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스보스톡에서 탈출한 북한인 모자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는 명령서가 지난 6월 7일 러시아 연방수사위원회 홈페이지에 게재됐다./러시아 연방수사위원회 홈페이지 캡처© 제공: 조선일보 지난 6월 초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실종돼 탈북 가능성이 제기된 북한 외교관 가족 모자(母子)의 체포와 수사에 ‘러시아판 FBI’라 불리는 연방수사위원회가 직접 개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유엔은 탈북민에게 ‘정치적 난민’ 지위를 부여하는데, 러시아 당국은 이들을 형사 사범으로 취급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북·러가 눈에 띄게 밀착하고 있는 가운데, 주요 탈북 루트 중 하나인 러시아에서도 탈북민 강제 북송(北送)이 줄을 이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위원회는 지난 6월 7일(현지 시각) 홈페이지에 블라디보스토크 영사관을 탈출한 북한 고려항공 소속 무역대표부 박모씨의 아내 김모(43)씨와 아들 박모(15)씨의 실종 사건 관련 공개 수사를 촉구하는 명령서를 게재했다. 4일 북한 영사관이 현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고, 실종자 이름과 사진이 담긴 전단이 배포된 지 불과 사흘 만에 러시아 당국이 직접 나선 것이다. 위원회는 모자 실종과 관련된 언론 보도를 언급하며 “중앙에서 지휘할 것”이라며 “연해주 수사국장에게 형사 사건의 조사 진행 상황을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모자는 공개 수사 지시가 있은 후 불과 몇 시간 만에 연방 수사 요원들에게 체포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소식통을 인용해 “모자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떨어진 크라스노야르스크로 이동해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했지만 러시아 공안 당국에 붙잡혔다”며 “현재 모스크바 주재 북한 대사관에 감금돼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고 했다. 2011년 설립된 위원회는 대통령 직속 기관으로 수사 요원이 2만명이 넘는 러시아의 중요 범죄 수사 기구다. 이 때문에 위원회가 탈북민 체포에 직접 개입해 수사를 촉구한 것을 놓고 이례적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전문가들은 러시아 당국이 이번 사건을 ‘형사 사건’으로 규정한 점에 주목했다. 유엔이 정치적 박해를 받는 탈북민에게 난민 지위를 인정해 왔는데 이번 사건처럼 일반적인 형사 사건의 피의자로 취급하기 시작하면 강제 북송의 명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러시아가 유엔난민기구(UNHCR)를 통한 탈북민 보호를 중단하고, 전원 형사 사범으로 구속해 북한에 넘겨주겠다는 의도가 아닌지 우려된다”며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고 했다. 현지 소식통은 “러시아가 이번 탈북민 체포에 현상금까지 걸었다는 얘기도 나온다”고 했다. 이 같은 우려는 러시아 국방장관이 최근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의 환대를 받고, 무기 거래 의혹까지 나올 정도로 북·러가 밀착하는 상황과도 맞물려 있다. 외교적으로 고립된 러시아가 북한에서 무기·인력을 지원받는 대가로 탈북민의 강제 북송에 적극 협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한범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모스크바의 북한 대사관에 김씨 모자 말고도 공관원, IT 엔지니어 등 4명이 감금돼 있다”며 “국경이 개방되면 최우선적으로 송환될 예정”이라고 했다. 이재춘 전 러시아 대사는 “탈북자들이 러시아에서 난민 지위를 받으면 어느 정도 안전이 보장되고 한국으로 오기도 했는데 최근 북·러 관계가 밀착되면서 안전을 담보하기 어렵게 됐다”고 했다. 탈북민이 한국에 오는 주요 루트 중 하나인 중국에서도 강제 북송 우려가 잇따르고 있고, 지난달 반간첩법 시행을 계기로 탈북 조력 활동이 더 위축될 것이란 전망이 많다.김씨의 남편 박씨는 현지 북한 식당 ‘고려관’의 지배인으로 일하다 2019년 검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뒤 코로나로 국경이 봉쇄돼 러시아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후 김씨가 대리 지배인으로 고려관을 경영했는데, 지난해 말 국가보위성 소속 식당 부지배인이 망명을 시도했다가 붙잡히는 사건에 연루돼 연금된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