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현 교수의 딸 성유리의 소주광고'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6898번 글을 읽고 매우 착잡한 감정을 느낀다.
글쓴이는 그 글에서 특별한 논평이나 가치판단을 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성종현 목사의 딸 성유리의 소주 광고라…"
"이것을 우찌 해석해야 하는 걸까요?"
라는 말속에 숨어있는 글쓴이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어서 그렇다.
먼저, 딸의 소주광고 때문에 아버지인 성교수를 비난할 의도가 숨어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비기독교적인 태도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근대사를 암울함 속으로 몰아넣은 그 악명 높은 '연좌제'는 이스라엘에서는 이미 신
명기 시대 때 폐지된 것이다.
"아비는 그 자식들을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라.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신 24 : 16)
이 말씀 때문에 유다 왕 아마샤는 자기의 부왕을 암살한 자들을 죽일 때에도 그들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다는 기록이 왕하 14 : 6에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카페 게시판에 다분히 '연좌제적'인 색채가 농후한 글이 올라오고 있다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만약 기독교도인 성유리의 소주광고에 문제가 있다면 성유리만을 거론했어야 했다.
그의 아버지가 목사이자 신학교수라는 사실을 들추어낼 것까지는 없었다.
허긴, 성유리의 아버지가 목사·신학교수라는 것 때문에 그녀의 소주광고를 문제삼았을 것
으로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술"을 대하는 한국교회의 태도에 있는 것 같다.
딤전 3장은 장로와 집사의 자격요건으로 "술을 즐기지 아니할 것"과 "술에 인박이지 아니할
것"을 들고 있다.
술꾼만 아니라면 집사 직분을 수행할 수 있고, 알콜 중독자만 아니라면 장로직분도 수행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딛 2 : 3은 늙은 여자들에게 "술의 종이 되지 말"고 젊은 여자들에게 선한 것을 가
르치는 자가 되라 하고 있다.
위의 성경 말씀들을 종합한다면 그리스도인들도 술은 마시되, 그것을 너무 즐기거나 알콜에
중독되기까지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선민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물들을 길게 나열하고 있다.
그러나 금기시되는 음식물에 술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백성들이 토지 소산의 십일조로 포도주와 독주를 사 가지고 성막으로 가서 권속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 하고 있다.(신 14 : 22 - 26)
다만 제사장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만큼은 술을 금하고 있다.(레 10 : 9)
예수께서도 공생애 기간 동안 포도주를 상당히 즐기셨던 것으로 보인다.(마 11 : 19)
그리고 예수께서 행하신 최초의 기적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
는 것이었다.(요 2 : 1 - 11)
만약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술 마시는 것을 금하실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셨다면
예수께서도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셨을 것이고, 최초로 행하신 기적을, 하필이면, 술을 만들어내는 기적으로 행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술과 담배를 교회헌법으로 금하고 있다.
이같이 교회헌법으로 술과 담배를 금하는 교회는 세계에서 한국교회가 유일하다.
한국교회에서 금주 금연은 하나의 율법적 계명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소위 주초를 금하는 조항을 헌법에 두고 있지 않는 한국의 교회들도 술과 담배를 금하고 있
기는 마찬가지이다.
한국교회의 상황을 극명하게 표현하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한국교회는 도둑질한 목사, 이혼한 목사, 성도와 간음한 목사는 용납되어도 술마시고 담배
피는 목사는 절대 용서받지 못한다."
성경이 명백히 죄로 인정하고 있는 행위는 한국교회에서 용납받아도 성경이 죄로 인정하지
도 않고 있는 음주 흡연이 용서받지 못하는 기현상을 지적한 것이리라.
이 사실을 기독 지성인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공론의 장을 한 번 마련해 보는 것도 한
국교회를 위해 유익한 일이라 생각된다.
참고로 필자의 견해를 먼저 밝히자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술은 경건생활에 유익함이 없고 담배는 건강을 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술과 담배를 마시고 피더라도 그것은 개인의 신앙양심에 속하는 문
제일 뿐 교회가 나서서 그것을 계명으로 금한다거나 정죄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음주 흡연을 금하는 전통을 고수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도 개개인의
자율적인 신앙양심에 맡겨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한국교회는 조상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마 15 : 3)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고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는(막 7 : 7 - 9)교회라는
주님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사도 바울도 바로 이러한 뜻으로 로마서 14장과 골로새서 2 : 20 - 23말씀 등을 기록하였
다.
필자의 견해에 대한 기독 지성인들의 기탄 없는 의견을 기대합니다.
선입감정에 치유치지 않는, 오직 성경에 근거한 진지한 토론이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첫댓글올으신 말씀입니다.만약 목사의 딸이 마먁 중독자라고 해도 그게 왜 그 목사의 문제입니까? 중독자가된 그 딸의 문제죠... 전 술도 마시고 담배도 핍니다 .느끼는건 사도바울의 서신서를 보면서 근거없는 계명을 강요하는 우리나라에선 술담배를 하지 말아야 되는건가... 갈등을 느낌니다
근자에 참으로 올은말 하는분을 보게 되는군요. 제가 다니는 교회의 젊은 목사님도 술 담배 하면 교인자격없답니다.그것이 앞에서 말씀 하신것같이 모든 죄보다 더큰죄인양 말씀 하시더군요.여러모로 믿음에 혼란스럽지 않게 한국교회도 아집을 버리고 잘못 말씀을 전하는것이없나 이제는 생각해 볼때라 생각합니다.
울법주의로 금하여 정죄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술은 이미 세상 문화의 중심에서 하나의 촉매제가 되어 있습니다. 술을 먹는 것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 자신의 영이 무엇으로 채워 가려 하는가의 근거로 스스로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복음의 깊이를 깨닫게 되면 술을 매개로 한 자리
에서 이루어 지는 문화에 흡수되기 보다 상대의 영혼을 보게 되고 영혼을 구하는 복음의 증인되는 마음에 촛점을 갖게 됨으로 성령을 쫒아 성령을 충만하게 채우라는 말씀이 이시대에 더욱 중요함을 이해하게 됩니다. 참된 복음으로 자라가는 하나님의 자녀는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게 되어지며
음주행위 자체의 옳고 그름으로서가 아닌 대부분의 음주문화와 음주를 부추기는 이유들에 있서서 하나님의 영광과 멀리 있는 허망한 것들이 대부분임에 경계하게 되며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속사람으로 하여 분명히 술에 취하려는 자신의 영혼의 이유를 깨닫게 되고 혹시 술을 통해 합당치 않은 방법들을
첫댓글 올으신 말씀입니다.만약 목사의 딸이 마먁 중독자라고 해도 그게 왜 그 목사의 문제입니까? 중독자가된 그 딸의 문제죠... 전 술도 마시고 담배도 핍니다 .느끼는건 사도바울의 서신서를 보면서 근거없는 계명을 강요하는 우리나라에선 술담배를 하지 말아야 되는건가... 갈등을 느낌니다
근자에 참으로 올은말 하는분을 보게 되는군요. 제가 다니는 교회의 젊은 목사님도 술 담배 하면 교인자격없답니다.그것이 앞에서 말씀 하신것같이 모든 죄보다 더큰죄인양 말씀 하시더군요.여러모로 믿음에 혼란스럽지 않게 한국교회도 아집을 버리고 잘못 말씀을 전하는것이없나 이제는 생각해 볼때라 생각합니다.
울법주의로 금하여 정죄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술은 이미 세상 문화의 중심에서 하나의 촉매제가 되어 있습니다. 술을 먹는 것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 자신의 영이 무엇으로 채워 가려 하는가의 근거로 스스로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복음의 깊이를 깨닫게 되면 술을 매개로 한 자리
에서 이루어 지는 문화에 흡수되기 보다 상대의 영혼을 보게 되고 영혼을 구하는 복음의 증인되는 마음에 촛점을 갖게 됨으로 성령을 쫒아 성령을 충만하게 채우라는 말씀이 이시대에 더욱 중요함을 이해하게 됩니다. 참된 복음으로 자라가는 하나님의 자녀는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게 되어지며
음주행위 자체의 옳고 그름으로서가 아닌 대부분의 음주문화와 음주를 부추기는 이유들에 있서서 하나님의 영광과 멀리 있는 허망한 것들이 대부분임에 경계하게 되며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속사람으로 하여 분명히 술에 취하려는 자신의 영혼의 이유를 깨닫게 되고 혹시 술을 통해 합당치 않은 방법들을
구해가게 될 때 심령 가운데 진정한 기쁨은 사라지게 됩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과 성령의 은혜로 얻어지는 기쁨의 차이를 알게 되면 몇걸음 휘청거리더라도 다시 주님 안에서의 삶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요동치않는 믿음으로 자라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