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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아버지의 이름은 아부 사이드인데, 사실 그 별명인 아크 순구르(‘흰 매’)라고 불리는 일이 잦았고, 지금도 다 그렇게
부른다. 이름이나 다름없는 아크 순구르 역시 튀르크계의 노예 군인들에게는 흔한 것이였는데, 그래서 다른 ‘아크 순구르’들과 구분을
위해 ‘하지브’라는 관직을 덧붙인다.
하지브라는 관직은, 우마미야조나 압바시야조에서는 ‘시종장’으로 번역할 수 있는 직책이였다. 사만조에서는 튀르크인 굴람들의
지도자들이 맡는 직책이 되었다. 군대에 있어 노예 군인들의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이 직책의 권한도 엄청나게 커지고…. 여담이지만
가즈니 술탄국의 알프 티긴과 세뷔크 티긴도 처음에는 사만조의 하지브로서 가즈니를 통치했다. 셀주크조에서는 사만조에서 위세는
비슷하게 유지 되었지만 그 역할은 궁정 관료에 좀 더 가까워 졌다.
근데 난 아크 순구르가 왜, 언제, 어떻게 알 하지브가 되었고, 알 하지브로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평상시에는
궁정 관료의 역할을 하다가도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하니, 나중의 원정도 하지브로서 수행한 것 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태어난게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남아있지 않으나, 1085 년에 38 세였다고 하니까 1049 년에서 1050 년 사이에 태어났을 것이다.
그의 첫 번째 주인은 셀주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이였다. 그가 첫 번째 주인의 밑에서 뭘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나이로 보면 할
것도 없었고. 다만 후에 주인의 아들 말리크 샤 1세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알프 아르슬란은 그를 아들의 놀이 친구이자 장래에는
아들을 위해 목숨 받칠, 로마 시대의 노예와 같은 역할을 기대하며 그─아마 그와 같은 ‘노예’들은 여럿이였겠지만─를 키우지
않았을까.
1072 년, 사마르칸트에서 알프 아르슬란이 어처구니 없게 죽자 셀주크 제국에서는 내전이 일어났다. 알프 아르슬란은 1066
년에 이미 장자인 말리크 샤를 후계자로 점찍어 놓았으나, 알다시피 그건 튀르크인들의 법도가 아니였다. 알프 아르슬란의 형
카부르트가 그의 영지인 키르만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말리크 샤 정권을 거의 거꾸러 뜨린 듯 했다. 만약 노예 출신 장군들의
분투가 없었다면, 말리크 샤는 패배해 그의 삼촌 술레이만과 같은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승리했고, 카부르트와 그의 아들들은
활줄로 교살당했다.
이 활약에 감명받은 술탄은 노예 출신 장군들을 친위세력으로 키웠다. 그 뒤로 그들의 발언권은 커져 재상 니잠 알 물크의 세력과
거의 맞먹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케임브리지 이란사史에서 소개한, 이때 활약한 노예 군인들의 이름 중에 아크 순구르가 있지는
않았지만, 이때 함께 출세하지 않았을까.
노예 출신 장군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과는 별개로, 아크 순구르는 나름대로 셀주크 왕조 자체에 접근해갔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술탄 말리크 샤의 유모와 결혼을 했다. 그것도 그냥 유모가 아니라, 술탄에게 젖을 물린 여자였다. 튀르크 사회와
무슬림 사회 모두 왕자에게 젖을 물린 여자를 대단히 존중했다. 이 덕분에 그는 셀주크 왕가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이런 결혼 덕분이였을까, 1084 년에 말리크 샤는 디야르바크르의 마르완조에 대한 원정을 이끌 장군 둘 중 한 명으로 아크
순구르를 지목했다. 참고로 나머지 한 명은 카부르트와의 내전에서 활약한 사람이다. 이 원정은 1085 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아주
격렬했다고 한다. 결국 셀주크 군대는 마르완조를 무너뜨렸다.
1084 년에서 1085 년 사이에 아크 순구르는 아들을 얻었다. 이 아들이 바로 장기이다. 스티븐 런치만 경이 소개한 전설에
따르면 그는 오스트리아 어느 후작의 미망인인 이다라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이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전설은 이다가 제 1 차 십자군
원정에 남편과 동행했다가 포로가 돼 하렘에 끌려왔다고 전한다. …. 제 1 차 십자군이 소아시아에 발을 딛은 건 1096 년의 일이다.
그러는 동안 시리아 역시 전화에 휘말려 있었다. 이 전쟁은 튀르크·아랍·아르메니아 사람들이 뒤섞여 벌인 것이었는데, 결국 술탄이
시리아로 친정을 오고서야 끝이 났다(1087 년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1086 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술탄은 점령한 도시들을
노예 출신 장군들에게 분배했는데, 아크 순구르는 할랍(알레포)을 받았다.
할랍의 에미르가 된 그는 독자적인 행보를 보여주는데, 이는 술탄의 동의하에 한 것이라고 한다. 또 역사가들은 그의 통치에 대해
사료들은 공명정대 했다고 적었다. 그에 대한 일화가 몇 가지 남아 있는데 대체로 도시의 성문 앞에서 악인들의 악행을 비난하고,
그들에게 잔혹한 처벌을 주었다는 것들이다.
1088 년에서 1089 년 사이에 그의 아내 중 한 명, 말리크 샤의 유모였던 그 아내가 죽었다. 사가들에 의하면, 이때 아크
순구르는 그녀의 시신을 도시 밖으로 직접 옮겨 화장했다고 한다. 헌데 역사가들은 이런 기록과 함께 묘한 소문을 기록으로 남겼다.
아크 순구르가 ‘실수로’ 그녀를 죽였다는 것이다. 이 소문을 우리에게 전해준 이븐 알 아딤(이
소문을 기록으로 남긴 것은 1150 년대에 할랍의 역사가인 알 아지미이고, 알 아딤은 이를 다시 옮겼다.)은 아무런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1092 년, 술탄 말리크 샤는 아크 순구르에게 카짐 알 다울라, 즉 제국의 종복이라는 별칭을 내렸다. 또, 아크 순구르와
보잔(알 루하[에데사]의 노예 출신 에미르.)에게 다마스쿠스의 투투쉬의 밑에 들어가 이집트의 파티마조를 정복할 것을 명령했다.
처음에만 해도 세 장군의 군대는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트리폴리에서 세 장군의 군대는 파국을 맞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트리폴리의 카디(법관) 이븐 암마르가 아크 순구르와 그의 재상 제루스 카마르를 매수해서 단독으로 철군하게 했고, 보잔 역시 그
뒤를 따라 퇴각했다. 전력의 공백 때문에 투투쉬는 원정을 포기했다. 아크 순구르와 보잔이 원래 투투쉬를 싫어해서 엿 먹일 기회를
찾다 이 짓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원정이 실패하고 얼마 뒤에 술탄 말리크 샤가 죽었다. 이 때도 셀주크 제국은 내전 상태에 들어갔다. 당연하지만, 투투쉬 역시
술탄이 되겠다고 군대를 일으켰다. 그는 주변의 에미르들을 회유하여 제국의 서부를 장악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또 다른 술탄 후보
베르크 야룩이 군대를 이끌고 투투쉬를 쳤다.
보잔과 아크 순구르는 또 한번 투투쉬를 버렸다. (안티오케이아의 에미르 야으 시얀은 투투쉬의 곁에 남았다.) 두 에미르는 군대를
끌고 그대로 베르크 야룩에게 달려갔다. 어린 시절의 친구이자 주인 말리크 샤 1세에 대한 충절 때문일수도 있고, 그냥 투투쉬가
싫어서 일수도 있고 아니면 강력한 술탄이 출연하는게 싫어서 일지도 모른다. 어쨋건 투투쉬는 패배했고, 다마스쿠스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베르크 야룩은 아크 순구르와 보잔에 귀르보아까지 붙여서 시리아로 보내 투투쉬를 견제하게 했다.
하지만 투투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군대를 모았다. 이번에도 그의 곁에는 야으 시얀이 함께했다. 그는 다시금 군대를
일으켰다. 아크 순구르와 보잔, 귀르보아도 서둘러 군대를 모아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투투쉬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기겠노라는 다짐을
되씹으며 진군했다. 두 군대는 이슬람력 487 년 주마다에 텔 알 술탄에서 마주쳤다. 두 군대가 기싸움을 벌이고 있을때 아크
순구르의 군대가 투투쉬에게 가버렸다. 그들은 아크 순구르를 포박하여 투투쉬에게 항복한 것이다! 투투쉬는 아크 순구르를 참수했다.
남은 두 에미르는 패퇴했다.
아크 순구르의 시신은 카르네비아 산에 매장되었다. 투투쉬는 그의 자식 대부분을 죽였다. 살아남은 자식은 장기가 유일했다.
그 뒤에도 투투쉬의 승리는 계속되었다. 그는 거의 단독 술탄에 이르렀다. 그는 수도 이스파한을 공격할 수도 있었으나, 겨울에 진군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군대를 라이로 물려 겨울을 났다. 이게 그의 치명적인 전환점이었다.
베르크 야룩 주변에 투투쉬를 죽어라 싫어하던 에미르들(놀랍게도 셀주크 제국 서부의 에미르 대다수가 그랬다!)이 모여들었다.
베르크 야룩의 군대는 라이 근교에서 투투쉬의 군대와 격돌했다. 투투쉬는 전투 도중에 죽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목을 친
사람은 아크 순구르의 노예 군인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아크 순구르의 자식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장기는 베르크 야룩의 호의와 아버지의 동료들의 도움으로 말그대로 잘 먹고 잘 살았다. 더
나중에 시리아로 금의환향한 장기는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 할랍의 자자지야 학원에 안치했다. 그 뒤 그리스교도의 악몽이자 순니파의
아이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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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 글들
- C. Edmund Bosworth, 「ḤĀJEB」, 『ENCYCLOPÆDIA IRANICA』, 2002.
- C. Edmond Bosworth, 「The Political and Dynastic History of the Iranian World (A.D. 1000-1217)」, 『Camb. Hist. Iran V』, 1968.
- Carole Hillenbrand, 「‘Abominable acts’: the career of Zengi」, 『The Second Crusade: scope and consequences』, 2001.
- M. Th Houtsma, 「AḲ SONḲOR」, 『E. J. Brill's first encyclopaedia of Islam 1913-1936』, 1993.
- M. Th Houtsma, 「KURBUḲA」, 『E. J. Brill's first encyclopaedia of Islam 1913-1936』, 1993.
- M. Th Houtsma, 「TUTUSH」, 『E. J. Brill's first encyclopaedia of Islam 1913-1936』, 1993.
- Ibn Khallikān, 「AK SUNKUR THE HAJIB」, 『Ibn Khallikan's Biographical dictionary, 1』, M. de Slane 옮김, 1843.
- 이희수, 『터키사』, 2007.
- 영어판 위키 백과의 『Philaretos Bracham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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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집기도 힘이 듭니다.
제가 참고한 글들의 기묘한 공통점은, 아크 순구르의 인생을 단 한 가지로 요약한 겁니다.
장기의 아버지.
이 이상의 설명은 필요없는거다.
첫댓글 장기라는 인물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를 못해서 =.=;; 살라딘 만큼이나 유명한 인물이었나요?
살라딘의 원래 주군이고, 이사람때부터 십자군에게 반격을 가하죠.
그건 누르앗딘이고, 이마드 알 딘 장기는 사이프앗딘과 누르앗딘의 아버지임.
십자군이 최초로 점령한 도시 중 하나인 에데사를 (무슬림으로서) 탈환한 사람입니다. 그 전에는 셀주크 술탄을 위해 칼리파와 싸운지라 순니파 내부에서 이미지가 "썅눔"이였는데, 에데사 탈환 한 방에 순니파의 아이돌이 되었죠.
1차 십자군 당시 파죽지세로 밀려 자존심을 제대로 구겼던 이슬람권에게 반격의 불씨를 마련해준 사람이죠. 무척 정교하고 규율있는 군대를 만들어 십자군 세력을 밀어내고 에데사를 탈환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얼마 안가서 죽었고, 그의 아들 누르 앗딘이 본격적으로 그가 닦아둔 길 위에서 힘을 펼쳐보이지요. 누르 앗딘의 공세는 2차 십자군을 유도했지만, 2차 십자군 역시 누르 앗딘에 의해서 격파되었습니다. 그 후 누르 앗딘의 수하였던 인물이 이집트의 통치자 자리에 오르고, 누르 앗딘 사망 후 시리아 지역 또한 다스리게 되는데, 그가 살라흐 앗딘, 흔히 살라딘이라고 부르는 인물입니다
아크 순구르의 최후가 비참했네요..
..휘하 군대들에게 배신당한거네요..
휘하의 군인이 복수도 해줬으니 쌤쌤 아니겠습니까.
배신만큼 사람한테 상처주는게 없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