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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신 金東臣 (1871 ~ 1933)】 "민종식 의병부대의 선봉장"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원표(元表), 호는 청암(淸庵)이다.
1871년 12월 26일 충청남도 회덕군(懷德郡) 탄동면(炭東面) 덕진동(德津洞)에서 김요제(金堯濟)와 창원(昌原) 황씨(黃氏) 사이에서 6형제 중 3남으로 출생하였다. 생몰년도에 약간 차이가 있는데, 족보에 따르면 1872~1933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형은 중인(中人), 자신은 의업(醫業)이라 한 점으로 보면 그의 집안은 한미한 중인 집안으로 추정된다. 17세에 부친이 사망했는데, 당시 막내 동학(東鶴)은 세 살이었다. 이로써 보면 집안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처지였을 것이며, 젊은 시절부터 의업에 종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 소식을 들은 뒤 의병에 가담할 생각을 하는 한편, 일제의 한국 침략이 갈수록 노골화되어가는 과정을 주의 깊게 관망하였다. 그는 일제가 “강화도조약 이후 한국의 독립을 핑계 삼아 국권을 모두 강탈했으며, 보호를 빙자하여 백성의 재산을 거의 빼앗았다. 마침내 국모의 변과 황제의 욕됨이 극에 달하였다”라면서 국가의 원수를 갚고 백성의 생명을 구하고자 의병에 나섰다.
1906년 (음)3월 중순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과 접촉하였다. 당시 민종식은 충남 예산의 광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패퇴한 후 전라북도 전주·진안(鎭安)·용담(龍潭)·장수(長水)·무주(茂朱) 등지를 전전하며 의병을 규합하는 중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종식을 만나게 되었고, 이때 의병 규합의 조력자로 활동하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전북을 왕래하며 장수와 무주에 지인들이 특히 많았던 터라 민종식을 돕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때 도움을 받으려고 민종식이 ‘칙지(勅旨)’를 준 것으로 짐작된다. 민종식 의병부대의 선봉장이라 표방하면서도 홍주의병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다만, 홍주의병에 가담할 의병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민종식 의병부대의 선봉장임을 내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민종식이 의병을 거두어 충청도로 돌아가 홍주성을 재차 공격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홍주의병의 실패 원인으로 신분 문제를 들었는데, 민종식이 양반 사족 중심의 의병으로 운영한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홍주의병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충남 노성(魯城)의 궐리사(闕里祠)에서 최익현이 주관한 강회에 참석하였다. 당시 최익현의 경우에도 거의를 준비 중이었다. 자신도 그 역시 종사관의 임무를 맡아 영호남을 순회하며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태인의병 역시 실패로 끝났다. 이처럼 그가 직간접으로 관련된 의병 봉기가 모두 실패하자 독자적인 거병 계획을 수립하였다. 마침 1907년 7월 이른바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어 일제의 내정간섭이 심화된데다 고종의 강제 퇴위를 당하자, 직접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굳혔다. 민종식으로 받은 칙지를 소지하고 있었으므로 의병의 모집에 유리하였을 것이다. 영호남 각지를 돌아다니며 의병을 모으는 과정에서 칙지를 앞세워 자신을 승지(承旨)로 소개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일제는 승지를 참칭(僭稱)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1907년 (음)8월 전북 정읍(井邑)의 내장산(內藏山) 연암사(然菴寺), 혹은 백양사(白羊寺)에서 기우만(奇宇萬)·고광순(高光洵)과 더불어 구체적인 거병 계획을 논의하였다. 한편, 자신의 『문집』에서는 남원의 고광수 집에서 이들을 만나 의병 봉기를 의논한 것으로 적고 있다. 당시 약 80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선봉장 유종환(兪宗煥), 중군장 염기덕(廉基德, 혹은 廉基俊), 후군장 임병주(林秉柱), 군량장 박헌태(朴憲泰)·국인묵(鞠仁黙) 등이 주요 구성원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충청·전라·경상도 출신이었다. 의병부대의 명칭을 삼남창의소(三南倡義所)라고 했으며, 자신을 삼남창의소도원수(三南倡義所都元帥) 혹은 대한창의대장이라 하였다. 삼남창의소의 전체 규모는 1,000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주장했지만, 실제로 각자 통솔한 의병 규모는 수십 명에서 100~200명 정도였을 것이다. 삼남창의소의 주도 인물들은 대체로 양반 유생이었고, 일반 병사층은 농민과 산포수, 행상 등 평민들이었다.
의병의 격문 포고 보도(『대한매일신보』 1907.9.25) [판형2] |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솔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의병부대가 연합한 형태인 데다 학문적 동질성이나 지역적·혈연적 기반이 각각 달랐기 때문이다. 이에 해산 군인들을 영입하여 부대의 전술과 화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의 항일투쟁은 1907년 9월 10일 시작되었다. 순창읍에 위치한 우편취급소와 경무분파소 등을 공격하여 일본인 2명을 처단하였다. 이들은 내장산에서 지리산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순창읍을 공격하였다. 지리산으로 입산해서는 경남 서부 지역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지리산에 근거를 만들고, 안의(安義)·하동(河東)·함양의 각 부락에 격문을 보내 국가의 위급을 알리며 각료의 비정(秕政)을 탄핵하였다 아울러 일본인을 몰아내지 않으면 더러움이 백세에 끼친다면서 의병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들은 문수사와 같은 지리산 내의 사찰을 근거지 삼아 경남 함양, 전북 남원·순창·정읍, 전남의 곡성·구례 등 3개 도에 걸쳐 활약하였다.
인근 지역에 활동 중인 의병부대와는 적극적인 연대 혹은 연합전선을 형성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전북에서 활동한 이석용(李錫庸) 의병부대와는 일정기간 연합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일제 군경과 지속적으로 전투를 벌였는데, 우편취급소나 분파소와 같은 일제의 침략기관을 주로 공격하였다. 특히 1907년 8월부터 12월에 이르는 기간에 주로 지리산 내의 사찰을 근거지로 삼아 크게 활동하였다. 일제는 1907년 10월 하순 김동신 의병부대가 주둔했던 문수사를 소각하였다. 당시 일제의 군경 토벌대는 이들을 진압하려고 구례 연곡사(鷰谷寺)를 급습하였다. 연곡사 전투에서 고광순을 비롯한 20명 내외의 의병이 전사하였다.
1908년 1월 일제는 이들을 진압하려고 지리산 인근의 수비대와 경찰 병력을 총동원하였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다시 4월에 소재를 파악하기 위한 변장대(變裝隊)를 출동시켰다. 이 작전은 전남 서부 지역과 동부 지역의 의병을 동시에 겨냥하여 실시되었다. 전남 서부 지역의 경우에는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진압하려는 것이었고, 동부 지역에서는 김동신 의병부대를 섬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호남창의회맹소는 기삼연 의병장을 비롯하여 200여 명이 희생되었으나, 김동신 부대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08년 6월 6일 일시 귀향했다가 대전의 순사대에 붙잡혔다. 당시 상당량의 서류를 소지하고 있었는데, 마포(麻布) 24족(足), 짚신 220족(足), 사령서(辭令書) 2매, 일기장 1책, 통문 28통, 왕복문 38통, 명령서 7통, 정탐 서류 28통, 청원서 11통, 회계서류 10통 등이었다. 일기를 비롯하여 매우 다양한 서류를 지참하고 있었는데, 대체로 무주 출신의 유서기(兪書記)가 작성한 것이었다. 정탐 서류는 일제 군경의 동향을 파악한 문서이며, 왕복문은 우국지사들에게 의병을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주민들에게 군자금이나 물자를 징발하는 명령서, 그것을 경감해달라는 주민들의 청원서였다. 체포될 당시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귀향했다고 주장하였다. 『문집』에서는 의병 투쟁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자 청나라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려고 상경하는 중이었다고 적었다. 그렇다면 의병 항쟁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러 상경하던 중 집에 들렀다가 체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한국인 경부(警部)에 의해 4회에 걸쳐 신문을 받은 청취서(聽取書)가 남아 있다. 재판 과정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된 후 1910년 9월에 일제의 사면으로 방면되었다.
저술로는 『문집(文集)-창의사적초(倡義事蹟抄)-』이 있으며, 한국인 경찰이 신문한 청취서가 남아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06년 3월 26일 홍주(洪州)에서 기병한 민종식(閔宗植)의 부하로 들어가 그 선봉장이 되었다.
김동신은 민종식에게 전라남북도에서 기병할 것을 약속한 후 약 30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북 무주군 덕유산(德裕山)에 있는 자원암(紫原庵)으로 내려와 이곳에 유진하면서 거사 준비를 서둘렀다.
이때 민종식이 먼저 홍주에서 기병하였지만 그후 그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으므로 김동신은 전라남북도를 잠행하면서 동지를 규합해 갔다.
군대해산 후 의병운동이 보다 심화되어 가자 김동신은 전북 정읍군 내장산 백양사(白羊寺)에서 기우만(奇宇萬)·고광순(高光洵)과 더불어 기병할 것을 의논하고 인근 부락으로 통문을 돌려 의병을 소모하고 군기를 모아 갔다.
양력 9월 10일 8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순창(淳昌)의 우편 취급소와 경무고문 분파소(警務顧問 分派所)를 습격하여 이곳을 점령한 후 관물을 노획하였다.
김동신의 순창 거의는 이해 9월 15일 고광순의 동복(同福) 순사 주재소 습격과 더불어 군대해산 후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에 있어서의 의병 봉기의 선구를 이루는 것이었다.
1907년 8월 4일(음) 8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남원 사장(南原 沙場)에서 일군과 격전하여 적 2명을 사살하고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8월 11일 고광순 의진과 더불어 응령(鷹嶺)에서 적을 공격할 것을 약속하고 행군하여 구례 연곡사(求禮 燕谷寺)에 당도하니 그 지역은 천혜의 험지로서 군사를 머무르고 군세를 확장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군기(軍旗)를 세웠다.
기에는 '머지 않아서 국가를 회복한다'라는 뜻으로 '불원복(不遠復)'이라는 3글자를 썼다. 그리고 6시경에는 8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구례(求禮)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일 군경을 격퇴시킨 후 이곳 군기를 노획하였다.
이즈음 이들이 문수암을 거점으로 하였기 때문에 9월 18일 일군들이 문수암을 불태웠다.
8월 17일 오전에 약 8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남 함양군(咸陽郡) 좌전(左田)에서 일 군경 20여 명과 격전을 벌여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9월 4일 의병 6백 명을 거느리고 경남 안의군 월성(安義郡 月城)에서 일병 40명을 공격하였고 9월 15일 의병 1백 명을 거느리고 이석용(李錫庸) 의진과 합진하여 전북 용담군 심원사(龍潭郡 深原寺)에서 일병 47명과 종일토록 격전을 벌여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1908년 2월 약 1백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전북 용담군 구랑(九郞) 일대에서 일병과 교전하여 이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전북 무주군 황천면 삼곡리(茂朱郡 篁川面 三谷里)에서 일군과 다시 교전하였다. 3월 6일 스스로 "3남의병대장"이라 칭하고 8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남 거창군 매학(居昌郡 梅鶴) 일대에서 일병 70여 명과 교전하였다.
이와 같이 전라·경상도 일대에의 종횡무진 혁혁한 전과를 올리면서 활약하던 중 뜻하지 않게 신병이 발병하여 남몰래 고향인 충남 회덕군 탄동면 덕진동(炭洞面 德津洞)에서 치료하다가 대전 경찰서 일경에게 탐지되어 6월 8일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될 때 사령서(辭令書) 2매, 일기장, 통문 28통, 왕복문 38통, 주민에게 낸 명령서 7통, 탐정계서(探偵屆書) 28통, 청원서 11통, 회계서류 10통, 잡서 1봉 등 그간의 그의 활약상을 담은 일체의 기록문서가 일경의 손으로 넘어간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가 체포된 후에도 그의 부하 비장들은 계속해서 전북 무주, 경북 성주(星州), 경남 거창(居昌), 전북 순창(淳昌), 전남 담양(潭陽)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활약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그와 함께 거의하여 선봉장으로서 활약하던 유종환(兪鍾煥)·문태익(文泰翊)·최정근(崔正根)·성문길(成文吉)·차은표(車恩表)·오대근(吳大根)·국인묵(鞠仁默)·임병주(林秉柱) 등을 들 수 있다.
8월 1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내란죄로 종신유형을 선고받고 다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