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영화를 번역하는 박지훈입니다.
어제, 트위터에서 인셉션 장인 부분이 논란이 되고 있다며 기자의 연락을 받았고, 그 기자에게 왜 아버지로 나갔는지 설명을 했는데, 기사는 마치 제가 뒤늦게 알고 변명하기 위해 말을 끼워맞춘다는 뉘앙스로 쓰였더군요. 지금부터 진짜 변명을 해보겠습니다.
블록버스터의 경우 촉박한 개봉일정으로 가번역이라는 걸 하게 됩니다. 그림 없이 대본만 보고 내용만 맞춰 번역을 해놓고 프린트가 들어오면 화면에 맞게 수정하는 거죠. 예전엔 이런 일이 드물었는데, 요즘은 거의 모든 블록버스터를 이렇게 번역합니다. 제가 번역한 어떤 블록버스터는 미국에서 프린트가 들어오지 않아 가번역만 얹어서 개봉한 적도 있지요. 배급사들이 그렇게까지 동시개봉에 목매야 하는 이유는 여러분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인셉션 역시 가번역 후, 캐릭터 성격이나 상황에 맞게 대사 수정을 거쳤습니다. 처음엔 아버지로 알았습니다. 이건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대본상에선 마일스가 장인이라는 어떤 대사나 암시가 없었으니까요. (화면 보고 번역하면서 그것도 눈치 못 채느냐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전 화면 없이 소리만 들으며 번역합니다) 후에 아버지가 아니라 장인이란걸 보도자료를 보고 알았지만 이때는 배 떠난 후였습니다. "보도자료가 미리 왔을 거 아니냐"라고 말하시는 분들고 계시는데, 보도자료가 영화보다 일찍 올 때도 있고, 늦을 때도 있습니다. 저도 나름 고민을 했지요. 이걸 어떻게든 수정을 해야 하나, 큰 줄기에서 문제될 건 없으니 그냥 넘어가야 하나... 전 후자를 택했습니다. 물론 회사에서도 알고 있었지요. 이게 제가 말한 "사전에 알았지만 정서상 문제 될건 없다고 판단했다"의 의미입니다. 당시 인셉션의 한국 개봉이 일주일 늦춰지자 여기 디피에서도 이런저런 말이 많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별의별 억측들이 많았지만, 배급사 발표대로 프린트가 들어오질 않아서 개봉일을 맞출 수 없었던 거였습니다. 이런 경우 십중팔구는 감독이 편집을 바꾸어 프린트 제작이 늦어지기 때문입니다.
동시개봉하는 블록버스터의 경우 번역에 주어지는 시간은 고작해야 사나흘입니다. 인셉션도 마찬가지였지요. 광고를 하려면 심의를 받아야 하고, 심의를 받으려면 번역이 필요한 상황에서, 줄일 수 있는건 번역 일정 뿐이지요. 그 짧은 시간에 인셉션처럼 내용이 복잡하고, 대사가 많은 영화를 하나하나 분석해서 차분히 생각하며 번역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 돈 받고 일하는 프로가 그런 핑계 대지 마라"고 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물리적인 시간이 불가능한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영화번역을 하다보면 많은걸 고려해야 합니다. 가령, 배우가 욕을 해서 그대로 욕을 쓰면, 어떤 관객은 재밌다고 좋아하고, 어떤 관객은 저런 단어를 어떻게 자막에 넣느냐고 비난을 합니다. 군대 영화라서 군대에서 쓰이는 용어들 그대로 써놓으면 밀리터리 마니아들은 좋아하겠지만 어린 학생들이나 여성 관객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그 가운데서 제가 판단해 중심을 잡다보면 저도 사람인지라 제 기준이, 제 감정이, 제 감성이 개입되는건 어쩔수 없습니다. 좋은 예가 인셉션에 나오는 "졸라"겠군요. 어떤 분은 캐릭터를 잘 표현했다고 좋아하셨고, 어떤 분은 저런 저질 단어를 쓰는게 말이 되느냐며 비난하셨습니다. 번역은 결국 어느 한쪽으로부터 욕을 먹게 되지요.
제가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번역에 대한 관객들의 비난, 비판은 제 몫이기에 괜찮습니다. 직업의 특성상 9를 잘해도 1을 못하면 집중적인 비난을 받을 소지는 항상 존재하니까요. 하지만, "먹튀다. 면상에 침을 뱉는다. 병맛이다. 쓰레기다"란 식의 인격적 모독은 참기가 참 힘드네요. 저도 디피 회원으로 글을 올리진 않지만 여기서 많은 정보를 습득합니다. 다른 영화사이트들과 달리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어서 유일하게 즐겨 오는 영화 사이트지요. 근데 여기서 그런 인격모독적인 비난을 받으니 참 가슴이 아프네요.
답답한 심정의 넋두리라고 생각해주세요.
많은 분들이 충분히 읽었다고 판단될 경우, 이 글은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부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덧붙입니다.
"소리만 듣고 번역한다"는 말에 영화를 전혀 안 본다고 생각하시는 거 같아서요. 프린트가 미국에서 들어오면 물론 국내에서 가장 먼저 영화를 봅니다. 영화를 보면서 소리를 녹음해 작업실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장면 하나하나를 머릿속에서 더듬으며 번역을 한다는, 다른 매체들처럼 스크리너나 동영상 파일을 보면서 번역하는 게 아니란 의미였습니다. 극장영화 번역 시스템이 가장 원시적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지금도 전 시중에서 구하기도 힘든 워크맨을 사용하니까요. 스크리너 등의 소스를 못 받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유출 사고가 발생할 경우 영화사가 입어야 할 막대한 피해를 생각하면 회사 방침을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허나, 시스템만을 탓하기도 그렇습니다. 가끔씩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작업하는 영화도 나중에 보면 소소한 실수들이 보이는 걸 보면 제 덜렁덜렁한 성격도 한몫 하는 것이겠지요. 전 아직도 번역이 뭔지 배우고 있습니다.
처음 이 글을 쓰면서 제 글이 또다른 논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이 좀 됐었습니다. 근데 이렇게 긍정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덧글을 달아주신 분들은 물론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회원분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