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 ‘주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연결이 없다면,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양을 돌보되 “삯꾼”(요한 10,12)에 지나지 않으며 “착한 목자”(요한 10,11)는 될 수 없습니다.
사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라는 사실은 사목자뿐 아니라 교우들에게도 해당합니다. 성당에 다니는 이유가 ‘주님을 믿으려고’라고 말하면서, 주님보다는 성직자나 수도자 또는 신자들을 보고 쉽게 낙담하거나 슬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따르다가도 뒤돌아 섰다가 회개하며 다시 주님께 돌아오기를 반복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어보셨듯이 우리에게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까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주님을, 주님만을 사랑하고 바라보는 것도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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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를 사랑하느냐?>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물으신 일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베드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제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을 고백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나는 너를 이미 용서했고, 너를 변함없이 사랑한다. 너도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용서하신 것은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용서 자체도 사랑이지만, 사랑하니까 용서합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의 사랑을 몰라서 하신 말씀도 아니고, ‘나를 사랑하여라.’ 라고 강요하시는 말씀도 아니고, 회개는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한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사랑 없이 죄책감으로만 하는 회개는 많이 부족한 회개입니다. 회개는 주님을 사랑해서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뒤에 곧바로 회개했습니다. 사람의 속을 꿰뚫어보시는 예수님은 그가 이미 회개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회개를 완전하고 참된 회개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랑으로써 그의 회개를 완성시킬 필요가 있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회개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또 당신이 이미 용서하셨음을 그에게 알려 줄 필요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라는 말씀은, 베드로 사도 자신이 스스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도들의 사랑을 무시하거나 깎아내리는 말씀도 아니고, 다른 사도들은 베드로 사도보다 예수님을 덜 사랑해도 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사랑 실천은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실천과 나의 실천을 비교하는 일이 아니라, 그만큼 내가 더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실천과 나의 실천을 비교하다가 자칫 잘못하면 교만이나 위선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만큼만 하면 되겠지.”라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다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못하는 일이 생깁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는 말은, “주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는 것처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아시면서 왜 물으십니까?” 라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말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다윗이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다윗이 당신께 무슨 말씀을 더 드릴 수 있겠습니까? 주 하느님, 당신께서는 당신 종을 알고 계십니다."(2사무 7,20) 시편에도 비슷한 말이 나옵니다. “정녕 말이 제 혀에 오르기도 전에, 주님, 이미 당신께서는 모두 아십니다."(시편 139,4) 이런 말들은 모두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의 대화를 고해성사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베드로 사도의 성찰, 통회, 정개, 고백은 이미 이루어졌고, 예수님의 용서도 이루어졌고, 이제 베드로 사도의 보속만 남은 상황입니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라는 말씀은,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과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을(마태 16,18-19) 재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하고, 그에게 보속을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1)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은 분명히 ‘큰 잘못’인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과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을 취소하지 않으셨습니다. 취소하시기는커녕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세 번이나 말씀하심으로써 그의 지위와 권한과 임무를 분명하게 재확인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입니다.(마태 12,20) 죄를 지은 사람 자신이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누구든지 원상 복구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아주 잠깐 동안 ‘부러진 갈대, 연기 나는 심지’가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고, 베드로 사도 자신은 곧바로 통회함으로써 예수님의 은총에 응답했습니다. (배반자 유다도 회개했다면 원상 복구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셨지만, 그 자신이 스스로 포기했고, 그래서 그는 영원히 배반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2)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말씀을 베드로 사도에게 보속을 주시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 보속은 그의 ‘임무 수행’을 겸한 것으로서 평생 해야 할 일입니다. ‘보속’은 ‘벌’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과 용서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보속’을 ‘죗값을 치르기 위한 괴로운 숙제’로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신 것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또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보속을 실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 말은 연옥에서의 보속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연옥은 벌을 받는 곳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준비하는 곳입니다.) <‘어린 양들을 돌보는 일’은 베드로 사도가 실천해야 하는 ‘예수님 사랑’입니다. (원래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실현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이들’을 사랑함으로써 당신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기를 바라십니다.(마태 25,40)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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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분과 대화 중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신지요?’ 교우분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원예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어요.’ 꽃을 사랑하고, 전례 꽃꽂이를 하시기에 원예를 통해서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모래치유라는 말도 들어봤고, 장난감치유라는 말도 들어보았습니다. 꽃과 나무를 통해서 메마른 감정에 사랑의 광합성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랑이 열매 맺어서 슬픔은 기쁨이 되고, 절망은 희망이 되고, 근심은 담대함으로 변하면 좋겠습니다.
제가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설교학에 대한 자료를 더 많이 모았을 것 같습니다. 책도 번역하고, 강의 준비를 철저히 했을 것 같습니다. 처음 강의를 하면서 준비도 부족했고, 열정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으로 오면서 강의를 다른 신부님께 넘겨 드렸지만 아직도 아쉬움은 남습니다. 2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영신수련’ 공부를 좀 더 체계적으로 했을 것 같습니다. 신학생들과 함께 30일 피정을 하면서 영신수련의 구조와 체계는 잘 모르면서 열정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년에 북미주에 계신 수녀님들과 함께 피정을 하기로 했습니다. 1년의 여유가 있으니 차분하게 피정에 필요한 자료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시즈프스’라는 드라마를 보고 있습니다. 미래에서 사람들이 현재로 넘어온다는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싶어서 넘어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나기 위해서 넘어옵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된 질서를 바로 잡으려고 넘어옵니다. 어떤 사람은 일확천금을 얻으려고 넘어옵니다. 경마의 결과, 복권당첨 번호, 주식의 정보를 가지고 넘어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교회는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도, 질병도,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예, 주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예수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3번하십니다. 베드로는 3번 대답하면서 마음이 슬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마음을 충분히 아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3번 질문하신 이유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반을 충분히 용서하셨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 길은 부귀, 명예, 권력에 있지 않습니다. 희로애락의 세상사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빛으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셨으니 이 큰 선물을 받은 저희가 굳은 믿음으로 더욱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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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구 박장근 베드로 신부님]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나를 따라라">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 릭 워렌의 글에서 우리는 지금 해야할 일을 자주 뒤로 미루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그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단계를 밟게 된다고 합니다.
1단계는 희망적 상태에서 이렇게 생각한답니다. "이번에는 조금 일찍 시작할거야"
2단계는 약간의 긴장 상태에서 "빨리 시작해야만 하는데."하고 생각하고
3단계는 잠재해 있는 죄책감 단계로서 "나는 조금 더 서둘러서 시작했어야만 했는데."
4단계는 그릇된 재확신의 단계로서 "아니야, 아직 그것을 할 만한 시간이 남아있어."
5단계는 절망적인 상태로서 "도대체 뭐가 잘못된거지?"
6단계는 강도 높은 고통의 단계로서 "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7단계는 그냥 밀고나갈 수밖에 없는 단계로서 "그냥 해치워 버려야지!"라는 생각을 한답니다. 8단계는 이러한 7단계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결심하는 단계로 "다음번에는 꼭 일찌감치 시작할 거야." 생각하지만 이 생각 자체가 바로 이러한 싸이클을 반복하게끔 만든답니다.
지금 해야할 일을 뒤로 미루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불필요한 문제들을 야기시킵니다. 또한 기회, 시간, 그리고 돈을 낭비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미루는 것이 습관이 되면 중독증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미루는 습관에 인이 박히게 되면 변화하기는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뒤로 미루는 습관은 삶의 방식이 되어 우리 삶의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고통의 원인이 되는 미루는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다음의 것을 실행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주어지면 그 일을 하는 것에 있어서는
1.변명하기를 그만둘 것이며,
2. 그 일을 완벽하게 해야된다는 욕심을 버릴 것이며
3. 일에 대한 두려움을 직면하고 용기를 가져라!
4. 그리고 이 일로 인한 현재의 고통보다는 앞으로 얻어질 것에 초점을 맞추어 일을 해나갈 것이며
5.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하라!
이렇게 하면 미루는 습관으로 받는 고통이 사라지게 됨을 릭 워렌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묻습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예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물으심에, 마음 한켠에 섭섭함이 생겨버렸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예수님께 모두 “예”라고 응답합니다.
그렇게 응답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세 번씩이나 당부하십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그리고 베드로의 삶이 앞으로 어떠할지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을 삶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결국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으로서 바치게 될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마지막을 더욱 견고히 해주실려고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씩이나 물으셨나 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다른 말씀하시지 않고 당부의 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은 바로 전인적인 동의를 구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따른다는 것은 어느 한 부분만의 만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따르기 위해서는 따를려고 하는 그의 마음과 정성과 의지가 동의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에게 당부하시는 이 말씀은 베드로의 온 존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라”
지금의 우리들도 베드로와 같은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한다면 이제는 세상을 따르지 말고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지금 멈추어져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것을 없애 나가도록 해야되겠습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는 미루는 습관으로 인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 미루는 습관부터 없애나가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잔을 들도록 합시다.
축복의 잔을 들기 위하여 우리에게 지금 주어진 일들에 충실한 시간을 만들어 나가야 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나를 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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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사랑은 감정놀이가 아니야!>
사랑 고백은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이 차고 차 도저히 내뱉지 않을 수 없어 저절로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 고백입니다. 고백을 당하면 그것은 고백이 아니라 고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옛날 무서운 시절에 자백을 받아냈다고 발표되곤 하였는데 고문에 의한 자백이고 그래서 거짓 자백이었던 것과 비슷하다 할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시몬 베드로가 이런 처지였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당신을 사랑하는지 물음을 받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물음을 받고, 특히 첫 번째 물음은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는지 비교하는 사랑고백을 요구받습니다.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덧 난 상처를 건드리듯 세 번이나 배반한 자신의 사랑을 꼬집는 그 세 번의 물음과 그렇게 물음을 당해도 반발하지 못하고 모래알 씹듯이 대답해야만 하는 자신의 궁핍한 사랑고백, 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이런 사랑고백은 당당하지도 황홀하지도 않은 고백이고 속으로 겨들어가는 쓰디쓴 사랑고백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랑고백을 원하신 것일까요?
사랑을 구분하자면 감성이 하는 사랑과 의지가 하는 사랑이 있지요. 감성적 사랑은 좋은 느낌이 충만하면 “아, 좋다!”하고 감정이 터져 나오듯 고백이 터져 나오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절대 사랑을 억지 고백할 수 없습니다. 연인 간에 부부 간에 이런 경우를 종종 보지요.
의지적 사랑은 이런 감성 놀이가 아닙니다. 자기 전 존재로 다른 존재를 감당하고 책임을 감당하고 고통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사랑이 있는지 물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맡기면 당신의 양들을 감당할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는지, 이런 무거운 책임을 감당할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는지, 지금까지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갔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에 끌려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게 되더라도 그런 고통을 감당할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는지 물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와 책임과 고통을 감당할 의지가 있는지 물으신 주님, 이제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처음 부르실 때 그때도 나를 따르라 하셨는데 그때는 따르려는 의지가 있는지 묻지도 않고 고기 잡는 어부 되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지만 이제는 따르려는 의지가 있는지 사랑의 의지를 물으신 다음 당신의 양떼를 잘 돌보라 맡기시고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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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태형 요한 세례자 신부님]
<으뜸 사도 베드로>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열두 사도의 으뜸이었던 베드로 사도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 전통을 이어받아 그분을 첫 번째 교황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도 베드로의 위치는 확고부동하였습니다. 그렇게 된 까닭은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인정하셨고, 베드로 역시 그분의 말씀으로 살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베드로는 그때마다 사랑을 고백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하였지만, 닭이 울기 전 사람들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는 잘못을 저지른 후 슬피 울었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과연 베드로가 예수님께 한 고백이 참 사랑일까 하고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한 알콜 중독자가 당장에 그의 부인과 아이들을 돌보아주어야만 할 절실한 상태에 있는데도 가족에게 가볼 생각은 않고 술집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며 술집 주인에게 ‘나는 정말 내 가족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 그 중독자는 자기 위안을 위해 참 사랑과 사랑의 느낌을 혼돈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도 예수님께 고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봄으로서 과거에 그가 한 잘못을 따지거나 책임을 물으시지 않습니다. 한결같은 눈으로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십니다.
그 기다림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자세가 변화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기 전의 베드로의 모습과 지금의 대답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게도 자신만만했던 어투가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리가 없습니다’ 라고 겸손된 자세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부족하고 이기적인 사랑을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을 하도록 사랑의 차원을 바꿔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세 번을 모두 사랑한다고 똑같은 대답을 했어도 처음과 둘째는 그 고백의 깊이에서 다른 것이며, 둘째가 속삭임이었다면 셋째는 선언이었을 것입니다.
‘속삭임’은 귀에 대고, ‘선언’은 영혼에 대고 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을 모른다고 말했을 때 그때마다 절연과 배신의 골을 깊게 팠던 것처럼, 세 번 거듭된 고백에서 매번 다른 깊이와 넓이로 예수님을 향한 신의와 사랑을 선언하고 그분의 참 사랑 안에 머물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할 때 흔히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지 않고 자기 편한 대로 자기 마음대로 차지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경향을 띠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은 상대방에게 의존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상대의 자유는 없어지고 의존적인 사랑에는 자신의 자유가 없어지는 법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사랑은 이런 구속이나 지배를 초월한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선택을 받은 으뜸제자로서의 신분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해야하는 위치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최고 지도자의 위치는 바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는 자리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이 세상에서 주님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사랑해야하는 위치라는 것을 우리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더 많이 사랑하는 우리 되도록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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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상을 차려 아침을 먹이신 다음, 베드로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며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뭔가 이상한 질문입니다. 보통 일을 맡길 때면,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잘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묻는데, 엉뚱하게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 일까요?
이는 일을 ‘잘’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당신께서 맡기신 일은 ‘능력’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하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일’을 사랑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엇이 본질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나의 양들’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돌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6.17)
그렇습니다. 당신의 양들이 맡겨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믿으시기에 맡기신 양들입니다. 이는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능력을 보고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과 사랑으로 맡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 하심은 당신이 먼저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당신이 먼저 우리를 믿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세 번의 동문서답으로 대화를 끝내고 맙니다. 그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5.16.17)라고 고백할 뿐,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 이전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주님을 의심하고 세 번이나 부정했지만, 주님은 그가 배신할 줄을 알면서도 그를 믿으셨습니다. 그러니, 비록 그가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는 ‘하느님의 충실하심’(헤세드)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믿음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끝내 이를 알아듣지 못한 베드로는 결국, 양떼를 돌보지 않고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폴란드 소설가 센키비치의 소설 <쿼바디스>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지하교회에 숨어있던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나가던 중, 갑자가 한 줄기의 빛이 그를 향해 다가오자, 그는 그 빛이 그리스도임을 알고 땅에 엎드린 채 묻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러자 빛이신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나의 양을 버렸으니,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지 않겠느냐?” 그제야 비로소 베드로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당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일’에 앞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요청받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유일한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의 일을 따르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의 일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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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7)
주님! 당신께서는 아침상을 차려 사랑을 먹이시고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저의 사랑을 당신이 몰리서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제가 모르기에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냐?”
당신은 배신할 줄을 빤히 알면서도 여전히 저를 사랑하오니 제가 어떤 상화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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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6)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의 마음이 슬퍼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신 세 번의 물음은 일찍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던 베드로의 배반을 상기시키면서, 그의 세 번의 배반을 치유해 주시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면서, "내 양들을 돌보아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오늘의 이 말씀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겠다고 서약한 사제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사제들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신자들을 잘 돌보아라. 그리고 나를 따라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그렇게 신자들을 사랑하여라."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작년에 코로나가 한창 일 때, 어느 개신교 목사가 방송에 나와, 코로나 지침을 따르지 않는 목사들을 두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목사들이 있다." 라고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살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제의 삶이든, 신자의 삶이든,
모두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셨고, 말씀하셨고, 행동하셨을까?'를 먼저 숙고해 보고,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이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이들의 '참된 삶'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인간적인 사랑인 '필레오'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인 '아가페'로,
각자 자기성소에서 "예,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기쁘게 응답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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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요한 21,15-19 (예수님과 베드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당신께서 아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당신께서 제게
늘 물으십니다
감히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렵니다
다만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께서 아신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께서 저보다
저를 더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저보다
저를 더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작아지고
당신은 커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라지고
당신은 남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계시기에
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믿지 않으면
당신을 향한 사랑 고백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하나 되는 사랑으로
당신을 향한 사랑 고백을
하고 싶을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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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 외국인 연구자가 각 나라의 1분당 평균 걸음 수를 조사했습니다. 미국은 분당 25걸음을, 영국은 분당 29걸음을, 일본은 평균 35걸음을 걷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인의 평균 걸음 수는 어떻게 될까요? 놀랍게도 1분에 평균 56걸음을 걷는다고 합니다. 거의 1초에 한 걸음을 걷는 셈입니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를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빠른 성취를 원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우리나라가 정말로 빠르게 발전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빨리빨리’ 문화는 빠르게 실망하고 빠르게 절망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어떤 것이든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너무 급하게 원하는 결과를 구하려고 하다가 놓치는 것도 너무나 많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빠르게 서두르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한 발자국 떨어져서 다시 한번 생각하며 바라보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부활하신 뒤에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으로, 예수님의 수난 당시에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한 일을 언급하지도 또 그간의 보여주었던 실망스러운 모습을 야단치시지도 않으시면서 온화하게 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세 번이나 합니다. 즉, 베드로가 세 번의 믿음 고백을 하게끔 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베드로는 착한 목자에 의해 지위를 회복하며, 자신의 뒤를 따르는 사목자들과 함께 자신의 양들을 먹이도록 불리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세 번이나 던지셨을까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계속해서 이 질문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막연하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주님을 떠올리며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베드로가 들었던 주님의 말씀을 똑같이 듣게 될 것입니다. 그 말씀은 바로 “나를 따라라.”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따르는 것이 아닌, 사랑의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원칙을 좇기보다 주님의 원칙을 좇아야 합니다. 급하고 막연하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 마시고, 왜 주님을 사랑하고 함께 해야 하는지를 묵상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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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갑곶성지에는 ‘천국의 문’ 봉안당이 있습니다. 이곳에 들어오시는 안치식을 거의 매일 하면서, 죽음에 대한 묵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첫째, 죽음은 힘든 이별이며 커다란 상실입니다.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슬픔입니다. 특히 사랑했던 만큼 그 고통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컷 울고 애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지 70년이 된, 80대의 할아버지께서도 이곳으로 부모님 유해를 개장하면서 펑펑 우십니다. 시간이 그렇게 지나도 죽음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둘째, 죽음은 실패가 아닙니다. 질병, 노화로 인한 죽음이 의료적 실패나 기능불량이 아닙니다. 삶이 죽음에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사실은 이 죽음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한 부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당연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셋째, 죽음은 남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가 됩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줍니다. 특히 죽음에 대한 계속된 질문 속에 지금을 새롭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죽음은 어떠하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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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으로 관계 회복을>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래서 다짐과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철석같이 믿었는데 네가 그럴 줄 몰랐다’ 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배신을 당하면 큰 상처를 받게 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를 쳐다보기도 싫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립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는 옛말이 있듯이 많이 놀라면 매사에 겁을 내게 됩니다. 이러한 상처를 치유 받고 여기에서 일어서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5).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맺기 전의 이름으로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한 번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반복해서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마르14,29). 라고 하였던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옛 상처에서 벗어나 주님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처입고 좌절한 마음을 회복시켜 주시고 그리하여 베드로는 배반을 하고도 제자공동체로 다시 돌아와 그들 사이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베드로 또한 그분의 마음을 알기에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6) 하고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고 예수님처럼 파견하신 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세 번의 사랑 고백이 우리 교회의 시작인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공생활 동안 하셨던 목자로서의 사명을 베드로가 이어받게 하셨습니다. 양들을 돌보는 고귀한 임무는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들을 통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함께야).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슬퍼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제가 당신께 잘못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십니다. 당신과의 관계를 이제 당신이 판단하십시오.’ 하고 주님께 의탁한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세 번이나 배반하였던 베드로를 당신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베드로뿐 아니라 그를 알고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게 관계를 지속시켜가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결국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은 사랑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 간에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멀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용서는 배신을 당한 사람이 하는 것이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처럼 품이 큰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요한21,19)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혹 관계가 소원해진 사람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만남이 사랑 안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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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 지금 여기가 구원의 꽃자리 천국天國이다-
며칠전 산전수전 온갖 고통 다 겪고 면담고백성사시 꽃처럼 앉아 있던 자매에게 확신에 넘쳐 드린 위로와 격려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제부터 천국의 삶을 사십시오. 그 힘든 생지옥같고 연옥같은 수십년의 세월을 참 장하게 믿음으로 통과하셨습니다.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기적’입니다. 그대로 보속의 삶이었습니다. 참 어려운 굽이굽이 산전수전 고난의 고비들을 다 넘었습니다. 이제부터 꽃처럼 감사와 기쁨 가득한 천국의 삶을 사십시오.”
새벽에 일어나 카톡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전달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선교사입니다. 대단한 언변으로 다른 이들을 설득하는 선교사가 아니라, 기쁨에 가득 찬 삶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선교사입니다.”
‘기쁨에 가득 찬 삶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선교사의 삶’은 그대로 ‘하느님의 꽃’ 같은 삶입니다. 이른 봄부터 피기 시작한 ‘파스카의 봄꽃’들에 이어 수도원 곳곳에서 계속 피고 지는 다양하고 무수한 꽃들의 화사한 행렬입니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곳에 몇 달간 계속 피고 지는 샛노란 애기똥풀꽃을 보며 어제 써놓은 ‘꽃처럼’ 이란 글입니다. 노오란 애기똥풀꽃의 꽃말, “엄마의 정성과 사랑!”이 참 아름답습니다.
-“볼품없이 초라한 버려진 땅, 자리 탓하지 않는다
그 어디든, 뿌리 내리면 거기가 자리다
하늘만 내려다 보시면, 볼 수 있으면 행복이다
누가 보아 주든 말든, 알아 주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때되면 꽃처럼 활짝 피어나, 주변을 환히 밝힌다
바로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구원의 꽃자리 천국天國이다”-
그대로 우리 정주의 수도공동체 형제들을 닮은 꽃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꽃다운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까요? 문득 어제 읽으며 메모한 글도 생각납니다.
“헤르만 헷세는 자신이 유감스럽게도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만은 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바로 ‘아름답게 사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장 무상無常한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충고한다. 예를 들면 열흘 동안 화병에 꽃힌 채 시들어가는 백일홍 관찰하기, 그 잎의 뒷면도 세세히 들여다 보기, 밝은 잿빛으로 변하는 장미의 모습을 생생하게 감동적으로 응시하기, 그렇게 해서 삶의 무상함에 대해 슬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리하여 소중하게 받아들이기---”
그대로 삶의 관상적 측면에 주목하라는 충고입니다. 사랑의 관상觀想, 관상의 아름다움입니다. 어떻게 하면 각자 주어진 정주의 자리에서 꽃처럼 아름다운 관상적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사람마다 자리는 다 다를 것이나 그 방법은 단 하나 똑같습니다. 바로 답은 사랑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 세 번 거푸 주고 받은 물음과 답이 바로 아름다운 삶의 비결을 알려줍니다. 삶의 자리는 다 달라도 모두에게 공통된 진리를 보여줍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 베드로 대신 내 이름을 넣어 보십시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세 번 당신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 매번 똑같이 당신께 대한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종전처럼 자신을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지 않고 그냥 자기의 사랑을 고백하면서, 질문하시는 주님께서 사람의 마음속까지 아신다고 겸손히 대답합니다. 베드로의 정화된 순수한 마음, 순수한 사랑입니다. 어제 읽은 유명했던 여배우 윤정희 데레사의 남편 피아니스트 백건우 요셉 마리의 인터뷰중 한 대목도 생각납니다.
“많은 사람이 진정한 음악이 무엇이냐고 내게 물어 오면, 난 항상 이렇게 대답하죠. ‘음악은 마음의 순수한 상태’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물음입니다. “예, 주님을 사랑합니다!” 답은 이 하나입니다. 이렇게 사랑할 때 비로소 마음의 순수요 꽃같은 삶입니다. 사랑과 순수는 함께 갑니다. 요즘 곳곳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새하얀 찔레꽃(꽃말;고향에 대한 그리움, 고독)들이 ‘마음의 순결’을 상징하는 듯 참 반갑습니다.
이어지는 베드로를 향한 말씀이 구체적 당신 사랑의 처방을 알려 줍니다. 세 차례나 매번 대동소이합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내 양떼인 형제들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람 형제들만 아니라 함께 하는 모든 피조물 형제들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은 분명 생태적 회개의 사랑까지 염두에 두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모범이 성 프란치스코요 이 성인을 많이도 닮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말씀이 예수님 사랑에 대한 결정적 행위의 응답을 촉구합니다.
“나를 따라라.”
‘나를 믿어라’. ‘나를 사랑하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이웃 형제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표현되는 예수님을 따르는 행위입니다. 이제 제1독서 사도행전도 거의 막바지입니다. 복음의 베드로와 사도행전의 바오로가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베드로처럼 바오로에게도 순교의 죽음이 머지 않았음을 예감케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한결같이 주님을 따르는 바오로의 삶에서 사도의 한결같은 주님 사랑을 확인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한결같이 당신을, 이웃 형제들을 사랑하며 당신을 잘 따를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다음의 공동고백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희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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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빵과 물고기로 새벽 허기를 채워주신 뒤,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는지 물으십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
베드로는 세 차례나 반복된 질문에 슬퍼하며 답하지요. 이 장면을 세 번 주님을 부인했던 실패에서 베드로를 일으켜세워 주시려는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 대목에서 우리 안에 반복해 울리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은 부르심을 받아 주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온 우리에게 '신앙이란 바로 사랑의 문제'임을 각인시킵니다. 신앙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이끄시며 구원하시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그분께 머무릅니다. 예수님은 일찌기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라고 하시며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두셨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와 그의 신앙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등장합니다.
"수석 사제들과 유다인의 원로들이 그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면서 유죄 판결을 요청하였습니다."(사도 25,15)
먼저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 기득권자들 입장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처단한 뒤 그분의 추종자들도 경계하며 손을 댑니다.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바오로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지요.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는 무리가 명백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계명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고 법을 준수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신의를 표현한 기존 종교 기득권자들에게, 사랑으로써 율법을 완성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위험해 보였던 것일까요?
그런데 율법의 정신과 내용이 사랑이고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며 예수님은 그 사랑을 완성하러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 사실 그 둘은 다르지 않지요.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사도 25,19)
이 견해는 율법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면서 직책상 이 일을 처리해야 하는 이들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저 죽었지만 그 추종자들이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 때문에 일어난 귀찮은 분쟁일 뿐이지요. 이 시각이 어쩌면 지금 이 세상의 입장과 유사할 수도 있습니다. 방관자이고 구경꾼이면서 적당히 이득을 취할 기회 정도로 신앙을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부르심 받은 신앙은 율법이나 이익 이전에 사랑의 문제입니다. 주님은 사랑 때문에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 역시 사랑 때문에 그분께 응답해 지금 여기 존재합니다. 감히 섞일 수 없는 엄청난 간극을 지닌 신과 인간이 사랑 때문에 만나고 사랑하고 하나가 된 것입니다. 사랑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 21,18)
그런데 이 사랑은 처음에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과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싶다가, 결국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예고하신 바와 같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고 원하지 않는 곳,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를 끌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이란 것이 오묘해서 한때 그토록 원하지 않았던 방식을 그때에는 기꺼이 받아안게 될 것입니다. 강렬했던 원의마저도 사랑 안에 형체도 없이 녹아들어 사랑과 하나가 되어 버릴 것이니까요. 그러면서 사랑이 되어갈 것이니까요.
"나를 따라라."(요한 21,19)
그때 비로소 사랑이 된 우리에게, 주님께서 이제 진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처음의 부르심과는 다른 차원이 펼쳐지는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또 물으십니다. 우리도 "예,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지치지 말고 대답하고 또 대답합시다. 사랑을 물으시고 구걸하시는 주님께 마음을 다해 응답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이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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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신앙인은 무슨 가치를 궁극적으로 마음에 간직할까요?
사람이 자신의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참된 사람됨의 본질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간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윤리의 관점에서 인간 본성의 윤리적 성격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법사상으로 해명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현상학現象學과 실존주의, 가치철학 등에 의해서 종래의 형이상학적인 격(Persona)의 개념으로는 충분히 인간 본성의 동적인 윤리적 성격을 명확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치는 물건도, 물질적인 것도, 심리적인 것도, 주관적인 마음의 자세도 아닙니다.
가치는 객관적인 실재며, 인간의 정신성에 대응하는 그 무엇이며 인간의 심정이라는 탐지 기능으로 직감적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가치는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어떤 객관적 그리고 정신적인 실재 입니다. 신앙인들의 심층부에 가치심정은 얼마나 깊을까요? 그리고 무슨 가치를 궁극적 최고의 가치로 심정心情, 곧 마음에 자리하고 있어야 할까요?
-<善과 神을 찾는 사람을 위하여>중에서
♣인간에게는 일곱 가지 가치들이 있는데 그 중 쾌락의 가치, 육체적 가치, 경제적 가치, 교양가치는 인간의 마음에 충족감은 주지만 자아가 온전히 내포돼 있지 않는 관계로 하위 가치에 해당됩니다.
예술(미)적 가치, 도덕적 가치, 종교적 가치로 올라가면 갈수록 자아가 상당히 내포되어 망아상태忘我狀態에 이르러 엑스타시(Ecstasis), 즉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간다.”라는 심리 상태까지 내적 감동을 줍니다.
도덕적 가치는 가장 많이 “자아가 내포돼 있다.”고 하는데, “도덕적 가치는 자기완성에로 진보함으로 자아의 본질적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윤리적 가치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하며 도덕적 선은 인간의 자아를 본질적으로 인간답게 형성하며 충실함과 행복감은 어떤 가치보다 깊고 영속적인 것입니다.
“종교적 가치”는 첫째로 인간의 자아가 근본적, 전면적으로 망라돼 있습니다. 도덕적 경우는 자아가 들어간다고는 하지만 그 행동 자체가 문제가 됐지만, 인간의 자아 자체와 인간의 실존의 근저가 문제가 되는 것은 종교에 있어서 뿐입니다. 예술이나 도덕적 가치 때문에 목숨을 바치는 경우는 드뭅니다. 종교적 신조信條 때문에 박해로 순교자가 되는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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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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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3mpVij4diOc&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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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 17)
사랑은
서로의 약함을
돌보는 것이다.
약함을
돌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또한
우리 자신의
약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약함을
기억하는 것은
사랑받았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약한 양들을
돌보는 것이다.
어린 양들을
돌보면서
예수님 사랑을
다시 만나게 된다.
약함에
감사할 때
양들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다.
약함에 대한
이해가
사랑에 대한
이해이다.
약함과 허물을
사랑으로
다시 일으키시는
주님이시다.
부활의 기쁨은
약함을 돌보는
사랑의 기쁨이다.
복음의 의미는
사랑하는 사람의
기쁨이다.
약함을 돌보는
사랑과 무관한
것은 없다.
사랑에는
뜨거운 눈물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서로에 대한
존중이 있을
뿐이다.
하느님께로
우리를 이끄는
약함의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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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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