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이 5월 15일 스승의 날인데 오늘 학교에 오니, 제자였던 교사가 꽃과 작은 선물을 가져와서 제게 줍니다. 학교에 제가 담임을 했던 제자도 같은 교사로 10년이 넘게 있지만 그 제자는 아직 한번도 제게 꽃 한 송이 준 적이 없어서, 오늘 다른 제자에게 꽃을 받고는 당황스러웠습니다....
요즘은 스승의 날에 꽃도 선물로 받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오는 세상인데 교사인 제자에게서 받은 거니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대전으로 고등학교 때 은사님을 뵈러 갑니다. 친구 몇이 만나서 선생님께 저녁진지를 대접하고 작은 선물을 마련하여 드릴 겁니다. 해마다 5월에 대전에 가고 있습니다. 제가 교직에 나온 지 30주년이어서 이번에 그간의 일들을 책으로 낼려고 준비 중인데 거기에 우리 선생님에 대한 글이 있어서 여기 올립니다. 그 선생님 별명이 돼지 감자였습니다.
<돼지감자
지난 3월 1일에 고향에 사는 친구 집에 다섯 부부가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원래 여섯 명인데 부산에 사는 친구가 일이 바쁘다고 못 와서 올 수 있는 사람들끼리 만난 거였다. 우리는 홍성에 있는 홍주고등학교 2회 졸업생으로 고등학교 1학년 때에 만나 지금까지 계속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늘 고등학교 시절 얘기와 뚱딴지 선생님 얘기를 밥 먹듯이 한다. 우리 선생님 별명이 뚱딴지였다. 고등학교 2학년, 3학년을 계속 담임하시어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세 번이나 바뀌었던 아픔을 선생님께서 깨끗이 지워주셨다.
마침 여자들이 돼지감자를 캔다고 야단을 떨어서 대전에 있는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친구와 또 다시 옛날이야기를 안 꺼낼 수가 없었다. 돼지감자가 뚱딴지이기 때문이다. 뚱딴지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행동이나 사고방식 따위가 너무 엉뚱한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과 ‘국화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 땅속줄기는 감자 모양이며, 줄기는 높이 1.5~3미터이고 잔털이 있다. 알콜 원료나 동물 사료로 쓴다.’로 나와 있다.
이 뚱딴지는 남미에서 들어온 걸로 우리가 먹고 살기 힘들 때에 구황작물로 들여왔지만 사람들이 즐겨 먹을 만한 것이 못 되어서 돼지나 송아지를 준다고 돼지감자, 송아지감자로 불렀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뚱딴지가 당뇨에 좋다고 해서 지금은 귀한 몸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 선생님의 별명을 내가 지은 것은 결코 아니다.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반 친구들의 생각에는 선생님에게 아주 적절하고 탁월한 별명이라고 다들 좋아했다. 선생님은 술과 담배를 안 하시고 조금은 무뚝뚝한 편이셨다. 고향이 우리 지역이시고 고등학교까지 홍성에서 나오셨는데 당시에 우리가 보기엔 우리들하고 맞지 않아서 이런 별명을 붙여드린 거였다.
‘뚱딴지’로 부르면 선생님이 아실까봐 ‘돼지감자’를 한자로 바꾸어서 우리끼리는 선생님을 ‘돈서(豚薯)’로 불렀고 선생님의 성(姓)을 앞에 붙여 ‘오돈서’라고 수군거렸다. 나는 우리 선생님이 2학년 담임을 맡으시고 반장 선거에서 반장으로 선출이 된 뒤에 3학년 때도 다시 반장으로 선출이 되어 선생님 아래서 2년을 반장으로 있었다.
우리 학교는 그 당시에 개교한 지 2년밖에 안 되었고 2차로 학생들을 선발하는 후기여서 그 지방의 명문으로 알려진 홍성고등학교에 비해 많이 부족했다. 우리 선생님은 홍성고등학교를 졸업하신 분이셨고 우리 학교의 선생님 중 여러 분께서 홍고 출신이셨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혹독할 정도로 공부를 많이 시키셨다. 못하는 아이들이 잘하는 아이들을 이기려면 노력밖에 없다는 말씀과 함께 성적이 먼저 시험보다 떨어지면 무섭게 혼을 내셨다. 나는 늘 그게 두려워 더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명색이 반장이고 2학년에 올라와 학급 편성을 할 때에 수석으로 반에 들어갔기 때문에 거기서 뒤로 밀려날까봐 늘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던 거였다.
지금은 전국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서 야간자습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40년 전에 그걸 처음 시작했다. 그때는 야간자습의 개념이 없었고 선생님께서 저녁에 학교에 나와 공부할 사람이 있으면 교실을 개방해주신다고 하여 처음에 몇 사람이 하다가 나중에 꽤 많은 숫자가 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그때는 새벽까지 했었다.
그때는 자습감독을 하시는 분이 없었고 우리 선생님이 보통 아홉 시가 넘은 뒤에 한 번쯤 교실을 들러보고 가셨다. 3학년 가을에 학교 울타리 너머에 있는 과수원으로 사과서리를 다녔는데 나는 소심한 성격이라 한 번도 가지 않았지만 다른 친구들이 날마다 새벽 두 시에 가서 사과를 가져다 먹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쓰레기통에서 사과를 먹은 흔적을 보시고는 자습하는 사람 전원을 불러내셨다. 누구 짓이냐고 화를 내셨는데 내가 했다고 먼저 나갔더니 아이들을 돌려보낸 뒤에 다시는 하지 말라고 주의만 주시고 나도 보내주셔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내가 대표로 크게 혼이 날 줄로 생각했었다.
2학년 때, 3박 4일의 ‘경주-포항-울산-부산’ 수학여행을 갔을 때는 선생님께서 수학여행비가 든 전대를 늘 내 배에 채워주시고 나더러 항상 조심하라고 하셨다. 그때만 해도 소매치기가 많다고 할 때라 시골에서 수학여행을 왔으니 선생님들은 표적이 되기 쉽다고 학생인 내가 돈을 가지고 다니는 게 더 안전할 거라는 생각이셨다. 아마 이런 선생님의 생각 때문에 우리들이 그 뚱딴지라는 별명을 붙였을 거다.
선생님은 학교에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사셨다. 사모님과 다섯 살, 네 살 정도의 아들과 딸이 있어 네 식구셨다. 나는 그때에 너무나 철이 없어 몇 번이나 선생님 댁으로 가서 저녁을 얻어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사모님께 얼굴을 들지 못할 만큼 죄송한 일이다. 나 혼자서 가는 게 아니라 우리 친구들 대여섯이 저녁 식사를 하실 시간에 찾아다녔으니 식구들 식사 준비만 해놓으셨을 사모님이 우리 밥을 다시 준비하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나는 돈서 선생님께서 3학년 때에 우릴 다시 맡으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새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셔서 보니 선생님이셨다. 또 하나, 학급 편성을 다시 했지만 새로 바뀐 얼굴도 다섯 명도 안 되었다. 대부분 그대로 다시 만난 거였다.
솔직히 오돈서 선생님께서 2년을 맡으신 걸 좋아한 친구는 별로 없었을 거다. 선생님은 살가운 성격이 아니셨고 잘못하는 것은 다른 어느 선생님보다도 크게 혼을 내셨기 때문에 다들 내심 담임선생님을 다른 분으로 기대했다가 크게 당한 셈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반장으로 선출이 되어 선생님 곁에서 일을 보게 되었다.
우리가 졸업하면서 바로 다 대학에 진학한 것은 아니지만 선생님의 가혹한(?) 가르침 덕분에 우리 반에서 4년제 대학에 간 친구가 열 명이 넘고 2년제에 간 친구도 서넛이나 된다. 지금처럼 다들 대학에 갈 때가 아니고 2년제도 예비고사에 합격을 해야 지원이 가능하던 때다.
그때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 중에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이 10%정도 밖에 안 되던 때라 우리 반의 진학률은 꽤 높은 편이었다. 그때 우리 반 학생 중에 현재 대전에 있는 대학에 교수로 재직 중인 친구가 있고 교직에 나와 있는 사람도 나를 포함하여 셋이나 된다. 명문 고등학교라면 우스운 숫자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정도라도 이루게 된 게 모두 우리 선생님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작년 5월 스승의 날 무렵에 대전에 내려가 선생님을 찾아뵈었더니 교직에 있는 다른 친구와 나에게 퇴임 후의 생활을 지금부터 준비하라고 간곡히 말씀하셨다.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바로 낭패를 당한다고 하시면서 당신께서 하시는 일들을 말씀해 주시어 또 한 번 우리에게 귀감이 되셨다.
선생님께서는 퇴임하신 뒤에 대전에서 노인대학장을 하시고, 효행문화 보전 운동과 전통혼례식 보전, 봉사활동 등으로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하루도 쉴 새 없이 활동하신다고 하셨다. 나는 선생님을 모시는 그 자리에 대전에 살고 있는 제자를 불러 함께 했는데 제자에게 ‘우리 선생님 별명이 뚱딴지셨다’ 고 얘기하며 유쾌하게 웃고 떠들며 선생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겼다. 선생님은 정말 영양가 높은 뚱딴지시다.
친구와 그때 얘기를 다시 하면서 요즘 아이들은 선생님의 별명을 어떻게 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아이들도 선생님 별명을 지을 거고 자기들끼리는 별명으로 통할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르친 아이들 중에 벌써 교사가 여러 명이고 우리 큰 애도 교사다. 뚱딴지 선생님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며 감사드린다. >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