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지의 비극
중국 동진(東晉) 때의 전원시인 도연명(AD 365-427, 陶淵明)은 고향으로 돌아와 남쪽 들녘 의 황무지를 일구며 전원생활을 시작한 심경을, 새장 안의 새는 옛 숲을 그리워하고, 웅덩이의 물고기는 옛 연못을 생각하듯 그렇게 자연으로 돌아왔다고, 그의 시 귀전원거(歸田園居)에서 토로하였다. 다행히 그에게는 300여 평의 땅이 있는 집이 있어 느릅나무, 버드나무, 복숭아나무, 자두나무가 집안 앞뒤에 늘어서 있었다. 낙향 후 그의 관심은 오직 농사일 뿐으로 애써 가꾼 농작물이 서리나 싸락눈이 내려 잡초들과 같이 시들까 봐 걱정이라고 했다. 또한, 남산 아래에 콩을 심었는데 콩 싹보다 잡초만 무성하게 나와서 걱정이 되었다. 콩밭에 가서 김을 매다 저녁 이슬에 옷을 적시나 옷이 젖는 것은 아깝지 않지만 콩이 잘 자랐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이처럼 땀을 흘려 땅을 일구며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 열매 맺는 수확의 기쁨이 없다면 그의 노동은 허망한 헛수고일 것이다. 그런데 땅은 정직하므로 농작물이 자라 열매 맺을 수 있는 자연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그 농부에게 상응하는 보상을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쁨은 누구나 쉽게 체험할 수 있다. 상추와 방울토마토 몇 포기를 베란다에서 길러보니 농부의 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큰 화분에 상추 다섯 포기와 플라스틱 모판에 토마토 세 그루를 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상추를 몇 차례 딸 수 있었고, 토마토 줄기에는 앙증맞은 어린 토마토 열매가 한 그루에 세 개씩 아홉 개가 열렸다. 참으로 경이로운 생명의 신비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농사짓는 일은 언제부터 시작하였을까? 창세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인간의 등장과 함께 농사의 원형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노아 홍수 이후, 하나님은 노아의 번제 제단의 향기를 받으신 후,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시기로 약속하셨다. 그리하여 땅이 있는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으로 농사는 노아에 의해 다시 시작되었다.
예수님 당시에도 농사는 중요한 일상이었으므로 예수님 자신도 농사짓는 일을 비유로 사용했다. 씨뿌리는 자, 가라지, 겨자씨와 누룩, 포도원의 품꾼들, 포도원의 농부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등의 비유가 그러하다. 그중에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농부는 귀한 씨를 길가의 밭이나 돌밭과 가시 떨기나무밭에 뿌려 낭비하는지의 의문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기후는 10월과 11월이 우기로, 이때 이른 비가 내려야 땅이 촉촉이 젖어 땅을 갈고 씨를 뿌릴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많은 땅이 대부분 돌밭과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단단한 땅으로 되어있어, 먼저 땅을 간 뒤 씨를 뿌리고 그 씨를 흙으로 덮기 위해 다시 땅을 갈아야 한다. 따라서 그곳의 농지환경으로 보아 길가나 돌밭과 가시 떨기나무밭에 뿌리는 비유가 자연스레 나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농부는 씨를 낭비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이 비유는 예수님 자신이 자세히 설명하셨기 때문에 여기에서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같이 길가나 돌밭과 가시 떨기나무밭에 씨를 뿌리며 경작하는 사례가 오늘날 이곳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흔한 사례가 되었다. 복잡한 도시를 벗어난 근교나 외곽에서 여유롭고 한가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주인공처럼 농사짓기를 생각해 볼 것이다. 실제로 자치단체나 농지를 가진 개인들도 주말농장을 유료로 운영하고 있어, 주말엔 온 가족이 나들이 겸 텃밭에 나와 노동을 하고 함께 식사를 나누는 정겨운 풍경을 볼 수 있다. 이는 권장할 만한 건강한 노동이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자연과 가까워지는 정서교육 효과도 있다. 이런 주말농장의 공급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비용부담을 하기 싫어서인지, 공유지에 불법으로 땅을 파고 작물을 재배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이곳 산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작풍경은 뚝 길이다. 개천이 흐르는 한쪽에는 차도가 있고 반대편에는 방죽이 길게나 있다. 들로 산책하기에는 차가 다니는 도로보다 뚝 길이 더 정취가 있다. 그리 넓은 편이 아닌 길에는 사람 다니는 흙길이 좁게 나 있고 양쪽으로는 풀이 무성하다. 그 풀과 돌을 제거하고 농작물을 심는다. 뚝 아래에도 농작물이 자라고 있다. 뚝 중간 부분에는 땅을 파고 호박을 심어 놓았다. 아마도 그들 상호 간에는 서로 점유권을 인정하고 침해하지 않는듯하다.
이뿐이 아니다. 둘레길의 산 중턱까지 본격적으로 경작을 하고 있다. 이들은 돌밭과 가시떨기 밭을 힘들여 가꾼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여가로 하는 자가소비가 아니고 비즈니스로 보인다. 우리의 산과 들이 이렇게 훼손되고 있다. 만일 심한 홍수가 난다면 이들 경작으로 인해 뚝이 무너지고 산사태로 산 아래 동네는 침몰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공유자원을 고갈시키는 것이 장기적으로 자신과 공동체의 이익에 반한다는 것을 인식함에도 과도하게 약탈을 일삼는 것은 결국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경제학자들은 ‘공유지의 비극’이라고 한다. 즉 인간이 개인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공동선을 파괴하는 사례를 일컫는다.
공유지에 대한 이러한 불법점유의 생각은 어디에서 출발했을까? 인간은 ‘소유하는 존재(proprietor)’라는 프레데릭 바스티아(Frédéric Bastiat)의 말이 있다. 소유를 보호받기 위해서는 재산권을 가져야 한다. 이런 재산권은 신이 만든 제도로서 인간의 법은 재산권의 보호를 목적으로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러나 공유지의 불법점유는 보호 대상이 될 수가 없으나, 혹 개간자들은 기득권을 인정받으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인간은 땅에 대한 욕심이 많은 모양이다. 구약에서 땅은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며 관점이 되어 왔다, 출애굽에서 최종 목적지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다. 즉 풍요와 안식을 보장하는 땅이었다. 그곳에서 여호와께서 이루실 평화를 미가서에서는,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라고 선언하셨다.
이 평화로운 포도원을 왕이라도 빼앗을 수 없다.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아합왕이 빼앗으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시켜 아합 집에 대한 엄중한 심판을 선포하므로 그의 마음을 겸비하게 한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이 분깃으로 받은 땅의 경계인 옛 지계석(地界石)을 옮기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신명기에는 7년 끝에 모든 빚을 면제해주는 내용에 땅의 소유권을 본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레위기에는 50년마다 희년(禧年)을 지켜 팔려간 땅이 본래의 가족에게 되돌아가는 자유를 선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땅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므로 ‘공유지의 비극’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앞에서 도연명이 남산 아래 황무지를 개간하여 콩밭을 가꾸는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아마도 그가 살던 곳은 땅이 넓고 인적이 드문 곳이라서, 공유지를 차지하는 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공해와 기후변화 등으로 인해 이러한 사적 생산의 자유방임적인 행위가 공해를 유발하는 경우, 이의 처리를 위해 사회적 비용을 낮추도록 국가가 강행법이나 세금정책으로 규제를 해야 한다고 ‘공유지의 비극’이란 논문을 쓴 캘리포니아 대학의 생물학자였던 가렛 하딘(Garrett Hardin)은 주장했다. 결국,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자기가 공유지에 공해를 배출함으로써 분담하는 개인 비용이 공해 물질을 처리하는 비용보다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 분담비용이 적다는 이유로 우리 모두 자기 자신의 보금자리를 스스로 해치는 시스템에 갇혀 있다는 것이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의 한계이다.
이제 이런 비극의 전개를 참나리길에서 차분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첫댓글 빈땅만 보면 무언가, 주로 농작물을 심고 싶어 하는 경향은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강하다고 합니다. 아마도 농작물이 곧 생명 유지라는 오랜 인식에서 유래하는 것 같습니다. 쌀소비가 줄고 김치를 싫어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는 요즘에도 아파트 빈땅에는 여지 없이 상추나 고추 등의 농작물이 자라고 있다고 하는군요. 그 농작물을 죄의식없이 뜯어가는 사람도 꽤 있고...그래선지 대법원은, 남의 땅에 농작물을 심은 경우 그 농작물의 소유는 땅주인이 아니라 경작자에게 있다는 판례를 오늘날에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파종에서 수확까지 6개월도 안걸리고 농작물은 생명유지에 필요한 식량이라고 합니다.
크론베르그님은 공유지의 비극을 주로 자연재해와 경제적인 관점에서 논하셨는데 저는 남의 땅에 심은 농작물과 관련된 다툼을 중심으로 댓글을 썼네요. 그런데...공유지의 비극은 아니지만...저도 화분에 상추와 고추, 새싹보리를 심고 가꾸다보니 생명의 신비를 몸소 느끼겠더군요. 생명 유지를 위해서라기보단 새싹이 자라 쑥쑥 커가는 모습이 참 신기하더군요. 그래서 우리 대법원 판례도 이젠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60년대와 달리 요즘은 재미로 가꾸는 사람도 많으므로...그렇다면 남의 땅에 심지 말고 자기 땅 혹은 자그마한 화분에라도 심으면 졸을텐데...핵심을 비껴간 댓글이었습니다.
권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연세가 있으신 분들일 수록, 생명의 신비와 기쁨을 몸소 체험하시기 위해, 작물을 가구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며칠 집을 비우고 다녀왔더니, 베란다의 토마토가 또 다른 열매를 맺어서 무척 기뻤습니다.
주님도 저희에게 믿음의 열매를 보여달라고 하실텐데, 부끄럽기도하고 염려스럽기도 합니다.
항상 권사님의 따뜻한 권면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헤르만 헤세의 '정원에서의 기쁨'이란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사실 정원을 가꾸면서 마치 자신이 창조자가 된듯한 즐거움과 우월감을 느낀다.
사람들은 한 조각의 땅에 품어왔던 생각과 의지를 펼쳐놓는다. 그리고 다가올
여름을 기대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과일과 색과 향기를 창조해낼 수 있다.
농부가 된다는 것은 놀이처럼 재미로 할 때는 멋있는 일이지만 습관이 되고
점점 더 일이 많아져 의무가 되어버리면 그 즐거움은 사라져버린다.
어딘가에 내 집을 갖고 한 조각의 땅을 사랑하며 경작하여 식물을 재배하고 농부들이나 목장
사람들과 함께 행복을 맛보는 것. 그 행복이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해도 그런대로 괜찮은 것이다.
꽃들과 흙, 샘물, 한 조각의 땅 무화과나무, 복숭아나무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