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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고려 토론방 2차 고거전쟁에서 거란군은 어디까지 남하했슬까? 그리고 병자호란과 비교하면
선구자 추천 0 조회 74 24.04.03 13:51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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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4.04.03 22:30

    첫댓글 현종의 나주 피란 가지고 거란군이 충청도까지 남하 했다고 보는건 지나친 확대해석이지요 나주는 왕건이 고려 건국의 기초를 다졌던 지역이라 고려 왕실의 영향력이 막강한 지역일수밖에 지방 호족들에 절대적인 통제력을 구축하지 못해 피란 지역을 고르기가 쉽지 않은 당시 국가적 상황 떄문에 나주가 믿을만한 지역으로 선택되어 피란한 것이지 당시 중앙 정부인 개경 정부의 절대적 통제하에 놓여 있지 않은 호족들이 언제 거란군이 자기 지역으로 오면 내응해서 현종 자신을 넘기는 씩으로 투항할지 알수 없는 상황이라 그래서 쿠데타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즉위한지가 얼마안된 현종으로서는 맘 놓고 아무 지역에서나 피난할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왕의 행재소는 안전을 위해서도 거란군과 싸우는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야 정상이기 때문에 먼 나주가 적격일수밖에 없지요
    게다가 도서 지역과 인접하여 거란군이 나주로 진격해올떄 그곳으로 피란이 쉽지요
    내륙 지역으로 피란했다가는 기동력이 강한 거란군의 추격에 금방 잡히거나 포위되어 고립당하기 쉽고
    병자호란때 인조의 패인중의 하나가 기동력이 강력한 청군 떄문에 수도와 가까운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서
    청군에게 포위된 것이 크게 작용했지요

  • 24.04.03 22:33

    당시 고려군 대다수 병력이 북쪽 전선에 집중되었다 해도 남쪽에 잔존 병력이 없다고 단정짓기가 어렵고

    30만은 장부상 주둔 위치와 상관없이 강조의 관할하에 놓인 병력수를 말하는 것이지 강조와 같이 통주로 출정한 병력의 수치를 정확하게 나타낸 것이라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리 전선에 병력이 많이 집중된다 해도 소수의 병력은 남겨두기 마련이고

    그리고 전쟁에서는 필연적으로 국가의 대다수 병력들은 전방에 집중되는게 일반적이라 전투가 없는 후방에 병력들을 그렇게
    많이 남겨놓을 필요가 적은 법이지요 전방을 보존해야 후방도 안전한 법이니까요 그리고 전방 전체가 무너진 것도 아니고 일부가 뚫렸다 해도 단기전으로 적국의 수도를 함락하거나 사로잡지 못한다면 전쟁 장기화로 전방의 잔존병력의 보급로 퇴로 차단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에 그래서 현종의 피신이 이런 거란군의 단기전 종식 계획을 무산시켰던 것이라 전략적 가치가 큰 법이지요

    게다가 거란군은 개경 이남에 대한 지리에 무지해서 그래서 하공진의 천리 피신에 쉽게 넘어갈수밖에 없던 법입니다

  • 작성자 24.04.04 00:08

    후방이라고 뭐 삼남지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개경의 주변 및 개경과 평양사이 주요간선루트상에서는 일정수준 이상의 병력배치가 필요했다라고 봅니다.

  • 작성자 24.04.04 00:09

    전방을 보존해야 후방이 안전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방이 무너질경우를 대비해서 2선방어에 대한 대첵도 세워 놓아야 하는데 당시 고려정부는 그점에서 미흡한것은 사실입니다.

  • 24.04.04 00:51

    국가의 가용할 병력 자원에 한계가 많을수밖에 없기 때문에 2선 방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가 어려운 법이지요 특히 고려 같은 작은 국가로서는 전방방어와 2선 방어책 두 마리 토끼를 잡기가 어려운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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