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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저 기록의 땅” 전展 개최
○ 전 시 명: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품전展 “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
○ 기 간: 2022. 7. 22.(금) ~ 2024. 1. 28.(일)
○ 전시장소: 국립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메소포타미아실(306호)
○ 전 시 품: <사자 벽돌 패널> 등 66건 66점
〈조공 행렬에 선 외국인 마부〉, 기원전 10~7세기
신(新)아시리아 제국의 궁전 내부를 장식했던 석판 부조에서 살아 움직일 듯 정교한 조각 기술 표현(부분도)
말 두 필을 고삐로 끄는 마부를 묘사한 부조이다. 마구의 정교함이 돋보이는데, 굴레에 앗슈르식 장미 장식이 있고 이마 장식에서 술이 내려오며 머리 위에는 근사한 문장(紋章)이 보인다. 마부는 차림새와 머리 모양으로 보아 앗슈르인이 아닌 외국인이다. 이 부조는 앗슈르에 조공을 바치는 외국 사절단의 모습을 담은 큰 조각의 일부이다.
❁ 詩가 깃든 삶, 길가메시 서사시(Gilgamesh 敍事詩)
네 배를 채워라,
즐겨라 낮에도 밤에도!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라
춤추고 놀아라 낮에도 밤에도!
물에 들어가 목욕하고,
네 머리를 씻고 깨끗한 옷을 입어라
네 손을 잡은 아이를 바라보고,
네 아내를 안고 또 안아 즐겁게 해줘라
- 길가메시 서사시(Gilgamesh Epoth)
〈길가메시 서사시(Epic of Gilgamesh, ─敍事詩)〉 점토판 유물
〈길가메시 서사시(Epic of Gilgamesh, ─敍事詩)〉는 역사적으로 존재한 인물로 기원전 26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위치한 우룩(Uruk, 성서의 에렉 Erekh)이란 도시의 통치자였다. 그에 관한 이야기들이 그가 죽은 이후부터 오랫동안 세간에 떠돌고 있었고, 기원전 2100년경 우르 제3왕조의 궁정 시인들이 길가메시의 영웅성에 대해 글을 남기기 시작하였다. 이 왕조의 왕들은 길가메시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겼다. 현재 남아 있는 수메르 어(Sumer語)로 기록된 서사시적 작품들의 원형은 분명 길가메시에 대한 관심이 부흥된 우르 제3왕조 시대 것으로 보인다. 전해 내려오는 길가메시 서사시는 고대 바빌로니아(Old Babylonian) 말기인 기원전 1600년경에 아카디아어(Akkadian)로 기록된 것이다. 엄격히 말해 이 자료들도 ‘서사시’가 아닌 ‘서사시의 윤곽’이다.
길가메시(Gilgamesh) 서사시(敍事詩)는 인류의 오래된 이야기의 한 장면이다. 영원한 생명을 찾아 헤매는 길가메시에게 선술집 주인 시두리(Siduri)는 말한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인간에게 죽음을 주었다…그러니 배불리 먹고 즐겨라”
그 단순함에 나는 매되었다. 먹고 씻고 사랑하라! ‘carpe diem’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허무를 바탕으로 한 현세주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특징이다. 많은 학자들이 길가메시가 기원전 2800년경 우르크(Uruk)를 통치했던 실존인물이라고 믿고 있다. 죽지 않고 늙지 않는 영생을 얻는데 실패한 길가메시는 낙담하여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는 결국 불멸을 얻었으니, 5000년 전의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지지 않는가.
✺ 메소포타미아 신화, 길가메시 서사시(Epic Of Gilgamesh) 줄거리
* 주요 등장인물
◦ 길가메시(Gilgamesh) : 우루크의 왕
◦ 엔키두(Enkidu) : 길가메시의 친구이자 동반자
◦ 훔바바(Humbaba) : 삼나무 숲의 수호자
◦ 우타나피쉬티(Utanapish) :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노아의 방주에서 노아와 같은 존재)
◦ 샴하트(Šamhat) : 우루크의 매춘부(엔키두를 꼬셔서 길가메시에게로 안내하는 여자)
◦ 이쉬타르(Ishtar) : 우루크의 여신, 거꾸로 매달린 여신
◦ 닌순(Ninsun) : 길가메시의 어머니, 여신
길가메시는 수메르의 도시국가 우루크의 왕으로 반신(半神)이었으며, 잘생기고 총명한 데다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3분의 2는 신이고, 3분의 1이 인간. 온 세상을 둘러보고 우루크로 돌아온 후, 자신보다 강한 자가 없다는 사실에 취해 자만에 빠져 허구한 날 강제 노동을 시켜 백성들을 괴롭히고 싸움 좀 한다는 남자들은 다 두들겨 패며 악행을 일삼았다. 그중에서 특히나 가장 악한 짓이 초야권으로, 결혼하는 처녀들의 첫날밤을 자신이 대신 치렀다.
참다못한 백성들이 천신 아누에게 길가메시를 벌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자 아누는 창조의 여신 아루루를 시켜 엔키두를 만들었다. 엔키두 역시 매우 강했으며 몸통은 온통 털로 덮여 있었고 여인처럼 긴 머리칼이 소의 몸 같은 그의 신체 위를 덮고 있었다.
문명화된 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던 엔키두는 동물들과 같이 풀을 뜯고 물웅덩이 근처에서 살았다. 얼마 안 가 희한한 짐승이 있다는 이야기가 우루크에 퍼졌다. 이 와중에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으나, 결과적으로 이슈타르 신전의 여사제인 샴하트가 엔키두와 6박 7일을 계속 성관계를 맺으며 빵과 맥주를 먹여 그의 야수성을 벗겨내었다. 샴하트와 일주일간 쉬지도 않고 성관계를 맺은 엔키두가 본래 친구들인 짐승들에게 다가가자 짐승들은 엔키두를 피했고, 이제 엔키두는 그들의 말도 알아들을 수 없었으며 예전처럼 그들을 쫒아갈 만큼 잘 달릴 수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처럼 지혜로워졌다.
이에 샴하트가 말하길 "당신은 지혜로워졌어요, 엔키두. 이제 당신은 신처럼 되었어요. (중략) 아누와 이슈타르의 신성한 신전으로, 길가메시가 사는 곳으로 모시고 갈게요. 왕은 워낙 강해 야생 황소마냥 젊은이들에게 자기 힘을 과시한답니다."
엔키두는 그녀의 안내에 따라 우루크에 도착하고, 백성들의 호소를 듣고 분노하게 되었다. 곧 그에 대한 이야기는 길가메시의 귀에도 들어간다. 길가메시는 어느 누가 자신에게 대항할 수 있겠냐며 엔키두에게 결투를 신청하지만, 길가메시가 먼저 무릎을 꿇어버리고 어린애처럼 주저앉아 울어버린다. 둘은 화해하고 가장 친한 친구가 된다.
그 후 둘은 영웅으로서 온갖 행적을 남긴다. 엘림(삼목)산의 훔바바를 무찌른 것도 이때. 태양신 샤마쉬는 자신의 신전을 그 산에 짓고 싶었으나, 엔릴의 명령으로 산지기가 된 훔바바를 직접 죽일 처지는 아니었다. 엔릴이 신들의 실권자이고, 그에게 7개의 후광과 명령을 받아 산을 지키던 자가 훔바바였기 때문이다. 결국 샤마쉬/우투는 때마침 그 구역까지 영토를 넓히고 싶었던 길가메시를 부추기는 방법을 썼고, 길가메시가 엔키두와 함께 훔바바를 무찌르러 가 실제로 무찔렀다.
엔릴신의 대리자로서 7개의 후광을 가진 훔바바는 길가메시에게도 버거웠는지라, 길가메시는 정면 승부를 피하고 친구가 되자느니, 여동생을 아내로 주겠다느니 온갖 감언이설로 방심하게 만든 뒤에 기습해서 쓰러뜨렸다. 이에 훔바바는 "영웅이라는 놈이 속임수를 쓰다니!"라고 비난했다.
길가메시가 훔바바를 무찌르러 가자고 할 때는 조목조목 반대하며 만류했던 엔키두는, 정작 훔바바를 잡은 길가메시가 훔바바의 애원에 측은함 내지는 죄책감을 느껴 살려주려고 하자 "후환이 두려우니 당장 죽여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전승에 따라서는 길가메시가 자비를 베풀어줄까 했지만 엔키두의 설득에 마음을 바꿔 훔바바를 죽였다고 하기도 하고, 엔키두의 반대에 화가 난 훔바바가 엔키두를 욕하자 엔키두가 그 자리에서 훔바바의 목을 쳐 죽였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이 일은 이후 엔키두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런데 엔키두는 이성 없는 짐승으로 지낼 시절, 훔바바와 친구였다고 한다. 이후엔 그 산에다 우투/샤마쉬의 신전을 지었다.
그 명성이 하늘까지 알려질 정도가 되자, 사랑과 풍요의 여신 이슈타르의 눈에 길가메시가 들어왔다. 이슈타르는 길가메시에게 구애를 하지만 길가메시는 엄청나게 기나긴 장문의 모욕적인 언사와 함께 그녀를 무시한다. 이때 이슈타르에게 퍼부은 언사는 "당신의 옛 애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내가 다 아는데 어떻게 사귀겠는가?"쯤 된다. 화가 난 이슈타르는 아버지인 아누에게 부탁해 하늘의 황소를 지상에다가 풀어달라고 애원한다. 아누는 반대했지만 자꾸 끈질기게 이슈타르가 들러붙자 어쩔 수 없이 황소를 투하한다.
하늘의 황소는 대지를 황폐하게 만들고 성을 부숴 많은 백성들이 고생하게 된다. 결국 길가메시와 엔키두가 나서서 하늘의 황소를 무찌르게 되는데, 길가메시는 신의 짐승이라 망설였으나 엔키두가 나서서 황소를 죽여버린다. 그걸 본 이슈타르가 기가 막혀 하며 저주를 퍼붓자 엔키두는 자신의 친구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할 것이라며 황소의 넓적다리를 잘라 이슈타르에게 던지며 그녀를 모욕한다.
결국 하늘에서는 황소의 죽음과 이슈타르의 징징으로 인해 회의가 열린다. 길가메시는 신의 피가 섞인지라 죽일 수 없었으므로, 결국 그들의 창조물인 엔키두가 죽는 걸로 결정이 된다. 결국 엔키두는 병에 걸려 죽게 된다. 이때 길가메시의 품에 안겨서 죽었다고 하며 이후 시체에서 벌레가 나올 때까지 그 시체를 길가메시가 안고 있었다고 한다. 애통해하던 길가메시는 죽음에 대해 무언가 느낀 게 있는지 불사를 추구하게 된다.
길가메시는 불사의 방법을 얻기 위해 우트나피쉬팀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여행 중에 시두리라는 이름의 여관 주인을 만났지만 여관 주인은 "그런 허무한 생각은 버리고, 차라리 궁궐로 돌아가 노는 게 낫다. 신들은 불로불사지만 그런 즐거움은 누리지 못한다"라고 했다. 그러나 길가메시는 그 충고를 무시하고 우트나피쉬팀의 거처를 수소문하여 찾아간다. 우트나피쉬팀을 찾아 애원하자 7일 동안 잠을 자지 않는다면 영생의 비법을 알려줄 수도 있다 하였으나, 길가메시가 마지막에 잠들어 버려서 실패로 돌아갔다. 그냥 깜박 잔 것도 아니고 며칠을 내리 잤다고 한다. 깜박 잠들었다면서 핑계 댈지 모른다며 우트나피시팀이 아내에게 길가메쉬가 잠든 시점에 빵을 만들게 하는데, 그 빵이 상할 정도로 오래 잤다고... 우트나피시팀 왈 "잠을 못 이기면서 어찌 죽음을 이기려 하는가."
그러나 길가메시가 불쌍해 보였던 우트나피쉬팀의 아내가 남편더러 길가메시에게 선물을 주라고 부탁했고, 아내의 부탁으로 우트나피쉬팀은 불로초가 있는 곳을 가르쳐준다. 불로초를 얻은 길가메시는 이 불로초를 그 자리에서 혼자 먹을 것이 아니라 우루크로 가져가서 모든 노인들에게 나눠주어 모두 회춘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연못에서 방심하며 목욕하다가 뱀이 불로초를 몰래 훔쳐 먹어 껍질만 남겨두고 도망가는 바람에,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우루크로 돌아와서 한탄만 실컷 하다가 잠이 든 길가메시는 꿈속에서 신들을 만나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만, 죽으면 저승의 왕이 될 수 있으니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말을 듣는다. 꿈에서 깬 길가메시는 자신의 여태까지의 행적을 돌에 새긴 후에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의연하게 죽는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인간에게는 필멸의 삶을 배정했고,‘
자신들은 불멸의 삶을 가져갔지요.
길가메시, 배를 채우세요.
매일 밤낮으로 즐기고,
매일 축제를 벌이고 춤추고 노세요.
밤이건 낮이건 상관없이 말이에요.
.....
이것이 인간이 즐길 운명인 거예요.
그렇지만 영생은 인간의 몫이 아니지요."
길가메시와 관련된 이 신화는 지금으로부터 4,000~3,600여 년 전에 점토판에 기록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길가메시가 실제로 출현한 시기는 약 4,800년 전쯤이라고 한다. (연도는 BC가 아니고 지금부터 이다.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우리 고조선이 세워진 시기쯤이 된다.)
최초로 도시국가가 출현할 시기 즈음이다. 농경이 활성화돼서 잉여 생산물이 생겨나고 사피엔스들이 그제야 도시국가들을 만들어내던 시기이다. 신화의 내용도 오래된 것이다.
옛날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시기에도 인간의 욕망은 지금과 같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권력을 갖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고, 힘이 세지고 싶고, 지혜로워지고 싶다.
그리고 미래를 알고 싶고 조금이라도 이 세상에 더 오래 살고 싶다. 신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들을 넘어서고 싶다. 유전공학과 생명공학이 길가메시 프로젝트를 완성시켜 줄지는 모르겠지만, '시두리'의 조언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잠시 여인숙에 들렀다가 가는 존재이고, 즐길 운명이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윤성용)은 상설전시관에 ‘메소포타미아실’ 을 신설하고 “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 전시를 개최한다. 세계적인 메소포타미아 소장품을 보유한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공동 기획하였다. 전시는 2022년 7월 22일부터 2024년 1월 28일까지 1년 6개월간 열린다.
“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은 2019년에서 2022년까지 운영한 이집트실, 2021년부터 현재까지 운영 중인 세계도자실에 이어 개최하는 세 번째 주제관 전시이다. 신설 역시 상설전시관에서 세계문화를 향유할 기회를 제공하려는 세계문화관 연차 운영계획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인류 최초로 문자를 사용해 당시의 철학과 과학을 후대에 전하며 인류 문명이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고대 문명으로 현대 사회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그러나 이집트 문명과 같은 다른 고대 문명에 비해 크게 조명 받지 못해 그러한 내용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이 전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주요 성취를 소개하되 전문적 배경 지식이 없이도 관람할 수 있도록 문자, 인장, 종교, 초상미술 등을 접점으로 내용을 구성했다.
〈수메르왕 구데아(Gudea)의 좌상(坐像)〉, 기원전 2100년경, 섬록암, 높이 93㎝,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도시 국가 라가쉬의 왕 구데아(기원전 2150-2125년 재위)를 섬록암으로 조각한 상이다. 구데아는 단순하고도 부드러운 선으로 표현되었으며 맞잡은 두 손과 커다란 두 눈은 사려깊고 경건한 성정을 나타낸다. 오른팔의 다부진 근육은 신체 건강한 통치자라는 점을 드러낸다. 구데아는 라가쉬의 신전 재건을 기념하려고 이를 비롯한 여러 조각상의 제작을 지시했다. 이 내요이 치마에 슈메르어롤 적혀있다. 구데아 왕의 상은 라가쉬의 신전에도 놓였다.
〈신(新)바빌로니아의 ‘사자 벽돌 패널’〉, 기원전 7~6세기, 높이 97.2㎝ - 점토에 유약을 바른 이 유물들은 당시 바빌론이 얼마나 화려하고 장대한 곳이었을지 웅변해 준다.(부분도)
이쉬타르 여신을 상징하는 사자가 표현된 벽돌벽의 일부이다, 청금석처럼 반짝이는 파란색 배경에 사자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표면에는 유약을 발랐다. 이 같은 사자상 120구가 나부쿠두리우쯔르 2세가 세운 아쉬타르 문에서 ‘신년 축제의 집’ 비트 아카투까지 이어지는 행렬 길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아쉬타르 문의 정면도 아디드 신과 마르둑 신을 상징하는 575구의 황소와 무슈후슈 용으로 꾸며져 있었다.
전시는 총 3부로 구성된다. 1부 ‘문화 혁신’ 은 도시의 탄생으로 시작한다. 노동이 분업화·전문화되고 신전을 중심으로 물품의 수합과 재분배가 이루어지면서 사제 계급과 정치 계급이 통제권을 갖는 위계 사회로 나아갔음을 그릇을 키워드로 해 설명한다.
쐐기문자의 창안은 메소포타미아가 이룬 대표적인 문화 혁신이었다. 문자로 교역과 거래의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추상적인 개념을 발전시키고 주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나갔다. 문자 창안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원통형 인장도 발명되었다.
전시에는 13점의 쐐기문자 점토판 문서와 11점의 인장을 선보인다. 작은 점토판에 빽빽이 담긴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희로애락을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각 점토판의 내용과 해설을 담은 키오스크를 별도로 배치하였다. 또 신상과 의례 물품을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신과 신전 건축, 의례 행위를 소개하였다. 거대한 신전을 짓고 그에 수반되는 다양한 형태의 예술품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 또한 문화 혁신의 한 부분이었다.
〈봉헌용 그릇〉, 기원전 약 2600-2350년, 초기 왕조 시대 후기, 닙푸르 출토, 방해석,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인안나 여신에게 바친다는 명문을 새긴 방해석 그릇이다. 이와 같은 봉헌용 그릇은 신심을 표현하고 소원 성취를 빌기 위해 신전에 바치는 물품이었다. 이처럼 뛰어난 품질의 그릇을 바치려면 수입한 돌과 솜씨 좋은 장인이 필요하므로 봉헌자들은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을 것이다.
“안안나께, 헤티의 아들이자 소석 상인 아카-엔림이[이 그릇을] 봉헌한다”
〈봉헌용 그릇〉, 기원전 약 2600-2350년, 초기 왕조 시대 후기, 닙푸르 출토, 방해석,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봉헌용 상〉, 기원전 약 2600-2350년, 초기 왕조 시대 후기, 돌, 메트로폴리탄박물관
경건한 자세로 선 남성의 모습을 한 봉헌용 상이다. 눈썹과 눈은 조개껍데기, 청금석 또는 다른 귀금속으로 상감 세공했을 것이다. 초기 왕조 시대에 일반적으로 착용했던 여러 겹으로 짠 치마를 입고 있다. 커다란 눈과 맞잡은 손은 신성에 압도되었다는 뜻이며, 봉헌자들은 신에게 존경을 표하는 의미로 신전 안에 이러한 값비싼 상을 바쳤다.
〈신전 앞 의례 장면을 새긴 원통형 인장〉, 기원전 약 3500-3100년,
후기 우륵 시대 , 자연 역청이 섞인 석회암,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신전 밑에 묻는 말뚝〉, 기원전 약 2900-2350년, 초기 왕조 시대 , 구리 합금,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닌막 여신의 신전을 재건하며 묻은 원통〉, 기원전 약 604-562년, 신-바빌리 시대 ,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현악기에 달았던 황소 머리 장식〉, 기원전 약 2600-2350년,
초기 왕조 시대 후기, 청동에 조개껍데기와 청금석 상감,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발락, 어머니 여신에아루루에게 바치는 노래〉,
기원전 약 19-16세기, 고-바빌리 시대,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이 점토판 조각은 아루루 여신에게 바치는 슈메르의 의례용 노래를 기록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노래는 연주에 사용한 악기의 이름을 따 ‘발락’이라고 불렀다. 출산의 여신 아루루의 권능을 찬양하고, 한 도시가 파괴된 것을 통탄하는 내용이다. 발락의 특징은 단어와 문구를 슬프고 가슴 아픈 듯한 가락으로 되풀이하는 것이다. 사제가 축제나 신전을 짓는 행사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압칼루 상〉, 기원전 약 9-8세기, 신-앗슈르 시대, 님루드 출토,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2부 ‘예술과 정체성’ 에서는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한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인장 역시 인장의 소지자가 섬기는 신과 글을 도안에 넣어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쓰였다.
우르의 왕실 묘에서 발굴된 장신구들은 착용자의 신분을 드러내거나 죽은 자가 지하세계에 내려갔을 때 힘을 보태기 위해 고가의 수입 재료를 포함한 재료의 물성에 따라 맞는 형태를 선택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상’ 에 대한 메소포타미아인들의 태도는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주제이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인물상을 만들 때 개별 인물의 개성적 특징을 본뜨는 것이 아니라, 지위와 업적에 걸맞은 이상적인 속성을 조합했기 때문에 개별 상의 생김새는 매우 유사하다. 구데아, 우르-남마의 상에는 누구의 상인지 밝히는 명문이 몸체에 남아 있어, 글과 상의 보완적인 관계를 잘 알 수 있다.
또 <나부쿠두르우쭈르(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명문을 새긴 원통>은 통치자의 군사적·종교적 공적을 적은 문자 기록이 통치자에게는 초상 미술만큼이나 중요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회 장면을 새긴 판 장식〉, 기원전 약 2600-2500년,
초기 왕조 시대 후기, 님루드 출토, 설화 석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연회와 술 바치는 장면을 묘사한 판 장식을 봉헌하는 것을 기원전 3000-2000년대에 메소포타미아 종교 활동의 한 방법이였다. 여기에는 대게 왕과 황비, 남자와 여자 사제, 시종들이 한자리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이 여러 단으로 묘사되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남긴 명문은 고대인들의 신앙생활과 의례를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보통 이런 용도의 부조에는 중간에 벽에 걸기 위한 구멍이 나 있다.
〈날씨를 관장하는 신과 정령 등을 새긴 원통형 인장〉, 기원전 약 1720-1650년,
고-시리아 시대, 시리아 출토, 적철광,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날씨를 관장하는 두 신 사이에 새 머리를 한 정령 한 쌍을 두고 그 위로 나무와 산양 두 마리, 날개 달린 태양을 새긴 원통형 인장이다. 개별 구성 요소에 이집트 문화의 영향이라고 해석될 수 있지만, 이러한 요소들을 조합하여 화면을 구성하는 것은 오히려 레벤트 지역(소아시아와 고대 시리아의 지중해 연안 지방)의 인장이나 상아제 조각에서 많이 보이는 특징이다.
〈신과 정렬을 새긴 원통형 인장〉, 기원전 약 12세기경, 중-앗슈르 시대,
벽옥, 대리석, 적철광, 메트로폴리탄박물관
〈경배하는인물을 새긴 원통형 인장〉, 기원전 약 16-15세기,
카슈 시대, 옥수, 대리석, 적철광, 메트로폴리탄박물관
〈결투 장면을 새긴 원통형 인장〉, 기원전 약 2700-2600년, 대리석,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인장에 새기는 도상과 양식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달라졌다. 결투 장면은 초기 왕조 시대에 많이 나타나는 주제이다. 주로 원통형 인장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인장을 굴리는 대로 화면이 끝없이 연장되면서 생동감이 더 살아나기 때문이다. 보통 맹수를 제압한 자가 앞다리나 뒷다리만으로 선 두 짐승 사이에 서서 뿔이나 다리를 잡아 꼼짝 못하게 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결투 장면을 새긴 원통형 인장〉, 기원전 약 2700-2600년, 대리석,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상자를 나르는 사람들과 여신을 새긴 원통형 인장〉, 기원전 약 2600-2500년,
초기 왕조 시대 후기, 대리석,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채무 변제 증서와 보관함〉, 기원전 약 20-19세기,
아나틀리아의 퀄테페 출토 추정,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앗슈르-나다가 캬리냐에게 빌링 은 9⅔ 마나를 갚아 채무가 없어졌음을 기록한 채무 변제 증서로, 함께 전시된 보관함은 점토판을 담는 봉투 역할을 한다 보관함에는 네 개의 원통형 인장이 찍혀 있다. 세 개는 상환을 확인한 증인 세 명의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은 9⅔ 마나를 돌려받은 카리냐의 아들 앗슈르-타브의 것이다 실제로 게약에 인장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자 모양의 부적〉, 기원전 약 3300-2900년, 후기 우륵-젬데트 나쯔르 시대,
메소포타미아 남부 출토, 대리석, 메트로폴리탄박물관
3부 ‘제국의 시대’ 에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대표하는 두 제국인 신-앗슈르(신-아시리아) 제국(기원전 약 911~612년)과 신-바빌리(신-바빌로니아) 제국(기원전 약 626~539년)의 대표적인 예술을 다루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후반기에 등장한 두 제국은 정복 전쟁과 강력한 통치력 못지않게 왕성한 예술 활동으로 큰 족적을 남겼다.
신-앗슈르 제국은 궁전 내부를 장식한 아름다운 석판 부조로 이름이 높았다. <조공 행렬에 선 외국인 마부>는 당시의 정세를 정교한 조각 기술로 담은 작품이며 <강을 건너라고 지시하는 앗슈르 군인> 등 여러 부조에서 상이 현실을 대리하는 힘을 가진다는 앗슈르인들의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신-바빌리 제국은 수천 년 전통의 벽돌 제작 기술을 한층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수도 바빌리(바빌론)에 당시 세계가 경탄할 만한 건축물을 세웠다. 메소포타미아 건축을 통틀어 가장 잘 알려진 이쉬타르 문·행렬 길을 장식했던 <사자 벽돌 패널> 2점이 전시된다. 전시의 마지막은 이 모든 성취의 바탕에 소박한 벽돌 한 장이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장식 벽돌로 끝맺는다.
〈수로에 관한 기록〉, 기원전 약 2600-2350년, 초기 왕조 시대 후기, 납푸르 출토,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이라크 남부에서는 농사에 필요한 강수량이 모자랐기 때문에 농부들은 수로와 저수지를 만들어 인근의 강에서 경작지로 물을 끌어왔다. 인안나 신전에서 발굴된 이 점토판에는 슈메르의 종교도시 닙푸르를 가로지르는 수로를 보수하고 수로가 성공적으로 기능하기를 인안나 여신에게 기원하는 내용이 슈메르어로 적혀 있다.
〈황소 장석 그릇 조각〉, 기원전 약 3300-2900년, 후기 우룩-젬데트 나쯔르 시대,
메소포타미아 남부 출토, 녹니석이 섞인 동석,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동석(凍石)으로 만든 그릇의 조각으로 황소 형상을 장식해 멋을 더했다. 황소들이 줄기어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은 가축으로 길든 동물의 질서 정연함을 넌지시 드러내는 듯하다. 황소의 몸은 다양한 높낮이의 부조로 표현했고, 머리는 황소를 보는 사람을 향하도록 한껏 각도를 들어 아주 입체적으로 조각했다. 이런 모양의 그릇은 주로 신성한 장소에 봉헌되었다.
〈테두리가 비스듬한 그릇〉, 기원전 약 3300-3100년, 후기 우룩 시대, 토기, 메트로폴리탄박물관
〈황소 머리 장식〉, 기원전 약 2100-2000년, 신-슈메르 시대, 동석 또는 사문석,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야생의 황소와 가축화된 황소는 메소포타미아 예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로, 조각, 인장 등 다양한 장르에서 힘과 생식력을 상징한다. 황소머리 장식은 그릇, 가구, 악기부터 건축과 기둥머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건을 장식하는데 쓰였다.
〈맥아와 보릿가루 수령 내역을 적은 장부〉, 기원전 약 3100~2900년, 젬데트 나쯔르 시대, 우륵 출토 추정,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 문자는 농업을 전문화하고 상업을 촉발했으며 계급을 분화를 볼 수 있다.
베개 모양의 점토판 앞뒷면에 초기 슈메르 쐐기문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점토판에는 양조업자로 보이는 쿠심이라는 사람이 수령한 보릿가루와 맥아의 수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기록은 경제활동과 관련된 것이 많은데, 숫자 기호와 그림 문자를 조합해 간단한 거래 내역을 적었습니다. 그림 문자는 그림의 대상만을 지칭하는 방식으로 형용사나 부사 같은 문법적 요소가 없는 문자 발전의 초기 형태를 보여줍니다.
〈파종 축제 때 바칠 동물의 수를 적은 장부〉, 기원전 약 2043년경,
우르 제3왕조 시대, 드레헴 출토,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기원전 2043년경 바빌리에서 열린 아키투 파종 축제에 참여한 40여 명이 신에게 재물로 올릴 동물의 종류와 수를 정하여 그 내역을 상세하게 기록한 장부이다. 동물의 종류는 살찐 황소, 살찐 양, 최상급의 살찐 양, 양, 다 자란 염소로 구분되어 있다. 지금도 회계 분야에서 사용되는 일람표의 아주 이른 사례이다.
〈구누라 여신의 옥좌를 위한 물품 목록〉, 기원전 약 2112-2004년,
우르 제3왕조 시대, 닙푸르 출토,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5단 곱셈표〉, 기원전 약 20-16세기, 고-바빌리 시대,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수학과 회계는 아주 일찍부터 메소포타미아의 필기 문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후기 우륵 시대(긴원전 약 3500-3100년)에는 60진법과 10진법을 같이 쓰는 중량 측정 체계가 완성되었는데, 이 계산법은 이후 수천 년 동안 이용되었다. 이 점토판에는 1×5 =5, 2×5=10으로 이어지는 5단 곱셈표가 적혀있는데, 이와 같은 곱셈표는 매일 계산을 해야하는 필경사에게 유용한 도구였다.
〈판사들의 판결문〉, 기원전 약 20-19세기, 중기 청동기 시대,
아나톨리아의 퀼터페 출토,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고대 앗슈르의 무역 식민지였던 카룸 카네쉬에서 반견된 이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판결이 앗슈르어로 기록되어있다. “쿠룹-이쉬타르는 은 ⅓마니와 2½ 긴 때문에 샤마쉬-타파이를 고소하려고 한다. 난니야, 까타툼, 우쭙-아쉬쿰이 이 사건의 판사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인류 최초의 법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변호사는 존재하지 않아 당사들이 자신의 소송을 왕이나 그 측근에게 직접 홋 하였다.
〈마르둑의 찬가〉, 기원전 약 1000-1년, 신-바빌리 시대,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바빌리의 수호신 마르둑을 찬양하는 노래를 새긴 점토판이다. 단정한 글자체로 오래전에 사라진 슈메르어와 당시에 쓰던 악카드어 문자로 번역한 찬가를 한 줄 한 줄 번갈아 가며 적었다. 이 점토판은 애가(哀歌)를 부르는 가수의 서재에서 발견된 것으로 추정된다. 애가 가스는 고대의 문학과 과학 문헌을 필사하고 설명을 덧붙이는 의례 전문가이기도 했다.
〈슈메르어-악카드어 가축 용어 목록〉, 기원전 약 500-1년,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처방전〉, 기원전 약 9-7세기, 신-앗슈르 시대,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악카드어로 적은 신-앗슈르 시대의 의료 기록이다. 가로선으로 내용이 구분되어 있는데 첫 번째 칸은 파손이 심해 내용을 판독할 수 없지만 두 번째 칸은 귀 치료를 위한 처방전이, 세 번째는 ‘유령의 손’ 증세, 즉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의 처방전이 쓰여 있다. 쐐기문자로 기록된 의료 관련 문서에는 의학·약리학용어, 식물, 무기물, 동물에서 추출한 원료를 이용한 치료 방법이 자세히 기술되어있다.
〈승계와 상속에 관한 대호를 기록한 문서〉, 기원전 547년경, 신-바빌리출토 추정,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승계와 상속에 관한 부자의 대화가 바빌리어로 기록되어있다. 가장인 나니누는 아들 벨-키찌르가 그의 아내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입양하겠다고 요청하는 것을 거절한다. 나니누는 입양한 아이가 가문의 유산을 물려받는 것은 안된다며, 오직 벨-카찌르의 생물학적 자녀와 핏줄만 유산을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유산 상속은 예나 지금이나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였다.
〈수호 여신 라마의 비〉, 기원전 약 1307-1282년,
카슈 시대, 메소포타미아 남부출토, 설화석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신격을 상징하는 뿔 모양 머리 장식을 갖춘 라마 여신을 얕은 부조로 새긴 비다, 두 팔을 들어 위계가 더 높은 신에게 남성을(보통은 왕을) 데려가는 ‘중재의 신’으로서 경건한 모습을 표현했다. 카슈 시대(기원전 1595-1155년)의 나지-마룻타쉬 왕이 인안나에게 바치는 슈메르어 명문이 치마에 가득 새겨져 있다. 이 비는 우룩의 에안나 신전 지구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쉬타르 알현 장면을 묘사한 원통형 인장〉, 기원전 18-17세기, 고-바빌리 시대, 적철광, 메트로폴리탄박물
오른손에 철퇴를, 왼손에 초승달 모양의 칼을 든 이쉬타르 여신의 모습을 세 줄의 명문과 함께 인장에 새겼다. 이쉬타르의 어깨에서도 무기가 솟고 있다. 이쉬타르의 앞에는 곤봉을 든 남자가 단에 올라 서 있다. 남자의 뒤에 서 있는 여신이 간청하는 모습으로 이쉬타르에게 그를 소개하고 있다. 인장의 주인을 알려주는 명문에는 “피티툼, 이쉬메신의 아들이며 네르갈 신의 하인”이라고 적혀 있다.
〈이쉬타르 신상에 기도하는 장면을 새긴 원통형 인장〉, 기원전 9세기 후반-8세기 초반,
신-앗슈르 시대, 옥수(석영)광, 메트로폴리탄박물관
〈구데아 왕의 상〉, 기원전 2090년경, 신-슈메르 시대, 기로수 출토 추정, 섬록안,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도시 국가 라가쉬의 왕 구데아(기원전 2150~2125년 재위)를 섬록암으로 조각한 상입이다. 구데아는 단순하고도 부드러운 선으로 표현되었으며 맞잡은 두 손과 커다란 눈은 사려깊고 경건한 성정을 나타낸다. 오른팔의 다부진 근육은 신체 건강한 통치자라는 점을 드러낸다. 구데아는 라가쉬의 신전 재건을 기념하려고 이를 비롯한 여러 조각상의 제작을 지시했다. 이 내용이 치마에 슈메르어로 적혀 있다. 구데아 왕의 상은 라가쉬의 신전에도 놓여있다.
〈바구니를 인 우르-남마 상〉, 기원전 약 2112-2095년, 우르 제3왕조 시대, 구리합금, 메트로폴리탄박물관리
〈핏-이쉬타르의 공적을 적은 봉헌용 원뿔〉, 기원전 약 1934-1924년,
이신 라르사 시대,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두상〉, 기원전 8세기 후반-7세기 초반, 신-바빌리 시대, 구운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초인적인 존재로 생각되는 이 작은 두상은 눈매가 깊고 눈썹이 두드러지며 수염이 풍성하여 앗슈르 왕의 표준 이미지와 유사하다. 끝단을 접어 올린 관은 메소포타미아 조각에 흔히 나타나지만, 관만 바꿔 씌운다면 신과 옹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인이 다른 재료로 더 큰 상을 만들기 전에 제작해 본 견본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치자의 두상〉, 기원전 2300-2000년, 초기 청동기 시대,
이란 또는 메소포타미아 출토, 구리 합금,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우아하게 정돈된 턱수염과 잘 다듬어진 콧수염, 머리에 터번을 두른 남자를 실제 인물의 크기로 만들었다. 눈은 귀한 재료로 상감되어 있었을 것이다. 구리 주조라는 혁신적인 기술과 값비싼 재료를 쓴 것으로 보아 통치자나 지배층에 있는 사람이 제작을 의뢰하였을 것이다. 인물의 개성적 특징을 이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한 초상 조각은 메소포타미아 예술에서 매우 드물다.
〈우르왕실묘의 부장품(금귀걸이·초커와 목걸이 구슬·은판·목걸이와 팔찌)〉,
기원전 약 2600-2500년, 초기 왕조 시대 후기, 금·황금석·홍옥수, 메트로박물관)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우르에서 2000기가 넘는 무덤이 1920년대에 발굴되었다. 이 가운데 16개 무덤에는 금, 은, 청금석, 홍옥수로 만든 장신구, 준보석으로 만든 원통형 인장, 금제그릇, 악기와 같이 화려한 부장품이 묻혀있었다.
우르의 1237호 무덤은 시종 74명이 묻힌 채 발견돼 ‘거대한 죽음의 유구’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중 68명은 여성으로, 이 장신구들은 그들이 착용했던 것이다. 목걸이는 금과 청금석을 번갈아 배열했다. 은핀의 머리도 청금석으로 만들었다. 이 같은 핀은 옷을 여미거나 인장과 작은 장신구를 옷에 고정하는 데 쓰였다.
〈낫칼〉, 기원전 1307-1275년, 중기 앗슈르 시대, 메소포타미아 북부 출토, 청동,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중기 앗슈르 왕 아다드-니라리 1세(기원전 1307~1275년 재위)의 명문이 칼날 양면에 있는 청동제 낫칼이다. 메소포타미아 예술에서 곡선 형태의 칼은 권위를 상징했기 때문에 신이나 왕이 칼을 든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이 칼은 실제 전투용이 아니라 아다드-니라리 왕이 의례 때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명문: “앗슈르의 왕 엔릴-니라리의 아들인 앗슈르의 왕 아릭덴일리의 아들, 우주의 왕 아다드-니라리의 궁전”
〈앗슈르나찌르아플리 2세의 명문을 새긴 쐐기문자 석판〉,
기원전 약 883-859년, 신-앗슈르 시대, 남루드 출토, 설화 석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앗슈르나찌르아플리 2세 때의 석판으로 왕의 여러 칭호와 군사적 위업을 적고, 님루드에 새로 지은 북서 궁전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명문이 궁전의 알현실과 방의 입구를 표시하는 부재 등 님루드에서 여러 건 확인되어 ‘표준 명문’이라 불린다. 앗슈르나찌르아플리 2세는 전쟁을 치르면서 엄청난 공물과 전리품을 거둬들여 앗슈르를 크게 부유하게 만들었습니다.
〈맹견상〉, 기원전 1000년대 중반. 카슈 시대, 이라크 남부 출토, 구운 점토에 채색, 메트로폴리탄박물관
개는 메소포타미아 예술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점토로 빚어 구운 이 맹견 상은 내부가 비어 있고 표면에 칠했던 안료가 일부 남아 있다. 카슈 왕조의 장인들은 점토를 다루는 데 능했는데 근육질의 몸통과 얼굴의 주름, 실을 꼰 형태의 목줄에서도 그 기술을 엿볼 수 있다. 머리 위의 구멍은 부대를 상징하는 깃발을 꽂는 용도로 썼을 가능성이 있다.
〈조공 행렬에 선 외국인 마부〉, 기원전 약 721-705년, 신-앗슈르 시대,
코르사바드 출토, 설화 석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말 두 필을 고삐로 끄는 마부를 묘사한 부조이다. 마구의 정교함이 돋보이는데, 굴레에 앗슈르식 장미 장식이 있고 이마 장식에서 술이 내려오며 머리 위에는 근사한 문장(紋章)이 보인다. 마부는 차림새와 머리 모양으로 보아 앗슈르인이 아닌 외국인이다. 이 부조는 앗슈르에 조공을 바치는 외국 사절단의 모습을 담은 큰 조각의 일부이다.
〈강가를 따라 말을 끄는 기병〉, 기원전 약 704-681년,
신-앗슈르 시대, 니네베 출토, 설화 석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강을 건너라고 지시하는 앗슈르 군인〉, 기원전 약 668-627년,
신-앗슈르 시대, 니네베 출토, 설화 석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사자 벽돌 패널〉, 기원전 약 604-562년 신-바빌리 시대, 바빌리 출토, 구운 점토에 유약,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사자 벽돌 패널〉, 기원전 약 604-562년 신-바빌리 시대, 바빌리 출토, 구운 점토에 유약,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이쉬타르 여신을 상징하는 사자가 표현된 벽돌 벽의 일부이다. 청금석처럼 반짝이는 파란색 배경에 사자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표면에는 유약을 발랐다. 이 같은 사자상 120구가 나부쿠두리우쭈르 2세가 세운 이쉬타르 문에서 ‘신년 축제의 집’ 비트 아키투까지 이어지는 행렬 길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이쉬타르 문의 정면도 아다드 신과 마르둑 신을 상징하는 575구의 황소와 무슈후슈 용으로 꾸며져 있었다.
〈아다드-슈마-우쯔르 왕의 명문을 새긴 벽돌〉, 기원전 약 1216-1187년, 카슈 시대,
님푸르 출토, 구운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카슈 왕조 아다드-슈마-우쭈르 왕의 명문을 찍어 새긴 벽돌로 닙푸르의 최고 신 엔릴을 위해 에쿠르 신전을 재건하면서 신에게 올리는 왕의 글이 쓰여 있습니다. 명문은 오래전에 사어가 된 슈메르어로 작성했고 쐐기문자 서체 또한 의고형을 택했습니다. 이러한 고풍스러움이 신성한 공간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카슈의 왕들은 대대로 엔릴 신을 특별하게 생각했습니다.
〈벽돌〉, 기원전 9세기, 신-앗슈르 시대, 님루드 출토, 구운 점토에 유약,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앗슈르 왕세자〉, 기원전 약 704-681년, 신-앗슈르 시대, 니네베 출토, 설화 석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전시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네 편의 영상도 준비했다. 전시에 출품된 인장을 실제로 사용하여 인장 찍는 법을 알려주는 영상과 그 인장에 대한 큐레이터의 상세한 설명 영상이 1부에 상영된다. 전시품을 대여한 메트로폴리탄박물관 고대근동미술부의 킴 벤젤(Kim Benzel) 부장과 나눈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한 이야기도 2부에서 들을 수 있다. 영상실에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세계관과 예술적 성취를 테마로 한 4미터 높이의 미디어큐브가 관람객을 맞는다. 메소포타미아를 상징하는 땅과 강,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인장 그리고 일상을 빼곡하게 기록한 쐐기문자가 담겨 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손바닥 안의 작은 점토판에 세밀하고 집요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적어 놓았다.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오늘의 우리 이야기와 놀랄 만큼 닮아 있어 수천 년의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아주 먼 동료 인간과 오늘의 나를 잇는 희로애락의 이야기가 큐브 영상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고대근동학회와 협력하여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지명과 인명을 쓰는 대신 악카드어 원어의 발음에 최대한 가깝게 표기하였다. 악카드어는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보편적인 공용어로 사용된 언어이다. 전시는 무료이며 전시 설명은 8월 16일부터 주중 하루 2회(13:00, 15:00), 주말 3회(11:00, 13:30, 15:00) 진행한다.
국내에서는 물론 국외에서도 직접 보기 어려운 메소포타미아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이번 전시가 인류 역사에 큰 걸음이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문화적 혁신과 뛰어난 기술, 그리고 그들이 남긴 생각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자료출처 및 참고문헌: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정보, 조선일보 2021년 12월 27일(월) 〈최영미의 어떤 詩(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Daum, Naver 지식백과》]
첫댓글 무원 김명희 화백
허무를 바탕으로 한 現世주의, 길가메시의 서사시! 기원전1600년전의 詩가 정말 절 매료시키는군요.
고봉산 정현욱 님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에서 발상한 메소포토미아 문화가 매우 찬란했다는것은 익히 배웠지만 이토록 정교한 유물이 여태 전해지고 있다는게 놀랍네요
길가메시도 실존인물이고 그도 한 통치자로서 불멸의 영생을 원했겠지만 엄연한 죽음앞에서 될대로 되라는 심정보다 살아있을때 실컷 즐기라는 뜻의 시를 남겼기에 그의 불멸의 꿈은 이루어진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