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 4호선 상록수역,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딴 역명이다.
상록수역에서 10여분 거리에 최용신기념관이 있다. 최용신, 이야기 속을 거닐어본다.
1935년 동아일보는 창간 15주년 기념사업으로 농어촌을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을 공모한다. 이때 심훈(沈熏,1901-1936)은 양친이 사는 충남 당진으로 낙향해 손수 필경사(筆耕舍)를 짓고 창작에 몰두하던 중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샘골(현 안산시 본오동)에서 헌신적인 농촌계몽운동을 하던 최용신이 죽었다는 신문 잡지의 기사를 접한다. 샘골을 직접 방문하여 조사한 심훈은 최용신 선생의 생애에 눈물을 흘리며 깊이 감동한다. 최선생의 숭고한 생애도 생애이지만, 샘골에서의 상황은 자신이 찾고 있던 민족의 모습이기도 했다. 일제 검열의 한계 내에서 최용신 선생을 여주인공 채영신으로, 샘골은 민족의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청석골로 구성한 <상록수>가 공모에 당선되어 6개월 동안 총 127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된다.
제목 <상록수>는 최용신 선생이 학원 앞마당에 직접 심고 가꾼 향나무 등의 상록수를 보고 정하였다고 전한다.
<상록수>의 모델이 된 최용신(崔容信,1909~1935)은 농촌계몽운동으로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이다. 최용신 선생은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명사십리와 해당화로 유명한 바닷가 마을로 소설 <상록수>에서도 그 아름다운 풍광이 나온다.
『영신이 떠나는 날 아무리 기다려도 동혁은 오지 않는다. 달 밝은 밤 영신은 바닷가 해변을 거닐다 백사장에 앉아 손풍금을 뜯는다. 그러다 "하나님, 일과 사랑과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택하여 주시옵소서." 독백을 한다. 아니 호소를 한다. 이 때 동혁이 등 뒤에서 다 듣고 있다. 그 곡조 한곡만 더 타주세요... 둘은 백사장에 다정히 앉는다.』
원산에서 10리쯤 떨어진 이곳은 일찍이 기독교 전래와 더불어 교회, 학교를 운영하는 등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따라서 선생도 근대교육에 쉽게 접할 수 있었다. 1928년 함남 원산의 루씨여고보(樓氏女高普)를 졸업하고 서울 협성여자신학교(協成女子神學校)에 진학하여 농촌사회지도교육과의 황에스더(黃愛德)교수를 만나게 된다. 농민과 함께 생활하면서 문맹 없는 농촌, 잘사는 농촌 건설이 선생의 이상이었는데, 직접 농촌에 들어가 몸소 체험하고 실천하는 것을 강조한 황교수를 통해 선생은 농촌계몽운동에의 뜻을 더 확고히 하게 된다. 방학을 이용한 봉사활동, 실습 겸 농촌계몽운동을 통하여 가난과 무지가 만연한 피폐한 농촌은 선생으로 하여금 학업을 중단케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학업을 중단한 선생은 1931년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천곡(泉谷, 일명 샘골)에 YWCA농촌지도원으로 파견되어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당시 무허가였던 천곡학원(샘골학원) 인가뿐만 아니라 교사를 신축하여 아동은 물론 청년, 부녀자 등을 대상으로 야학을 통한 문맹퇴치에 노력을 기울였다. 지역 주민들의 냉소와 비관도 선생의 노력과 열정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기 시작했다.
선생은 애국심을 심어주는 교육활동은 물론 사회 발전에 필요한 운동 등을 전개해 나갔고, 농촌진흥운동에 관하여 토론을 정기적으로 열었으며 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선생은 새로운 지식과 학문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1934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고배여자신학교(神戸女子神学教)에 입학하여 학업에 정진 중이던 선생은 각기병에 걸려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샘골로 돌아온 선생은 병든 몸을 이끌고 농촌계몽운동을 계속하였으나, 일본 제국주의 간섭이 심해지자 YWCA가 샘골학원 보조금 지원 중단을 선언한다. 선생은 여성 잡지 <여론>에 ‘농촌의 하소연’이란 제목으로 샘골을 살리기 위한 사회 각계의 지원을 호소하지만, 반응은 냉담하였다. 선생은 과로와 장중첩중(장이 꼬이는 병)으로 수원도립병원에 입원하지만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1935년 1월 23일, 선생은 25년 6개월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영원한 안식처를 찾아 떠나고 만다.
생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샘골의 영원한 친구이자 동반자였던 최용신 선생, 그녀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천곡강습소를 영원히 경영하여 주십시오. 김군과 약혼한 후 십 년 되는 금년 사월부터 민족을 위하여 사업을 같이 하기로 하였는데 살아나지 못하고 죽으면 어찌하나.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 가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어머님을 두고 가매 몹시 죄송하다. 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전보하지마라. 유골을 천곡강습소 부근에 묻어주오.”
최용신 사망은 마을 주민에게 커다란 충격이자 슬픔이었다. 주민들은 시신이 안치된 수원도립병원으로 달려가 시신운반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등 그녀의 희생적인 활동에 최소한 예의를 다하였다. 장례식은 비통함 속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샘골강습소 학생들은 상주로서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묘지는 강습소 뒤편 양지바른 언덕(일리 공동묘지)에 잡았다.
『소설 속......
학생계몽운동 참가자를 위로하는 다과회에서 첫 번째 체험담을 발표하는 고등농업학교 학생 박동혁군, 지막 순서로 여자신학교 학생 채영신이 나와 박동혁군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한다는 의견을 발표하면서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시작된다.』
소설 속에서 박동혁 군은 김학준이며 채영신 양은 최용신이다. 김학준과 최용신의 사랑은 소설보다 더 소설적이다. 김학준은 최용신의 원산 고향 뒷집에 살았다. 1926년에 약혼한 이들은 10년 뒤 결혼해 함께 못 배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기로 약속했다. 10년을 몇 달 앞두고 김학준은 동경대학 재학 중 약혼자의 부음을 들었다. 김학준은 무너지는 가슴으로 샘골로 와 최용신의 관에 자신의 외투를 벗어 덮어주며 목 놓아 울었다. 장례식에는 4,50리 밖에서까지 수백 명의 촌사람들이 찾아와 상여 뒤를 따랐다. 최용신 선생이 세상을 뜨자 많은 기사가 나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 중 하나가 1935년 3월 2일자 조선중앙일보에 ‘썩은 한 개의 밀알, 브나로드의 선구자 고 최용신 양의 일생’이란 기사였다. 시인 강승한의 弔詩(조시)도 1935년 6월 19일자 《기독신보》에 실렸다. 최용신은 <상록수>로 유명해지기 이전에 이미 브나로드 운동을 하며 유명 인사가 되어있었다. 브나로드(Vnarod)운동이란 1931년 〈동아 일보〉사에서 전개하기 시작한 농촌계몽운동이다. 이 브나로드라는 말은 러시아 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인데,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의 귀족 청년과 학생에 의해서 전개된 농촌운동이다. 1937년 김학준은 동경에서 귀국하여 함흥에서 선생으로 있을 때, 길금복과 결혼하게 된다. 김학준은 보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전수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함경남도 영생고등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최용신과 굳게 약속한 농촌운동을 계속하던 중, 조선어학회사건으로 3년 6개월 형을 받아 살다가 1945년 6월에 출옥하였다. 최용신 선생이 세상을 떠난 이후 1962년 부인 길금복과 함께 처음으로 샘골을 방문한 김학준은 그 후 천곡 고등농민학원의 이사장을 지내는 등 교육사업과 추모사업을 이어나갔다. 성균관대 교수, 동국대 교수, 광주제일감리교회에 입교하여 장로가 되었으며, 조선대 교수와 조선대 부총장까지 역임하였다. 2남 3녀를 둔 김학준이 죽음에 이르러서는 “내가 죽거든 최용신 옆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족들은 그 유언에 따라 일리 공동묘지에 있던 최용신의 묘를 옮길 때 김학준의 묘도 그 옆으로 옮겼다. (당시 논란이 좀 있었다함)
남편을 옛 애인 곁에 묻어준 미망인 길금복 여사...... ‘그분의 육신은 나와 함께 살았지만 정신은 최용신 선생에게 더 가까이 가 있었기에 이곳에 모시는 것이 옳을 듯하다’고 말한 길 여사는 후에 미국으로 떠났다한다.
죽어서나마 약혼자 곁에 나란히 누운 두 묘
정부에서는 최용신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