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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승자 무신, 의종을 무신 난 도발자로 규정 고려사의 재발견 의종과 무신정변
경남 거제시 둔덕면 거림리 둔덕기성. 고려 의종이 왕에서 쫓겨난 뒤 3년간 유폐된 곳이며 폐왕성으로도 불린다. 송봉근 기자
고려왕조의 최대 정변인 무신의 난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 우리 학계의 대세다. “의종은 환관 무리와 놀러 다니는 일로 날을 보내어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 국정은 어지럽고 기강은 땅에 떨어졌다. 문신들과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내고, 무신을 혹사하고 천대한 결과 마침내 무신의 대란(大亂)을 도발케 했다.”(김상기, 『고려시대사』, 1984). 연회에 빠져 국정 혼란과 기강을 무너뜨리고, 문신을 우대하고 무신을 천대한 의종(毅宗; 1146~1170년 재위)에게 정변의 책임을 묻고 있다. 그런데 정설(定說)과 다름없는 이 견해는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 기록을 옮겨 놓은 것이다. “사신(史臣) 유승단(兪升旦)이 말한다. ‘불행하게도 의종은 아첨하고 경박한 무리들을 좌우에 두고 재를 올리고 기도하는데 재물을 기울여 탕진했다. 정치에 쏟아야 할 시간과 정력을 주색(酒色)에 빠져, 풍월을 읊는 것으로 정치를 대신했다. 이로써 점차 무신의 노여움이 쌓여 화(禍: 정변)가 일어났다’라고 했다.”(『고려사절요』 권11 의종 24년 8월 사평(史評)) 무신그룹이 권력 잡고 ‘의종실록’ 편찬 학계의 견해는 『고려사』에 실린 유승단의 의종 평가와 판박이다. 그런데 당시 실록 편찬에 참여한 유승단은 무신정변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처지가 아니었다. 무신권력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의종실록 편찬 자체가 출발부터 왜곡되었다. “어떤 사람이 무신정권 최고기관인 중방(重房)에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의종실록) 편찬자 문신 문극겸(文克謙)은 의종이 피살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국왕 시해는 천하의 가장 큰 죄입니다. 무신으로 사관(史官)을 교체해 사실대로 쓰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왕[명종]도 어쩔 수 없이 무신 최세보(崔世輔)를 사관으로 임명했다. 최세보는 마음대로 사실을 고쳐 (의종)실록을 편찬했다. 이 때문에 실록에는 탈락되고 생략된 사실이 많았다.”(『고려사』 권100 최세보 열전)
최세보는 조상도 알 수 없을 정도의 미천한 가계에다 글도 몰랐는데, 무신정변 덕에 재상 자리까지 올랐다. 실록 편찬의 사관(史官)에는 문신이 임명되던 관례를 깨고, 이때 무신이 처음 임명된 것이다. 의종실록은 최세보가 편찬책임자에 임명된 1186년(명종16) 12월 무렵 시작해 그가 사망한 1193년(명종23) 10월 무렵에 편찬이 마무리된다. 의종실록은 무신정변이 일어난 지 약 20년이 지난 뒤 무신정권의 안정기에 편찬되었다. 그 때문에 무신들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변의 책임을 의종의 실정(失政)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의종 시해 사실처럼 무신들에게 불리한 사실이 많이 생략되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기록된 유승단의 의종 평가도 온전할 리 없다. 따라서 무신정변의 원인에 관한 과거와 현재의 기록은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아가 의종은 과연 문신을 우대하는 문신 친화적인 정책을 펼친 반면에 무신을 천대했을까 의문을 던지게 된다. 역사를 대하며 반면(反面)의 사실을 읽을 수 있을 때 역사의 묘미(妙味)가 있다. “의종이 태자로 있을 때 국왕[인종]은 태자가 장차 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왕후 임씨도 둘째 아들 왕경(王暻)을 사랑해 그를 태자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태자(훗날 의종)의 스승 정습명(鄭襲明)이 충성으로 태자를 가르치고 보호해 폐위되지 않았다.”(『고려사』 권96 정습명 열전) 정습명은 당시 김부식과 함께 문신귀족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부왕인 인종과 모후를 등에 업은 외척들은 도량이 있고 따르는 사람이 많은 차남 왕경(王暻)을 왕위에 앉히려 했지만 ‘장자 계승’을 주장한 정습명으로 상징되는 문신귀족의 명분에 밀려 의종이 즉위한 것이다. 의종은 즉위 후 묘청 난을 진압해 정치의 주도권을 쥔 김부식?정습명 등 유교 관료집단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어, 사실상 이들에게 포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1151년(의종5) 김부식과 함께 자신을 보필한 정습명이 죽은 뒤엔 자신의 구상대로 정치를 한다. 고려 내시집단은 국왕 보좌한 신진 관료 의종은 1154년(의종8) 서경에 중흥사(重興寺)를 창건한다. 1158년(의종12)에는 ‘백주 토산(兎山)의 반월 언덕(*半月岡)은 왕조 중흥의 땅이다. 이곳에 궁궐을 지으면 7년 안에 금나라를 병합할 수 있다’라는 주장에 따라 대궐 중흥궐(重興闕)을 창건한다. 또한 측근인 재상 김영부(金永夫)와 김관의(金寬毅)에게 『편년통록(編年通錄)』을 편찬케 한다. 1157∼116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김영부는 뒷날 의종 복위 운동을 일으킨 김보당의 부친이다. 태조 왕건 이전 왕실 세계(世系)를 정리하고, 왕실의 기원을 중국 당나라 왕실에 연결시켰다. 풍수지리 도참사상 등에 입각해 왕실과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해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1145년)와 다른 성격의 역사서다. 정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168년(의종22) 의종은 서경에 행차하여 자신의 통치철학을 담은 이른바 ‘신령(新令)’을 반포하여, 음양사상·불교·선풍(仙風: 도교)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운다. ‘왕조의 중흥’이 의종이 바라던 정치 세계였다. 의종은 문신귀족과 달리 왕권을 강조한 절대 군주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사신의 평가와 같이 결코 무능한 군주가 아니었다.
의종의 정치를 보좌한 세력은 내시집단, 환관과 술사(術士: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 의종을 호위한 친위 군사집단의 세 그룹이다. 반(反)문벌귀족 세력이란 공통점을 지닌다. 내시는 조선시대와 달리 국왕의 정치를 보좌한 신진기예의 관료집단이다. 일반 군인은 어느 때나 고역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의종을 호위한 친위군사인 상급 무신은 비록 정변을 일으켰지만, 평소 의종의 우대를 받았고 의종을 지지한 측근 그룹의 하나였다. 의종은 무신을 천대하지 않았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1790년 편찬)에 실린 수박희(手搏戱) 모습.
권력은 결코 나눠 가질 수 없다. 그로부터 나타난 폐단이 측근 그룹 가운데 내시, 환관과 술사그룹, 친위 군사그룹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나타난다. 무신정변은 일차적으로 측근세력 내부의 권력 다툼에서 시작되었다.
“왕이 보현원(普賢院)에 가기 위해 오문(五門) 앞에 도착했다. … 왕은 무신들이 실망하지 않게 위로하기 위해 수박희(手搏戱: 태권도의 일종)를 하게 했다. 내시 한뢰(韓賴)는 (왕을 호위하는) 무신들이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했다. 마침 대장군 이소응이 수박희를 하다 힘이 부쳐 달아나자, 그의 뺨을 치고 비웃었다. 내시 임종식·이복기 등도 이소응을 모욕했다. 정중부 등은 ‘이소응이 비록 무신이나 벼슬이 3품인데 어찌 이렇게 욕을 보이는가?’하고 소리를 질렀다. 왕이 정중부를 달랬다.”(『고려사』 권128 정중부 열전)
무신정변이 일어난 날 낮에 벌어진 일이다. 왕은 수박희를 열어 친위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려 했는데, 왕의 총애를 다투던 내시 출신 한뢰·이복기·임종식 등이 그 참에 불을 지른 것이다. 친위 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린 일반 군인과는 처지가 다른, 국왕의 총애를 받은 집단이다. 모욕을 당한 이소응과 정중부는 국왕을 호위하는 친위 군사 출신이다. 모욕 사건이 발생한 그날 저녁 마침내 정변이 일어났다.
“밤이 되어 왕의 수레가 보현원에 도착했다. 이고·이의방은 왕의 명령을 가짜로 만들어 (친위군사인) 순검군을 집합시켰다. 왕이 숙소에 들어가자, 이들은 임종식·이복기·한뢰 등을 죽였다. 왕을 호위한 관료들과 환관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 정중부는 왕을 개경으로 돌려보냈다.”(『고려사』 권19 의종 24년(1170) 8월) 정중부와 함께 최초의 정변을 일으킨 이의방·이고 등도 역시 의종을 호위한 친위 군사였다. 이렇듯 정변은 일차적으로 측근 그룹인 정중부 등 친위 군사들이 내시 환관과 또 다른 측근 그룹을 제거하면서 일어난 것이다. 무신에 대한 푸대접이 아니었다. 의종 복위 운동 핑계로 문신들 대량 학살 그날 저녁 의종은 친위 군사들의 호위를 받아 왕궁으로 돌아와 보현원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피해를 입은 내시 환관 등이 다시 반발하자, 무신들은 의종을 거제도로 유폐한 후 환관과 내시들을 무더기로 제거한다. 3년 후인 1173년(명종3) 김보당을 주모자로 한 문신들이 거제도에 유폐된 의종을 경주로 모셔와 복위운동을 일으켜 무신에게 저항하자 마침내 이 정변은 문신들에 대한 대량 학살로 확대되었다.
당시 역사가들은 무신정변을 ‘경계(庚癸)의 난’이라 했다. 즉 최초 정변이 일어난 경인년(庚寅年: 1170년)과 복위운동이 일어난 계사년(癸巳年: 1173)의 두 차례 정변을 합해 무신정변이라 했다. 최초의 정변은 의종 측근세력 내부의 권력 다툼이며, 그런 빌미를 제공한 의종에게 일단의 책임이 있지만 의종의 책임은 여기까지였다. 두 번째 정변인 의종 복위 운동이 일어날 때 일반 군인들의 호응 아래 무신들은 문신에 대한 대량 살육을 저질렀다. 의종의 손을 떠난 정변이다.
무신정변은 가까이는 왕실 중흥과 왕권 강화를 시도한 의종과 그에 반대한 문신 관료집단 사이의 대립이라는 파행적인 정치로부터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멀리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등 12세기 이래 누적된 지배층 내부의 대립·갈등의 산물이 끝내는 무신정변이란 파국을 초래했다. 의종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그것은 정변을 일으킨 무신 권력집단의 역사왜곡일 뿐이다.
천민 출신 권력자, 실권 넘어 왕권을 꿈꾸다 고려사의 재발견 이의민과 신라 부흥운동
북한 개성 교외에 있는 신종의 능. 인종의 5남인 신종 재위 때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두 차례 무신정변 때 재위한 의종(인종 장남), 명종(인종 3남)의 능은 현재 소재를 알 수 없다. [사진 장경희 한서대 교수]
500년(918∼1392년)의 고려 역사에서 특이하게도 100년쯤은 무신정권(1170~1270년) 시대다.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초기 역사가들은 ‘고려왕조 멸망의 계기는 무신정권 때부터’라고 혹평했다. ‘의종과 명종(무신정변) 이후 권세 가진 간사한 무리[權姦]들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여 나라 근본을 깎고 상하게 하고 비용을 함부로 사용해 나라 창고가 텅 비었다’(『고려사』 권78 식화지 서문)는 식의 평가가 그렇다. 그렇지만 무신정권 붕괴 후 고려왕조는 120년이나 더 지속한다. 다양한 고려의 역사를 너무 단순화해 버렸다. 무신정권을 혹평한 까닭에는 당시의 권력자 이의민(李義旼·1184∼1196년 집권)도 포함된다. 그는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250년 고려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의 한 사람이다. 국왕과 관료집단 중심의 왕정 체제를 없애고 새로운 세상을 꿈꾼 혁명가였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없다’라는 기치를 내세워 1198년(신종1)에 일어난 만적(萬積)의 난도 이의민이 뿌린 씨앗에서 발아한 데 불과하다. 그는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무신의 전형적인 기질을 지닌 인물이었다.
『고려사』 반역전에 실려 있는 이의민 열전의 일부분.
아버지는 상인, 어머니는 사원 여종 경주 출신인 이의민은 천민이었다. 아버지는 소금과 체를 파는 상인, 어머니는 사원의 비(婢)였다. 이의민은 8자나 되는 큰 키에다 힘이 세어 두 형들과 마을에서 횡포를 부리다 안렴사(조선의 관찰사 격) 김자양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두 형은 죽었으나 그만 살아남았다. 김자양은 그의 완력을 보고 경군(京軍:개경방어 군인)으로 선발했는데, 그것이 인생의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아버지 이선(李善)은 어린 아들 이의민이 푸른 옷을 입고 황룡사 구층탑으로 올라가는 꿈을 꾸고선 아들이 필시 귀한 신분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이의민은 경군에 선발되어 가족을 데리고 개경으로 가다 날이 저물어 개경 성문이 닫혀 성 밖 연수사라는 절에서 묵었다. 꿈에 긴 사다리가 성문에서 궁궐까지 걸려 있어 그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깬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고려사』 권128 이의민 열전) 부자(父子)의 꿈속에는 천민 신분을 벗어나려는 열망이 담겨 있다. 경군이 된 그는 타고난 완력으로 수박희(手搏戱:태권도의 일종)를 잘해 국왕 의종의 총애를 받아 단숨에 별장(別將:정7품 벼슬)으로 승진한다. 결정적인 기회가 그에게 찾아왔다. 11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크게 공을 세워 장군(將軍:정4품)으로 승진한다. 장군은 1000명의 군사를 지휘하는 무반의 고위직이다.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본 무신정변이 그에게는 도약의 기회가 되었다. 1173년(명종3) 김보당(金甫當)이 주동한 의종 복위운동이 일어났다. 김보당의 명령을 받은 장순석 등이 거제도에 유폐된 의종을 경주로 모셔와 그를 구심점으로 무신정권을 타도하려 했다. 복위운동의 거점 지역을 경주로 택한 것은 옛 신라 수도라는 상징성에다 이곳의 반(反)왕조적인 정서를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무신정권 때 조위총의 난과 고구려 부흥운동, 의종 복위운동과 신라 부흥운동이 각각 서경과 경주에서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옛 삼국의 수도였던 두 지역은 고려 건국 후 개경 중심 정치에서 소외받았기 때문이다. 황룡사 구층탑에 올랐다거나, 개경 남문에서 궁궐로 사다리를 타고 넘어갔다는 이의민 부자의 꿈에는 고려왕조에 대한 경주인의 반감이 투영된 측면이 없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 정중부는 복위운동 진압 사령관으로 경주 출신 이의민을 선택한다. 경주의 반왕조적인 정서를 역이용한 것이다. 그의 의도대로 경주민들은 이의민을 반기면서 반란 주동자를 단숨에 제압하고 의종을 경주 관아에 가두었다.
“이의민은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가로 의종을 불러내어 술 몇 잔을 올리고, 그의 척추를 꺾는다. (의종이)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그는 껄껄 웃기까지 했다. (부관인) 박존위가 의종의 시체를 이불에 싸 가마솥 두 개와 함께 묶어서 연못 가운데로 던져 넣었다. …헤엄질을 잘하는 이 절의 승려가 가마솥만 건져내고 시체는 버렸다. 시체가 여러 날 동안 물가에 떠올라도 물고기나 새들이 뜯어먹지 않았다. 전 부호장 필인(弼仁) 등이 몰래 관을 마련해 물가에 묻어 주었다. 이의민은 스스로 공을 내세워 대장군(大將軍:종3품) 벼슬을 받았다.”(『고려사』 권128 이의민 열전) 의종 허리 꺾어 곤원사 연못에 던져 그러나 의종 시해의 죄과는 그를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아넣고,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된다. 1179년(명종9) 정중부를 제거한 무신 경대승(慶大升)은 왕정 체제를 부활하려 했다. 그러면서 국왕을 시해한 이의민을 제거해야 할 첫 번째 인물로 규정한다. 이의민은 1181년 경주로 피신한다. 국왕은 그의 반란을 염려해 벼슬을 주고 귀경을 권유한다. 1184년 경대승이 병사한 것을 계기로 재상이 되어 최고 권력자가 된다. 이의민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1193년(명종23) 경주 인근 운문사(雲門寺:경북 청도군 소재)의 김사미(金沙彌)와 초전(草田:경남 밀양시)의 효심(孝心)이 봉기하자 사령관 전존걸(全存傑)은 장군 이지순(李至純) 등을 거느리고 진압에 나섰다.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은 반적들에게 몰래 정보를 주고 의복과 식량 등을 보냈다. 반적들도 금은보화를 그에게 뇌물로 보냈다. 이 때문에 진압군은 이길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안 사령관 전존걸은 ‘만약 법으로 이지순을 처벌하면 그 아비(이의민)가 반드시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적이 더욱 기세를 떨쳐 아군이 패배할 것이다. 패배의 죄를 누가 지겠는가?’라고 분하게 여겼다. 마침내 그는 약을 마시고 자결했다.(『고려사』 권128 이의민 열전) 이의민의 아들인 이지순의 단순한 탐욕이 아니었다. 이의민이 반군과 내통하여 새 왕조를 건국하려는 야망을 품었던 것이다. “이의민은 일찍이 붉은 무지개가 두 겨드랑이 사이에서 일어나는 꿈을 꾼 후 대망을 품었다. 또한 용의 자손(고려 왕실을 뜻한)은 12대로 끝나고 다시 십팔자(十八子)가 나타난다는 옛 예언을 듣고, 십팔자는 이(李)씨를 뜻한 말이란 사실도 알았다. 이로써 그는 왕이 되려는 헛된 야망을 품고 탐욕스러운 마음을 억누르고 명사들을 등용시켜 자신도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다. 경주 출신인 그는 신라를 부흥시키겠다는 뜻을 몰래 가지고 반적 김사미·효심 등과 내통했다. 반적들도 엄청난 재물을 바쳤다.”(『고려사』 권128 이의민 열전) 이의민은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시대를 갈망한 유일한 무신 권력자였다. 국왕과 관료 중심의 왕정체제에 기생하여 경제·군사·인사권을 독점해 달콤한 권력에 안주하려 한 정중부·경대승·최충헌 등의 무신 권력자와는 다른 유형의 인간이었다. 김사미와 효심의 봉기가 진압된 후인 1196년(명종26) 4월 이의민은 냉정한 권력자이자 또 다른 야심가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제거된다. “적신 이의민은 잔인한 성품으로 윗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아랫사람을 업신여기고 임금의 자리마저 흔들려 했습니다. 그 때문에 재앙이 불꽃처럼 치솟고 백성들은 편안하게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이에 신들이 폐하의 신령스러운 위엄을 빌려 적신들을 단번에 쓸어 없애버렸습니다. 폐하께서는 낡은 제도를 혁파하고 새 정치를 펼치기 바랍니다. 오직 태조께서 가르치신 전범(典範:훈요십조)을 준수하여 중흥의 길을 밝게 여시기 바랍니다.”(『고려사』 권129 최충헌 열전) 최충헌은 단순한 칼잡이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노회한 인물이었다. 새 왕조가 아니라 태조 왕건의 고려왕조를 연장시키겠다는 현실주의 노선을 표방했다. 이는 이의민 제거의 명분일 뿐만 아니라 국왕과 관료집단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더 없이 좋은 명분이었다. 이의민 실각하자 경주서 신라부흥운동
최충헌의 집안은 부친과 외조부 모두 상장군 출신인 무반 가문이었다. 그 덕에 그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음서의 혜택으로 관료가 되었다. 이의민과는 신분이 달랐다. 무신정변으로 무신이 득세하자 자신의 출세에 유리한 무반으로 관직을 바꾼다. 1174년 서경에서 일어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해 별장(정7품 벼슬)으로 승진한 후 안동부사(副使)와 안렴사를 거쳐 행정 경험을 쌓았다. 이의민의 미움을 받아 관리생활을 포기하다, 1193년 장군(정4품)에 임명되어 다시 정계에 등장한 후 3년 만에 이의민을 제거하고 최고 권력자가 된다. 이의민이 제거된 후유증은 1202년(신종5) 11월 경주의 신라부흥운동으로 나타났다. 이의민 제거 후 최충헌이 경주에 있던 이의민의 삼족(친족·외족·처족)을 살육한 데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되었다. “경주 사람이 신라 부흥운동을 꾀하여 몰래 배원우를 (전라도) 고부군에 유배된 전 장군 석성주에게 보내 ‘고려 왕업은 거의 다 되었다. 신라가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대를 왕으로 삼아 사평도(沙平渡:한강)로써 경계를 삼으려 한다’ 하면서 그를 꾀었다.”(『고려사절요』 권14 신종 5년 11월) 최충헌은 1204년 이 난을 진압한다. 새 왕조를 건설하려 한 이의민의 꿈은 이로써 좌절된다. 최충헌은 아들에서 증손자까지 ‘이(怡)-항(沆)-의(?)’로 이어지는 62년간(1196∼1258년)의 최씨 정권을 열었다. 그 비결은 변혁을 바라지 않은 국왕과 관료집단의 여망을 정확하게 꿰뚫은 현실주의 정치이념이었다. 그는 이의민과는 다른 정치이념으로 정권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었다.
박종기 국민대 교수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세계를 지배했던 영웅들이 전쟁영웅 아닌 사람이없다. 구약성서는 전쟁의 기록이나 마찬가지이고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톤도 군인이고, 알렉산더 대왕, 징기스칸도 군인이다.
무관들이 득세하여 반정을 일으키고 총칼로 나라를 다스리면 당연히 안 되지만, 문민만을 숭상하여 무관을 멸시하고 국가 안보를 소홀히 하면 나라가 망한다. 대개 문관들의 당쟁과 당파싸움은 곧 망국의 길이다.
얼마전 평생을 군에서 보내고 나이가 70세인 국정원장에게 딸 또래의 국회의원이라는 년이 " 저게~ 저런게~" 하는 발언을 보고 망조가 들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정중부의 난이 일어난 이유가 별거 아니다.
군인들이 정치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관료화 되는 것이다. 군인은 군인 다워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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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