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vangelio de Hoy
En aquel tiempo, los Apóstoles se reunieron con Jesús y le contaron todo lo que habían hecho y lo que habían enseñado. Él, entonces, les dice: «Venid también vosotros aparte, a un lugar solitario, para descansar un poco». Pues los que iban y venían eran muchos, y no les quedaba tiempo ni para comer. Y se fueron en la barca, aparte, a un lugar solitario. Pero les vieron marcharse y muchos cayeron en cuenta; y fueron allá corriendo, a pie, de todas las ciudades y llegaron antes que ellos. Y al desembarcar, vio mucha gente, sintió compasión de ellos, pues estaban como ovejas que no tienen pastor, y se puso a enseñarles muchas cosas.
«‘Venid también vosotros aparte, a un lugar solitario, para descansar un poco’. Pues los que iban y venían eran muchos, y no les quedaba tiempo»
Rev. D. David COMPTE i Verdaguer
(Manlleu, Barcelona, España)
Hoy, el Evangelio nos plantea una situación, una necesidad y una paradoja que son muy actuales.
Una situación. Los Apóstoles están “estresados”: «Los que iban y venían eran muchos, y no les quedaba tiempo ni para comer» (Mc 6,30). Frecuentemente nosotros nos vemos abocados al mismo trasiego. El trabajo exige buena parte de nuestras energías; la familia, donde cada miembro quiere palpar nuestro amor; las otras actividades en las que nos hemos comprometido, que nos hacen bien y, a la vez, benefician a terceros... ¿Querer es poder? Quizá sea más razonable reconocer que no podemos todo lo que quisiéramos.
Una necesidad. El cuerpo, la cabeza y el corazón reclaman un derecho: descanso. En estos versículos tenemos un manual, frecuentemente ignorado, sobre el descanso. Ahí destaca la comunicación. Los Apóstoles «le contaron todo lo que habían hecho» (Mc 6,30). Comunicación con Dios, siguiendo el hilo de lo más profundo de nuestro corazón. Y —¡qué sorpresa!— encontramos a Dios que nos espera. Y espera encontrarnos con nuestros cansancios.
Jesús les dice: «Venid también vosotros aparte, a un lugar solitario, para descansar un poco» (Mc 6,31). ¡En el plan de Dios hay un lugar para el descanso! Es más, nuestra existencia, con todo su peso, debe descansar en Dios. Lo descubrió el inquieto Agustín: «Nos has creado para ti y nuestro corazón está inquieto hasta que no descanse en ti». El reposo de Dios es creativo; no “anestésico”: toparse con su amor centra nuestro corazón y nuestros pensamientos.
Una paradoja. La escena del Evangelio acaba “mal”: los discípulos no pueden reposar. El plan de Jesús fracasa: son abordados por la gente. No han podido “desconectar”. Nosotros, con frecuencia, no podemos liberarnos de nuestras obligaciones (hijos, cónyuge, trabajo...): ¡sería como traicionarnos! Se impone encontrar a Dios en estas realidades. Si hay comunicación con Dios, si nuestro corazón descansa en Él, relativizaremos tensiones inútiles... y la realidad —desnuda de quimeras— mostrará mejor la impronta de Dios. En Él, allí, hemos de reposar.
♣ 더불어 생명의 축제를 준비하는 외딴곳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회개하라고 가르치고 마귀를 쫓아내며 많은 병자를 고쳐준 뒤 돌아옵니다. 그들의 복음선포는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성황을 이루었습니다(6,31).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쉬려고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갑니다(6,31-32).
복음선포는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안고 떠났던 제자들이 다시 하느님 안에 머물도록 ‘세상을 떠나 외딴곳으로 가라’ 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사명의식을 새롭게 할 하느님 안에서 쉼의 시간, 곧 일종의 피정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먼저 배를 타고 떠난 예수님과 제자들보다 육로로 달려간 많은 사람들이 외딴곳에 먼저 다다릅니다(6,33).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6,34). ‘목자 없는 양들’처럼 뿔뿔이 흩어진 군중을 한데 모아 일치시키려 하신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외딴곳’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들을 외딴곳으로 보내신 것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과 오롯이 만날 수 있는 거룩한 광야로 그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만이 아니라 사실 군중들도 외딴곳으로 초대하신 것이었습니다.
다음 대목(6,35-44)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그들 스스로 필요한 것을 얻는 수고를 하라는 뜻으로 외딴곳으로 가라 하신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현세의 것 그 이상의 영원한 생명의 빵을 주고자 인간의 탐욕과 불순한 눈길, 불평등과 불의 저편 ‘외딴곳’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따로’ 외딴곳으로 가라 하신 예수님께서는 사실 제자들과 함께하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배를 타고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외딴곳으로 가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사람들이 기대하는 신앙을 보여줄 수 없었지요. 그래서 하느님이요 인간이신 분께서 불신앙과 거리를 둔 외딴곳으로 군중을 불러내시어 생명의 빵을 먹이실 준비를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외딴곳은 불신앙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예수님과 복음선포를 하고 지쳐 돌아온 제자들, 그리고 간절한 갈망을 지니고 ‘달려온’ 가엾은 군중이 함께하는 ‘사랑의 자리’입니다. 그곳은 쉼의 자리요, 하느님 안에 함께하는 공생의 자리이며, 모두를 살리는 ‘생명의 빵’이 봉헌되는 축제의 자리입니다.
내 안에 그런 여백을 마련하고 있나요? 우리 만남은 그런 성사적 사랑의 만남이 되고 있나요? 이 사회는 그렇게 탐욕과 불의와 현세적 욕망을 비워냄으로써 오롯이 하느님과 함께 하고 그분의 뜻이 드러나는 ‘거룩한 외딴곳’이라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지금 여기 살아 숨 쉬는 매순간을 ‘생명의 빵’을 준비하는 축제의 자리가 될 수 있을까요?
주님, 저 외딴곳에서 생명의 빵을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당신의 그 간절한 사랑을 알아차리도록 잠에서 깨워주소서. 세상 물질과 욕망과 집착의 끈을 끊어버리고, 당신을 잊은 채 인간의 소리에 젖어 방황하는 저희를 생명의 축제가 벌어지는 ‘외딴곳’으로 불러주소서! 아멘.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예수님의 자비>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마르 6,30-32).”
예수님께서는 지금 사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과 ‘재충전’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쉬는 일, 그것은 바로 ‘피정’입니다.
(피정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쉬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에너지를 얻어서 재충전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자비’를 잘 나타냅니다.
‘자비’는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먼저 판단하고 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는” 상황은,
사도들의 상황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상황입니다.
그래서 만일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선교활동을 하느라고 피곤한 것은 알지만,
쉬는 것은 나중에 하고, 내가 하는 일을 좀 도와라.” 라고 명령하셨다면?
만일에 예수님께서 ‘사람’보다 ‘일’을 더 생각하는 분이었다면 그렇게 하셨겠지만,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가장 먼저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사도들은 모여든 사람들을 ‘버려두고’ 떠난 것일까?
모여 있는 사람들을 그 자리에 놓아둔 채 떠나신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버리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먼저 외딴곳으로 보내신 다음에
당신은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온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시고 나서,
또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여든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나서
제자들을 뒤따라 가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쪽 자비를 위해서 저쪽 자비를 중단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3-34).”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을 주시려고
그들과 함께 외딴곳으로 가셨는데, 그곳에도 많은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앞의 장소에 있다가 옮겨 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새로 온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어떻든 예수님을 간절하게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휴식과 재충전을 할 시간을 얻지 못했을까?
예수님 자신은 쉬지 못하고 계속 일하셨지만,
바로 그 시간이 제자들에게는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다시 언급되는 때는 ‘빵의 기적’ 직전입니다(마르 6,35).
그래서 아마도 제자들은 사람들의 배고픔을 걱정하기 전까지는
군중에게서 떨어져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군중 속에 섞여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을지도 모르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그 시간이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심’을 뜻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당시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만의 처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의 전 인류의 처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라는 말은,
“목자가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살고 있었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인류를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시편 23,1-4).”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기의 목자가 누구인지 몰라서
목자 없는 양처럼 살고 있는 사람도 있고,
자기 스스로 목자를 떠나서 살고 있는 사람도 있고,
목자에게 돌아가려고 해도 그 방법을 몰라서 방황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에게는 처음부터 목자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참 목자가 되어 주시려고 오신 분입니다.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마르코복음에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을 보면,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도 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14,14; 루카 9,1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과 재충전이라는 것을 아시고
그들을 외딴곳으로 보내신 것처럼,
지금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과 치유의 은총’이라는 것을 아시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라는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자비 실천의 ‘좋은 예’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당한 사람을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서(루카 10,33)
자기의 여행 계획을 생각하지 않고, 또 자기의 시간과 돈을 아까워하지 않고,
강도당한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해 주었습니다(루카 10,34-35).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루카 10,36).
‘자비’는 이웃이 되어 주는 일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손익 계산을 하지 않고, 생색내지 않고...
‘나쁜 예’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부자는 라자로에게 빵 부스러기를 주긴 했으니까(루카 16,21),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닌데, 라자로의 상태는 생각하지 않고서
그것으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라자로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도 없었고,
그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인간에 대해 측으니 여기시는 예수님의 삶을 살자
저희 어머니께서는 제가 갓 신부가되고, 성당의 소임을 받고 살아가던 해에
중풍으로 쓰러지셨습니다.
물론 지금은 많이 나아지셨긴 하지만 처음에 병원에 찾아갔을 뵈었을 때에는
휠체어에 의지하시고, 식사도 누가 떠 주어야하고, 혼자서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또 말도 어눌해 지셨구요.
그러다가 퇴원을 하셔서 집에서 요양을 하십니다.
한번은 제가 강원도에 여행을 갔다가 어머니 생각이 나서 강원도 찰옥수수를
한자루 사가지고 고향의 어머니에게 갔습니다.
여전히 몸이 좋지 않아서 겨우 걸음을 떼시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머니와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독 때문에 피곤했는지 저는 그만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오랜만에 한 단잠이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조금 어둑어둑해 있었습니다.
이제 가야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섬주섬 챙겨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어머니께서 무언가를
바구니에 담아서 가지고 오셨습니다.
바로 제가 가지고 온 옥수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이 “오랜만에 먼곳에서 온 자식에게 밥한끼 해 먹이는 것이
애미의 도리일텐데, 몸이 이 지경이니 어떻하니.
그래서 내가 옥수수를 삶아 왔으니까 이거라도 먹고 가거라”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두세시간동안 잠든 사이에 중풍의 어머니께서 그래도 자식에게 밥은 못해주더라도
옥수수라도 삶아서 끼니를 채워서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중풍으로 못쓰는 손발이지만 낑낑 거리며 그 오랜 시간동안 옥수수 껍질을 벗기고
그리고 수염도 뽑아서 그렇게 땀을 빨빨 흘리면서 내어놓은 것입니다.
어머니 앞에서는 그저 맛있게 먹었지만,
돌아오는 차속에서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그런 불편한 어머니를 이끌고 있음을 말입니다.
사랑의 힘이 위대함을 그리고 자식을 향한 마음이 이렇게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통해서 저는 예수님의 사랑을 또한번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는가 봅니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보낸 것이 바로 엄마라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서 식사를 할시간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많은 이들안에서 피하고도 싶고 그리고 멀리하고도 싶은 것이
우리네들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또 우리는 많은 경우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어떤 일로서
그리고 어떤 수단으로서 바라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측은히 여기셨다는 것,
그들의 아픔이 눈에 밟혀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들의 아픔과 어려움이 눈에 밟혀서 가만히 있을 수 없으신 분이
바로 우리들이 믿고 있는 주님입니다.
우리는 그런 주님의 사랑을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며 느끼시는 가장 첫마음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 바로 측은함입니다.
그런 측은한 마음이 우리의 에수님을 바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신이신 분께서 인간이 되어 오시고, 우리들의 죄의 아픔 때문에 오늘 복음에서처럼
아픔을 찾아 다니시고, 그리고 우리들의 부족함의 한계 때문에
그 전지전능하신 신이 바로 십자가에서 아주 나약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십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이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는 측은함이 우리의 주님을 그렇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런 분을 믿고 있습니다.
그저 심판하고, 그리고 벌주고, 그리고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저 화석같은 신이 아니라
나와 함께 아파하고, 그리고 또한 우리의 죄를 함께 짊어지신 분임을 말입니다.
주님의 모든 구원의 역사는 거기에서 시작되고,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작은 이 보잘 것 없는 삶가운데에서도 함께 하신 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단지 어떤 거대한 힘을 기대하고 기적을 바라보는 것만은 아닙니다.