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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war60 -
거대한 전쟁의 이면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 종종 벌어지고는 합니다. 이를 흔히 미스터리라고 하는데, 6.25전쟁 또한 미스터리로 불리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고 일부는 전쟁의 방향을 바꾸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습니다. 그중 하나가 전쟁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곧바로 한강을 건너 아군을 추격하지 않고 서울에 머무르며 3일간 진격을 멈추었던 사실입니다.
[남로당의 환호 속에 서울로 입성하는 북한군 T-34전차]
그런데 이들은 3일간 전진을 멈추었고 이것은 이후 미스터리로 남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동부전선의 북한군 조공이 춘천-홍천을 돌파한 후 급속 우회하여 수원을 조기 점령함으로써 국군의 퇴로를 일거에 끓으려 했던 북한의 초기 전쟁전략이 국군 제6사단의 분전으로 와해되었다는 의견, 그 동안 남한에 은밀히 내재하고 있던 남로당 계열의 봉기를 기다렸다는 의견, 북한군의 역량 문제로 부대 재편과 보급을 하기 위해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로 하였다는 의견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의 낙서에서 계속 남진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서울에서의 3일간의 지체는 이후 북한군에게 커다란 짐이 되었습니다.
사실 미스터리는 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원인을 명확히 모르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간 지체한 사유를 북한 스스로 정확히 밝힌 것이 없어 아직도 미스터리로 분류되고 있지만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여러 가지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에 북한군이 한강을 건너지 못한 체 추격을 멈추었다고 추론하고 있고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전쟁 개시의 원죄가 있는 북한 측은 전쟁자료를 비공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래 동안 위에서 분석한 내용들보다 확실한 이유로 거론되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한강교량 폭파였는데, 한강에 놓여있던 한강교량들(인도교, 철교, 광진교)을 아군이 폭파함으로써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한강을 건널 수 없었다는 주장입니다. 즉, 아군의 군사작전으로 북한군의 남진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와 관련한 주장이 더 이상 통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소개할 내용은 이와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폭파되어 끓긴 한강 인도교]
1950년 6월28일 새벽 2시30분, 한강 인도교(현 한강대교 구교)와 철교에 하늘을 훤하게 밝히는 거대한 섬광이 일어나고 뒤이어 귀청을 찢는 커다란 폭음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리의 일부 상판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서 강으로 추락하여 들어갔습니다. 바로 6.25전쟁사 초기의 비극 중 하나인 한강교 폭파사건이었고 이것은 북한군에게 서울이 함락됨을 암시하는 암울했던 서막이기도 했습니다.
[점령지 서울에서 벌어지는 인민재판 ]
적의 진격을 막거나 늦추기 위해 교량이나 주요 교통 시설물을 자의로 파괴하는 작전은 오래전부터 시도된 보통전술입니다. 한강교량은 한강의 남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전략시설물이었으므로 국군이 이를 파괴한 것은 일견 타당한 측면도 있습니다. 6·25전쟁 발발 초에 임진강철교와 춘천의 모진교 폭파에 실패하여 방어에 상당한 곤란을 겪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전쟁 중 파괴된 압록강 철교의 모습]
한강 철교와 달리 적 후방 차단을 목적으로 아군이 파괴시킨 교량입니다.
반대로 공격을 가하는 군대는 돌격로를 확보하기 위해 수색부대 같은 선도부대들로 하여금 본진이 진입하기 전에 주요 길목에 있는 교량을 먼저 확보하도록 조치하는 것이 당연한 군사전술일 정도입니다. 따라서 적에게 밀려나고 있던 국군이 한강의 다리들을 폭파시킴으로써 적의 진공을 둔화시켜야 할 절대적인 필요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강교량의 폭파는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구동성으로 잘못된 작전이었다고 비판받는 한강교량 폭파]
당시 정황상 어쩔 수 없었다는 견해보다, 엄청나게 잘못된 것이었다는 비판적인 주장이 아직도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군사전략상 교량폭파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폭파의 시기와 방법이 너무 문제가 많았고 더구나 효과가 미진하였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우선 폭파시기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하는데, 이것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국군 역사의 치욕이기도 합니다.
한강교량 폭파는 시기부터 문제가 많았습니다. 후퇴 시 한강교량 같은 거대한 다리의 폭파는 철수하는 아군이 철수가 완료된 후 적의 추격 도하가 이루어지기 직전에 실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한강교량들이 폭파될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한마디로 어처구니없다는 표현이 정확할 정도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우선 무슨 이유에서인지 너무 성급하게 폭파가 이루어졌는데, 이후 관련 재판에서도 그 책임소재가 명확히 밝혀지지도 않았습니다.
[한강교량의 폭파는 시기부터 잘못된 작전이었습니다]
다리가 폭파되던 당시에 북한군 주력은 아직 서울 외곽에 있었고 오로지 2대의 북한군 전차만이 당시 서울의 북쪽 경계인 미아리를 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더구나 서울 방어를 위해 투입된 많은 아군부대들이 한강 북쪽에서 고군분투 중이었는데, 동부전선의 제6, 8사단과 옹진반도에서 퇴각한 독립 제17연대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부대들이 이곳에 투입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서울 방어의 중핵인 의정부 지구에서 선전을 독려하는
최병덕 총참모장을 비롯한 군수뇌부]
비록 제7사단처럼 초전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부대들이 많아 서울의 함락이 예견될 정도로 상황은 암울하였지만 반면 경의축선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던 제1사단처럼 고군분투하던 부대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건재가 유지되었건 아니면 무너졌건 한강 이북에 있던 모든 국군 장병들은 침략자를 막아내기 위해서 그야말로 고군분투 중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후방의 한강다리 폭파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열악한 조건에서 싸우던 국군에게 한강교량 폭파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후퇴로가 없어졌다는 의미로만 해석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한창 전투와중에 한강다리들을 폭파함으로써 국군 지도부 스스로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의지가 없음을 증명하였고, 이 때문에 한강이북에 있던 부대들의 전투 의지 또한 급속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아군은 모든 중장비를 유기한 체 단위부대 별로 흩어져 한강을 건너게 되는데 바로 이때 전쟁 초기 아군의 전력이 가장 많이 감소되었습니다.
[나룻배를 이용하여 한강을 도하하여 후퇴하는 국군의 모습]
전쟁이 벌어지자마자 지원 나온 미 군사고문단의 처치(John H. Church) 준장은 미증원부대가 올 때까지 서울에서 적극 시가전을 펼칠 것을 권고하였지만 육군본부는 다리를 성급히 폭파함으로써 서울을 사수할 생각이 추호도 없음을 증명하였습니다. 반면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 탈환 작전 당시에 전력이 열세였던 북한군은 서울을 요새화하여 무려 열흘 가까이나 방어해 내었습니다. 이처럼 서울은 적에게 점령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내어준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서울은 점령당한 것이 아니라 내어준 것에 가까웠습니다.]
다리 폭파직전에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전개한 부대는 서울을 방어하겠다는 약속과 달리 야반도주한 위정자들을 따라 함께 내려온 육군본부와 김포반도에 긴급 배치된 일부 부대들뿐이었습니다. 즉, 한강교량의 폭파는 어떠한 전후좌우 사정도 가리지 않고 국군 주력을 한강 이북에 그대로 둔 상태로 무턱대고 벌인 우발적인 사건과 다름 아니었습니다. 한강교량 폭파가 얼마나 무책임한 일이었냐는 폭파 당일의 모습을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한강교량 폭파에서 나타난 문제점은 위정자들의 보여준
무책임의 극치였습니다]
비록 방송에서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이야기하였지만 위정자들이 서울을 버리고 야밤에 줄행랑쳤다는 소문이 돌자 수많은 시민들이 한강교량을 건너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를 통제하지도 않은 체, 다리를 폭파하여 최대 800명으로 추산되는 서울 시민들이 폭사하거나 한강으로 떨어져 익사하였고 50여대의 차량도 함께 파괴되었습니다. 아무리 위급한 전시라도 이것은 결코 용납하기 힘든 작전이었습니다.
[개전 초 북한의 남침과 관련한 새로운 사실이 최근 드러났습니다 ]
결국 한강교량의 폭파는 필요하였지만 시기와 방법이 완전히 잘못된 작전이었습니다. 한강교의 폭파로 잃은 것은 수도 서울의 조기함락, 국군의 조속한 붕괴 그리고 죄 없는 민초들의 엄청난 희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희생을 대가로 얻은 것이 있어야 할 텐데 그것은 미미하였습니다. 처음 언급하였던 것처럼 처음에는 북한군의 진격을 3일간 막은 이유로도 보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놀라운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습니다
단지 폭파만 놓고 본다면 한강교량 폭파가 부분적으로 실패한 작전입니다. 당시 한강의 교량은 광진구에 있던 광진교를 제외하고 용산과 노량진 사이에 있던 인도교와 3개의 철교였는데 6월 28일 폭파 당시에 이른바 A교와 B교로 불리는 두개의 철교는 폭파에 실패하였고 이들 다리는 이후 유엔군의 폭격에 의해 절단되었습니다. 따라서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마음만 먹으면 한강을 즉시 도하할 수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유엔군의 폭격에 의해 한강교량 폭파가 완료되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주력이 한강을 도하하지 않고 3일간 진격을 멈추었던 사실을 미스터리로 만든 결정적 사유였습니다. 수많은 민초들의 희생과 아군의 붕괴를 스스로 재촉시켜 버리면서 감행된 한강다리 폭파가 만일 완전히 성공하였다면 어쩌면 한강교량 폭파는 북한군의 진격을 일시적으로 저지한 필요충분조건이 되었을 것이고 또한 북한군의 서울 도심 지체가 굳이 미스터리로 남을 이유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파괴되지 않은 철교를 이용하여 한강을 도하하는 북한군 기갑부대
그들은 마음만 먹었다면 즉시 한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알아본 것처럼 한강교량의 폭파는 우선 완전 폭파에 실패하였을 뿐 아니라 시기와 방법 자체가 잘못되었고 그 결과는 물론 효과도 미미하다 못해 엄청난 손실만 불러왔습니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6·25전쟁 중 가장 성공적인 교량 폭파작전은 북한군이 실시한 1950년 10월 19일 대동강 인도교와 철교의 폭파입니다. 그들은 후퇴와중에도 얼마 남지 않은 북한군을 대동강 이북으로 완전 철수시키고 유엔군 도달 바로 직전에 완벽하게 교량을 폭파하여 효과를 극대화하였습니다.
[북한군이 후퇴 시 폭파하였던 대동강철교]
그런데 ‘라주바예프 전쟁 보고서’처럼 2000년대 이후 새롭게 발굴 된 자료에 따르면 북한군의 한강 도하와 관련한 경악할 만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는데, 그것은 6·25전쟁 초기상황에 대한 지금까지의 해석이 상당히 잘못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였습니다. 어쩌면 같은 사실을 놓고도 그동안 너무 간과하던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한강교량 폭파 전에 이미 한강을 도하하였던 북한군 제6사단의 행적에 대해서 오래 동안 잘못 알고 있던 사실도 있습니다.
[북한군 제6사단은 이미 개전 다음날부터 한강을 건너오고 있었습니다.]
북한군 제6사단은 전쟁 개시 다음날인 6월 26일 오후에 선도 부대를 시작으로 다음날까지 개풍에서 한강하구를 건너 무주공산과 다름없던 김포로 대부분 도하를 완료하였습니다. 예전에는 북한군 제6사단의 극히 일부 선도부대만 김포반도로 진입한 것으로 파악하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6월 28일 한강교량 폭파 훨씬 이전에 이미 북한군 전체 제6사단은 한강도하를 완료한 상태였고 이들이 한강교량 이남을 아군보다 먼저 점령할 가능성이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나룻배를 이용하여 한강철교 인근을 도하하는
북한군 한강하구를 이미 이런 식으로 도하하였습니다]
따라서 급편 된 김포지구전투사령부(김포사)가 6월 26일부터 7월 3일까지 김포반도 일대에서 벌인 방어전을 그동안은 작은 전투사례로 분류하였지만 실로 엄청난 의의가 있음이 새롭게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북한군 제6사단은 6월 26일까지 영등포 점령하여 아군을 배후에서 포위하는 것이 목표였음이 밝혀졌는데 만일 김포사의 분전이 없었다면 충분히 달성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즉, 한강다리의 파괴 여부와 상관없이 아군주력의 퇴로는 완전히 차단될 가능성이 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그림처럼 일산근처에서 북한군 제6사단이 도하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들은 이미 전쟁 다음날 한강하구를 통해 김포반도로 진입하였습니다.]
어쩌면 전쟁 초기의 서울 함락이라는 비극적인 사건과 북한군 주력의 서울 지체에 가려 지금까지 일찌감치 한강을 도하한 북한군 제6사단에 맞서 싸웠던 김포사의 영웅적인 방어전이 소홀하게 취급된 경향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북한군 주력이 서울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 정확한 이유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 대한민국 미래를 결정지을 극적인 전투는 바로 김포반도 일대에서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단신으로 적진을 향해 돌격하다 산화한 김포지구
전투사령부 참모장 최복수 중령]
개전 초기 무주공산과 다름없었던 김포반도를 사수하기 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병력을 끌어 모아 급편 된 임시부대였지만 김포사는 불리한 상황을 탓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김포비행장 탈환작전 당시에 참모장 최복수 중령은 단신으로 기관총을 거치한 지프차를 몰고 비행장을 질주하여 적을 유린하다 전사하였고 사령관 우병옥 중령은 패퇴의 책임을 통감하고 마지막 방어선이었던 원미산에서 자결하였습니다.
[고귀한 희생을 망각하였던 사실이 미스터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처럼 6·25전쟁 개전 초에 보기 드물 정도로 최고 지휘관들이 목숨을 걸고 솔선수범하여 전선 맨 앞에서 싸움을 벌인 곳이 바로 김포반도였습니다. 그들의 용전분투가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살아난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전쟁 초기의 진정한 미스터리는 북한군이 서울에서 지체한 3일이 아니라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망각하고 있던 우리 자신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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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잊혀 질 뻔한 현세의 역사 이야기 정말 고맙습니다!
6.25의 미스터리 아직도 많이 숨어있어요. 찾아야 합니다.
제카페로 모셔갑니다,,,,,
잘읽어보았네 이래도 맞고 저래도 맞는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