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우리 모두가 사신, 평화와 우정의 가교를 잇자
조선통신사 걷기행사 마지막 날인 4월 21일, 아침 8시에 숙소 인근에 있는 유명한 설렁탕집에서 아침을 들고 9시에 동래구청이 제공한 버스로 역사문화탐사에 나섰다. 일본 측 참가자 일부는 비행기편으로 귀국길에 오르고.
먼저 찾은 곳은 동구 범일동 도로변에 있는 영가대,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을 향해 배를 띄우면서 해신제를 지낸 곳이다. 때마침 오늘(4월 21일) 오후 3시에 부산광역시 주관으로 영가대 옆에 조선통신사 역사관 개관이 있을 예정이어서 더 뜻 깊은 탐방이 되었다. 관계자의 호의로 역사관 내부를 둘러 볼 수 있어서 더욱 좋았고.
어떻게 우리 일행이 조선통신사 한일우정걷기행사를 마치고 부산에 도착한 때에 맞춰 개관하게 되었을까, 서울에서부터 걸어온 한일 양국의 평화와 우정을 다지는 민간사절이 개관에 앞서 이곳을 거쳐 간 것은 역사관의 개관을 축하하고 격려하는 깊은 의미를 지녔다고 하겠다. 역사관 개관을 주관한 관계당국도 그런 섭리가 담긴 줄은 미처 알지 못하리라.
역사관 안의 전시자료에는 1층에 '통신사, 신의를 교환하다', '조선과 일본의 평화교류', '영남의 주요길목, 영천', '통신사의 출항지, 부산', '한일 선린외교의 상징, 영가대' 등의 제목으로 조선통신사의 역할과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내용들이 소개되어 있고 2층의 문학관에는 시가 등의 문학작품과 일본의 쓰시마, 오사카, 교토. 에도 등을 통신사들이 지나가던 모습을 전시하고 있다. 의학과 문화교류의 내용, 조선통신사 정사와 수백 명의 통신사 일행이 탔던 선단의 모습을 그린 그림도 있고.
전시된 문학작품의 시가 중 '일동장유가'를 적었다.
'황산역에서 말 갈아타고 영가대 올라가니
동남의 요충이요 부산 바다의 입구로다
성은 견고하고 여염집도 장할시고
왜관과 절영도는 팔짱을 낀 듯 둘러싸고
그 밖은 가없는 큰 바다 하늘에 닿아 있고
그 안은 호수처럼 아늑하고 광활하다'
9시 40분부터 30여 분 간 영가대에 머물며 통신사들이 선린우호를 다진 상징적인 의미를 담아 기념사진을 찍은 후 태종대로 향하였다. 태종대에 이르니 날씨는 화창하고 찾는 이들이 많다. 순환열차를 타려면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기에 걸어서 올라가기로 하였다. 20일째 걷기로 숙달되어서인지 꽤 긴 언덕길을 걸어가는데도 힘든 기색이 없다.
올라가는 길에 비에 새긴 부산시민헌장을 살폈다.
'가야와 신라의 숨결 속에 낙동강과 금정산의 슬기가 담긴 부산은 민주의 새 역사를 일궈낸 자유의 도시이다. 대양의 관문이며 대륙의 교두보인 동북아시아의 중심에 우뚝 서서 인재와 자원을 모으는 역동의 해양도시, 진취적 기상으로 미래를 개척하여 지역번영과 인류평화에 이바지할 것이다.'
활기 넘치는 부산시내와 맑은 날이면 대마도를 조망할 수 있다는 전망대에서 넓은 바다와 한가롭게 움직이는 배들을 바라보며 매장 직원에게 대마도를 식별할 수 있느냐 물으니 맑은 날에는 볼 수 있지만 오늘은 안개가 끼어서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일본인들에게 직선거리로 46km인 대마도 쪽 방향을 일러주고.
11시 10분부터 태종대 순환도로를 한 바퀴 걸으니 한 시간 20분이 소요된다. 걷기행사의 뒤풀이로 적당하게 걸은 셈. 점심을 들기 위해 주차장에 대기 중인 버스에 올라 시내 중심부로 향하였다. 용두산 공원 부근의 부산숯불갈비집에서 삼겹살과 맥주를 곁들여 점심식사를 하고 나니 오후 2시가 넘었다. 한국 측 참여자는 대부분 식당에서 작별인사를 한 후 기차와 버스 편으로 서울과 대구, 광주 등지로 향하였다.
나는 부산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간 즐거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를 큰 소리로 외치고 아내는 '돌아와요, 부산항'을 일본어로 부르며 석별의 정을 나누기도.(아내가 부른 노래는 대만 가수가 불러서 일본인들에게 더 잘 알려진 개사곡이다.)
つばきさく 春なのに あなたは 歸らない
츠바키사쿠 하루나노니 아나타와 카에라나이
동백꽃 피는 봄이건만 당신은 돌아오지 않네
たたずむ 釜山港に 淚の雨が降る
타타즈무 부산항니 나미노 아메가 후루
잠시 멈춰서는 부산항에 눈물의 비가 내린다
** あつい その 胸に 顔 うずめて
아츠이 소노 무네니 카오 우즈메테
뜨거운 그 가슴에 얼굴을 묻고
もいちど 幸せ 咬みしめたいのよ
모이치도 시아와세 카미시메타이노요
한번 더 행복을 음미하고 싶어
トラワヨ プサンハンへ 逢いたい あなた
돌아와요 부산항에 아이타이 아나타
만나고 싶은 당신
(원곡인 조용필의 노래)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 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부산역 앞에서 내린 일행 중 한동기 선생과 최영미, 처제(김혜명)는 열차를 타러 가고 나는 아내와 함께 지하철을 이용하여 사상역에 내려 광주행 고속버스를 탔다. 3시 50분에 출발하여 광주에 도착하니 저녁 7시, 부산의 일행들이 저녁식사를 할 시간이다. 일본인들의 다수는 내일 오후 3시에 고속페리편으로 후쿠오카로 떠나고 일부는 비행기편으로 인천 또는 김해에서 출발하게 된다. 체육진흥회 선상규 회장과 스탶, 고양문 교수, 신향순 여사는 끝까지 남아 이들을 전송하고. 모두들 평안히 가시라.
1997년에 아내와 함께 '회상의 열차'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러시아의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한 고려인들의 고달픈 삶의 역정을 돌아본 적이 있다. 그때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열차 안에서 러시아에 살고 있는 세계적인 작가 아나톨리 김이 조국을 떠난 교민들이 조국에 대하여 느끼는 소회를 '나의 삶과 조국'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내가 처음 한국에 대하여 관심과 사랑을 느낀 것은 노래에 연유합니다. 모든 노래에는 조국을 떠난 자의 심금을 울리는 가락이 있습니다. 조국을 떠난 자들이 조국을 잊을 수 없어 부르는 노래들이 그들의 삶의 근원에 대하여 생각하게 합니다. 미국이나 중국, 일본에서 사는 동포들을 볼 때 그들은 한국의 아이디어를 지니고 간 사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외국에서 성취한 성공은 동포들에게 드리는 선물이 됩니다. 내가 러시아의 문화와 흐름 속에서 글을 쓴 것이 결과적으로 한국의 영광과 발전에 공헌한 것이 될 것이므로 재 삶은 기쁨에 넘칩니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한국과 일본의 아이디어를 지니고 걸은 사신들이다. 아내는 등에 새긴 페난트에 평화와 우정을 담았고 나는 희망과 전진을 내걸었다. 어떤 이는 선린우호를 적었고 어떤 이는 서로 사랑하자고 썼다. 우리가 소박하게 다지고 염원한 이 모든 소망들이 한국과 일본은 물론 세계에 전파되는 큰 열매로 자라기를 기원하며 글을 맺는다. '조선통신사 한일우정걷기 참여자 만세'
추신, 기준서 전 그리스도대학교 총장이 다음과 같은 축하메시지를 보내왔다.
김 교수님;
결국 일 내셨군요.
사모님, 처제와 함께^^
열다섯 명의 한국 팀 완주자 속에 포함되었으니 대단하십니다.
강은수 원장 말처럼, 도시인은 한 정거장도 걷기를 싫어하는데 말입니다.
긴 행로에 쇠잔한 에너지를 잘 보충하십시오.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도중에 여러 번 격려 문자를 보내온 박계은 친구는 다음과 같은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끝까지 완보한 친우여, 마치고 나니 우주를 적시는 비가 네리네... 장하다.'
걷는 동안 전화와 문자, 메일로 격려와 성원을 보내준 가족과 친지 여러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