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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시기 *
교회는 일 년의 주기 안에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하신 구원 업적을 기념하며 경축한다.
이를 ‘전례주년’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를 통하여
“강생에서 성령 강림과 주님의 재림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전 신비를 기억한다.”
‘예수 부활 대축일’과 ‘예수 성탄 대축일’은 전례주년의 두 기둥이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주간마다 주님의 날이라 부르는 ‘주일’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한다.
그러한 가운데 성인들의 천상 탄일도 축하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고유 특성을 지닌 시기(대림 시기, 성탄 시기, 사순 시기, 부활 시기) 외에
1년에 33-34주간이 남게 되는데,
이 시기를 연중 시기라고 한다.
이때의 미사 전례 독서들은
교회의 복음화(선교) 활동이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수님의 공생활과 교회가 자라나는 모습을 주로 들려준다.
또한 이 시기에는
그리스도 신비의 어떤 특수한 면보다는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다양하게 경축한다.
특히 연중 주일이 그러하다.
이 시기에는 또한 성인들을 자주 기념한다.
연중 시기에
사제는 생명의 희열과 희망을 나타내는 녹색 제의를 입으며,
이것은 공현 후 주님 세례 축일 다음 날부터 재의 수요일 전 화요일까지,
다시 성령 강림 대축일 후 월요일부터 대림 제1주일 전 토요일까지 계속된다.
연중 마지막 주일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 로 지낸다.
The unclean spirit convulsed him
and with a loud cry came out of him.
All were amazed and asked one another,
“What is this?
A new teaching with authority.
He commands even the unclean spirits and they obey him.”
(Mk. 26-27)
*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의 묵상글 *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치심을 듣고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다.
하나는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라는 반응과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강하게 거부하는 반응이다.
이 사람을 복음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회당에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더러운 영이 들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워하는 깨끗한 영혼인가?
아니면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강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인가?
아니면 놀라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인가?
왜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가?
사람의 말을 들었다면 아무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느님의 말씀이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보라.
예수님이 가르침을 시작하시기 이전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모두들 똑같이 회당에 있었다.
누가 건강한 영혼인지 누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인지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이런 서로 상반된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서로 상반된 반응이 나타난 것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다가
빛을 받고 평소의 삶이 드러난 것일 뿐이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고 해서
평소에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는 법이다.
또 건강한 영혼이라고 해서
평소에 눈에 띄게 드러나는 삶을 사는 사람도 아니다.
평소에는 잘 모른다.
각자 자기의 삶을 살기 때문이고
그리고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의 속 마음을 우리네 눈으로는 알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말씀 앞에서만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 놓고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히브 4,12)라고 말씀하신 대로
마음 속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겉으로 볼 때에는 크게 차이가 없다.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이전까지는
아무도 그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인지 몰랐다.
다만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말했기 때문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평소에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대로 살면 자기가 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없이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서 사는 사람이다.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누군가가 이야기하면
금방 화를 내고 거부하고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의견만이 최고인 양 조금도 다른 사람한테 양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더군다나 복음에서 말씀하신 대로 사는 사람은 바보이고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며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평생 예수님과 아무 상관 없이 살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말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사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예수님과 아무 상관 없이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이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반드시 신자가 아닌 사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신자라고 하더라도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일 수 있다.
회당에 모여 있다는 것은
평소에 신앙 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이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비록 평소에 전적으로 말씀대로 살아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말씀을 듣고는 놀라고
무언가 새롭게 깨닫고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이 신자이다.
사람들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예수님을 보고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라고 놀랬다.
그렇다.
예수님의 말씀은 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마태 4,4)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늘 새롭고 권위 있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생활도 늘 새로워지고 풍요로워진다.
그런 영혼이 건강한 영혼이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란 무슨 뜻인가?
‘가르침’은 그리스어로 ‘디다케’(Didache)라 하고,
라틴어로는 ‘독트리나’(Doctrina)라 한다.
이 말은 ‘가르침, 교훈, 원리, 원칙’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원칙이 있다.
식물이면 식물이 살아가는 삶의 원칙이 있고 동물은 동물의 원칙이 있다.
기차는 기차의 원칙이 있고 자동차는 자동차의 원칙이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는 인간의 원칙이 있다.
그 원칙에서 벗어날 때 불행해지고 사고가 난다.
신앙인은 신앙인으로서의 원칙이 있다.
원칙은 하나의 질서이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삶의 방식이며
동시에 개성이고 특성이다.
이런 원칙이 무시될 때 혼란이 오고 불행해진다.
인간 최초의 불행은 이 원칙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대형 사고가 난 것이다.
그 결과로 모든 인간에게 불행이 온 것이다.
이제 원칙에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 길만이 우리가 살 길이고 잃었던 행복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다.
권위 있는 새 가르침은
바로 이런 원칙을 제시해 주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예수님께서 권위를 갖고 가르쳐 주시는 새 가르침을 배우고,
그것을 우리 신앙 생활의 원칙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더러운 영을 내 안에서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악에서 해방시켜 주러 오신 것이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악한 생각들은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도 도와 줄 수 없다.
오로지 하느님이 말씀만이
내 안에 있는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 있다.
권위 있는 새로운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두운 곳이라도 빛이 들어가면 어둠은 물러나는 법이다.
아무리 단단하게 얼어붙은 물도 따뜻한 햇빛이 들어가면 녹기 시작하는 법이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악에서, 더러운 영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러 오신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 주신다.
그 더러운 영이란
예수님의 말씀과는 맞지 않는 생각들이나 사고들일 수도 있다.
오늘 복음은 가르침으로 시작해서 그 가르침을 듣고 새로운 가르침으로 깨닫고
그 소문이 곧바로 온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이 새로운 가르침이 널리 퍼져 나가야 한다.
내 안에서 널리 퍼져 나가야 하고
또 다른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에게도 널리 퍼져 나가야 한다.
마르코 복음은 앞으로
이 새로운 가르침이 점차로 퍼져 나가면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를 전해 줄 것이다.
마치 마른 사막에 물이 흘러 들어가서 생기를 되찾아 주듯이
새로운 가르침이 내 마음 안에 놀라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질 때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또 귄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질 때
하느님의 나라는 그만큼 많이 건설될 것이다
- 전 성바오로수도회 관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어떤 낚시꾼이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낚시꾼은 보통 다른 낚시꾼과는 달랐어요.
보통의 사람들은 큰 고기를 잡으면 무척 기뻐하지요.
하지만 이 사람은 큰 고기가 잡히면 실망을 하고,
작은 고기를 잡으면 무척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고기를 잡으면 길이를 재어 보고는
큰 것은 버리고 작은 것은 담는 것이었어요.
이 모습을 쭉 보고 있으면서 의문이 들었던 다른 낚시꾼이 이 사람에게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실례입니다만,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제가 쭉 지켜봤는데, 큰 고기는 버리고 작은 고기만 바구니에 담으시더군요.
왜 그러시죠?”
이 낚시꾼은 이렇게 말했어요.
“그야, 이유가 있지요.
우리 집 프라이팬의 크기가 20㎝밖에 안 돼요.
따라서 20㎝가 넘는 고기를 우리 집 프라이팬에 구워 먹을 수가 없거든요.”
아마 우리들은 이 낚시꾼을 어리석다고 비웃을 것입니다.
한 마리 전체를 구울 수도 있겠지만,
너무 크면 칼로 잘라서 구워 먹을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 낚시꾼은 거기까지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역시 우리의 삶 안에서 이와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혹시 이런 말을 자주 하시지 않나요?
‘나는 이것밖에 가진 것이 없어.’,
‘지금까지도 잘해왔으니까, 다른 생각을 할 필요는 없어.’
이런 말들을 자주 하면서,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크기를 한정시켜 놓고는
그 이상의 것은 포기해 버릴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이는 마치 옛날 중국 여인들이 발을 묶어서 더 이상 크지 못하게 하는 전족(纏足)처럼
스스로를 묶어서 성장을 중지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승진을 하고 싶다, 더 큰 집을 갖고 싶다…’ 등
무언가 발전적인 것을 바라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단순히 막연한 희망에 그칠 뿐,
그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을 하는데 얼마나 자주 망설였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권위 있는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시고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큰 소리로 예수님께 외치지요.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 놀라운 선언은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하게 꿰뚫은 것이었지요.
그리고 주님께 대한 존경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즉, 악령은 예수님을 지금 위치에 그냥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앞으로 성취할 인간 구원 계획을 중도에서 왜곡시키고자 하려는 시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의도를 아시고 곧바로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사실 악령은 악으로써만 인간을 유혹하지 않습니다.
매일 미사에 참석하는 열심하신 교우가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어요.
“미사를 드리면서,
묵주기도를 바치면 더 좋지 않을까?”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도 선이고,
미사를 봉헌하는 것도 선한 행동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두 가지 선에 동시에 충실할 수 없는 법입니다.
바로 이렇게 악령의 유혹은
선한 것을 가지고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인해 우리들을 지금 이 자리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내 자신을 한정시켜서,
지금 이 자리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유혹들이 우리 주위에는 참 많습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큰 소리로 말해야 할 것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사람에게서 나가라.”
- 인천교구 간석4동 본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가수 조성모의 ‘가시나무새’란 노래를 잘 알고 계시지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가사 몇 구절이 계속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군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픈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생각할수록 일리가 있는 말 같습니다.
제 안을 들여다보면
어찌 그리도 많은 또 다른 내 모습들이 자리 잡고 있는지 모릅니다.
수만 가지의 모습의 제가 들어앉아 있습니다.
때로 저도 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선량하지만
때로는 악랄합니다.
때로 순수하고 감성적이지만
때로 그렇게 교활할 수 가 없습니다.
때로 천사의 얼굴로 살았습니다만,
때로는 보기만 해도 흉한 악령의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언제라도 천국으로 직행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영혼을 지니고 살았는가 하면,
지옥 불에 떨어져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죄 중에도 살았습니다.
그 수만 가지 모습 때문에 방황하고 갈등하고 괴로워하며
그렇게 살아온 제 인생인 듯합니다.
그것이 인생인가 봅니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참으로 딱한 한 인간을 만나십니다.
악령에 사로잡힌 인간이었습니다.
보통 악령이 아니라 지독한 악령이었습니다.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고 스스로를 한번 통제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그 모든 일이 다 허사였습니다.
평소에는 잠잠하다가도
악령이 활동하기 시작하면 거의 초죽음 상태가 되고 맙니다.
악령의 활동이 잠시 중지될 때 제 정신으로 돌아오지요.
그 순간 느끼는 감정은 죽음보다 더한 괴로움이었습니다.
자신이 악령에 사로잡혀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
스스로를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죽고만 싶었을 것입니다.
본인이 느꼈던 스트레스도 컸겠지만
주변 사람들이 옆에서 느끼는 고통도 이만 저만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무서웠습니다.
그러다보니 가족들도 포기하고 떠나갔습니다.
도움을 주던 친구들도 떠나갔습니다.
이제 혼자가 되어 정처 없이 전국산천을 떠돌아다니는 부랑자 신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가련하고 불쌍한 영혼이 오늘 주님을 만납니다.
자신 안에 들어있는 또 다른 존재로 인해 고통당하는 영혼,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영혼,
하루 온종일 악령에 시달리는 가련한 영혼 앞에
주님의 발걸음이 멈춥니다.
우리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 안에 분명히 악에로 기우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악으로 인도하는 흐름이 있습니다.
그 세력이야말로 이 시대 악령입니다.
성령에 반대되는 악령,
불결한 영, 사악한 영입니다.
그 악령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우리를 괴롭힐까요?
악령은 타락한 하느님의 영입니다.
겉은 그럴 듯합니다.
머릿속에는 천사의 지식도 지니고 있습니다.
마음속에는 하느님을 알아보는 식별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악령의 최종적인 목표는
인간을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일입니다.
인간의 시선을 흐리게 만듭니다.
자기 중심을 잃게 만듭니다.
하느님께서 금하고 계시는 행위를 하도록 자극합니다.
이런 악령이 오늘 예수님을 만나 이렇게 외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악령의 이 말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 고백이 아니라
자기 방어의 수단으로서 나온 말입니다.
비록 타락한 영이지만,
하느님을 거스른 영이지만,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영이지만,
하느님의 존재를 인식합니다.
악령이 하느님 앞에 서 있자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예수님의 찬란한 성덕 앞에 격분한 악령은
아직 세상에 드러내서는 안될 예수님의 신원을 재빨리 폭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구원 사업을 좌절케 하려고 기를 씁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 각자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악령을 멸망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천사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할지라도,
지속적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악의 세력은 순식간에 우리 인생을 점령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머릿속이 하느님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흘러넘친다 하더라도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성령으로 채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느새 악령의 지배를 받고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말씀의 위력>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살기 위하여’ 밥 먹어야 하듯,
역시 ‘살기 위하여’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몸 상태가 안 좋으면 밥맛이 없듯,
영혼의 상태가 안 좋아 마음 무디어져 있으면 말씀 맛이 없습니다.
과연 내 영혼은 건강합니까?
내적 변화에 따른 외적 변화가 영성 생활의 순리입니다.
아무리 환경 바꿔 보고 사람 바꿔 봐도
얼마 지나면 그 환경이 그 환경이요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하늘 아래 새것이 없다는 전도서의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끊임없이 외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삶,
내적 빈곤의 반영입니다.
오늘날의 앞만 보고 질주하는 물질 문명의 삶,
계속되는 자원 낭비에 공해와 오염으로 지구의 수명을 단축시키며,
더욱 내적 빈곤을 조장할 뿐입니다.
환경을, 사람을 바꿀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는 게 지혜입니다.
내적 변화로 마음이 새롭게 깨어 있으면
매일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날입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처음처럼 시작합니다.
정주의 삶이 타성에 젖은 안주의 삶으로 변질되지 않으려면
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자주 말씀드리다시피
밖으로는 정주의 산으로,
안으로는 맑게 흐르는 강으로 살아야 합니다.
끊임없는 내적변화에 따른 새 마음을 갖게 해주는 게 말씀과 기도입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만물은 하느님을 위해서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안에 현존하십니다.
하여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어
우리 영혼과 육신을 새로이 하고 활력을 줍니다.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어둠을 몰아내는 말씀의 능력이요 말씀의 빛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어둠의 세력인 더러운 영은
빛이신 주님 앞에 더 이상 숨어 있을 수 없어 스스로 뛰쳐나와 소리치며
예수님의 정체를 고백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권위있는 한 말씀에 혼비백산 달아나는 더러운 영입니다.
이어 목격자들의 경탄이 뒤따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모든 악의 세력들도 결국은 주님께 복종합니다.
말씀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입니다.
어둠의 악에 대한 최고의 퇴치 방법은
하느님의 말씀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새롭고 권위있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살리고 치유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늘 지금 여기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또 늘 내적으로 맑게 흐르는 강되어 살게 합니다.
오늘도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오시는 주님은
말씀과 성체의 은총으로 우리 안의 어둠을 몰아내시고
무디어진 마음을 깨어있게 하시며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해 주십니다.
아멘.
- 성요셉수도원 원장
*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의 묵상글 *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강론 시간이 가요 톱 텐이나, 뮤직뱅크 시간이 아니데,
요즘 들어 가요를 자주 인용하게 됩니다.
안치환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으음∼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 누가 뭐래도 ―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 누가 뭐래도 ―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기를 품고 사는
바로 그대 바로 당신 바로 우리
우린 참사랑
노랫말을 천천히 음미해 봅니다.
그런데,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도 있겠지만,
보통 꽃이 사람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장미, 백합, 극락조, 초라한 잡초라 하더라도,
그 꽃이 저보다 아름다운 것은 사실입니다.
때문에, 이 노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 소중함에 대해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초라하게 보여도…
정신적, 육체적, 심리적으로 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고귀한 존재요,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귀함, 가치를 따진다면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사람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이는 사람의 우월성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만이 최고요, 중심이기에
자연과 다른 창조물들을 훼손하고 파괴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최고’란 의미는
지배 피지배의 개념이 아니라,
소중함의 의미입니다.
신앙인이든, 비 신앙인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모두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재요,
하느님의 숨결, 넋으로 숨을 쉬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에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을 치유하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자 외칩니다.
“나자렛 예수님,
당신이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떠나거라.”
꾸짖으시며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기에,
치유해 주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묵상하며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이 외침이 마음에 남습니다.
“당신이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맞습니다.
예수님과 더러운 영, 곧 마귀들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 들린 사람은
예수님과 상관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모상을 갖고 있고,
예수님의 숨결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관이 있습니다.
비록 몸과 마음이 온전치 못하여 스스로 괴로움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도 예수님에게는 소중한 존재요,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적에도 예수님께는 그러한 존재이기에…
구원의 대상이기에...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적, 육체적, 심리적으로 나약하고,
많은 잘못과 실수를 한다 하더라도,
그리하여 자신과 이웃들에게 실망과 아픔을 안겨준다 하더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아름다운 꽃으로 여겨주시는 분이십니다.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이시기에
우리 또한 시편 저자처럼 다음과 같이 노래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인간을)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셨나이다.”
이러한 감사와 찬양과 함께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꽃보다 아름답고 소중하게 여기겠다는 다짐을 드리며
새롭게 시작되는 연중 시기를 기쁘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아멘.
- 제주교구 중앙 본당
* 윤경재 요셉님의 묵상글 *
<새로운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마르코 저자는
예수님을 능력이 있으신 분, 강하신 분, 추진력이 있으신 분으로 묘사합니다.
특별히 학자들은 1장 21절에서 39절까지 내용을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 라고 부릅니다.
저자는 예수님의 바쁜 하루 일정을 강조합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바쁘고 힘든 하루를 사셨는가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시몬의 집으로 가 시몬의 장모를 고치시고,
저녁에도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외딴 곳에 나가시어 기도하시고,
전도 여행을 떠나십니다.
-<가르침, 구마와 치유, 기도, 전도 여행을 떠남.>
어느 신부님께서 이 장면을 묵상하시고 우스개 소리로
예수님께서 너무 바쁘게 사셨기 때문에 일찍 돌아가신 것 아니냐는 농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일정을 묵상해 보면
그분께서 인간을 너무 사랑하셨기에
쉬고 싶을 때 전혀 쉬지 않고 일하셨고,
당신을 찾아오는 이들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장소에서 머무르신 것이 아니라,
좀 더 많은 이들을 만나시기 위해
회당에서, 길에서, 문 앞에서, 열린 곳에서 일하셨습니다.
기도 후에는 또 마을 사람들이 찾고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곳에 머물지 않고 이웃 마을로 이동하십니다.
치유와 기적에 대해 대접하려는 그들의 마음을 읽었기에 떠난 것입니다.
또 당신의 사명이
한 곳에만 머물러 기적이나 보여주시려고 세상에 들어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곳에 머물러 대접이나 받으며 안주하게 되면
머지않아 고인 물처럼 썩어가게 됩니다.
흐르며 살아있는 생명수가 되지 못합니다.
생명수라야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게 되고 치유하며 삶을 줄 수 있습니다.
24절에서 회당에 머물고 있던 더러운 영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반항합니다.
더러운 영은
영혼이 약한 사람에게 기생하여 그의 인격을 파괴하고 악한 행동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 더러운 영은
언제나 한 곳에 안주하려 꾀합니다.
다른 곳으로 옮겨가거나 새로운 변화를 지극히 꺼립니다.
그저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혼자 날뛰게 놔두는 것을 바랍니다.
더러운 영은
실제로는 매우 약한 영인데 거짓으로 강한 체 할 뿐입니다.
꼭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만 달라붙는 악랄하고 치사한 성품의 영입니다.
예수님처럼 힘 있고 권위 있는 분을 보면 지레 겁을 내 발악을 합니다.
강한 체하거나 아니면 어리광 피우는 꼴입니다.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울부짖는 행동입니다.
솔직하지 못하고 거짓으로 꾸미는 행동입니다.
그러면서도 멀쩡할 때는 회당에 머물러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성격을 지닌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자기만을 위하기 바라며
제 뜻에 어긋나는 일이 있게 되면 꼭 이간질하거나 뒷말을 합니다.
무슨 일이라도 시키면
별별 이유를 들어 간섭하지 말라고 하고 요리조리 빼기 바쁩니다.
이런 부류 중엔
한 단체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나다니기 좋아하여 제 얼굴을 내세웁니다.
주인처럼 대접받기를 즐기며 말로는 온갖 참견은 다합니다.
실제 봉사에 가서는 갖은 이유를 대며 소극적으로 돌변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새로운 가르침에서 온 것입니다.
당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베풀어 주시는 언행일치에서 온 것입니다.
대접 받으려 하지 않고
맡은 사명을 완수하려고 떠나는데서 온 것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변화를 받아들이고,
몸을 사리지 않으며,
언행일치의 삶을 살며,
때가 면 떠나는 예수님의 본보기를 충실히 따라야 할 것입니다.
- <굿뉴스>
* 이기양 신부님의 묵상글 *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얼마 전에 고등학교 선생님을 한 분 만났습니다.
어느 선생님이 학생을 야단치고 체벌을 가했던가 봅니다.
체벌을 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경찰이 신고를 받고 왔답니다.
다른 학생이 핸드폰으로 선생님을 신고한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교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는
선생님의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선생님의 가르침이 받아들여질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이
옛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예수님의 권위에 사람들이 놀랍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르 ,22)
예수님 당시에 가장 권위가 있어야 할 사람들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볼 때 가난하고 천한 목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보다도 예수님이 권위가 있었다고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그러면 율법 학자들은 왜 권위가 없었을까요?
그들은 그 당시의 대표적인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며
배운 것도 많았고 권력까지 갖춘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에 대해서
마태오복음 23장에서 신랄하게 비판을 하십니다.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마태 3,3-16)
율법 학자들이 권위가 있어야 했음에도 권위가 없었던 이유는
위선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을 뿐더러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스승이라고 불러주기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자기들의 권위만을 내세우려 했지
하느님을 두려워하거나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반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으셨고,
말씀하기에 앞서 먼저 실행하셨습니다.
누구의 잘못을 책하시기보다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셨고,
원수까지도 사랑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손수 닦아주시면서
서로 그렇게 행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 죽음에서도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치는 헌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사의 권위, 아버지의 권위, 어머니의 권위, 회사 직위의 권위 등 모든 권위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이거나 남에게 요구만 하는 사람들은
권위는커녕 남들이 싫어합니다.
자기는 희생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희생을 강요하거나,
이기적인 삶을 살면서 권위만 내세우려들면
남들이 욕을 하고 비아냥거립니다.
참다운 권위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에 대한 헌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 서울대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