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윤관 장군의 공(功) ] (요약) 그 당시 여진족은 함경도와 요동지방에서 세력을 떨치며 고려를 위협하고 있었다.
윤관 장군은 우리 백성들을 괴롭히던 여진족을 몰아내고 압록강 건너 공험진에 정계비를 세우고 국토을 넓히는 공로를 세운 인물입니다.
그는 1104년 추밀원사로서 동북면행영병마절도사가 되어 여진 정벌에 나섰다가 실패했습니다.
후에 절치부심하여 별무반이라는 특수군을 창설하고 양성하여 1107년(예종 2년) 여진 정벌에 다시 나섰습니다.
10만 명이 넘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군대를 동원한 이 전쟁에서 그는 대승을 거두었지요.
이때 함주와 영주, 웅주, 복주, 길주, 공험진, 숭녕, 통태, 진양의 9성을 쌓아 국경을 튼튼히 하고 이듬해 봄에 개선했습니다.
이 공로로 그는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 문하시중, 상서이부판사, 군국중지사가 되었으나 그 후 여진은 9성 지역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며 강화를 요청해 왔습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9성을 지키기 어렵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어 여진에게 돌려주고 말았습니다.
윤관의 업적이 순식간에 허사가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정세가 이렇게 바뀌자 윤관은 여진정벌의 실패자로 모함을 받아 벼슬을 잃고 공신호마저 삭탈되었습니다.
나중에 그가 죽기 1년 전 예종이 모든 것을 복권 시켜주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인 파주에 내려와 살다가 이듬해인 1111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묘소 입구 오른쪽에 따로 위치한 교자총과 전마총입니다.
교자총(轎子塚)은 윤관 장군이 임금님께 하사받은 가마를 묻었던 자리라고 하며, 전마총(戰馬塚)은 전쟁터를 함께 누비던 애마를 묻은 곳을 말하는 것 같네요.
일반적인 무덤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들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문숙공 윤관 장군이 일곱 살 때 쓴 칠언시는 경세제민의 자세를 어릴 적부터 지니고 있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윤관 장군 묘 근처에 뽕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도 이 시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인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시적 재능은 훗날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게 만들었답니다.
장군의 무덤에는 봉분 아래에 호석을 두르고 있고, 그 뒤로는 흰색 돌담이 둘러져 있어 사계절 포근한 느낌이 듭니다.
왼쪽에는 석양, 오른쪽에는 석마 ~ 석마는 처음 보는 것 같아요. 휴가 때 잠깐 들렀다가 찍은 사진과 비교해 봅니다.
이렇게 초록빛이었다가 누런 빛을 내며 천년을 변함없이 이어내려 왔을 겁니다.
파평윤씨는 그 인구수만도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의 많다고 합니다.
후손중에는 윤봉길 의사, 윤석중 선생, 윤동주 시인 등이 있습니다.
윤관 장군 묘지 근처에는 문인상, 장명등, 무인상, 동자상.... 이 즐비합니다. 거의 왕릉을 방불케하는 수준이지요.
윤관 장군 묘에는 문인상과 무인상이 함께 있습니다. 그만큼 문무를 겸비한 장수라 하겠습니다.
윤관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여충사입니다.
[ 麗(고울 려) , 忠(충성 충) ] 이름을 풀이하자면 고려의 충성스런 신하를 모신 사당이 되겠네요.
뜰에 낙엽이 쌓여있는 오른쪽 사진은 여충사의 재실(齋室)입니다.
경기 문화관광 해설사님이 <파평윤씨의 시조 윤신달 설화>를 들려주셨는데 그 내용이 참 재미났습니다.
파평산 서북맥내령 기슭에 있는 깊이 10미터 넓이
백수십보(2,000여평)가 되는 큰 연못(마지막 사진 龍淵)에서 서기 893년(신라 진성왕 7) 8월 15일 천둥번개와 함께 소나기가 쏟아지면서 운무가 사면에 자욱한 가운데 연못위로 갑자기 번쩍거리는 금궤가 떠올랐다.
이를 본 관원들이 이상히 여겨 태수에게 사연을 고하고 즉시 와서 보니 금궤는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아 떠오르지 않아 할 수 없이 헤어졌다 한다. 그날 해가 질 무렵 근처에 사는 노파가 그 연못에서 빨래를 하는데 서산에 무지개가 찬란하게 뜨며 또다시 금궤가 떠오르자 이를 건져 안고 집으로 돌아와 열어보니 금궤안에 오색이 찬란한 우모(羽毛)에 싸여 있는 남자 아이가 서광이 빛나는 눈과 용모가 범준하며 양어깨에 붉은 점이 日, 月을 상징하고 양쪽 겨드랑밑에는 87개의 용(龍)의 비늘이 있으며 등에는 북두칠성의 검은 점과 손바닥에는 尹자 모양의 손금이 그어져 있었다 한다.
이분이 바로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이다.
그렇다면 파평윤씨의 시조가 잉어의 비늘을 갖고 태어났다는 얘긴데... 그래서 일까요? 실제로 파평윤씨의 후손들은 지금도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고려 예종 2년(1107년)에 여진족을 피하던 윤관장군이 강을 만났는데 앞에 놓인 강을 피하지 못하고 좌절하고 있었답니다.
그 때 갑자기 잉어떼가 나타나 다리를 만들어줘서 윤관장군은 그 다리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 난을 피했다네요. 잉어에게 은혜를 입어서 그런다는 얘기도 있더라구요. ㅋㅋ
스펀지라는 TV프로그램에서는 “가수 윤도현은 네모를 먹으면 아버지께 혼난다” 라는 명제로 방영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정답은 당연히 '잉어'였죠!
○ 지정번호 : 사적 제 323호
○ 입 장 료 : 무료 ○ 이용시설 : 약 2,000평
○ 주 차 료 - 무료
○ 현지교통 :
(703번 버스) 서울역 버스환승센터->불광 -> 연신내,구파발 -> 고양동 ->용미리 -> 분수리(윤관장군묘) (승용차) 구파발 -> 통일로 10분 -> 대자삼거리(벽제화장터) 우회전 -> 고양동 ->용미리 -> 분수리(윤관장군묘) ○ 현지숙박 : 유일레저타운 (2인실, 8인실, 30인실 / 031-948-1364, 948-6161)
○ 주변관광지 :
공릉관광지(하니랜드), 공.순.영릉, 유일레져타운, 보광사, 소령원, 기산저수지, 발랑저수지, 연풍저수지, 용미리석불입상, 혜음원지
첫댓글 훌륭하신 분을 감히 보잘것 없는 후손들은
뭐라고 논할수가 없죠 윤관 대원수님 만세 만세 만세 ~
철우 고맙워 짝짝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