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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울연대 원문보기 글쓴이: 목암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여느 때처럼 새벽 5시경에 일어났는데 어제 쓰지 못하고 잤던 생활일기를 쓰려고 컴퓨터를 켰다. 아직 주무시고 있는 어머니를 돌아보고는 문서작성 프로그램을 열기 전에 먼저 알송 프로그램을 열어 모차르트 곡을 여러 곡 불러왔다.
클래식 중에서도 모차르트와 바흐 음악이 머리를 맑게 하는데 좋다고 하여 가벼운 치매기운이 있는 어머니에게 모차르트 음악을 자주 들려 드리고 있다. 우연히 고른 첫 음악이 생동하는 기운이 꿈틀꿈틀 솟는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0번 D단조 2악장이었다. 이 음악은 약동하는 기운이 선명하다. 새벽이라 더 그렇다.
신기한 모차르트 음악의 동시 연주
선율에 몸과 마음을 얹어 놓으면 금새 선율을 타고 살랑대는 봄바람에 너울대는 빨래처럼 내 몸과 마음도 가볍게 일렁인다. 스스로 탁월한 선곡에 만족하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어본다. 그러나 어머니 꿈속까지 가 닿기에는 노트북컴퓨터의 소리가 너무 작다.
디브이디 플레이어 5.1채널 앰프에 노트북의 출력단자를 연결하다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라디오 수신기가 내장된 앰프에 전원을 넣자 케이비에스 에프엠이 나오는데 모차르트 곡이 아닌가. 내 노트북컴퓨터에서 나오는 20번 D단조 2악장 바로 그 곡이었다. 방송에서도 거의 비슷한 대목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노트북의 스피커 소리를 줄여봤다. 다시 라디오 방송 볼륨을 줄이고 노트북 볼륨을 올려봤다. 똑같은 연주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어머니 영혼의 편안한 휴식을 위해 모차르트를 고른 나를 보고 있기라도 한 듯 에프엠 방송의 진행자가 꼭 같이 모차르트를 골랐을까? 어떻게 바로 그 순간 내가 앰프에 전원을 넣었을까?
새벽 두 시경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서는 왕 할아버지가 오셨다며 어서 문을 열고 마당에 불을 켜라고 했었다. 몸이 불편하신데도 마당에 나가겠다고 서둘렀다. 환상과 뒤섞인 일상이 또 어머니를 괴롭히는 순간이었다. 겨우 고집을 누그러뜨리고 잠에 드셨는데 정작 나는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토막잠을 자면서 어떻게 하면 어머니의 영혼이 평안할 수 있을까 궁리를 하다가 새벽을 맞았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어쩌면 전날 내가 어머니에게 품었던 불손한 마음이 대가를 치르느라 새벽 토막잠을 자야 했고 이렇게 모차르트 음악이 양쪽으로 등장했는지도 모른다.
전날, 돌담을 쌓고 있는데 마루에서 팥을 가리고 계시던 어머니가 혀를 끌끌 차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고 쯧쯧. 저래가지고 무슨 담을 쌓는닥꼬! 반듯반듯하게 돌을 놔야지 어글어글 돌을 얹어 놓으면 다 무너지지 저기 견딜끼락꼬 쯧쯧.”
날은 저물지, 군불 땔 시간, 밥할 시간은 이미 다 됐는데 하던 일은 끝나지 않고 올려놓는 돌덩이는 자꾸 건들거려 신경이 곤두 서 있는데 어머니의 잔소리가 들리자 나도 모르게 팩 쏘아 붙였다.
“어떻게 해야 반듯반듯하게 쌓을 수 있는지 어머니가 함 해보세요!”
물론 말을 하는 순간 후회했지만 다행히 귀를 잡수신 어머니가 듣지 못했는지 아무 말씀도 없이 하던 일을 계속하고 계셨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들었건 못 들었건 그렇게 쏘아붙이는 내 기운이 어머니에게 가 닿았을 것은 자명한 이치다. 저녁밥을 먹으면서도 그랬고 잠자리에 들면서도 못내 기분이 찜찜했다.
어머니를 위한 모차르트 음악이 양쪽에서 흘러나오자 기분이 씻은 듯이 나아졌다. 환해진 내 기운이 어머니의 오늘 하루를 쾌청하게 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아주 확연했다. 마음이 편해지면서 보상을 치른 느낌이었다.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자리
이때 ‘마음이 편하다’라고 할 때의 마음은 기분에 해당된다. 그러나 ‘마음이 나쁜 사람이다’고 할 때의 마음은 성품이나 성질을 말하고, ‘마음을 알 수가 없다’고 할 때는 본심이나 의도를 말한다. ‘너한테 마음이 없다’고 할 때의 마음은 애정이나 관심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마음은 감정이나 느낌, 기분이나 생각, 나아가서 정신과 영혼을 함께 일컫는다. 그러면 마음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불편했던 내 마음이 풀어진 것은 모차르트 음악 때문인가?
내가 전날 어머니에게 팩 쏘아붙인 것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날의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동사섭’ 문화센터가 건립되어 개원식을 하는 날이었다. 여기저기서 같이 가자고 연락이 왔다. 함양에서 하는 개원식이라 이곳 장계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지만 대소변을 못 가리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갈 수도 없고 해서 참석을 포기했다.
‘동사섭’은 내 삶의 전환에 중요한 부위를 차지하는 영성훈련 프로그램이다. 1994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일곱 번이나 수련을 했고 지금도 지역 수련모임에 참석하고 있다. 그만큼 각별한 인연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의식하건 못하건 동사섭 개원식에 어머니 때문에 가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어머니에게 쏘아붙인 이유가 꼭 그 때문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일을 다 예상하고 어머니를 모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행사에 못 가서 마음이 상했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러면 무엇 때문일까? 어머니랑 같이 산지 보름이 넘으면서 슬슬 늘고 있는 어머니 참견과 잔소리에 짜증이 쌓여 있었기 때문일까? 과연 그것 때문일까? 그렇다면 내 마음이 상하게 된 원인은 오로지 어머니가 제공한 것인가?
이렇듯 마음이 상하게 된 뿌리 찾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과연 사람의 마음이 꼬이게 되는 원인은 어떤 결과의 인과관계를 따져 파고들면 그 뿌리가 나타날까? 그렇다면 내 마음은 오직 외부 환경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종속변수에 지나지 않는가? 불가에서는 마음이 환경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일체유심조’라 하여 세상만사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마음이 문제다. 세상일이 마음 한번 바꿔 먹으면 달라진다는 말이 있지만 사람은 때로 평생 동안 습관 하나도 바꾸지 못한다. 마음을 바꾼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뻔히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게 마음이다. 자기 마음이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편해지면 사람관계도 잘 풀리고 공부건 사업이건 다 잘 된다고 한다. 마음이 편해지는 방법도 많이 알려져 있다. 많은 성인들의 가르침이 차고 넘친다. 욕심을 버려라. 화를 내지 말라. 마음을 비워라.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정성을 다하고 간절히 구하라. 칭찬하고 격려해라. 이웃을 돌보고 대가를 바라지 말라 등등.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이런 원리를 안다는 것과 마음을 그렇게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래서 마음은 늘 닦아야 하는 것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마음을 닦는 것이 수련과 명상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세수하고 거울을 보고 얼굴을 가꾸듯이 늘 마음을 살피고 돌보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주일 정도 목욕을 하지 않거나 며칠 얼굴을 안 씻으면 찜찜해서 견디지 못하면서도 마음은 평생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제대로 된 수련을 처음 한 것은 1992년께다. 난생 처음으로 나의 본 모습을 맞대면한 자리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명상과 수련의 궁극적인 목표인 갈등과 망상이 멈추고, 물질적 오랜 습이 멈추었다. 텅 빈 충일감이 있었다. 동학에서는 이를 성품자리라고 한다. 불가에서는 견성이라고도 하고 무념이라고도 한다. 순간에 깨어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때의 충격은 엄청났다. 물질작용 중심으로 생각하고 정치체제와 사회구조 문제로 모든 세상사를 읽고 있던 내가 비물질의 엄청난 세계를 접하는 기회였다고 할 수 있다. 사회구조 문제와는 별개로 개인의 심성과 영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확인하는 계기였다. 꼭 1주일 동안 세상과 인연을 딱 끊고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야마기시 공동체에 가서 ‘야마기시 특별연찬강습회’를 한 자리였다.
수련원을 나설 때 온 세상이 달라 보였다. 긴 시골길을 걸어 나오는데 보이는 모든 것, 들리는 모든 것이 새 세상이었다. 세상이 달라졌으니 나의 생활도 예전과 같을 수가 없었다. 수련기간은 1주일이었지만 사실 내 생을 온통 걸었던 일주일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를 쓴 독일 태생의 에크하르트 톨레의 경험과 견줄 만하다. 책에 보면 그는 우울증으로 청소년 시절에 몇 번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는데 다시 자살을 생각하면서 ‘나는 더 이상 나 자신과 함께 살 수 없어’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는 그 순간 또 다른 ‘나’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가짜 ‘나’를 버리고 진짜 ‘나’를 보았다고 한다. 그 순간 새들의 지저귐과 밝은 햇살이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신비함 그 자체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수운 최제우의 ‘용담유사’에도 보면 경주 멸적굴로 들어가 죽기를 각오하고 49일 기도를 시작할 때 계곡의 물소리와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소리마저 어리석은 자신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 같은 간절함이 우리를 마음의 근원자리에 가 닿게 하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지도 모른다. 사회운동만 해온 지독한 유물론자였던 내가 1주일 동안 화두를 들고 씨름을 해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수련 기간에 위기가 여러 번 있었다. 뛰쳐나가는 사람이 실제 있었다. 수련원에서 맞은 여러 번의 내 정체성 위기는 나를 송두리째 흔들면서 비약적으로 내 의식을 심화시켰다. 큰 공안사건에 휘말린 채 안기부에 끌려가서 몸과 마음이 완전히 파괴되어 있던 내게는 존재의 위기를 겪고 있었던 것이 오히려 마음공부에 집중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다음날 뒷산 약수터에 운동 삼아 약수를 뜨러 갔다. 길게 늘어진 통 수만큼의 인간들이 물통 곁을 지키고 있었다. 자리를 뜰 때도 동행한 가족을 불러 물통 곁에 세우곤 했다. 달라진 세상에서 달라진 나는 그들과 같을 수가 없었다.
내 물통을 제일 뒤에 갖다 두고 ‘나 없어도 잘 있거라’고 부탁을 하고 철봉에 매달리기도 하고 윗몸 일으키기 등 운동을 하고 돌아왔더니 내 물통만 동그마니 뒤에 처지고 다른 물통들은 다 앞으로 가 있었다. 내 뒤에 있던 물통들도 다 내 앞으로 나가 있었다.
“하하. 다른 물통들은 다 부지런히 앞으로 갔는데 내 물통은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네. 하하” 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내 물통을 줄의 제일 뒤에 갖다 붙였다. 그러자 줄의 중간쯤에 통이 있는 한 사람이 나더러 물통 주인이냐며 자기 앞에다 갖다 놓는 것이었다.
뒤로 밀려났던 내 물통이 아무도 상하게 하지 않고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간 것은 당시 탐독하고 있던 고엔카의 《단지 바라보기만 하라》는 책의 영향도 컸다. 이 같은 일들이 많이 생겨났다. 아무리 힘겹고 어려운 문제에 부닥쳐도 고요한 상태로 바라보기만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단지 바라 볼 수 있는’ 힘 기르기
그때부터 시작된 마음공부는 때로는 급격히, 때로는 느리게 나를 변화시켜갔다. 내 변화의 방향은 마음이 편하고 무슨 일이든 즐겁게 하는 쪽이었다. 누구하고든 관계를 잘 풀고 나를 감추지 않고 잘 드러내는 쪽이었다. 비록 나를 놓치고 격한 기분에 휩쓸리더라도 오래 가지 않았고 금방 산뜻하게 본심자리로 돌아왔다.
감정이 격해진 상태의 나를 바라볼 수 있으면 이미 그런 기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보면 된다. 내게 맞는 기법을 개발한 것들도 많이 있다. 예컨대 마음이 중심을 잃었을 때는 이를 작은 소리로 내게 확인시켜 준다.
‘희식아, 네가 지금 잔뜩 화가 나 있구나. 그래 화가 날만도 하지 그치?’
‘너 지금 우울하구나. 심란한 일이 있나보네?’
이를 요약하자면 순간에 살기, 판단-분별 이전에 머물기, 지금 여기서 행복하기, 내 뜻대로 창조하기 등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문제는 순간에 깨어있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자신의 상태를 깨닫는 것이 첫 관문이다. 화가 엄청 나 있는 자기를 발견하고서도 ‘나 지금 화를 더 오래 내야 돼. 지금 이대로 화가 없어지면 안 돼!’라고 고집부리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화 그 자체에 휩쓸려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의 경우다. 따라서 마음공부는 모든 현상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고 그러한 자기를 ‘알아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야마기시 수련원에서 ‘공분’과 ‘의분’의 정당성에 대한 연찬도 했다. ‘화가 없이는 해낼 수 없는 일이 있는가?’라는 주제로 연찬했다. 당연히 그런 일이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마음공부 초기의 내 과제는 분노나 미움 없이 세계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변혁운동을 하면서 분노하고 공격하면 그 순간 내 속에 분노의 기운, 공격의 기운이 꽉 차면서 스스로 내상을 입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대표로 있던 단체가 엠티를 갈 때 명상적 엠티를 접목해봤는데 아주 성공적이었다. 격한 토론과 뒤풀이 술잔치에서는 맛볼 수 없는 깊은 공명을 불러 일으켰다.
그 후 1994년 말, 동사섭 프로그램을 처음 하고는 바로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었다. 행자수련원에 들어갔고 수계를 받았으니 내 초발심이 대단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 후 지금까지 해온 수련은 참으로 다양하고 꾸준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수련하는 동안 맛보는 깊은 환희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단지 먼 미래를 밝혀줄 고행이기만 했다면 절대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살이를 통해서만 마음공부는 더 나아간다
‘인산 뜸’ 수련까지 했다. 직구 뜸을 단전혈과 중완혈에 올려놓고 대여섯 장씩 뜨는 것이었다. 쑥을 전용 절구에 넣고 봉을 만들면 작은 달걀 크기만한 쑥 덩이가 생긴다. 한 장 타는데 근 5~6분 걸린다. 연탄불에 오징어 굽는 느낌이었다.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뜨거운 불기운을 내 망상이 번식하는 곳으로 보냈다. 몸에 이상이 있는 곳에도 보냈다. 두 곳 혈 자리는 달의 분화구처럼 움푹 패었다.
300여 쪽에 이르는 《인산쑥뜸요법》이라는 책을 정독하고 쑥뜸에 대한 효과와 작용을 충분히 공감한 것이 섭씨 700도에 이르는 뜨거운 불덩이를 견디면서 쑥뜸 수련을 해내게 한 원동력이었다.
강력하기 짝이 없는 직구뜸 수련을 주변에 권했지만 선뜻 나서는 사람을 보지는 못했다.
또 한번은 5박6일에 160만원을 내고 아봐타 수련을 했다. 리뷰까지 했던 때는 7년쯤 전이다. 2006년 말에는 휴전선 근처 화악산 정상에 올라가 1주일간 동학수련을 했다. 동학수련은 지금까지 했던 수련하고 전혀 다른 주문수련이었다. 만트라 요법이라고 이해하고 참석했는데 그 이상이었다. 유불선신을 통합한 동학의 정수를 봤다고나 할까.
단식 수련, 간화선 수련. 음양단식 수련, 야마기시 연찬학교, 지리산 정령치 계곡에 얼음을 깨고 들어가는 물 수련. 춤 명상, 애니어그램. 아난다마르가 수련, 엠비티아이, 각종 명상모임의 지역만남 등등 한 해에 꼭 한두 번씩은 열흘 가량 시간을 내서 마음공부를 해왔다. 큰 스승이 있다고 하면 시간을 내서 친견하기도 했다.
어떤 수련은 아기자기한 방편들을 내밀하게 익힐 수 있었고, 어떤 수련에서는 잔가지들 없이 의심의 덩어리를 뿌리째 뽑아내면서 일보 전진하는 순간을 맞기도 했다. 간화선 수련이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캄캄한 동굴을 나흘간이나 헤매다가 닷새 되던 날 하얀 눈이 융단처럼 덮인 넓고 넓은 평원이 파도처럼 마구 물결치더니 나를 덮쳤다. 잔뜩 공포에 떨며 터널을 엄청 빠른 속도로 달려가다가 눈이 멀 정도로 밝은 빛 무리 속으로 내가 흡수되기도 했다.
그 닷새째 날은 새벽부터 격렬한 진동과 오열이 종일 계속되었다. 무의식의 밑바닥까지 내 거짓된 삶과 물질 중심의 탐욕이 씻기는 날이었다. 몸이 공중으로 튀어 올라 천정까지 가 닿았는데 법당 마룻바닥에 개구리 패대기쳐지듯이 나뒹굴어졌다.
아봐타 수련의 ‘내뜻대로 살기’ 수련에서 겪었던 경이도 잊을 수 없다. 세상일이 내 뜻대로 다 될 뿐 아니라 ‘내 뜻’ 자체가 항상 세상사와 조화를 잘 이루는 데서 오는 경이를 상상 해보라.
마음공부에서 격렬한 오열과 함께 신체적 변화를 겪게 마련이다. 이것은 몸 기운이 맑아지는 초기 증세라 보면 된다. 집안 대청소를 한 것에 비할 수 있겠다. 먼지도 나고 소음도 난다. 그게 오열과 진동이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그래서 마음공부 프로그램 참석자들 사이에는 ‘약발기간’이라는 말이 유행한다. 어떤 마음공부 단체에서는 공공연히 이제 막 마음공부를 끝낸 최근 기수를 대선배로 모신다. ‘약발’이 제일 센 사람이라는 뜻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마음을 바로바로 알아채고 잘 다루는 것이 일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붓다가 보리수나무 밑에서 수행을 통해 득도한 것도 그 이전에 평소의 생활 속에서 치열하게 공부한 마무리 단계였던 것으로 보면 된다. 가정생활, 사회생활을 하면서 매일 매일 생생하게 겪는 생활상의 고비와 갈등이 우리 마음공부의 소재들이고 이 소재들이 마음의 격을 한 단계 높이는 발판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이것들은 결코 멀리 할 대상이 아니라 그 속에서 자신을 갈고 닦는 도장이라 보면 틀리지 않다.
마음공부의 다양한 방편들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정교한 지식체계를 구축해도 수련과 명상 없이는 성품자리에 들 수 없다고 한다. 그런 것 같다. 나에게 있어서 수련과 명상을 통해 도달하는 일상의 모습은 아주 단순해 보인다.
늘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놓치지 않고 아는 것’이다. ‘내 마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알아채는 것’, 그것이 마음공부가 겨냥하는 지점이다. 어떤 사람은 몇 십 년이 지나서야 겨우 그때 그 일의 진면목을 알아챈다.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도 욕망과 에고에 기초한 원한을 짊어지고 간다. 그래서 나는 마음공부를 달리 정의한다. 순간에 나를 알아채는 ‘힘 기르기’라고 정의한다.
한번은 어떤 시민단체 연수회에서 나를 불렀다. 전국에 있는 활동가들이 만나 수련회를 하는데 서로 마음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해 달라며 저녁시간을 송두리째 내게 주었다. 그 시민단체를 잘 알기에 그 단체의 활동에 맞는 순서를 준비했다.
내가 누군지,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는 프로그램을 게임식으로 엮었다. 문방구에 가서 이것저것 소품들도 준비했다. 내가 익혀둔 몇 가지 마술도구도 챙겼다. 내가 강의 갈 때는 꼭 선물들과 마술도구 등을 챙긴다. 이것은 수강생들의 마음을 활짝 열게 하는데 중요한 도구다. 신나게 게임을 하다가 문득 자신의 내면을 발견해 가는 것이었는데 몇 사람이 눈물을 쏟아 분위기가 숙연해지기도 했다.
마음공부 프로그램들을 이렇게 말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긴 할 텐데 그래도 보통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 될 것이다. ‘자기의 본 모습을 깨닫고 생각의 방향을 돌려 관계를 잘 풀어가게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마음이란 내 마음인데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므로 ‘내 마음의 사용설명서’를 익히는 것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모든 일상사는 관계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관계맺기와 풀기’를 주요 과제로 삼는다. 그 수단으로 흔히 ‘감사일기 쓰기’나 ‘칭찬하기’, ‘무아명상 하기’, ‘3분 웃기 명상’ 등을 하기도 한다.
마음을 닦는 것에는 넓은 영역이 존재한다. 영역이 넓은 만큼 방편들도 참 많다. 소리와 색과 향과 꼴(특수한 형태의 모양)과 감촉 등이 다 마음을 닦아 가는데 크게 작용하는 소재들이다. 마음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서 ‘생각’의 힘이 제일 크기 때문에 그 생각을 돌리게 하는 보조장치들이라고 보면 된다.
소리를 통해 마음을 가다듬는 만트라에는 ‘옴마니반메훔’이라는 육자진언이 있다. 동학에서는 21자 주문이 있는데 동학농민군들이 외던 것이다.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이다. 관세음보살만 외워도 병이 낫는다거나 주기도문만 외워도 평안이 온다는 것은 ‘소리’에서 비롯되는 여러 작용 때문이다. 교회에서 방성기도를 하면 은혜가 크다고 하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내 마음의 사용설명서’ 읽기
미국 항공우주국에서 근무하는 과학자 바바라 브레넌은 자신의 저서 《기적의 손치유》에서 놀라운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온전한 상태의 나뭇잎의 오오라는 깊은 물빛 같은 푸른색이었는데 가위로 잎을 자르자 오오라가 붉은 핏빛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놀란 브레넌이 잎사귀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더니 1~2분 후에 다시 본래의 파란색으로 돌아왔다는 실험결과다. 진정성이 담긴 소리는 우리의 기운을 변화시킨다는 게 정설이다.
기운, 영성, 혼이라고 말하면 갑자기 애매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있다. 검증되지 않은 주술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다. 마음공부는 기운공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물리학에서 제 4의 물질이라고 부르는 플라즈마가 브레넌이 말하는 에테르(Ether)체나 아스트랄(Astral)체에 해당한다. 명상과 만트라를 통해 이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가 변하게 되고 마음과 몸이 바뀌는 것이다. 칭친과 격려, 그리고 자연재배 음식 등이 그런 작용을 한다.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모았던 에모토 마사루의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을 봤을 것이다. 깊은 산 맑은 약수는 정육각형의 아름다운 결정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수돗물이나 생수의 경우 위생적으로나 과학적으로는 아무 불순물이 없어도 육면구조의 한쪽 귀퉁이가 깨져 있거나 징그럽게 일그러진 물 결정체를 볼 수 있다. 일그러진 물에 ‘사랑’이나 ‘감사’, ‘이해’ 등의 글자만 써 붙여도, 아니면 간단한 축원만 해도 신기하게도 물의 결정체가 정육면체로 바뀐다. 이 모든 것은 만트라, 또는 영부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만트라 외에도 최근 유행하는 아로마요법이 있다. 향으로 마음의 평정을 얻는 명상법이다. 향뿐이랴. 색을 통한 마음치유도 있고 꼴(모양)도 있다. 미술치료기법이 사실은 꼴을 통해 마음을 읽고 마음을 치유한다. 우리의 전통 옷인 색동옷은 오방색을 기초로 한 음양오행원리를 구현한 색이다.
하늘을 뜻하는 흰색 옷을 즐겨 입은 것도 마찬가지 이치다. 농경민족으로 무논에 가서 일하는데 흰옷은 전혀 실용적이지 않을 수 있으나 하늘기운을 중요시하는 환족(桓族)에게 흰색은 하늘을 뜻할 뿐 아니라 진실과 순결을 나타내고 오행에서는 금(金)에 해당한다.
피라미드 파워라고 들어 봤을 것이다. 히란야라든가 얀트라 등은 물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부적도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가 지나치게 물질위주의 삶에 빠져 있어서 그렇지 비물질 또는 극미물질(플라즈마) 세계에 대한 이해를 조금만 가지면 마음공부의 원리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서 칭찬과 긍정, 용서와 양보, 선행이 삶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알 수 있다.
이들은 생각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힘이다. 좋은 방향이라 하면 영적 진보를 말한다. 영적 진보라 함은 수치심보다는 자긍심, 슬픔이나 두려움보다는 기쁨과 즐거움, 욕망보다는 이성, 미움보다는 사랑, 다툼과 경쟁보다는 공생, 갈등보다는 평화를 말한다. 결국 깨달음, 견성, 해탈, 본성자리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생각이 바뀌면 물질은 이미 변화를 시작했다. 플라세보효과(Placebo Effect)라고 들어봤을 것이다. 《의식의 세계》를 쓴 미국 프린스턴대학 딘 라딘 박사가 한 재미있는 실험이 있다. 두통을 앓는 사람에게 저명한 의사가 비타민을 주고 새로 개발된 두통약이라고 했더니 나았다는 것이다. 성공률이 54%였다고 한다.
한 방에 있는 열 명의 사람이 있는데 아홉 명에게는 활력제인 암페타민을 먹이고 한 명에게는 수면제를 먹였는데 수면제를 먹은 사람은 전혀 잠들지 않고 다른 사람처럼 활기차게 지냈다. 또 다른 방에는 아홉 명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한 명에게 암페타민을 먹였는데 활력제인 암페타민을 먹은 한 명도 다른 사람처럼 잠에 빠져 버렸다고 한다. 물질과 생각이 서로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험인 것이다.
이처럼 마음공부에도 여러 방편들이 있고, 정성을 다해 노력하면 자기의 근기에 딱 맞는 것을 만날 수 있다. 나아가서 다양한 응용을 하는 경지에도 다다를 수 있다.
오로지 여기, 현재에 머물러라
살아있는 영성지도자 이현주 선생은 마음공부 단체가 난립하는 현상을 두고 “자본주의의 끝자락에서 펼치는 돈벌이 장사꾼들이 잔치”라고 혹평했다. 그런 면이 없지 않다. 장사속이 훤히 보이는 일들이 주변에서 많이 일어난다. 특히 마음수련 단체 중에는 사회의식은 수구보수적인 집단들도 적지 않다. 실명을 거론하기는 뭐하지만 수련프로그램을 여러 단계로 늘리고 늘려서 전 과정을 이수하려면 수백만 원을 갖다 바쳐야 하는 곳도 있다.
저렇게 산다면 일상생활은 어떻게 꾸려 가는지 아리송한 마음공부꾼들도 많다. 마음공부하러 다니는 게 일인 사람들이다. 일상은 따분하고 혼탁하니까 멀리하는 사람들 말이다. 자신의 에너지를 맑게 하면 세상사는 문제가 안 된다. 기운이 맑아지면 깨달음은 따라온다. 불이 켜지면 저절로 어둠이 물러가는 이치다. 부정 정서와 씨름할 필요가 없다. 밝고 환한 기운을 키워가고 믿음과 사랑과 기도와 선행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 나가면 뭔가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자신의 영적 진보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선행을 하고서 그 대가로 받는 물질적 보상이라는 것은 내 속에서 일어나는 영적 진보에 비할 바가 아니다. 행위 자체로써 이미 더할 수 없는 보상이 이루어지는 것이 사랑이고 긍정이고 공감이고 선행이고 동정이다.
삶은 다양한 체험의 공간일 뿐이고 세속적인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믿는 사람은 마음 알기와 마음 다스리기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단지 이 체험의 공간에서 그것이 세속적인 성공이든 세속적인 실패든 연연하지 않고 그를 통해 어떤 의식의 진보를 이루느냐가 중요할 뿐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이미 성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수련단체에 전 재산을 넣고 들어갔다가 10여 년을 살다 나온 후배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나오면서 넣었던 재산을 달라고 하고 그 단체에서는 약속했던 대로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분쟁이 났던 때였다. “빈 손 하나 달랑 들고 유유히 나올 수 있는 그 마음 하나를 가져 나올 수 있다는 것만큼 더 큰 재산이 어디 있는가”라고.
체험의 순간들을 얼마나 충실하고 진실하게 보내느냐, 그리고 그 결과로 얼마나 많은 중요한 자각과 각성을 이루느냐를 잊지 않는 것이 마음공부다. 분노, 미움, 회한 등 주로 부정적 감정에 휩싸이는 것은 백 프로 다 과거를 회상할 때나 미래에 대해 걱정할 때이다.
마음공부가 평화와 안정과 사랑을 내 속에서 이루는 것이라면, 또 그것을 사회화 시키는 것이라면, 오로지 현재에 머무르면 된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사람은 과거나 미래는 마음이 만들어낸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마음공부에서 ‘히어 앤 나우’(Here and Now)를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바로 반박이 뒤따를 법하다. ‘도사 같은 소리’라고. 또 의문도 들 것이다. ‘도대체 정의와 불의는 없는가. 현실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빈곤과 차별과 폭력과 학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그렇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식별할 능력도 없고 그럴 관심도 없는 설익은 마음공부꾼들이 양시론에 빠진다고 본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구름 잡는 소리만 하는 사람을 보면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다. 옳고 그름을 항상 명확히 하고 그것을 구별해낼 사회적 식견을 연마하면서 이를 넘어서는 사람은 다르다. 행동은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고 약자를 돌보지만 마음은 항상 평화로운 것이다. 마음공부꾼이 행동도 않고 관심도 없이 저 혼자 ‘멍하니 행복’하다면 깨달은 사람은 치열한 현실공간에 자기를 놓고서도 한결같은 사랑과 평화로 늘 충만하다.
마음공부 진영에서도 명성 높은 지도자급 인사 중에 독선과 자의식이 너무 강해 주변사람을 힘들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선문답 같은 말을 입에 올리면서 자기를 면책하고 남을 질책하는 도구로 ‘마음공부’를 이용하는 사람도 없잖아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도 그것을 반면교사 삼으면서 자신의 마음공부거리로 전환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로 마음공부 하는 사람이다.
데이비드 홉킨스의 《의식혁명》에 보면 재미있는 일화가 나온다. 사람들의 의식수준을 1000까지 나누는데 이런 예를 든다.
화려한 부자 동네 앞에 혼자서 서성대는 허리가 굽고 남루한 옷차림을 한 늙은 사람이 하나 있다. 이 노인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느냐다. 사람의 의식이란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어떻게 해석하는지, 또 어떻게 대응하는지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 ‘젊을 때 뭐하고 늙어 저렇게 되었나?’ 라고 생각한다.
- 더럽고 구역질나서 얼른 피하고 싶어 한다.
- 노인이 저런 처지에 처하게 된 것은 뭔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잘못 산 것이다.
- 노인문제를 경제사회적 모순의 결과로 보고 연구의 대상으로 진지하게 고민한다.
- 노인에게 뭔가 도움을 주기 위해 다가간다.
- 노인을 우리들 자신의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동정심을 갖는다.
- 폭행을 하거나 곤란을 줄 것 같아 얼른 자리를 뜬다.
- 사람들이 노인을 돕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것을 보고 회의를 느낀다.
과연 당신은 어느 쪽인가?
<< 아름다운 후퇴(2012. 전희식. 자리출판사)>> 136-156쪽에서 인용
첫댓글 역시 글은 아무나 쓰기가 어려워요.
몇줄만 스면 머리 속이 바닦이 나니 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