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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93)
혈뇌문의 후예들(2)
철가를 나와 객잔으로 돌아온 백산은 주하연이 주었던 보퉁이를 하
염없이 바라보았다.
무엇이 들어 있을지 겁이 나 지금껏 풀어보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얼굴이 생각날까 봐 풀어보지 못했다는 게 옳을
지도 몰랐다.
"다시 가져다 줄 것 아니면 풀어보시지요. 세상을 그렇게 힘들게 사
는 게 아닙니다. 편하게 사십시오."
한쪽에서 백산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유몽은 슬쩍 지나가는 투로 말
했다. 백산을 가만 보고 있자니 답답해서 하는 소리였다.
"알았어, 인간아."
불편함을 쏟아내듯 소리를 지른 백산은 이내 보자기를 풀었다.
"이건……?"
쪽빛 비단으로 지어진 두벌의 옷과 신발 그리고 모자까지, 며칠전
야시장에서 샀던 비단으로 만든 옷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허억!"
옷 사이에 들어있는 물건을 쳐다보던 백산은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
다. 조그마한 비단 주머니 네 개가 들어 있었다.
꿈에도 잊지 못하는 물건들, 네 개중 세 개는 그녀들의 유품이었다.
애명환(愛鳴環).
전부 네 개의 애명환을 샀다. 그리고 선물이랍시며 하나씩 그녀들에
게 주었다. 애명환은 그녀들에게 준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었다.
"니미럴!"
한참동안 애명환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맨 왼쪽에 있던 주머니를
거꾸로 세웠다. 그러자 붉은색 반지 하나가 비단 옷 위로 떨어졌다.
"이건 소운이 차고 있던 반지……. 그리고 이건 천영이 차던 반
지……. 이건 추렴이 차던 반지……."
사라랑! 사라랑!
세 개의 반지가 한데 모아지자 애명환은 나직한 울음을 토해냈다.
"오랜만이지, 내가 그동안 너무 무심했어. 당신들을 함께 두었어야
했는데, 당신들 모습이 떠올라 모아놓을 수가 없었어."
살아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말을 하듯 나직이 중얼거린 백산은 하
나 남은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얼마전 야시장에서 받았던 주머니, 하연이 것이었다.
주머니를 풀어내 안에 있는 물건을 꺼냈다.
예상했던 대로 그것 역시 애명환이었다.
안쪽에 하연이란 글이 새겨진 반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그것
을 나머지 세 개 가까이로 가져다 댔다.
사라랑!
"제기랄!"
일순 백산의 입에서 낮은 욕설이 흘러나왔다.
"처음부터 하나의 돌이었던 모양입니다."
유몽 또한 애명환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애명환을 만드는 재료인 홍
명석은 하나의 돌로 만든다. 그래야 같은 소리가 난다.
그런데 백산이 가지고 있던 오래된 애명환과 얼마전 주하연과 같이
산 애명환은 같은 소리를 내고 있다. 아마도 같은 원석을 쪼아 만들었
음에 분명했다.
"우습군, 50년 차이를 두고 산 반지가 같은 돌로 만들어졌다고? 홍
명석이란 돌은 전부 같은 소리를 내나 보군."
"으음! ……아닙니다, 주공. 제가 알기론 홍명석은 같은 돌 조각을
만났을 때만 소리를 냅니다."
50년이란 말에 흠칫 놀란 유몽은 얼른 정신을 추스르고 단호하게 말
했다. 20살이나 많다고 하였을 때 그냥 하는 말이라 여겼었는데, 지금
보니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어찌된 일인지 모르지만 그는 정말 80대
의 나이였던 것이다.
"인연이 없는 것만은 아니군요. 가서 술이나 좀 가져올까요?"
"그래야겠어. 물 안탄 화주로 가져와. 제길!"
절로 튀어나오는 욕설. 화주는 원래 아버지가 무던히 좋아했던 술이
다. 그 덕에 어린 시절부터 조금씩 마셨다. 주하연처럼 이것저것 마셔
보다 화주를 좋아하게 된 게 아니라, 술은 화주밖에 몰랐기에 즐겨 마
시던 술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볼일이 없을 테니까."
이내 표정을 푼 백산은 세 부인의 애명환을 한 주머니에 담아 품속
에 집어넣었다.
"버려야 하나 아니면……, 쩝!"
고민스러운 듯 주하연의 애명환을 보던 백산은 입맛을 다시며 그것
도 품속으로 집어넣고 말았다.
잠시 후.
유몽이 가져온 화주를 말없이 입안으로 쏟아 붇기 시작하였다.
"물 같아."
얼마나 마셨는지 알지 못했다. 끊임없이 물 같다는 말을 되뇌며 화
주를 들이켰고, 나중엔 단지가 들어오기 시작한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
다. 그리고 어느 순간 뱃속에 있던 내용물을 전부 쏟아낸 후에야 백산
은 잠이 들었다.
"으음!"
아침, 부신 햇살이 잠을 깨웠다. 백산은 극심한 갈증에 손을 더듬거려
주담자를 찾았다.
"괜찮습니까, 주공."
"30년 만에 그렇게 퍼 마셨는데 괜찮다면 그게 사람이냐? 근데 내가
얼마나 잔 거야?"
"3일 동안 퍼 잤습니다. 참 무던히도 자더군요."
유몽은 쓴웃음을 지었다. 미동도 하지 않고 처음 눕혀놓은 그대로
자는 모습에 처음엔 그가 죽은 줄 알았다.
"3일? 맞다 오늘 물건 찾으러 가는 날이구나. 가서 시원한 국물이나
준비시켜 둬. 그리고 오늘 떠나자."
"알겠습니다. 저 주공 옷은 버렸습니다. 워낙 냄새가 심해서…….
군주님이 만들어주신 옷을 입으십시오. 내 살아 생전에 주공처럼 술버
릇 심한 사람은 처음 보았습니다. 몸에서 술이 받지 않으면 안 드셔야
지요 그게 뭡니까?"
"무슨 소리야? 옛날엔 말술……."
그러다가 입을 닫았다. 그러고 보니 소령으로 빙의한 후에는 한번도
술을 마셔보지 않았다. 얼마 전 남경왕부에서 먹기는 했지만 그건 술
이라 부를 수도 없는 것들이다. 어쩌면 녀석은 술을 못 마시는 체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좋은 건 약에 쓸래도 없어 이 놈의 몸은."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백산은 투덜거렸다.
국물로 아침을 대신한 두 사람은 객잔을 나서 대장간으로 향했다.
"주공, 정말 죽이는 옷걸이 가졌습니다. 아니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거죠?"
연신 백산의 위아래를 살피듯 쳐다보며 유몽은 부러운 듯 주절거렸다.
쪽빛 비단옷과 포초혜 그리고 관모까지 갖춘 백산의 모습은 귀티가 줄
줄 흐르다 못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가끔가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백산 때문에 걸음을 멈추는 사태가 속
출했다.
"여기서 머릿속에 든 것만 좀 있으면 왔단데……. 흐읍!"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유몽은 화들짝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미 백산의 귓전으로 송곳처럼 박혀든 말을 어쩔 것인가.
'제기랄! 이놈의 주둥이.' 하며 내심 투덜거린 유몽은 질끈 눈을 감
았다. 반짝이는 포초혜가 무자비하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 나 대가리에 든 것 아무것도 없다. 아는 글도 천자문밖에 없
다 이 자식아. 이 좋은 날 그런 말을 꼭 해야겄냐?"
퍽! 퍽퍽! 퍽퍽퍽!
백산의 손발이 유몽의 전신으로 무자비하게 떨어졌다. 유몽은 몸을
웅크리고 싶었다. 그러나 사방에서 정신 없이 떨어지는 백산의 사지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발딱 선 채 백산의 뭇매를 고스란히 맞을 수밖에 없었다.
"저런 나쁜 놈 봤나. 아무리 종이 잘못했다고 해도 그렇지 젊은 놈
이 노인을 저렇게 패도 되는 거야? 생긴 것과 달리 완전 개차반이구
먼."
우뚝!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백산은 일순 동작을 멈췄다. 새파란 놈,
바로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까닭이다.
"니미럴! 이 자식보다 내가 20살이나 더 먹었단 말이야 자식들아!"
"에라! 이 도둑놈 자식아, 부모 잘 둔 덕에 상전이 되었는지 몰라도
그럼 안 돼, 이 나쁜 놈아!"
급기야 돌멩이마저 날아오기 시작했다.
"빨리 와 임마!"
재빨리 대장간 쪽으로 도망을 치며 고함을 내질렀다.
"어이그! 그만 두자, 그만 둬. 이제 타혈법이고 뭐고 없어!"
잠시후 대장간 앞에 도착한 백산은 유몽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며 손을 내려버렸다.
"제가 말씀을 안 드렸군요. 거의 회복되었습니다. 소림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완전한 몸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더욱 조심해야지. 몸에 도움도 안되고 매를 맞게 되면 더 억
울하잖아."
"설마 이 늙은 놈을 진짜 때리실 겁니까?"
"네가 늙었으면 난 벽에 똥칠하고 있어야 해, 임마. 네가 아무리 그
래봐야 내 눈엔 어린애로밖에 안 보여!"
서로 토닥거리며 두 사람은 대장간 안으로 들어섰다.
"재미있는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철야와 철웅 부자가 두 사람을 맞으며 빙긋 웃었다.
"재미는……. 이 녀석이 칼 주인이야. 옛날엔 뭐라 불렸다 그랬지?"
"살(殺)……."
"맞다 살황(殺皇)이라 불렀대. 하여간 무림인 자식들 보는 눈도 더
럽게 없어. 이런 녀석을 황(皇)이라 부르다니……. 서푼어치도 안 되
는 실력들로 까부는 걸 보면."
"주-공!"
"어이구! 기분은 나쁜가 보네. 그럼 한가지만 물어보자. 저기 보이
는 곰 녀석과 싸우면 어떻게 될 것 같냐? 내가 보기엔 백 초면 너는
깨진다. 그러고 철웅 저 녀석은 용황신가의 가신들에게 백 초면 깨지
고."
백산의 말에 유몽과 철웅은 동시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유몽은 철
웅을 보며 몸을 떨었고, 철웅은 용황신가라는 말에 몸을 떨었다.
스스로 무공을 최고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백 초라니.
"지금 용황신가라고 하였습니까. 정녕 신가가 재림했단 말입니까?"
"아냐, 호칭만 그렇게 불렀을 뿐이야. 그들은 그냥 무림세력에 불과
해. 그러니까 너는 여기서 불이나 피워."
"그들을 그냥 두실 겁니까?"
"나를 건들지 않으면……. 무기나 줘봐!"
"문주……!"
"웅아!"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재차 말을 꺼내려는 철웅을 철야가 말렸다.
그리곤 백산을 향해 세 가지를 내밀었다.
백산이 주었던 은영마삭을 개조하여 만든 무기와 검 한 자루 그리고
순백색으로 광채를 뿌리는 검집이었다.
"귀신같은 솜씨네?"
온통 눈꽃 문양으로 뒤덮인 검집을 보며 백산은 감탄사를 뱉어냈다.
검집이라 하기보다는 장신구라 해야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더구나 눈꽃 문양 사이로 상감 처리한 검은 줄무늬는, 전서체로 여
정검이라 써놓은 것이었다.
"이건 철류(鐵流)라는 검입니다. 그리고 이건 마안철겸(魔眼鐵鎌)이
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철류(鐵流)는 젊은 시절 호기심에 만들어 보았던 검이었을 뿐 새롭
게 작업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지난 삼 일간 은영마삭의 개조와
검집을 만드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았다.
"마안철겸이라……. 무시무시한 놈을 만들어버렸구먼."
은영마삭을 받아든 백산은 만족스런 얼굴로 말했다. 중지 크기의 조
그마한 낫은 장신구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 포함된 기운은 대단했다.
철웅이 익혔던 철패기(鐵覇氣)를 머금고 있었던 것이었다.
"철정(鐵情)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마 유용한 무기가 될 겁니다."
"시험이나 한번 해볼까?"
하고 백산은 마안철겸이라 이름지어진 무기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이어 마안철겸을 공중으로 번쩍 던져 올린 다음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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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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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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