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드라마에서 특히 고려 드라마에는 스포츠 중 국민스포츠라 할만한 격구가 떠오른다.
오늘은 격구에 대해 배워 보자. 냉정하고 객관적 평가해주길 부탁합니다.
자 격구란?
타구(打毬) 또는 포구(抛毬)라고도 한다. 오늘날의 골프 또는 하키와 같이 막대기로 공을 치는 경기이다. 원래 페르시아에서 비롯된 폴로 경기가 당(唐)나라에 전래되어 격구로 불리면서 고구려 ·신라에 전해졌으며, 고려시대에 성행하였다. 조선시대에도 1425년(세조 7)에 무관의 습무(習武)로 재흥되어 전기까지는 무과(武科)의 시취(試取) 과목이 되었으며, 정조 때에 이십사반(二十四般)무예의 하나로 정해져 격구보(擊毬譜)가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수록되었다. 또한 《용비어천가》 제44장에는 격구에 관한 노래와 기록이 있고, 《경국대전》 병전(兵典) 시취조의 격구 항목을 보면, 막대에 붙은 숟가락[杖匙] 길이 9치(27 cm), 나비 3치(9 cm), 자루길이 3자 5치(105 cm), 공 둘레 1자 3치(39 cm)이며, 출마표(出馬標)와 치구표(置毬標)의 거리는 50걸음, 치구표에서 구문까지는 200걸음, 구문 사이 거리는 5걸음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격구에는 말을 타고 하는 기마격구와 궁중이나 넓은 마당에서 하는 보행격구가 있다. 무신이 한 기마격구는 구장에서 말을 타고 막대기로 공을 쳐서 구문 밖으로 내보내는 놀이이다. 경기 방식은 처음에 경기자들이 말을 타고 출마표에서 격구봉을 들고 기다리고 있다가 기녀가 노래하고 춤추면서 구장 한복판에 공을 내던지면, 양편 경기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공을 쳐 구문 밖으로 내보내는데, 공을 구문 밖으로 쳐낸 횟수가 많은 편이 이겼다. 보행격구는 궁중이나 넓은 마당 여기저기에 구멍을 파놓고 걸어다니며 공을 쳐서 구멍 안에 넣는 놀이인데, 아이들까지도 참가하였다 한다. 세종 때부터는 종친을 궁내로 불러들여 보행격구를 하였고, 세조 때는 수십 명씩 떼를 지어 승부를 겨루었다. 임진왜란 이후 상류층에서는 볼 수 없었고, 서민들의 놀이로서 계승되었다. 이 놀이에서 파생한 것이 포구락(抛毬樂)이며, 고려 때부터 회례악(會禮樂)으로 채택되었으나, 조선 세종 때 너무 길다 하여 폐지되고 잡악으로 남았다.
1.그렇다면 어디서 어떻게 격구가 들어왔을까요?
자세하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격구는 BC 500년에 페르시아에서 행해진 기록이 있고 그 후 우리나라로 넘어오게 되었는데요.
19세기 중반 영국인이 이 격구운동을 보고 만든 것이 Polo 이구요. 937년 (고려태조 1년)
격구장이 있었다는 기록을 보아 삼국 시대부터 행해졌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세종은 격구를 잘하는 사람이라야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할수 있다고 하여 무예연습의 필수 과목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격구대회에서 우승하면 기마병이 된다는 것도 어느정도 통하는 이야기가 될 수 있겠습니다
2.격구는 어떤 의미로 하였을까?
흔히 이것을 통해 격구를 스포츠로 국민적 관심을 일으켰을 것으로 추측하지요. 하지만 더 중요한것은 무신에서나 보았듯이 무신들이 자신의 무예나 출중한 기술로 자랑을 뽐내는 것 같습니다.
3.격구는 어떻게 하는건가요?
격구 장비에는 격구채인 장시와 주칠목환이라는 공이 필요하다. 장시는 끝이 숟가락 모양으로 둥글게 생긴 채이다. 주칠목환은 격구에 쓰이는 공으로서 나무를 깎아 만들고 붉은 색 옻으로 칠을 한 것이다.
폴로는 땅 위에 있는 공을 채로 쳐서 구르는 공을 몰고 간다. 격구는 공을 치기도 하지만 격구채인 장시에 공을 들어올려 던지는 등 다양한 기술을 구사할 수 있다.
▲청군과 홍군이 공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홍군이 공을 장시에 끼워 올리고 있다.
▲홍군이 공을 장시에 끼운 채 구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공을 끼운 장시를 머리위로 빙빙 돌리며 구문으로 달려가고 있다.
▲구문으로 공을 많이 넣는 것으로 경기의 승부를 가른다.
격구는 청군, 홍군으로 나눴을 태지요. 그리고 골대가 있습니다. 일종의 축구처럼 비슷하죠. 하지만 틀린 점은 말을 타고 공을 가지고 골대에 넣는 것입니다. 그것을 뺏기위해 서로 저러한 봉을 들고 선수들과 치열하게 무예대결을 펼치죠.
어찌보면 고려시대에 당시에 무신정권때 지금 나오는 최충헌 시절 부터 하였다고 보니까, 무신들을 뽑기위해 아마 이러한 제도을 펼쳤을 것이고요.
3.격구의 경기규칙 및 방법
1.격구의 규칙.
골대속에 숫가락모양으로된 막대기로 공을 퍼서 던지는것을말합니다.
2.격구의 기술은-
1.숫가락빨때같은것으로 공을퍼서 공중멀리 던진후에 야구의 수비수처럼 숫가락막대기로 그 공을다시 잡아야한다. (농구와 야구랑 비슷함.)
2.사모구는 털로된공을 활처럼숫가락으로 던지는것이 사모구라고함.(옛적 기병들의 고난이도 훈련.)
3.격구의 경기시간.
1.격구는 시간이 무제한입니다. 누가많이 골대에 공을넣은 점수와,공을친 거리를 계산하여
합계의 점수가 나온다.
점수는 당시 숫자와같은표시가 있었다.
N:5점
M:20점
↑위와비슷흡사하게 점수를얻는 당시의 게임이였다.
4.격구는 어떤왕이 했을까?
주로 우리가 잘하는 조선의 정종, 정조가 주로 많이 격구를 즐겄다고 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세종 3년(1421) 11월 25일 기사에는 격구하는 방법이 자세히 적혀 있다. - 구를 치는 방법은 편을 나누어 승부를 겨루는 것이다. 구를 치는 몽둥이는 모양이 숟가락과 같고 크기는 손바닥만한데 물소가죽으로 만들었으며, 두꺼운 대나무로
루를 만들었다. 구의 크기는 달걀만한데 나무를 깎아 만들었다. 땅을 주발과 같이 파서 이
름을 와아라 하는데, 혹은 전각을 사이에 두고, 혹은 섬돌 위에, 혹은 평지에 구멍을 만든다.
구를 칠 때는 꿇어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여 치는데, 구가 날아 넘어가기도 하고, 혹은 비스
듬히 일어나기도 하고, 혹은 구르기도 하는 등 각기 구멍 있는 곳의 상황이나 상태에 맞추
어 적당하게 한다. 구가 구멍에 들어가면 점수를 얻게 되는데, 그 방법이 매우 다양하다.
조선 초기의 정종은 격구를 대단히 즐겼던 모양이다. 신하들은 왕이 공부를 게을리 하고 운
동에 정신을 빼앗기는 것을 싫어하여 왕과 신하들 간에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정종은 여러 핑계를 대고 격구를 해야 한다고 우긴다. - 경연에 나가 강관에게 이르기를
"과인이 병이 있이 수족이 저리고 아프니 때때로 격구를 하여 몸을 움직여 기운을 통하게
하려고 한다." 하니 조박이 말하기를 "기운을 통하게 하는 놀이라면 그만두시라 수 없습니
다. 청컨대 소인의 무리와는 함께 하지 마소서." 태상왕(정종)과 상왕(태종)이 격구를 즐긴
탓에 효성이 지극했던 세종은 자주 두 분을 모시고 격구를 구경했다. 이때에 세종은 격구가
군사훈련에도 유용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격구장 30개를 만들게 했고(세종 7년 3월 21일), 같
은 해 4월 19일에는 무과시험에 격구를 포함하도록 지시했다. 다음은 격구를 무과에 포함시
키자는 병조의 보고서다."
예전 제도를 상고하오니 한나라의 축국과 당나라의 격환은 황제
가 즐기던 옛 제도로서 모두가 유희를 이용하여 전투를 연습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려 전성
시대의 격구하던 유희는 것을 모방했던 것입니다. 격구를 잘하는 자는 말은 타고 활을 쏠
수 있으며, 창쓰고 칼쓰기도 능히 할 수 있으니 이제부터는 무과시험에서 그 재주를 시험하
소서. 세종은 이 보고를 받아들여 그 이후로 치러지는 무과에서 격구가 시험과목으로 채택
됐다. 임금의 깊은 뜻도 모르고 사간원에서 '격구'는 고려 후기에 유희의 도구가 되었고 음
란한 풍습을 조장하여 국가에 도움이 없었다'며 격구를 정지할 것을 간언하기도 했다 조선
초기 무예연마를 위해 격구를 국가적으로 중요시했던 만큼 왕조실록에 나온 격구 기사도 상
당량에 이른다. 그러나 후반으로 갈수록 기사량이 줄어드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데 정조
16년(1792) 6월 19일에는 태조가 격구를 즐기던 경구정을 복원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 정
릉과 화릉 두 능의 재실을 수선하고 격구정을 중건했다. 격구정은 태종의 잠저 때 격구하던
곳으로 현종 갑인년(1674)에 관찰사 남구만이 처음 창건하고, 45년 후 무술년(1719)에 이탄
이 중건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관찰사 이문원이 다시 신축한 것이다.
즉 예전부터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아마 격구는 지금 영어로는 게이트볼이라고 하고, 영국도 이와같은 비슷한 격구가 있지요.
영국 기원설 : 영국 기원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은 헨리 체드윅입니다. 그는 1840년대 최초의 야구 기자였는데, 야구 기록법을 고안하여 야구 역사의 선구자적 인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야구 기자로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유일한 사람입니다. 체드윅은 야구기원은 영국에서 성행했던 "크리켓"과 "라운더즈"라는 경기라고 주장했습니다. 1751년 미국으로 이민간 영국인들이 게임도 가지고가 비로소 미국에서도 야구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크리켓은 주로 어른들이 즐기는 스포츠인데 11명씩 이루어진 두팀이 교대로 수비와 공격을 하고, 볼을 배트로 쳐서 득점을 하는 경기입니다. 이 경기는 영국에서 처음 생겼는데 야구와 비슷하며, 영국 민족 고유의 스포츠로서, 마치 태권도가 우리나라의 국기이듯이 영국과 영연방의 국기로서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격구와 영국의 격구는 현저히 다릅니다.
ㅎ한국의 격구는 현재 어르신들이 주로 하는 스포츠 운동화로 '게이트 볼'이라고 하시면 아실 겁니다.
첫댓글 자세히도 설명하시네요! 이런것에서도 사대사상이 내재 되어있다고 보는것이....!!
죄송해요 너무편파적이라서ㅠ
아니 기발하고 좋은자료라고 생각 되어서 한말입니다.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