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의 비유, 차유(差喩) - ③ ‘차이의 차유’와 ‘모순의 차유’/ 동아대 명예교수 신진
③ ‘차이의 차유’와 ‘모순의 차유’
모든 시, 모든 언술은 동일성과 차이성, 두 개의 기둥에 의해 지탱된다. 은유(환유 또는, 제유)의 원리와 차유의 원리가 그 대표적인 축이다.
차유의 유형을 나누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차유의 핵심 자질로는 ‘차이’와 ‘부정(否定)’ 둘을 들 수는 있는 바, 이 두 요소 중 어느 요소에 중심이 실리는가에 따른 유형화는 가능하다.
‘차이의 차유’는 보편적 상식에 대하여 또는 자체 문맥 내의 상반성, 중의성, 과정성, 모순성 등 차이가 나는 언어에 의해 나타나는 비유이다. 상식적 상황과 시적 상황 사이에서, 언어의 규범적 의미에 대한 특수한 의의, 평상의 언어에 대한 심미적 언어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문법적 일탈이나 생략, 비약 등 의미론적 간극에서 생성된다.
한때 분석철학의 총아로 불리었던 로티(Richard Rorty)의, 언어적 실천에 있어서의 아이러니스트의 개념에도 부합한다. 로티는 언술이란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공적인 영역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일치를 이루어야 하지만, 아이러니스트에게 있어서는 모든 사람이 합의할 수 있는 진리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다른 이들의 동의 여부보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관점이 더 중요하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언어는 자신의 생각이 오류일 수도 있는 가능성마저 열어두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시인은 물론 모든 인간은 모두가 아이러니스트라 할 수 있다. 특히 누구나 독창적인 단어로 표현할 때면 시인 같다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데 그런 현상이야말로 차이 나는 언어, 아이러니컬한 언어를 불러오는 계기이다. 이는 차이의 당위성이요, 특히 아이러니의 개념이 핵심이 되는, ‘차이의 차유’에 따르는 창의성의 실제적 증거가 될 수 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국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을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한용운, 「알 수 없어요」 전문
독자는 우선 ‘님’의 정체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시인이 모른 척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시를 읽게 된다.
님의 정체를 알기 위해 한용운의 일대기나 불교의 경전을 뒤질 필요도 없진 않지만, 그 전에 시 읽기는 이 시의 제목 「알 수 없어요」 진위부터 파악하고자 한다. 화자는 분명 알 수 있지만 ‘알 수 없다’고 시치미를 떼는, 아이러니스트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시의 이해를 위해서는 ‘바람도 없는 공중에서 벌어지는 수직(垂直)의 파문’, ‘떨어지는 오동잎 같은 발자취’,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 같은 얼굴’, ‘꽃 없는 깊은 나무’며 ‘탑 위의 고요한 하늘 같은 입김’,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냇물같이 노래하는 이’, ‘바다를 밟는 아름다운 발꿈치’, ‘떨어지는 해를 단장하는 시’, ‘다시 기름이 되는 재’ 등등 일반 상식에서 벗어나고, 통사적 의미상 불합리하기도 한 언어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를 위해 언어의 내적 외적 상황을 연동시켜 보게 된다.
그리하여, 「알 수 없어요」의 각행은 무위(無爲)의 유위(有爲), 진리의 표상, 신비로운 연원(淵源)의 청각화, 온누리에 충만한 만남과 헤어짐의 순리와 그치지 않는 사모(思慕)의 정과 시대적 상황 등등의 정황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시인의 전기적 사실과 문화사적 흐름을 함께 짚어보며 문학사적 가치도 짚어볼 수 있다. 개인적인 동시에 근원적이고 세계적인 문제를 심미적으로 구체화하는 시의 핵심 계기를 음미할 수 있다. 약한 등물을 밝히는 아름다운 행동의 시이자, 절대적 가치를 찬미하는 시 정도의 결론을 내리게 된다. 아울러 이 시의 언어적 차이성 표현에는 표면적으로 모순되고 불합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특별한 진리나 진실을 표현하는, ‘모순’의 축도 개입되지만, 그것을 포함, 〈알 수 없는〉, 〈약한 등불〉 등 조심스런 진술과 시치미떼기 등 넒은 의미의 ‘차이의 차유’가 바탕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첨언해 둘 만한 사실은 우리 근대 시사에서 1920년대 주요한, 이상화 등으로 대표되는 낭만주의시가 서구적 동일성의 언어에 의한 것이었다면, 만해와 소월의 시는 각각 전통 불교문학과 민요 양식을 격상시킨, 자생적인 근대시어, 차유 지향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이다.
아무튼 서구 전통의 수사가 표현적 동일성을 확보하는 데 목표를 두는 데 비해 차이의 차유는 그 동일성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조건, 차이성에서 출발한다. ‘차이의 차유’는 전통적 문체로서의 아이러니와 같이 언어와 지시대상 사이에 간극이 있는 언어표현이다. 반어법, 낮춘 진술, 과장진술, 동음이의어에 의한 말장난, 패러디, 미화법, 곡인법 등등이 이에 포함되고 역설도 아이러니의 대표적인 하위범부의 하나로 취급할 수 있다.
모순된 표현을 내세워 차이 나는 진실이나 진리를 환기시키는 ‘모순의 차유’는 종래의 수사법상 역설의 원리가 중심이 된다. 모순이거나 불합리한 표현이 주는 차이성, 언어 표현과 내적 진실 사이에서 발생한다. 광의의 ‘차이의 차유’에 포함시킬 수도 있긴 하지만 이는 자주 쓰이기도 할뿐더러, 차이의 또 다른 축이 되고 그 내면의 특정 진리나 진실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해서 쓸 만하다.
그러나 분석 과정에서 자명하게 알 수 있듯이, 전통적 문체로서의 역설이나 아이러니가 ‘모순의 차유’나 ‘차이의 차유’의 전부인 것은 결코 아니다. 실제 현대시는 이전의 전통 수사학에 입각한 논리로는 규정할 수 없는 차이성의 축에 의해 지탱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게 돼 있다.
날이 갈수록 진실은 더 특수하고 개인적인 차원에 놓이게 되는 까닭에 더욱 불합리하고 차이 나는 표현으로 끄집어내게 되는 것이다. 즐거움이 아픔인 때가 있고, 아픔이 즐거움인 때가 일상인 것이 도시문명 속의 생활이다.
사막의 중심에서 보도된 오늘의 특종 뉴스는
푸른 밤하늘에서 심장이 터져 흩어지는
사자를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자의 울음소리와 포효하는 몸짓을 보려고
사람들은 망원경을 챙겨 산을 오르고
나는 나의 사막인 옥상에 올라가
츄리닝 바지에 손을 넣고 때를 기다렸다
건조한 사막 중심부에서
사자의 핏빛 섬광을 만날 수 있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므로 천천히 기다렸다
갈기갈기 찢어지는 사자의 심장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걸을 때마다 스륵스륵 모래 소리 일어나는
나의 사막을 들여다보러 온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옥상에 펼쳐 놓았던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기다렸다
사자가 제 심장을 터뜨리면서 마지막 핏빛 섬광을
뿜어낼 그 순간을 기다리며
열려있는 조리개를 빙글, 나의 사막으로 돌려보았다
내가 펼쳐놓은 나의 사막을 향해 천천히
조리개를 열고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들여다보았다
내 핏빛으로 내가 절실해 본 적이 없으므로
나는 선명하게 조절되지 않았다
나의 사막인 내 심장 쪽에서
붉게 모래 폭풍이 이는 것이 흐릿하게 잡혔다
모래 폭풍을 뚫고 포효하는 사자 한 마리
―강미정, 「사자 관찰」 전문
굳이 동일화에 이르고자 하지 않는다. 기존의 세계와 상식에 대한 부정의식이 만만치 않게 내재되어 있고 불합리하고 모순된 표현이 주를 이루고 있다.
시인에 있어 현재는 언제나 변화와 재편을 요구하는 모순의 밭이다. 현재는 현실적 격식으로 동일화를 요구하지만 그 스스로 동일화를 방해하는 외적 요인에 둘러싸여 있기도 하다. 그래서 시란 현재에서의 차이성 발견에서 시작되고 동일성 지향과 차이성 구현이란 양면을 함께 지니는 차이 나는 언어체계라 할 밖에 없다.
하늘에서 심장이 터져 흩어지는 사자를 볼 수 있다는 뉴스가 나오다니, 그 뉴스에 사람들이 망원경을 들고 산을 오른다니, 말도 안 되는 말이다.
‘나’는 어떤가? 〈나의 사막인 옥상〉과 〈나의 사막인 심장〉의 모순과 ‘사람들’과 달리, 사자를 사막에서 만나는 상황적 모순 속에 놓여 있다.
망원경으로 사막을 들여다보며, 흐릿하게나마 볼 수 있는 사자, 폭풍 속의 사자, 사자는 밤하늘이나 사막과도 같이 어둡고 메마른 현실에서 그나마 내가 나이기를 바라는 ‘나’인지도 모른다. 적자생존의 도시사회에서 악착같이 살아 남는, 살아 남아야 하는 맹수성(猛獸性) 인간.
나답게, 내 핏빛으로 당당한 나, 순수하고 이상적인 자아를 실천할 수는 없으므로, 화자는 싸워서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나, 사자를 찾는 것이리라. 이는 비단 시인이나 화자 개인에 국한되지 않는, 모두의 바람(망원경의 은유)일 수밖에 없는 현실 풍자이기도 할 것이다.
세상에는 어떤 보편적 진리도 실현된 바 없다. 기존의 가치체계와 이에 근거한 권위에 도전하거나 부정하는 건 모순과 불합리의 세계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는 용기일 수 있다. 때로는 허무로서 직시할 수도 있고, 끊임없이 주체의 도전을 감행할 수도 있다. 현대시가 더욱 차유의 시인 이유이며, 시 창작과 비평에서는 물론, 문학 교육 현장의 논리적 기초가 되어야 할 실질적인 대안으로 ‘차유’를 제안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차이 나는 시 쓰기, 차유의 시론(신진, 시문학사,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