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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고려사의 재발견 / `훈요십조`가 말하는 종교 이념. 귀화인 수용과 천자국체제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30 14.11.29 10:0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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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국교설은 史實무근 수신은 불교, 통치는 유교

 

고려사의 재발견 '훈요십조'가 말하는 종교 이념

 

불교국교설은 史實무근 수신은 불교, 통치는 유교

 

 

1 중생을 안락의 세계로 이끄는 관음보살의 모습을 그린 ‘수월관음도’. 고려시대 불화를 대표하는 작품의 하나이지만 일본 규슈에 위치한 신사인 가가미신사(鏡神社)에 소장돼 있다.[중앙포토] 2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아내기 위해 제작한 팔만대장경.[중앙포토] 3 연등회와 팔관회 시행을 강조한 ?훈요십조? 부분.

 

 

불교가 고려의 ‘국교(國敎)’라는 주장(이하 불교국교설)은 정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언제, 누가,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했느냐는 의문을 풀어줄 분명한 글은 고려사 연구자인 필자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국교설은 마치 신비주의자의 주술처럼 구전돼 사학자들조차 그런 주술에 휘둘리고 있다. 역사학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이다.

 

국어사전에, 국교는 ‘국가에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여 보호되고 공인된 종교’라고 나와 있다. 국민이 전부 믿어야 하고, 그 종교의 일(敎務)을 나라의 일(國務)로 취급하는 종교가 국교다. 특정 종교의 이념과 정신이 법과 제도에 반영되어 국가의 통치 이념과 원리가 돼야 국교란 지위가 부여된다는 말이다. 고려 불교국교설을 당연시한 글들 가운데 많이 인용한 근거를 꼽자면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943년)다.

 

“6조, 내가 지극히 원하는 것은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이다. 연등회는 부처를 섬기는 것이고, 팔관회는 하늘의 신(天靈)·오악(五嶽)·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후세에 간신들이 (두 행사를) 더하거나 줄이자고 건의하면, 마땅히 금지하게 하라. 나 또한 처음부터 맹세하기를 (두 행사의) 모임 날은 국기(國忌: 국왕 등의 제사)를 범하지 않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길 것이다. 마땅히 경건하게 행사를 치르도록 하라.”

 

태조 왕건은 연등회와 팔관회를 중시하고, 반드시 시행할 것을 주문했다. 국왕과 백관이 사원에서 행사를 치른 연등회는 고려의 대표적인 불교행사였다. 연등회 말고도 고려가 불교를 중시한 예는 많다. 돌아가신 왕들의 영정은 주로 사원에 모셔져 사원에서 선왕(先王)의 제사를 치렀다.

고려는 불교와 승려를 위한 여러 제도를 만들었다. 과거시험에 승려를 위한 승과(僧科)를 두었다. 승려들은 승과를 통과해야 사원의 주지 등에 임명되었다. 또한 왕사(王師*왕의 스승)나 국사(國師*나라의 스승) 제도를 만들고 덕이 많은 고승(高僧)을 왕사·국사에 임명했다. 국왕은 새로 임명된 왕사와 국사에게 9번 절하며 제자의 예를 취했다. 이같이 고려시대엔 불교가 다른 어느 종교보다 중시됐고, 불교가 고려 사상계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으로 불교가 고려의 국교라고 하기엔 미흡하다.

 

풍수지리설도 불교만큼 고려 건국에 기여

 

6조에서 연등회와 함께 팔관회도 강조됐다. 원래 팔관회는 재가신도들이 8가지 금욕적 계율을 지키는 불교행사다. 하지만 고려의 팔관회는 불교 외에 다른 사상도 녹아든 행사였다. 팔관회엔 선랑(仙郞*화랑)이 용·봉황·말·코끼리를 타고 행사에 등장하고, 그 뒤를 사선악부(四仙樂部: 행사의 樂隊)가 뒤따른다. 네 마리 짐승은 불가(佛家)에서 한 해 동안 인간이 행한 일들의 선악을 평가하는 불가(佛家)의 상징이다. 사선악부는 과거 신라 화랑도의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의 사선(四仙)을 형상화한 것이다. 신라 이래 전통사상인 낭가(郎家) 사상을 계승한 증거다.

팔관회 첫날엔 태조의 진전(眞殿)과 역대 국왕에 참배하는 의식을 치른다. 천자를 자처한 역대 국왕에 대한 숭배는 제천(祭天)의례에 해당된다. 또한 고려의 관리와 송나라, 여진, 거란, 일본의 상인들은 고려 국왕에게 천자의 의례를 행한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팔관회를 고구려 제천행사인 동맹(東盟)에 비유한 것도 이 때문이다. 태조가 강조한 팔관회는 민간신앙을 포함한 전통사상, 조상 숭배 및 제천의식을 포함했다. 불교의례만 중시된 게 아니었다. 불교국교설의 또 다른 근거를 살펴보자.

 

“1조, 우리나라의 대업(大業*왕조 창건)은 불교의 호위하는 힘에 도움을 받았다(我國家大業 必資諸佛護衛之力). 그 까닭에 선종과 교종 사원을 창건하고 주지를 파견하여 그 업을 닦게 하였다. 뒷날 간신이 집권하여 승려들의 청탁에 따라, 사원을 서로 바꾸고 빼앗는 것을 금지하라.”

 

부처의 힘으로 고려왕조가 건국됐다는 ?훈요십조? 1조는 불교국교설의 유력한 근거로 많이 인용되어 왔다. 그러나 왕조 건국에 도움을 준 사상은 불교만이 아니었다.

 

“5조, 짐이 삼한 산천의 숨은 도움에 힘입어 대업을 이루었다(朕賴三韓山川陰佑 以成大業).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며, 대업을 만대에 전할 땅이다. (국왕은) 사중월(四仲月: 각 계절의 가운데 달)에 그곳에 가서 100일이 지나도록 머물러, 왕조의 안녕을 이루게 하라.”

 

5조엔 산천의 숨은 도움, 즉 풍수지리 사상도 고려 건국에 도움이 됐다고 했다. 1조의 ‘우리나라의 대업은 부처의 호위하는 힘에 도움을 받았다’는 표현과 같다. 태조 왕건은 왕조 건국에 두 사상이 동일한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 1조에 근거한 불교국교설은 그런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하다.

 

“국왕은 유교이념에 입각한 통치를”

 

오히려 1조가 작성된 취지는 승려들이 뒷날 권신(權臣)과 결탁하여 정치에 관여하거나 사원의 소유권을 빼앗는 등 불교의 폐단을 경계하는 데 있다. 또한 사원을 함부로 지어 지덕을 훼손함으로써 신라가 멸망했다는 전제 아래 승려 도선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지정한 장소 외엔 사원을 함부로 창건하지 못하게 규정한 2조 역시 같은 취지다. 불교를 언급한 ?훈요십조?의 1조와 2조는 불교국교설의 근거가 아니라, 불교의 폐단을 경계한 것이다.

 

후삼국 전쟁이 한창일 때 태조 왕건은 신라가 황룡사 9층탑을 세워 3국을 통일한 예에 따라 개경에 7층탑, 서경에 9층탑을 각각 세워 후삼국을 통합하려 했다. 그러자 참모인 최응(崔凝)은 ‘왕이 된 자는 전쟁 때 반드시 문덕(文德*유교 정치이념)을 닦아야 하며, 불교나 음양(*풍수지리)사상으로 천하를 얻을 수 없습니다’라고 충고한다. 태조 왕건은 ‘백성들이 전쟁에 시달리고 두려워하니 부처와 귀신과 산수의 신령한 도움을 청하려 한다. 그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러는 것이며, 난리가 진정되어 편안하게 되면 유교 정치이념으로 풍속을 고치고 교화할 것이다’라고 했다(?보한집(補閑集)? 권上). 왕건은 전쟁에 시달린 민심을 달래주기 위해 불교와 음양사상을 강조한 것이다. 반면 나라를 통치하는 데는 유교 정치이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 생각은 ?훈요십조?에도 나타난다.

 

“10조, 가정과 국가를 가진 자는 근심이 없을 때 조심해야 한다. 널리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읽어, 옛일을 거울 삼아 오늘을 경계해야 한다. 주공(周公) 같은 대성(大聖)도 '서경'의 ‘무일(無逸)’ 편을 성왕(成王)에게 바쳐 경계했다. 마땅히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붙이고, 들어오고 나갈 때에 보고 살피도록 하라.”

 

국왕은 항상 역사를 공부하고, 유교이념에 입각한 통치를 하여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또 7조엔 “신하와 백성의 마음, 즉 민심을 얻는 방법은 신하의 비판과 충고를 듣고 백성을 때에 맞춰 부리고 부세와 요역을 가볍게 하고 농사짓는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결국 위의 두 조항은 모두 유교이념에 입각한 정치, 즉 군주의 어진 정치(仁政)를 강조한 것이다. ?훈요십조?에서 불교국교설은 찾을 수 없다.

 

지방 세력의 고유한 사상·문화 인정

 

성종 때(982년) 최승로는 성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불교는 수신(修身)의 근본이며,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입니다. 수신(*불교)은 내생(來生: 다음의 삶)을 위한 밑천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유교)은 지금 힘써야 할 일입니다. 지금은 가까운 것이며, 내생은 먼 것입니다.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찾는 일은 잘못이 아니겠습니까?”(?고려사? 권93 崔承老 열전)

 

최승로는 이렇게 “수신의 역할은 불교, 통치의 역할은 유교가 각각 맡아야 한다”면서 불교와 유교의 공존을 주장했다. 그는 태조 왕건에게 발탁돼 관료생활을 시작한 태조의 측근문신이었다. 태조 사후(943년) 40년이 지나 그가 제기한 불교와 유교의 역할론은 태조의 뜻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태조의 생각을 담은 훈요십조에도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와 풍수지리, 도교와 전통사상 등 다양한 사상과 종교의 공존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과 종교의 다원성을 중시한 태조의 생각은 성종 때 최고의 유학자인 최승로에게까지 계승되고 있었다.

 

고려사회는 하나의 이념과 사상이 강조된 사회가 아니라, 다양성이 존중된 다원사회였다. 고려왕조는 옛 삼국 출신의 수많은 독자적인 지방 세력을 통합하여 건국되었다. 건국 후에도 그들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그들의 협조를 얻어 왕조를 통치하려 했다. 옛 삼국의 근거지에서 독자 영역을 구축한 지방 세력의 고유한 사상과 문화를 인정하고 그것과 공존하면서, 민심의 수습과 사회의 통합을 이루어 나가려 했다. 태조의 그런 통치철학이 '훈요십조'에 담겨 있다.

 

 

 

 

 

인구 9%, 군인 10%가 귀화인 … 무늬만 단일민족

 

고려사의 재발견 귀화인 수용과 천자국체제

 

 

단군의 표준영정. 몽골 침략기와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등장한 단일민족론은 우리 민족이 단군의 후손이란 주장에 바탕을 뒀다. [중앙포토]

 

 

고려가 건국된 지 100년이 될 무렵, 제8대 현종(顯宗·992~1031년, 1009~1031년 재위)이 즉위한다. 현종은 신라계 출신 왕족 안종(安宗)과 그 조카 헌정왕후(경종의 비)의 불륜으로 태어난 국왕이다. 안종이 불륜을 범한 죄로 경남 사천에 유배되자, 현종은 유배지에서 지내다 안종이 숨지자 개경에 온다. 헌정왕후와 자매 사이인 헌애왕후는 경종의 비로서, 유명한 여걸 천추태후다. 아들 목종이 즉위하자, 모후가 된 천추태후는 외척인 김치양과의 불륜으로 낳은 아들을 병약한 목종의 후사로 왕위에 앉히기 위해 왕위 계승 서열상 적자인 현종을 강제로 출가시켜 지금의 북한산 신혈사로 내친다. 그것도 모자라 여러 번 현종을 살해하려 하나 실패한다. 어렵사리 왕위에 오른 현종은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이 점령되자, 공주·전주·나주로 피난을 한다. 피난 도중 국왕의 체통에 손상을 입을 정도로 온갖 수모를 당한다.

 

고려의 학문을 융성케 한 유학자 최충(崔沖)은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긴 현종을 ‘간난비운(艱難非運·죽도록 고생하고 억세게 운이 없음)’의 군주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거란의 침입을 물리쳐 붕괴 직전의 고려 왕조를 일으켜 세운 ‘중흥(中興)의 군주’라고 평가했다. 오늘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현종대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에 눈을 돌려보기로 한다.

 

“거란의 수군(水軍)지휘사로 호기위(虎騎尉)의 벼슬을 가진 대도(大道) 이경(李卿) 등 6명이 내투(來投·귀화)했다. 이때부터 거란과 발해인이 귀화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고려사』 권5 현종 21년(1030) 5월)

 

왜 현종 때부터 거란과 발해인들이 대거 고려로 귀화했을까? 현종 20년인 1029년 9월, 거란 장군 대연림(大延琳)이 발해부흥운동을 일으켜 흥요국(興遼國)을 세운 게 도화선이 됐다. 발해 시조 대조영(大祚榮)의 7대손인 대연림은 고려 침략을 주도한 거란 성종(聖宗)이 병약해(1031년 사망) 거란 조정에 내분이 일어난 틈을 타 흥요국을 세웠다. 거란의 불안한 정세로 그동안 거란의 지배를 받아온 발해와 거란 계통의 주민들이 고려에 귀화하기 시작한다. 발해·거란인들의 고려 이주는 발해가 멸망(926년)한 10세기 초에 시작됐지만 현종 때부터 본격화된 것이다. 이때부터 금나라가 건국(1115년)되는 12세기 초까지 수많은 이민족 주민들이 고려에 귀화한다. 그런 점에서 1030년(현종 21) 이민족의 대거 귀순은 고려의 주민 구성은 물론 고려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상징적인 사건이다. 다음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민족=단군 후손’ 주장이 단일민족론 근거

 

고려 건국 후 12세기 초까지 약 200년 동안 고려에 귀화한 주민과 종족은 크게 한인(漢人)과 여진·거란·발해 계통 등 네 갈래로 나뉜다. 가장 많이 귀화한 주민은 발해계로서, 38회에 걸쳐 12만2686명이 귀화했다. 전체 귀화인 가운데 73%를 차지한다. 발해국이 멸망한 결과다. 그 다음으로 많은 귀화인은 여진계 주민으로 4만4226명에 달한다. 거란계 주민은 1432명이 귀화했다. 이들은 거란의 피정복민으로 억압을 받아오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나 거란의 내분을 틈타 고려에 귀화했던 것이다. 한인(漢人) 귀화인은 송나라는 물론, 송나라 건국 이전의 오월·후주 등 오대 국가의 주민들이 포함돼 있다. 모두 42회에 걸쳐 155명이 귀화했다. 고려에 귀화한 이민족 주민의 총수는 약 17만 명으로, 12세기 고려 인구를 200만 명으로 추산한 『송사(宋史)』의 기록에 근거할 때 결코 적지 않은 비율(8.5%)을 차지한다(박옥걸, 『고려시대의 귀화인 연구』). 우리 역사에서 이처럼 많은 이민족이 유입된 경우는 기록상 고려 외에 달리 찾을 수 없다. 또 다른 예를 들기로 한다.

 

 

서울 사직공원에 있는 단군성전. [중앙포토]

 

 

고려 태조 19년(936) 9월 지금 경북 선산의 일리천(一利川)에서 후백제 신검(神劍)과의 마지막 후삼국 통일전쟁에 동원된 고려군은 모두 8만7500명이다. 이 가운데 ‘유금필(庾黔弼) 등이 거느린 흑수(黑水)·달고(達姑)·철륵(鐵勒) 등 제번(諸蕃)의 경기병(勁騎兵) 9500명’이 포함돼 있다(『고려사』세가 태조 19년 9월조). ‘제번(諸蕃)’의 군사는 고려에 귀화하여 고려군에 편입된 여진 계통의 이민족 병사들이다. 전체 군사의 10%가 넘는다.

 

귀화인의 비중 문제를 떠나 고려 왕조가 다양한 종족·국가 주민들의 귀화를 받아들인 사실은, 우리 역사의 특징 중 하나로 전가의 보도처럼 거론돼온 단일민족론을 재검토할 근거가 된다. 이민족의 고려 귀화에 최초로 주목한 학자는 손진태(孫晉泰·1900년생, 납북)다. 그러나 그는 고려 시대 이민족 귀화 현상에 대해 “한민족의 혈액 중에 만주족·몽고족·한족(漢族) 등의 혈액이 흘렀으나, 오랜 역사를 지남에 따라 우리 민족의 피는 완전히 한국적 피로 변화했다”고 했다(『조선민족사개론』 1946년, 44-45쪽). ‘단일민족론’을 주장한 최초의 학자인 손진태는 이민족의 고려 귀화를 예외적인 현상으로 규정하고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일민족론은 무엇인가? 손진태의 주장이다.

 

“조선사는 조선민족사로서, 유사 이래 동일 혈족(血族)·동일 지역·동일 문화를 지닌 공동 운명 속에서 공동의 민족투쟁을 무수히 감행하면서 공동의 역사생활을 했다. 이민족(異民族)의 혼혈(混血)은 극소수이다. 따라서 조선에서 국민은 민족이며, 민족사가 곧 국사이다. 이 엄연한 역사 사실을 무시하고 조선 역사를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손진태, 『조선민족사개론』, 3쪽)

 

단일민족은 동일한 혈족(피붙이)·지역·문화를 가진 역사공동체다. 그는 혈족이 단일민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봤다. 위 글에서 이민족의 혼혈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는 단서를 단 것도 그 때문이다. 이병도 박사도 단일민족론을 제기한다(『국사와 지도이념』 1953년).

 

이민족 받아들이며 독자적 천하관 형성

 

단일민족론의 원류는 이승휴(李承休·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1287년)다. 이 책에 따르면 “부여·비류국·신라·고구려·옥저·예맥의 임금은 누구의 후손인가? 대대로 단군을 계승한 후예다”라고 했다. 몽골의 침략을 체험한 그는 단군의 후손이라는 역사의식으로 우리 역사를 서술했다. 일제 식민지배를 목전에 둔 한말 지식인들도 우리 역사에서 단군을 시조로 한 혈연공동체를 강조한다. 단일민족론은 여기에서 기원하며, 손진태는 이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했다.

 

단일민족의 중요한 기준을 피의 순수성으로 본 것은 지금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 주관적이다. 또 다른 기준인 지역과 문화의 동질성도 고정불변한 것은 아니다. 고유문화도 외래문화를 수용, 융합해 새로운 문화로 창조된다. 변화하지 않는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종족이 고려 왕조에 귀화한 사실은 오히려 다양한 문화와 풍습이 고려에 유입돼 새로운 문화, 사회체제로 변화하는 계기가 된다. 단일민족론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태조 왕건의 아버지 세조는 896년 궁예에게 귀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왕께서 만약 조선·숙신(肅愼)·변한의 땅에서 왕이 되시고자 하면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저의 장남을 성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고려사』 태조 총서)

 

신라 쇠망기 새로운 시대를 갈망한 세조와 궁예 등의 영웅들이 조선(고조선과 한사군)·숙신(말갈과 발해)·변한(한반도 남부) 지역을 아우르는 통일왕조의 건설을 구상한 증거다. 이들 지역엔 다양한 종족이 살고 있어 특정 민족보다는 여러 종족을 아우르는 ‘통일국가’를 건설하려 한 것이다. 그런 꿈이 고려 왕조의 건국 이념에 반영되어 있다. 한반도 최초의 실질적인 통일국가를 지향한 고려의 의지가 대륙 정세의 변동으로 나타난 수많은 이민족의 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고려 왕조는 이민족 귀화인들을 다양한 층위로 편제시켜, 고려의 신민(臣民)으로 삼고 그들의 거주지를 고려의 번병(蕃屛), 즉 울타리로 삼았다. 이러한 정책을 시행한 건 고려와 주변 종족을 중심과 주변, 즉 천자와 제후관계로 삼으려는, 종번의식(宗蕃意識)에 기초한 고려적인 천하관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는 고려 왕조가 천자국(황제국) 체제를 갖추는 동력이 됐다. 이런 국가체제에서 ‘단일민족론’이 수용될 수 있었을까?

 

단일민족론은 고려 왕조의 국가 성격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거나, 한말에 근대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강조한 선험적이고 관념적인 역사인식의 산물이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단일민족론의 기준인 동일한 핏줄·문화·지역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변화·발전하는 것이다. 그런 사실이 고려 역사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박종기 국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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