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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금 우리는 가을인 듯 하면서도, 가을이 아닌 것 같은, 그런 계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11월인지라, 가을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노랗게 물든 단풍나무를 보면, 웬지 모르게, 저절로 멋진 시가 쓰여질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영국의 시인 “제이슨 레만”이 쓴 “현재 시제”라는 시가 있습니다.
“봄의 계절, 나는 여름을 기다렸네.
그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들녘을.
여름의 계절, 나는 가을을 기다렸네.
화려한 잎사귀들의 추락과 그 신선한 차가움을.
가을의 계절, 나는 겨울을 기다렸네.
아름다운 흰 눈 그리고 연휴의 즐거움을.
겨울의 계절, 나는 봄을 기다렸네.
그 따뜻함, 그리고 그 자연의 눈부신 소생함을.
어린이의 계절, 나는 성인 됨을 기다렸네.
그 자유함, 그 존경스러운 의젓함을.
20대의 계절, 나는 30대를 기다렸네.
그 성숙함, 그 화려한 변신의 때를.
중년의 계절, 나는 20대를 오히려 동경했네.
그 푸른 젊음과 자유의 시대를.
은퇴의 계절, 나는 중년의 때를 오히려 동경했네.
그 정성 어린 때, 땀 흘려 생의 한계에 도전하던 그 시대를.
그러나, 이제 나의 생은 다하고,
나는 결코 나의 원함을 얻지 못했다네.”
우리는 이 시인처럼, 늘 지나간 과거를 그리워하거나, 다가올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서, 오늘이라고 하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무시할 때가 많습니다. 과거보다 못한 오늘이라고, 미래는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고, 그렇게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 채, 오늘이라고 하는 현실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오늘이라고 하는 현실에 서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과거보다는 오늘이, 미래보다는 오늘이, 우리에게 더욱더 소중한 날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고, 오늘이라고 하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음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바로 ‘오늘 이 자리’에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18절 말씀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오늘은 “추수감사예배”로 드리는데,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범사에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간에, 원망하고 불평하기보다는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군가, “감사는 행복의 지름길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열심히 학교 다니는 것도, 힘들게 회사 다니는 것도, 이런저런 이유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행복한 삶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을 불평하는 순간에는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할 때에, 행복해집니다.
여러분!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순간, 감사하는 마음을 사라지고 맙니다. 사람들이 감사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 중의 하나가 비교 의식과 열등 의식입니다.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여, “저 사람보다 내가 더 낫다”라고 생각하여, 행복을 느끼는 사람보다는 “왜 나보다 저 사람이 더 낫을까?”라고 생각하여,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어가는 사람이 더 많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행복하기 보다는 절망에 빠지는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비교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나는 너무 부족하고, 나는 가진 것이 없어.”
누군가를 만났을 때, “나보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다. 나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나보다 더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보다 더 잘 나간다.”라고 비교하기 시작하면, 바로 그 순간부터, 감사는 사라지고, 불행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재물이나 능력이, 있거나 없거나, 우리는,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가난에서 오는 슬픔도 아니요, 실패에서 오는 아픔도 아닙니다. 가장 큰 불행은 비교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비교하면서, 불행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을 바라봄으로,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너는 나의 사랑받는 자녀요, 너는 내가 만든 최고의 걸작품이다. 너는 나의 축복이다. 너는 나의 택한 백성, 나의 기쁨, 나의 전부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택한 백성이요, 주님의 기쁨이요,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요, 주님의 전부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에, 감사하게 되고, 감사는 우리에게 행복의 문을 활짝 열어 줍니다. 감사는 행복의 나라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겐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우리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여, 불행에 빠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귀하고 소중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환경으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을 과감하게 내버려야 됩니다.
사람들이, 비교하는 것들을 보면, 대부분 환경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눈에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고, 피부로 와 닿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환경을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처한 환경을 바라볼 때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까요? 감사보다는 오히려 원망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에 놓여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6-17)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습니다. 그뿐입니까? 포도나무에도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도 열매가 없습니다. 밭에도 먹을만한 식물이 없습니다.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처한 현실이었습니다.
이런 환경인데, 감사할 수 있습니까?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이 오는 동안, 열심히 피땀 흘려 일했기 때문에, 풍족한 수확을 기대했는데, 열매는 고사하고, 설상가상으로, 폭염과 무더위로, 홍수와 태풍으로, 잘 익어가던 열매들은 다 떨어지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던 소와 양까지 다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최악의 상황입니다. 어느 것 하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분위기입니다. 그대로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하고, 하나님을 원망한다고 한들, 하등 이상하지 않는 그런 상황입니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환경을 바라보면,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상황이지만, 하박국 선지자는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렸습니다.
그는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 눈물겨운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기와 과일은 고사하고, 당장 먹을 쌀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기도하며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기쁨만 아니라 슬픔도 감사합니다. 성공만 아니라 실패도 감사합니다. 희망만 아니라 절망도 감사합니다. 부요할 때만 아니라 부족할 때도 감사합니다. 건강할 때만 아니라 아플 때에도 감사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범사에 감사할 수 없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 인해서 감사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감사했을까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고생하며 사는 것, 근심하며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십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본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절망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삶은 절대 절망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램 29: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기뻐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환경으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을 과감하게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얼마를 소유해야 만족할 수 있을까요?
세계적 부호로 유명했던 록펠러에게, 어느 날, 신문 기자 한 사람이 찾아와서, “당신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십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는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만큼 소유해야 만족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그는 “조금만 더”라고 대답했습니다.
“조금만 더”가 얼마만큼일까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우리는 멈추지 못하고, 계속 욕심을 품게 됩니다. 만족하지 못합니다.
“조금만 더”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을 찾지 못한 채, 욕심에 쓰러지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소유는 결코 우리를 만족하게 할 수 없습니다. 소유는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가진 사람이 그 가진 것을 빼앗길까봐, 안절부절 못하고,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볼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행복의 기준을 소유에 둔다면, 우리는 언제쯤 자족하며, 만족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요?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까요? 과연 그럴 때가 다가올까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한평생 추구했던 것은 바로 자족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빌립보서 4:11-12절 말씀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사도 바울은 그가 태어난 배경과 그가 가진 것으로, 저절로 자족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떤 환경이든지간에,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자족하는 삶 속에, 감사가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원하십니까? 자족의 삶을 가르쳐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주여, 나에게 자족을 가르쳐 주옵소서. 어느 형편에서든지, 만족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많든지, 적든지, 소유의 유무에 상관없이 만족하기를 원하오니,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잠언 30:7-9절 말씀입니다. 아굴의 기도입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자족하는 마음은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자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셨기 때문에, 자족할 수 있었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살다 보면, 우리 인생에게 닥치는 여러 가지 고난과 역경이 있을 수 있고, 감당하기 벅찬 짐의 무게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루는 새들이 하나님께 와서 불평을 했습니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튼튼한 다리를 만들어 주면서, 왜 우리에게는 이렇게 가느다란 다리를 주셨습니까? 그리고, 양 어깨에 ‘날개’라는 무거운 짐을 매달아 주시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하나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새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거운 짐으로 생각되어지는 양 날개를 활짝 펴서, 움직여 보아라”
독수리가 맨 먼저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여겼던 육중한 날개를 활짝 펴, 힘껏 움직여 보았습니다. 그 순간, 독수리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지며, 하늘을 날게 되었습니다.
새들의 양 어깨에 붙은 것은 ‘짐’이 아니었습니다. 그 무겁다고 생각되어진 날개가 있기에, 하늘을 훨훨 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큰 짐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어느 한 순간, 우리에게 행복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여는 열쇠가 되어줄 것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감사해야 할 이유는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한결같이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돌보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감사”란 무엇입니까?
“감사한다”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생각하고 산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누가 그대를 별다르게 보아줍니까?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받아서 가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이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우리는 본래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렇게, 빈손으로 이 세상에 던져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생명과 호흡과 공기와 물과 땅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은혜로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힘과 기회를 주셨고, 수고에 대한 열매를 주셨습니다. 가정과 교회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서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것,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감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함으로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이며,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의지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오니, 지금과 같이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