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
2001년01월16일 제343호 |
| [표지이야기] 10명의 각계인사가 미리 쓴 나의
유언장
살아 있는 이들이 미리 쓰는 유언장. 그것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자신한테 내리는 평가가 어떤 형태로든 스며들 수밖에 없다. 그 평가가
냉정하든, 그렇지 못하든간에….
<한겨레21>은 이런 점에 착안해 현재 살아 있는 각계 인사들에게 자신의 유언장을 직접 쓰도록 청탁했다. 대략 15명의 인사를
선정해 유언장을 써보도록 부탁했는데 10명의 인사가 보내줬다.
<한겨레21>은 청탁할 때 특별한 형식이나 주문을 하지 않았다. 글을 보내주신 인사들은 대체로 참회록이나 회고록에 가까운
‘자서전’ 성격의 글을 보내왔다. 딸이나 자녀에게 부치는 편지글 형식도 있었지만 이들도 결국은 크게 자서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몇몇
인사들은 재밌는 상상력을 가미하기도 했다.
유언장 청탁과정에서 특이한 대목은 의외로 유언장에 관한 거부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상당수 인사들이 선뜻 청탁에 응한 것도 이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한 유력 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 유언을 공론화할 경우 살아가며 이를 다 지킬 수 있을까 두렵다”며 난색을 표시했다. 또다른
유력 정치인도 “정치인이 아무리 순수한 의도로 유언장을 쓰더라도 그 자체가 정치선전으로 왜곡될 우려가 있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한 전직 장관 출신은 처음에는 흔쾌히 쓰겠다고 약속했으나 막판에 못 쓰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그는 “유언장을 쓰는 과정에서 내 마음이
정리돼 있지 않은 걸 뒤늦게 깨달았다”면서 “앞으로 수양을 더 해야겠다”고 말했다. 물론 유언장 기획 자체에 거부감을 보인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정초부터 느닷없이 웬 유언장이냐. 나보고 일찍 죽으란 말이냐.” 유언장을 쓴 이들 중에도 “이거 쉬운 게 아니더라”며 곤혹스러움을
나타낸 이들이 적잖았다. 여하튼 유언장이란, 어떻게 받아들이든간에 쓰는 이에게 강한 삶의 무게를 던져주는 것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사랑하고 기뻐하라!
유년에서 노년까지 세대별로 전하고 싶은 말
김창완/ 가수
열살이 안 된 어린이들아!
이제 나무 이름과 새 이름, 풀·꽃 이름 그리고 엄마, 아빠의 이름을 외울 나이의 어린이들은 이 세상을 이렇게 봐야 한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너희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병아리’, ‘개나리’, ‘빵빵’, ‘엄마’, ‘아야’, ‘피자’가 얼마나
나이가 많은지 알아야 한다. 만약에 네가 네살이라면 내 자전거보다도 어리고 그때 산 자전거 신발보다도 늦게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네가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너도 이름을 얻기 전부터 이 세상에 있었던 것처럼 이름을 얻기 전의 나무와 이름을 얻기 전의 하늘, 이름을
얻기 전의 어둠과 밝음을 보아야 한다. 달팽이가 부르는 노래는 제목이 없다. 되도록 그런 노래를 불러라.
이제 스무살이 안 된 청소년들.
아! 그 주체할 수 없는 성을 어떻게 할까? 그래. 너희들은 죄인이다. 너희들은 지금 욕망에 대하여 배우고 있다. 그 청춘의 불로 태우지
못할 것이 없다. 용광로 같은 심장은 무쇠라도 녹인다.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너는 더 격리될 것이다. 너에게 세상은 미세한 균열도 허용되지 않는
격납고다. 하나 그 속에서 너의 불꽃이 꺼져서는 안 된다. 오! 귀한 세상의 빛, 청춘의 불꽃이여! 그 광휘에 눈이 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들은 나르시스다. 고요한 물가나 거울을 멀리하라. 당신을 유혹하는 것은 당신 자신들이다. 스물몇, 당신들은 이제 사물에 이름을 붙일 만큼
지혜롭다. 그리고 당신들은 남들로부터 ‘님’이나 ‘씨’라는 호칭으로 불릴 것이다. 아직 서른이 안 된 당신들은 이율배반의 극치다. 모든 규율을
어기며 모든 규율 안에 산다. 당신들은 개울의 소용돌이다. 돌 틈에서 기회를 엿보다 특이점이 생기면 과감히 몸을 던진다. 유혹이 당신들의 외부에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당신들은 언제나 탈옥을 꿈꾸는 수인이다. 아! 아이러니여. 당신들의 위장술은 어쩌면 가장 교묘한 신의 화장술인지도
모른다.
서른 즈음 당신들은 세상에 아주 익숙하다.
이제 후각으로 날씨를 안다. 눈오는 냄새, 비오는 냄새, 기다림과 이별과 사랑의 냄새를 안다. 모든 인연의 중심에서 균사같이 인연이 또
피어난다. 아이가 입학할 때 당신은 느낄 것이다. 당신이 부모와 너무 닮았다는 것과 아이가 당신을 따라 살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인 또는
답답함. 세상에 익숙해지지만 못 가본 세상은 오히려 더 넓어진다. 킬리만자로는 더 멀어지고 파푸아뉴기니는 이제 자신의 지도에서 지워버린다.
수첩에는 필요없는 전화번호가 쌓여간다. 단 세개의 전화번호만 남기고 모두 지워라.
마흔 대 여섯에게 말한다.
당신들은 가장 교활하다. 대부분의 우화에서의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다. 당신들은 처음으로 허물을 벗고
싶다고 생각한다. 몇몇은 허물을 벗고 우화하기도 한다. 그들의 우화는 나비의 그것처럼 화려하고 장엄하지 않다. 그들의 우화는 고작 이혼이다.
그들이 갑자기 캐주얼을 입고 싶어하는 것은 아직 변태의 꿈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쉰은 유치원생이다.
이들은 다시 정장을 하고 주말을 기다린다. 그들은 모든 것을 새로 경험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새로운 것은 없다. 당신이 처음 입은
양복이 체크무늬 양복이었다면 체크무늬 양복을, 처음 입은 한복이 감잎 물들인 색이면 그 빛의 한복을 다시 입으리라. 그들은 인생을 새로 쓰고
싶어한다. 하지만 종이는 바랬고 잉크의 색은 묽다.
예순, 비로소 차 맛을 즐긴다.
일흔살의 당신은 전화 벨소리만 듣고도 누구의 전화인지 안다.
여든살의 당신은 체온이 34.5도라고 느낀다. 가끔 가랑잎을 주우며 그게 더 따뜻하다고 느낀다. 이제 당신은 보이는 것보다 만져지는 것을
더 믿는다. 그래서 손주의 살을 만지길 좋아한다. 그들은 질색을 하지만….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든 사랑하라. 그리고 기뻐하라. 삶은 고달프지만 아직 더 먹을 나이가 있다. 그때까지 기다려라. 비록 임종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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