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부팅의 시간 터널 속으로>
유행에 둔감한 우리 집에 핫한 신천지가 도래했습니다. 하루에 한가지 찬도 준비 할지말지였는데 갑자기 균형잡힌 식탁으로 변한 것입니다. 엘에이 갈비구이에 건새우 넣은 아욱국, 거기에 상큼한 시금치오이나물까지. 밥 맛없다고 늘상 작게 독백하시던 엄마는 드러나지 않게 젓가락질이 분주하십니다.
코로나라고 하면 1969년도에 나타나서 모든 이들의 선망을 받던 번쩍거리던 신진자동차의 이름으로 기억속에 남아있는데 2020년도에 불쑥 들이닥친 코로나는 모든 이들이 두려움으로 멀리하는 절대적 기피의 대상입니다. 개인의 위생을 지키는 것 외에 가장 중요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행이 절실해지자 주일예배는 영상으로 드리게 되고 크고 작은 모임도 취소되면서 저마다 자발적인 칩거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재택 근무를 하게 된 아들과 더불어 손주들도 현관문 밖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말에 조심스러워 방문조차도 어렵습니다. 함께 살고 있는 가족들이 몸담고 있는 자신들의 주거 공간만이 안전지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바이러스는 독자적으로 자기 증식이 안되고 반드시 숙주가 있어 하는데 그 숙주가 다름아닌 사람이 되고 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띄워야 하게 되었습니다. 전 사회적으로 불가피한 휴가를 맞게 된 것입니다.
상호간의 배려를 위해 누구에게라도 만나자는 말을 선뜻 건내기도 어렵습니다. 어느 분 글에 보니 수술복과 감염복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수술복은 내게 묻어 있는 세균을 환자에게 옮기지 않으려고 입는 옷인데 입기가 어렵고, 방염복은 환자의 균이 내게 옮지 않도록 막는 옷인데 벗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우리가 필수로 착용하는 마스크는 두 가지를 병행하는 양면용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마스크는 쓰기도 벗기도 쉽기에 조심스럽습니다. 야외에서는 필요가 없고 실내에서는 써야 하는데 자주 잊고 거꾸로 하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마스크로 입을 막고 있으니 말에 조심을 하게 되는 점은 좋습니다. 온라인 상에서는 마스크가 필요없어서인지 자신이 두려움의 수퍼전파자가 되는 것도 모른 채 불필요한 말들을 전달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또 마스크를 쓰고 보니 상대방의 눈동자가 눈에 잘 들어옵니다. 사람들의 눈은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가식적인 웃음을 지을 수도 있는 입은 가린 채 눈만 보게 되면 그 사람 본연의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코로나 감염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마스크 보다는 손씻기에 있습니다. 손바닥, 손등, 손가락 사이사이, 엄지 손가락 그리고 손톱 밑까지 ‘따르릉따르릉 비켜나세요’를 두번 부를 만한 시간 동안 충실하게 닦으라고 합니다. 남을 위한 배려나 자신을 위한 방어보다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집안에 꼼짝없이 갇혀있는 손자녀석은 종일 ‘엄마, 나 뭐해?’를 무한반복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 또한 저항할 수 없는 자가 격리 상태에서 이 말을 수도 없이 되뇌이게 됩니다.
‘어, 오늘은 대체 무슨 요일이야? 오늘은 또 뭐하지?’
‘리부팅’은 컴퓨터가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중에도 운영체제의 설정을 바꾸거나 하드웨어 운영을 위한 드라이버 설치 등으로 컴퓨터를 재부팅하는 것입니다. 또는 컴퓨터 작동 중에 프로그램 실행에 문제가 있어 전원 버튼을 사용하여 강제로 완전히 껐다 다시 켜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리부팅 시간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전자였다면 무언가 바꾸거나 보충을 해야 하고 후자이면 일단 모든 것을 정지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나의 눈을 한번 들여다보면 어떨지요. 거기에 어떤 모습이 보일런지요. 입으로는 웃어도 눈은 찡그리고 있지 않은지. 늘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갑자기 들이닥친 홀로의 시간이 당황스럽지는 않은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변명하고 투덜대기 일쑤이던 입은 막고 눈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살펴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지 않기에 나 자신을 부단히 씻어가면서 민낯의 나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도 같습니다. 무엇을 바꿀지 무엇을 설치해야 할지, 아니면 아예 껐다가 다시 켜고 싶은지.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꾸던 사람들이 일과 일상, 그리고 사람들로 부터까지 멀어졌지만 하루 속히 일탈에서 일상으로 돌아가기만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몸이 불편하지 않은 상태로 이렇게 감금당하는 시간은 전무후무한 일이 될 것입니다. 주변에 고통받는 분들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상황이고 더 이상 환자가 발생하지 않고 경제적 손실을 겪지 말고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지만 그동안은 홀로의 시간을 잘 보내야겠습니다. 재정비를 잘 해 두어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서 힘들게 복구해야 할 쌓인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단 지난 세월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자신은 저 뒤에 내팽개쳐 둔 채 앞으로만 내달리고 있던 나를 주워담고 niksen(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것)을 통해 나를 챙겨 보는 것은 어떨지요. 한국인들이 남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자기의 영역이 없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세상에는 ‘모순되는 두개의 진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멍청이들이 너무 많다는 책 속의 말도 있습니다. (‘내 주위에는 왜 멍청이가 많을까?’) 아마도 이 책은 남이 써준 저마다의 자기고백서가 아닐까 합니다. 어느 누구도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기 어려울테니까요. 나의 영역을 구축하지 않으면 늘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싶어하거나 휘둘리기 십상입니다.
영화 ‘작은 아씨들’에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던 엄마는 조에게 말한답니다. ‘넌 엄마와는 다른 방법을 선택했으면 좋겠어’. ‘어떤 천성은 누르기엔 너무 고결하단다’. 우리가 번잡한 세상에 휩쓸려 사노라 선택하지 못했던 좋은 천성을 발견할 수도 있겠고 반대로 전혀 알지 못했던 자신 조차도 참기 어려운 단점이 드러나기도 할 것 같습니다.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지점에 서 있습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주는 터닝포인트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일예배를 취소하는 것은 생명을 내어 놓는 것과 같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취소가 아니라 영상으로 대신한다는 말싸움도 적절치는 않아보입니다. 예배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겠지만 어쩌면 이 위기의 상황이 교회 본질을 철저히 숙고할 우리 세대의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한시적인 전환에 대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며 서로 반목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것보다는 내 자신이 예배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이나 태도에 대해 돌아보는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나는 혹 주일에 교회 마당을 밟고 성도들과의 교제를 더 좋아했던 공간과 관계에 갇혀 있던 사람은 아니었는지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신앙인인지 내 안에 갇혀있는 종교인인지를 1에서 10으로 가늠한다면 나는 어디쯤에 해당할지요. 다시 모여서 예배를 드릴 날이 오면 보다 건강한 공동체로 거듭나서 더 겸손한 모습으로,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서로 나누는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 와중에 엄마는 제게 부끄러운 고백을 하십니다. “얘, 물론 이 병이 얼른 지나가야 하지만 난 식구들이 종일 집에 있으니 너무 좋구나’. 평상 시에 늘어놓으시는 잔소리는 제가 방백으로 돌리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끊임없이 중계하시는 독백에서 제 귀에도 들리는 고백으로 전환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이 칩거 기간 동안에 각자의 방백과 독백을 실컷 한 후에 사람들을 만나면 사랑한다고 그동안 많이 보고 싶었다 고백하고 그에 화답하고, 하나님께는 일상에 대한 감사의 고백으로 전환되기를 소망합니다.
‘사자가 자세를 바꾸면 밀림이 긴장한다.’ (2002년 벤츠 광고 카피)
창밖의 봄이 우리 곁을 무심결에 지나가고 있습니다. 아까운 시절이지만 모두 집안에서 자세를 바꾸시고 세상을 향해 다시 한번 달려나가 보겠습니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르릉’
긴장한 세상이 정결해진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첫댓글 힘든 중에도 좋은 글 올려주신 권사님 감사합니다.
모두 이 어려운 과정을 잘 이겨내시고 이런 역경을 오히려 변화의 디딤돌로 삼는 은혜를 누리시기 원합니다.
이런 깊은 생각의 우물속에서 아름다운 글을 길어 올려 나누어 주는 선배가 있다는 사실에 뿌듯 !!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배시간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과 여러가지 순서에 대한 반성과 고찰을 할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